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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은 공정히 징수되어야 한다.>
2탄 : 산 자에게는 산 자의 일이 있다.
BY, DOSKHARAAS(도스까라아스)

1.
비.
사막에도 비가 내릴 때가 있다. 단 삼일 동안의 우기. 메마른 모래가 게걸스레 빗물을 삼킨다. 평소에 땅을 밟으면 버석거리던 발자국 소리가 지금은 뺨을 때릴 때와 비슷한 소리로 난다. 샌들이 땅을 찰 때 마다 울린다. 나는 비가 좋다. 덕분에 지겨운 세금 징수 일도 견딜 수 있다.
지난 번 임무로 ‘아흐하르 사쿰’을 궤멸 시킨 것 때문에 나는 특별 휴가를 받았다. 휴가가 끝나고 돌아왔을 때, 세금관리청의 청장이 바뀌어 있었다. 그는 아흐하르 사쿰의 옛 신도였다. 덕분에 가장 잡일을 하고 있다. 강제 차압 업무, 가장 하급 관리가 하는 일이다.
게모즈가 졸린 눈을 하고 웅크리고 있다. 목을 움츠리고 여섯 개의 다리를 완전히 접고 앉아 있었다. 무신경하게 비를 맞고 있는 뒷목을 두들겨 주었다.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관심 없다는 눈동자를 나에게 돌린다.
“조금만 더 참게, 늙은 친구. 오늘 그 다리 여섯 개가 오랜만에 열심히 일 할 테니까.”
늙은 게모즈는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알아들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내가 일을 할 차례라는 것은 알았다.
나는 다음 문으로 다가가 노크를 했다.
똑. 똑. 똑.
아무 반응이 없다. 나는 귀를 가져다 댔다. 인기척이 있는 것 같지만 빗소리 때문에 착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착각한 것이기를 기대하며 잠시 기다렸다. 터번에 고인 빗물이 흘러내려와 눈으로 들어간다. 나는 다시 노크를 했다.
“세금 징수원이다. 문을 열어라.”
침묵. 13번 째 겪는 침묵이다. 매번 일을 하기 위해 문을 두들기면 그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그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도 내가 하는 일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내 일을 해야 했다. 나는 다시 노크를 했다.
“마지막 경고다. 세금 징수원이다. 문을 열어라. 문을 열지 않으면 강제 집행하겠다.” 나는 짬마 품 안에서 이 집이 미납한 세금 액이 얼마인지 확인해 불러주었다. 아직도 대답이 없었다.
쾅쾅쾅.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 왔다. 나는 게모즈 수레로 가 세금으로 징수한 - 압수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 잡동사니들을 뒤적였다. 큰 나무 곤봉에 날카로운 세모꼴 도끼날을 박아 끈으로 고정한 대형 돌도끼를 꺼냈다. 대형 돌도끼를 들고 문 앞으로 가는 도중 건넛집 창문에서 상황을 살펴보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고모즈 횡격막으로 만든 창문은 불투명한데다가, 빗줄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려,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유령처럼 보였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형 돌도끼가 나무문 안으로 파고든다.
콰직.
나무문이 나무토막으로 변해갔다.
비가 계속해서 쏟아져 세상이 뿌옇게 보였다. 선명히 보이는 것은 부서져가는 문과 내 손에 들린 대형 돌도끼뿐이었다.
콰직, 콰직, 콰직.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문이 완전히 쪼개졌다. 문이 열렸다.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찢어지는 소리에도 나는 아랑곳없이 도끼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서진 문 조각이 밟히며 신음소리를 냈다.
그 다음 장면은 언제나 똑같다. 여자들이 울면서 내 짬마 자락에 매달려 사정을 하고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기절하기도 한다. 남자들은 돌처럼 굳어 모든 굴욕을 참아내고 깨문 입술에서 피가 나려 한다. 무기력한 아버지 뒤에 숨은 아이들을 울부짖는다. 나는 수레에 물건을 다 실었다. 등 뒤에서 적의에 찬 시선이 사정없이 찌르는 것을 느끼면서 짐 위로 방수포를 덮고 끈으로 고정했다. 그 사이 내 등은 삶을 유린당한 사람들의 원망으로 너덜너덜해졌다.
“이봐, 그만 둬!”
성 난 목소리가 들렸다. 겁에 질려있으면서도 분노를 참지 못하는 앳된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얼굴에 수염이라고는 하나도 나지 않은 얼굴이 어슴푸레한 어둠 위에 떠 있었다. 이국적인 얼굴이다. 하늘의 두 개의 달 중 하나처럼 하얀 얼굴. 바다 ‘건너’에서 온 것 같다. 떨고 있다. 비에 젖었기 때문에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떨고 있는 지도 모른다. 손에 들고 있는 돌도 떨고 있었다. 그가 게모즈 앞으로 달려왔다.
“공무집행 방해다. 물러 서.”
그 아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는데도, 네 놈들은 신경도 안 쓰고, 그, 그저 세금 뜯어가는 데만 혈안이지. 이, 이, 이 더러운 앞잡이들, 고모즈 내장만도 못한 놈들.” 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변성기를 이제 막 지난 목소리였다.
나는 아이를 내버려둔 채 게모즈에 올라탔다. 그를 건드렸다가는 군중이 흥분해 덤벼들 수 있다. 성난 군중의 연대는 폭력으로 잠재울 수 없다. 진짜 권력은 폭력이 아니라 연대에서 나오는 법이다. 나는 게모즈에게 출발하라는 만트라를 외어 신호를 보냈다. 게모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디를 가려는 거야! 내 말이 안 들려?”
비가 계속해서 내리며 그와 나 사이를 갈라놓았다.
“비켜.”
“수, 수레를 그 자리에 놓고 가.”
“두 번 이야기 하지 않겠다. 비켜라.”
그는 화내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덜리는 손으로 돌을 던졌다. 이마에서 불이 번쩍인다. 비 때문에 피가 흐르는 지 알 수 없었다. 손으로 확인해보니 손끝에 묻은 빗물에 붉은 색이 섞여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질 폭력에 떨고 있었다. 나는 이 소년이라고도 어른이라고도 말하기 힘든 남자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는 그의 일을 할 뿐이고 나는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자눈.”
나는 내 뒤에서 들린 목소리 -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아버지?
나를 부른 사람의 얼굴은 내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얼굴이었다.

2.
우리는 술집에 앉아 있었다. 수레는 게모즈에게 직접 가져 놓으라고 명령하고 가게로 들어왔다. 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오랜만에 대화를 하고 싶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대화를 하기에 적당할 만큼 조용한 구석자리였다. 간단한 안주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자네가 이런 한직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바다 건너’에서 용병 일이라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거기는 아직 전쟁 중이라고 들었거든. 자눈, 다시 만나서 반갑네.”
“에짐. 자네야 말로 그런 일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우리 둘은 서로의 가죽부대를 들어 올리고 술을 들이켰다. 뜨거운 물이 목구멍을 훑는다.
“세금 징수원 일을 한단 말이지?”
“그런 셈이지.”
“얼마만이지? 형제?”
“자네가 ‘바다늑대 단’에 들어갔을 때가 마지막이었지. 전쟁이 끝나고, 레지스탕스가 해체되고 난 다음에 말이야.”
“맞아. 자넨 더 이상 더러운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
“아들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그가 바다늑대 단에 들어간 이후, ‘바다 건너’로 가서 만난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까 봤던 얼굴로 나이를 계산해 보면, 에짐과 헤어졌을 때 즈음 이미 태어났어야 했다. 나이가 맞지 않다. 에짐이 내가 계산 하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먼저 대답했다.
“친 아들은 아니야.”
“마누라는, 도망이라도 갔나?”
“죽었어.”
“그렇군.”
“오래전 일이야. 아들놈은 제 어미 얼굴도 모르지. 제 친아비 얼굴도 모르고.”
“사내다운 놈이더군.”
에짐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만약 왕년의 자눈이라면 벌써 내 아들놈 목이 떨어져 나갔겠지.”
“미안하네.”
“뭐가? 자넨 자네 일을 할 뿐이야. 만일 내가 자네랑 같은 입장이라도 난 내 일에만 충실했을 걸세. 열심히 문을 부수고 사람들 물건을 빼앗아 갔겠지. 자넨 내 이마에 돌을 던졌을 거고.”
그가 쾌활하게 웃었다. 예전에 보았던 웃음과 똑같았다.
“자넨 뭘 하고 지내나, 에짐.”
“나? 비웃지 말게. 난 아이들에게 격투기를 가르치고 있네. 이 지역 자경단을 담당하고 있지.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는 거야.”
“자네다운 일을 하는군. 자넨 언제나 대형 석단도 하나면 무슨 문제건 해결했지. 자네가 그 때 그 말만 많던 대장 놈 코앞에다가 칼 꽂았던 거 생각나나? 그 놈 오줌 한번 힘차게 지렸지.”
“어머니 하그무스의 가호가 함께 하길.” 에짐과 내가 동시에 말했다. 우리 두 사람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오랜만에 계산 없이 웃어본 것 같다. 우리는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그가 대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대형 마제 석단도는 그에게서 이별 선물로 내가 받아 보관하고 있었다.
에짐이 입가를 닦으며 가죽부대를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기울여 앉았다. 방석이 커다란 그의 몸을 견디느라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있었다.
“사실 요새 사람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에짐이 말했다. 표정이 어둡다.
“무슨 일인가?”
내가 묻자 그는 최근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해 주었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 세금 징수를 하면서 아이들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이래적인 일이다. 부패가 자랑인 이 항구도시 하그무스에서 가장 많은 것이 어린아이다. 아이들이 없어진다고 누가 신경이나 쓸까? 세금관리청에서 이 일을 해결할 리 가 없다. 범죄가 벌어지면 해결하는 것 또한 세금 징수에 버금가는 세금관리청의 임무지만, 세금관리청은 돈이 안 되는 일에는 힘을 쓰지 않는다.
“결국 그래서 내가 떠맡은 셈이지. 그래도 단서는 잡았어. 이제 곧 잡을 수 있을 거야. 이런 이야기 보다, 밝은 이야기나 좀 하지. 어떻게 살았나?”
나는 에짐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는 그 거짓말을 믿어주었다. 그는 나에게 진실을 이야기 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내가 마지막에 그를 보았던 대로, 그는 바다늑대 단에 들어갔다. ‘바다건너’ 대륙에서 온 상선을 공격하는 합법적인 해적집단이다. 그는 그 일을 하던 도중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여자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아내를 때리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던 남자였고, 에짐은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흔한 이야기다. 남편에게서 도망쳐온 여자는 에짐과 함께 살았다.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막 태어난 그녀의 아이를 두고 바다로 떠났다, 일을 마치고 온 에짐이 발견한 것은 피로 젖은 아내의 시체와, 피 웅덩이에서 울고 있는 갓난아기였다. 복수는 생각만큼 달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 나는 아들을 키우면서 혼자 살았지. 이 거리로 온 건 얼마 되지 않아.”
“이름이 뭔가?”
“자눈이야.”
“뭐라고?”
“맘에 들지 않나?”
내 이름을 한, 소년도 어른도 아닌 아이, 내 이름을 한 아이.
“아니. 그럴 리가.”
“자네처럼 강인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려고 하는 아이지. 아직 사내가 되지는 못했지만 될 가능성이 충분한 녀석이야. 정의감이 강해.”
“내가 보기에도 그러네.”
이건 진심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나 같이 타락하지 않고 자라기를 바랐다. 내 이름 자눈도, 우리 이새람 군도의 민족을 통합시켰던 위대한 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나는 실패자로 그 왕의 이름을 더럽혔지만, 그 아이만큼은 그 왕처럼 자신의 모든 욕망을 실현하는 자가 되기를 바랐다. 비록 하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왕은 말했다. 내 안에는 끝없이 먹을 것을 요구하는 짐승이 살고 있고, 나는 그 짐승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모든 것을 참고 견뎠노라고. 맨손으로 시작해 왕이 되었지만 아직도 내 손은 칼을 쥐고 싶어 한다고. 그는 지치지 않고 모든 것을 이겨내는 돌의 의지를 두 손에 쥐고 있었다. 나는 어린 자눈도 그렇게 자라기를 바랐다.
헤어지기 전에 나는 그의 주소를 물었고, 내일 찾아 가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에게 받았던 석단도를 찾았다. 조금 더러워지기는 했지만 아직 그럴듯했다.
다음 날, 나는 세금관리청에서 일상적인 보고 업무를 마치고 일찍 퇴근했다. 게모즈가 제대로 수레를 가져다 놓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상사의 명령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내 진짜 정체를 모른다. 아마 알았다면 함부로 이야기하진 못할 것이다.
오늘도 비가 내렸다.
나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손에는 그에게 받았던 마제 대형 석단도와 술 부대를 들고 있었다. 머리에는 세금 징수원을 상징하는 터번을 썼다. 검은 색 터번이다.
집은 비어있었다.
에짐은 죽어있었다.

3.
방 안은 조용했다.
에짐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입 밖으로 나온 혀가 보라색으로 부풀어 있었고 목에 끈으로 졸린 상처가 있었다. 부릅뜬 채로 뒤집힌 눈이 충혈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질식만이 사인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에짐은 근접전이 특기였고, 체구가 꽤나 커다란 편인 나보다 키며 체격이 한참 큰 사내였다. 이 굵은 목이 손쉽게 질식할 리 가 없다.
그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적어도 죽은 지 5시간은 되어 보였다. 나와 술을 마시고 헤어진 뒤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의 가슴과 배에는 수 십 군데의 찔린 흔적이 있었다. 찔린 상처를 확인해 보니 상처의 모양이 여려 개였다. 날이 넓은 마제횡인(磨製橫刃) 석단도로 찌른 곳, 날이 길고 좁은 타제첨인(打製尖刃) 석단도로 찌른 곳, 도끼로 찍힌 곳, 어림잡아 네 명이 동시에 그의 두터운 가슴과 배를 난도질했다. 복막이 찢겨 내장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렇게 무력하게 당할 친구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강인한 사내였고, 사람을 죽이는 기술에 누구보다 숙달된 사내다. 이렇게 자신의 피에 잠겨 차갑게 식어 있을 사내가 아니다. 도대체 왜? 의문은 또 하나 있었다. 그의 아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와 같은 이름을 한, 소년도 청년도 아닌 아이.
나는 집 안을 뒤졌다. 세간이 간소했다. 그 흔한 가정용 고모즈가 한 마리도 없었다. 안락의자용 고모즈조차 없었다. 그의 체격을 버텨낼 고모즈가 흔치는 않을 터였다만, 지나치게 검소한 집이다. 방안 가득 자료가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 그가 다룬 사건에 대한 보고서나 자료들이었다. 대부분 불륜이나 폭행시비에 대한 것들이거나, 폭력조직과 대립하게 된 일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는 자기 일에도 일일이 보고서를 만드는 꼼꼼한 사내였다. 과거 레지스탕스에서 함께 싸울 때에도 그는 기록할 수 있는 것을 일일이 기록하고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격투기를 가르치던 아이들의 성과를 꼼꼼히 기록한 표도 있었다.
그런데 술집에서 나에게 이야기한, 어린아이들의 실종에 대한 자료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집 밖으로 나왔다. 손에는 아직도 그에게 돌려주려 했던 대형 마제 석단도가 들려있었다. 나는 가죽으로 만든 칼집에 석단도를 집어넣고 짬마 안에 넣었다. 비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나는 옆집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려고 해도 문이 없었다. 내가 부숴버린 탓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제 문을 몇 개나 부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벽을 두들기며 말했다.
“아무도 없나.”
대답이 없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내 목덜미 앞에 횃불의 주황빛을 둔하게 반사하는 석단도의 칼끝이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저리 꺼져요.”
여자였다. 막 솟기 시작한 봉긋한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진정해, 그냥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러니까.”
“대답할 이유도, 그럴 마음도 없어요. 꺼져요!”
“어젯밤에서 새벽 사이, 이상한 소리를 듣지 않았나?”
“당장 사라져, 이 검은 악마.”
나는 조금 화가 났다. 나는 이제는 사라진 이새람 군도(群島) 출신자의 후손이다. 나는 내 아버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내 조상이 어디서 왔는지는 안다. 검은 피부가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으니까. 게른 사람들의 피부도 태양에 그을린 갈색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보다 더 진한, 검은 색에 가까운 피부를 하고 있다.
150년 전, 나와 같은 이름을 가졌던 왕 자눈이 바다 건너 대륙 연합과 동맹을 맺고 게른의 왕 키오와 전쟁을 벌였다. 어머니 여신들이 떠난 뒤로 황폐화 되었던 행성 하그무스에서 벌어진 전쟁 중 가장 큰 것이었다. 그 때 이후로 게른 사람들은 이새람 군도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약 15년 전, 바다 건너와 게른이 손을 잡고 이새람 군도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전쟁을 벌였다. 나는 그 때 레지스탕스였다.
나는 칼을 쥔 채 떨고 있는 여자의 두 손을 그대로 잡아 비틀어 꺾어 올렸다. 여자가 비명을 질렀고 나는 아랑곳없이 땅에 떨어진 칼을 발로 차 멀리 보냈다. 그리고 여자의 두 손목을 비튼 그대로 들어 올렸다. 여자는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허공에 떠 올라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깨금발로 바닥을 짚고 조금이나마 손목에 가해지는 부담을 덜어보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힘을 잃어가더니 잠잠해지더니 씩씩대는 숨소리도 줄어들었다.
“다시 한 번 묻지. 어제 무슨 소리를 듣지 않았나?”
여자가 침을 뱉는다. 아직 힘이 덜 빠진 모양이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가씨, 난 에짐의 친구고, 에짐은 지금 죽어서 피 양탄자 위를 뒹굴고 있소.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다 이야기 해 줘요.”
“난 아가씨가 아니에요.”
말투가 누그러졌기에 나는 손을 놓았다. 손목이 아픈 듯 손으로 부비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에짐 아저씨가 죽었다는 게 사실이에요? 믿을 수 없어요.”
“사실이야. 확인시켜 줄 수 도 있지만, 젊은 아가씨가 볼 만한 장면은 아니지.”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에도 화가 나 보이는 눈초리가 더 매서워졌다. 눈초리만으로도 목을 자를 수 있을 것 같다.
“자눈은 어떻게 됐죠?” 그녀가 말했다.
“당신 눈앞에 있지.”
“장난치지 말아요!”
그녀가 내 뺨을 때렸다. 나는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 이름도 자눈이거든.”
“그럼 당신이 에짐 아저씨가 말한 그 자눈이란 말이에요?”
실망한 눈초리다. 도대체 에짐, 이 친구 나를 어떻게 소개한 거지, 이제 묻고 싶어도 물을 길이 없다.
“그럼, 아저씨 말고 내가 알던 자눈은 어디 갔죠?”
“그 꼬마 친구도 찾아야 해, 아가씨. 내 이마를 찢은 보답을 해야 하거든.” 나는 그녀가 보답이라는 내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난 아가씨가 아니에요!”
“그럼 이름을 말해 주겠나?”

4.
베슨이 에짐의 시체를 보고 기절할 듯 무너지는 걸 붙잡아주고, 내 품에 안겨, 내 품을 주먹으로 두들기며 눈물로 적시고, 이윽고 진정되기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신경이 곤두 선 여자에게 서툴게 접근했다가 손톱자국이 나는 걸 모를 만큼 어리지 않다.
“자, 아가씨……”
“베슨이라고 했잖아요.”
“……베슨, 이제 내가 필요한 걸 좀 알려줘야겠어.”
“아저씨는 슬프지도 않아요?”
“슬프지. 하지만 슬픈 것 보다 복수가 더 중요해.”
“짐승이네요.”
“에짐이라도 그랬을 거야. 그게 우리 식 우정이지. 갚아 줄 것을 갚아주는 것.”
이 말은 반만 진실이었다. 나머지 반은 싸움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내 두 손이 오랜만에 마음껏 싸울 구실을 찾았다는 기쁨에 떨리고 있었다. 내 안에 잠든 야수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나는 베슨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에짐의 시체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불평도 없으니까. 산 자는 산 자의 일을 해야 한다.
베슨이 방석을 내 왔다. 우리 둘은 각자의 방석에 앉았다. 그녀는 부모가 모두 돈을 벌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난 뒤로 에짐에게 의지하고 살았다고 한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에짐이 요새 수사를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요새 이 거리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에짐 아저씨가 수사하고 있죠. 아저씨는 최근 나타난 곡마단을 의심했어요.”
“떠돌이 곡마단 말인가?”
“네.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거든요. 자눈이 몰래 그 곡마단에 손님으로 가서 염탐을 하고 왔어요. 어제 에짐 아저씨가 그것 때문에 화가 많이 나셨죠. 허락도 없이 위험한 짓을 했다고요. 자눈은 아저씨를 존경해서,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 해요.”
그러기엔 몸이 약한 편이지, 나는 무심결에 말할 뻔했다.
“에짐 아저씨 집에서 큰 소리가 났었어요. 싸우는 소리였죠. 어제 자눈이 우리 집에 왔어요. 아버지에게 화가 많이 나 있었죠. 더러운 세금 징수원하고 같이 술 마시러 나갔다 오기나 하고, 자신이 아버지 일을 도우려는 데 그걸 몰라준다고 화가 많이 났었어요.”
젊은 남녀가 밤에 한 집에 있었다? 그것도 화가 많이 나 흥분해 있는 젊은 남자와 함께? 나는 더 자세한 것은 묻지 않기로 마음먹고 다른 질문을 했다.
“자눈은 언제 나갔지?”
“내가 일어났을 때는 이미 없었어요.”
그녀의 까무잡잡한 피부 위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강한 척 해도 아직은 소녀티를 벗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 순진하고 티 없이 보였다.
한참 더 이야기했지만 더 알아 낼 정보가 없었다.
나는 먼저 그 곡마단으로 갈 생각을 했다. 그 곳에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곡마단들은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돈이 되는 무슨 일이든 한다. 돈이 되면 범죄도 저지른다. 아기를 훔친다는 소문은 단지 뜬소문이 아니다. 섣불리 건드릴 수 도 없다. 험한 세상을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녀석들은 꽤나 거칠다. 무슨 사업이든, 사업에는 언제나 돈과 힘이 필요한 법이다. 돈은 몰라도 힘이 있는 게 곡마단 놈들이다. 돈을 걸고 싸우는 격투기 시합을 전문으로 하는 퇴물 격투기 선수나, 나이프 투척을 업으로 삼는 놈들도 있다. 무슨 짓을 할이지 모르는 내몰린 자들인 데다가 실력도 좋다. 세금관리청이 이런 놈들을 상대할 리 가 없다. 저번 임무 때 잠입했던 호법청 놈들보다 질이 나쁘다. 그래도 거기 말고는 다음 정보를 구할 길이 없다.
베슨은 의외로 강단 있는 여자였다. 내가 가는 곳을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그녀에게 칼을 쓸 줄 아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짐이 나에게 주었던 단도는 그녀에게 너무 무거웠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카툼 나이프를 건네주었다. 크기가 작은 이 나이프에는 방아쇠가 달려 있다.
우리 민족이 찾아낸 카툼석(石)의 성질 중에는 일정한 리듬으로 두들기면 열을 발하는 것이 있다. 돌에 가해진 진동이 내부에서 증폭되어 열을 발하는 것인데, 나이프에 달아 놓은 방아쇠를 당기면 방아쇠 끝에 달린 조각이 카툼을 두들겨 달구는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리듬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크기가 작고 날이 좁은 타제 석단도라 찌르는 것 말고는 쓸 길이 없다. 그러나 가볍기 때문에 베슨이 쓰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분이 나빴다. 카툼 나이프는 내 행운의 부적 같은 것이다. 나는 운이나 직감 같은 변덕을 믿지 않으려 하지만, 나 같은 직업에는 언제나 미신이 따른다. 불안한 곳에는 더러운 곳처럼 언제나 구더기가 끓는다. 아무리 단단히 막아도 그렇다.
“어떻게 접근할 건데요?”
그녀가 비가 올 때 쓰는 방수포를 머리에 뒤집어쓰며 말했다. 방수포 위로 비가 쏟아져 메마른 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나는 검은 터번을 매만진 다음 대답했다.
“보다시피 나는 공무원이야.”

5.
곡마단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게모즈가 천막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비를 맞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 보였다. 고모즈들이 꾸룩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조련사들이 지겨운 얼굴로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영업 끝났소.”
퇴물 격투기 선수인 것처럼 보이는 덩치가 내 앞을 가로막더니 말했다. 덩치로는 밀린 적이 별로 없는 나보다 머리 하나 더 있었다. 둔해 보여도 싸울 때는 무희처럼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서 있는 자세를 보면 안다. 적당히 벌린 발에 고루 체중을 분산시켜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게 준비하고, 팔짱 낀 손을 바로 풀 수 있게 서로 꼬아 놓지 않으면서 심장이나 갈비뼈, 그리고 턱을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나를 우습게보고 있었다. 나는 베슨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손짓하고 말했다.
“단장은 어디 있지?”
나는 검은 터번을 가리키며 말했다. 요새는 이 터번을 보고도 말을 함부로 하는 놈들이 있다. 공무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나는 예측할 수 없고 속을 알 수 없는 위험한 인물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당황하게 만들고 겁먹게 만든다. 그러면 알아서 정보를 내놓는다. 불안이라는 틈을 메울 수 만 있다면 말이다. 아프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가 다시 물어도 덩치는 대답 대신 뭉개진 코와 찢어진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코웃음만 쳤다. 녀석은 내가 풋내기 인 줄 안 것이다. 대부분은 얼굴을 노리고 주먹을 휘두르는 법이다. 목표물을 보지 않으면 주먹이나 발을 맞추지 못하는 풋내기나 그러는 법이다.
나는 덩치의 가랑이 사이를 걷어 올렸다. 발등 위에서 무언가 깨지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이 이제야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이미 늦었다. 이제 내 안의 야수를 말릴 방법은 없다. 덩치가 아직도 젖은 모래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눈을 뒤집어 올리고 침을 흘리고 있다. 그의 동료가 이 꼴을 보고 모여들었다. 나는 그들이 보든 말든 쓰러진 덩치의 가슴팍이며 배를 걷어차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묻지. 단장은 어디 있지?”
“멈춰! 뭐하는 짓이야, 너 뭐야?”
나는 다시 한 번 검은 터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이 장님이 아니기를 빌었다.
“단장님은 뭐 하러 찾지?” 녀석들은 내 손가락을 무시하고 말했다.
“단장님께 물어보지 그래?”
나는 여전히 덩치를 걷어차고 있었다. 놈들은 질린 것 같다. 미친놈을 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덩치가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몸을 떨어서 나는 발길질을 그만 두었다. 사실 좀 지치기도 했다.
“재미있는 친구군. 이런 짓을 하고도 살아서 돌아가기를 바라는 건 아닐 텐데?”
“그 친구 말인데, 여기 이 친구 말하는 거지? 내가 보기에도 그래. 살긴 글렀어.”
내가 덩치의 턱을 한 번 더 걷어차자 녀석들이 칼을 꺼내들었다. 모두 네 명이었고, 모두 한 돌덩이에서 쪼개져 나온 타제 석기처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싸움에 익숙한 몸놀림이었다.
“이봐, 내가 괜히 이러고 있는 게 아니잖아. 난 공무원이야. 공무집행 방해를 할 생각인 건 아니겠지?”
“우린 여기 사람이 아니니까, 여기 법에 적용도 안 돼.”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봐, 난 풋내기가 아니야.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가지도 않을 뿐 더러, 네 놈들이 겁나지도 않아. 빨리 단장이나 불러와.”
“날 찾았소?”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놈들 사이로 작고 뚱뚱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수염이 드러난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비에 젖어 가슴 털과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 사이로 살 찐 가슴이 자식 9명의 젖을 먹인 할머니처럼 늘어져 있었다. 피부가 노란 것을 보니 바다 건너 출신인 것 같다. 문신이 보인다. 팔에 있는 살갗 절반이 그림으로 채워 져 가슴까지 이어져 있었다. 등에도 문신이 있을 것이다.
“단장님이십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록 있어 보이는 움직임이다.
“따라오시오.”
단장은 우리 둘을 천막 안으로 안내했다. 천막 안은 의외로 아늑했다. 적어도 내 방보다는 좋아 보였다. 안락의자 고모즈에 앉은 단장의 모습이 어미 고모즈에게 안긴 새끼 고모즈처럼 보였다. 튀어나온 배, 툭 튀어나온 눈, 찢어진 입. 다른 것이 있다면, 고모즈는 양서류고 단장은 인간이라는 점이다. 게모즈건 고모즈건 양서류는 다 똑같이 생겼다. 난생이라 배꼽이 없고, 모래 속과 모래 위를 오가며 살기 때문에 털이 없고, 다리가 여섯 개라는 것이다. 게모즈는 크고, 고모즈는 작고, 단장은 털이 많다.
내가 단장에 대해 공상을 하는 사이 단장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가죽부대를 들어 올리고 술을 들이켰다. 술에 절어 사는 것 같이 보였다. 나는 이 늙은 고모즈를 뒤흔들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쉽사리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정보도 얼마 없다. 처음 칼 쓰는 법을 배웠을 때, 나와 에짐에게 교관이 말했다. 찌를 거면 단번에 쑤셔라.
“아이들은 어디 있지, 단장?”
나는 대답 대신 뜨거운 것을 받았다. 익숙한 감각이다. 뜨거운 것이 강제로 들어와 다리에 힘을 빼앗아 가고 숨도 못 쉬게 만드는 느낌. 부적을 맡기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누군가가 내 등을 쑤시고 있다. 단번에 쑤셨군. 젠장. 뒤를 돌아보자 베슨이 웃고 있었고 다시 앞을 보자 ‘검은 손’이 얼굴로 날아들고 있었다. 당했군. 젠장.
나는 검은 손이 뭔지 설명할 틈 도 없이 기절해버렸다.
젠장.

6.
젠장.
술을 진탕 먹고 난 다음 날처럼 머리가 깨지고 있었다. 조각조각 깨지고 있었다. 등줄기에 아직도 전율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코가 쑤시고 등이 쑤시기 까지 한 걸 보니, 오늘이 내 행운의 날인 것 같다. 고통으로 온 몸이 부풀었다 줄어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둡다. 피 냄새가 난다.
나는 축축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지하인 것 같았다. 발광석의 붉은 빛이 어둠을 가르고, 문아래 틈 사이로 투명한 빛이 조금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녀석들이 나를 우습게 본 모양이다. 놈들은 내 몸을 묶기는 했지만 그냥 가죽 끈으로 팔과 몸통을 동시에 감아놓았을 뿐이었다. 물론 가죽 끈은 단단하고 질겨 쉽게 풀리지 않는다. 마찰도 심해 이로 잡아 당겨 푼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팔에 피가 통하지 않아 손끝이 저려왔다. 빨리 포박을 풀어야한다.
내가 레지스탕스 활동을 할 때 배웠던 작은 재주가 있다. 어깨 관절은 쉽게 탈구된다. 잘못하면 습관성 질환이 되기도 한다. 나는 관절을 빼는 법을 배웠다. 죽을 만큼 아파서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지지만 진짜로 죽는 것 보다 났다.
어깨인대를 다치지 않게 주의하면서 어깨의 삼각근과 승모근에 힘을 가했다. 관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근육이 수축하며 간격을 벌린다. 신경을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은 격통이 팔꿈치와 손끝까지 흐른다.
우둑.
연골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어깨 관절이 빠졌다.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꽉 다물고 있었기 때문인지 턱이 아팠다. 끈이 벗은 옷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나는 다시 어깨 관절을 맞추려 힘을 가했다. 자유를 찾은 반대쪽 손으로 팔뚝 위를 잡고 삼각근과 승모근, 대흉근을 동시에 수축시켰다. 관절을 감싸는 근육이 조여들어 관절이 다시 구멍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아팠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몸을 확인했다. 코가 부러질 일은 없다. 내 코에는 이미 연골이 없다. 너무 얻어맞은 탓이다. 그래서 숨을 쉬거나 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피가 말라붙어 피부가 좀 땅겼다. 등에 찔린 상처도 손으로 확인해 보았다. 제대로 노렸다. 그들은 내가 죽길 바라지 않았다. 급소를 피해 찌른 것이다. 내 두꺼운 등 근육 덕분에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 나는 내가 무기로 쓸 수 있는 게 뭐가 있는 지도 확인해 보았다. 에짐의 단도도, 카툼 나이프도 없다. 평소에 쓰던 투척용 석단도도, 검은 손도 없었다.
검은 손.
그 뚱뚱한 단장이 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 때 썼던 무기다. 나도 평소에 자주 쓴다. 고모즈의 내장 중에는 질기고 검은 부분이 있는데 모래 속에 살 때 모르고 삼킨 이물질을 모아 두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모래를 채워 단단히 입구를 봉하면 그 자체로 무기로 쓸 수 있다. 꼭 그 부분을 이용할 필요는 없다. 가죽 주머니에 모래나 자갈을 채워도 된다. 검은 손으로 얻어맞으면 충격이 안 까지 전달되어 퍼진다. 몸 안에 멍이 들고 내장이 상한다. 뒤통수를 노리고 때리면 소리 없이 죽일 수 도 있다. 그런 위험한 무기를 내 얼굴에 갈기다니. 미간을 노리고 때린 것 같다. 그래서 한 번에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무기로 쓸 만한 것은 나를 묶었던 가죽 끈 뿐이다. 나는 가죽 끈을 주먹과 손목에 단단히 감고 팔꿈치 길이 정도 남겨 끝을 다른 손으로 감아쥐었다. 주먹질을 할 준비와, 목을 조를 준비를 동시에 한 셈이다. 나는 문 옆에 서서 누구든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어둠 속에 있으면 시간감각이 사라진다.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 지를 고민해 보았다. 아이들을 납치하는 게 곡마단인 것은 확실하다. 베슨도 곡마단의 일원일 것이다. 칼 쓰는 것을 보면 베슨이 에짐을 죽였을 것이다. 희대의 여배우가 따로 없군. 내가 모르는 것은 세 가지, 아이를 납치하는 목적, 이곳의 위치, 그리고 어린 자눈의 행방이었다.
내가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에 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한 명. 놈이 열쇠로 문을 열면서 중얼거렸다. 들은 적 있는 목소리다.
“건방진 새끼, 죽여주마.”
그 덩치다. 알이 깨진 것에 복수를 할 작정인 것 같다.
등의 상처가 조금 아프기는 하지만 저 정도 녀석은 해치울 수 있다. 나는 문 옆에 서서 기다렸다. 줄을 팽팽히 당겼다.
문이 열렸다.
녀석은 내가 없어서 당황한 모양이다. 틈이 생겼다. 나는 곧바로 가죽 끈을 녀석의 목에 감고 팔을 교차시켜 힘껏 조이며 녀석의 등 뒤로 돌아갔다. 녀석이 목줄을 손으로 쥐어뜯으며 발버둥 쳤다. 나는 뒷발로 문을 닫았다.
녀석은 팔팔했다. 손발을 휘두르며 나에게 계속해서 덤벼들었다. 죽이면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늦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움직였다. 녀석의 뒤통수에 박치기를 날리고 무릎으로 등 뒤의 신장을 찔러 넣고 목을 조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녀석이 힘이 좋아도 거리를 두고 있는 나를 집어 던질 수 는 없다. 누군가를 메치려면 최대한 몸을 밀착시켜야 한다. 녀석과 나는 주먹 하나 정도로 거리를 두고 있는데다가, 녀석의 키가 지나치게 커서 던지는 것은 무리였다. 녀석은 가장 잘하는 기술을 봉인 당한 셈이다.
숨이 막혀서인지 녀석의 체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줄을 놓았다. 갑자기 머리로 피가 들어가면 어지러움을 느낀다. 녀석이 비틀거렸다.
허리를 틀면서 체중을 실은 주먹을 턱에 꽂아 넣었다.
꽝.
가죽 끈으로 감은 주먹이 녀석의 뇌를 흔들어 다리가 풀렸다. 취한 사람처럼 휘청댄다.
나는 녀석의 안면에다 팔꿈치를 그었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뿜어져 나왔다. 녀석이 무릎을 꿇고서도 버텼다.
나는 양 손으로 머리를 붙잡아 당기며 무릎차기를 넣었다.
콰직.
코의 연골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녀석의 목을 위에서 감아 겨드랑이에 단단히 붙이며 동시에 두 발로 동체를 감고 뒤로 넘어졌다. 녀석은 머리를 땅에 박으며 엎어졌다.
나는 발로 놈의 몸을 고정시킨 채로 몸을 뒤로 젖히며 녀석의 목을 졸랐다. 녀석의 경동맥이 막혀 금방 정신을 잃을 것이다. 버둥거리던 녀석의 몸이 점차 얌전해진다.
녀석이 기절했다.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녀석의 몸을 뒤졌다. 녀석이 검은 손과 투척용 석단도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짬마를 벗겨 입었다. 폭이 넓은 가죽 끈을 허리에 단단히 감았다. 상처가 터졌는지 허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검은 손은 품에 넣었다. 짬마가 조금 컸지만 체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투척용 석단도는 허리띠에 꽂아 넣었다.
나는 녀석의 두 팔을 등 뒤로 꺾어 손목을 싸잡아 묶은 다음 두 다리도 접어 손목과 발목을 서로 연결해 묶었다. 이제 녀석은 꼼짝 못할 것이다. 나는 녀석을 옆으로 눕히고 꼬리뼈를 찼다. 비명을 지르며 녀석이 정신을 차렸다.
나는 녀석을 괴롭히며 알아 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우려냈다. 녀석은 이미 겁에 질려 똥오줌을 지린 상태다. 거짓말을 할 여유는 없다.
감히 누구한테.

7.
나는 제단으로 향했다.
그들은 하수인에 불과했다. 곡마단은 단순히 청부업을 하는 놈들일 뿐이다. 그들은 아이들을 왜 납치하는 지 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아는 것은 베슨이 그들의 일원이 아니라는 것과, 그녀가 그들에게 일을 의뢰한 장본인이었다는 것이다. 그 날 밤, 에짐을 죽인 것은 곡마단의 힘 꽤나 쓰는 놈들과 베슨이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이곳은 베슨의 집이라고 했다. 녀석이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베슨 같은 어린 여자가 가지기엔 너무 큰 저택이다. 내가 있던 곳은 지하에 있는 많은 방 중 하나였다. 지하에는 내가 있던 방과 같은 크기의 방이 6개나 더 있었고, 모두 축축하고 피 냄새가 났다. 처음에는 지하 감옥인 줄 알았다. 하지만 너무 조용했다.
녀석이 말한 제단으로 오르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사치스러운 저택이다. 모래 벽돌로 만들어 수수한 실내장식만 있는 게른의 집과는 너무도 달랐다. 게다가 너무 조용하다. 하인이나 노예가 몇 명 있어도 이상할 것 없는 대저택이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거짓말을 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녀석이 말한 대로 움직이니 말했던 대로 커다란 문이 있었다. 예전 레지스탕스 시절에 보았던 화려하고 세밀한 무늬가 그려진 문이다. 나는 문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댔다. 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낮고 굵직하게 울리는 소리가 주문처럼 들렸다. 기도를 하는 것 같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짙고 단단한 어둠이 가득 채운 가운데 발광석의 붉은 빛이 군데군데 빛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역겨움이 목구멍 위로 튀어나오려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빛 하나하나 마다, 그 아래에 기괴한 장식품이 있었다. 고급 대리석으로 만든 접시들 위에는 핏기가 사라진 손과 발, 그리고 눈을 감은 머리가 있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작고 앙증맞아보였다. 잘린 머리들은 하나같이 어리고 착한 얼굴이었다.
가장 안 쪽 가운데에 제단이 있었다. 수수한 제단이다. 그 뒤로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거울 위에 붙은 발광석이 노란 빛을 뿜어 제단을 빛내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하얀 피부의 벌거벗은 소년이 누워 있었다. 자눈이었다. 약에 취해 있는지 잠들어 있었다. 거울과 자눈 사이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베슨이었다. 역시 그들과 한 패였다. 그 옆에 선 남자는 여성복인 짬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에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숙인 채 하늘 높이 깡마른 팔과 손을 들어 올리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손에는 투명한 석단도를 들고 있었다. 노란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멈추고, 이번에는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주문을 외웠다.
“물러가라, 위대한 외계의 옛 것아! 이 땅 하그무스 그네들의 영토가 아니며, 우리는 그네들을 원하지 않는다! 그네들은 차가운 우주 공간에 그대로 머물라, 별들이 부르는 미친 노래를 들으며 춤을 춰라, 그네들의 잃어버린 고향을 위해 곡하라, 사라진 영광을 기리며 악을 써라! 그네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던 별의 아이들은 이제 가고 없다. 허망한 사막만 남은 하그무스와 두 개의 달은 그네들에게 등을 돌렸노라! 별의 아이들이 낳은 자식은 우리는 더 이상 그네들과 춤추고자 아니한다! 물러가라!”
그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해서 외웠다. 베슨은 두 손을 맞잡고 그가 하는 말을 따라 외웠다.
나는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마 이들도 ‘마즉크’를 하는 놈들이라는 것이다.
‘아흐하르 사쿰’ 임무 때, 나는 거대한 괴물과 맞닥뜨렸다. 그 놈은 괴물을 ‘위대한 외계의 옛 것’이라고 불렀고 괴물의 힘을 빌려 여러 가지 이상하고 신비한 힘인 마즉크를 사용했다. 분명 이 자도 그 위대한 외계의 옛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놈들과 나의 거리는 스무 걸음 떨어져 있었다. 투척용 석단도의 사정거리에서 조금 벗어난 거리다.
주문을 외우던 자가 갑자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귀족 원로원 중에서도 중진인 아르테눔이었다. 나는 아르테눔과 베슨이 무슨 짓을 하는 지 더 지켜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르테눔이 두 손으로 투명한 석단도를 거꾸로 붙잡고 내리찍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투척용 석단도를 꺼내 던졌다. 이마에 석단도가 박힌 아르테눔이 뒤로 넘어지며 거울을 깨트렸다. 노란 빛을 반사하는 거울 조각과 함께 아르테눔이 바닥에 쓰러졌다. 베슨이 그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거울이 깨져서는 안 된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베슨이 아르테눔에게서 칼을 빼앗아 들고 자눈을 찌르려 했다. 내가 또 다른 투척용 석단도를 던졌다. 베슨의 손목에 석단도가 박혔다. 손목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베슨에게 달려가면서 검은 손을 꺼내 내가 그녀의 목덜미를 내리 찍고 가슴팍을 밀어 찼다. 그녀가 제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나는 자눈의 뺨을 때려 일으켜 세우려 했다.
“자눈! 정신 차려, 자눈!”
충격.
등을 떠밀려 중심을 잃고 땅에 쓰러진 나는 또 다시 등에서 뜨거운 충격이 느껴졌다.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검은 손을 뒤로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베슨이 나뒹굴었다. 등에 아마 투명한 석단도가 박힌 것 같다. 곁눈질로 보니 자눈의 가슴에 칼이 꽂혀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는 베슨의 목을 찍어 누르며 배 위로 올라탔다. 베슨이 팔을 버둥거리며 저항했다. 나는 베슨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에 아직 석단도가 꽂혀 있었다. 나는 다른 쪽 손목에다 석단도를 꽂았다. 석단도가 두 손목을 모두 꿰뚫고 바닥에 박혔다. 비명을 지르는 베슨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세 번. 네 번. 다시는 덤비지 못하게 박살내고 싶었다. 베슨이 발버둥을 치고 엉덩이를 들어 올려 벗어나려 했다. 나는 검은 손을 다시 주워들고 두 팔의 팔꿈치를 향해 연달아 내리찍었다. 팔꿈치 안쪽의 인대가 튀어나온 부분이었다. 미칫, 하는 소리가 나며 인대가 끊어졌다. 베슨이 폐를 쥐어짜며 거친 숨소리를 내지른다. 몸부림친다. 나는 베슨의 목을 찍어 누르며 말했다.
“네 놈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말해! 에짐을 죽인 건 네 놈들 짓이지?”
지친 베슨이 고개를 조금 움직인다. 나는 목에서 손을 뗐다.
“하나하나 말해 봐. 네 놈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거야? 네 놈들이 아이들을 잡아다가 이렇게 조각내 놓은 이유가 뭐냐고! 그리고 네 년이랑 아르테눔은 무슨 관계야?”
“어리석은 놈……네 따위가 뭘 알아! 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어. 얼마 안 있으면 위대한 외계의 옛것들의 힘이 강대해져. 두 개의 달이 하그무스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자리를 잡고 마주 보는 날, 위대한 외계의 옛 것들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이걸 막으려 하셨어!”
“아이들을 납치 해다 토막을 내 놓아서 말이지?”
“이 검은 악마! 처음 그들을 이곳에 불러와 폭주 시킨 게 네 놈과 똑같은 이름을 했던 그 역겨운 왕이다!”

8.
나는 베슨에게서 모든 것을 들었다.
과거의 전쟁으로 하그무스가 사막이 된 것도, 내가 참여했던 전쟁에서 이새람 군도가 지도에서 사라지게 된 것도, 다 그 더러운 마즉크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돌아오려 하고 있었다.
아르테눔은 마즉크의 힘으로 위대한 외계의 옛 것들을 봉인할 생각을 했다. 그는 문을 닫을 생각이었다. 문을 다시 닫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생명력이 필요했고, 그는 곡마단을 고용해 아이들을 납치했다. 아이들이 사라진다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냥 납치하는 것 보다 수많은 아이 중에 한두 명을 납치하는 게 훨씬 얼버무리기도 수월했을 것이다.
아이들을 고문하고 괴롭히고 산 채로 팔 다리를 잘라 그 아이들이 충분히 고통 받게 했다. 아이들이 흘린 눈물 한 방울마저도 소중한 것이었다. 한 편으로는 열락이 필요했다. 그는 추잡한 난교를 벌이며 마즉크에 필요한 관능을 모았다. 그렇지 않으면 괴물들이 다시 이 땅을 유린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땅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에짐은 이 사실 까지는 알지 못했다. 나와 술을 마시고 돌아간 집에서 그는 아들이 납치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아들 옆에서 떨고 있는 베슨을 보고 저항하지 못했다. 그는 자눈과 베슨이 연인인 줄로만 알았다. 베슨은 인질인 척 하고 에짐을 속이고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 그리고는 뻔뻔하게 에짐의 주검과 내 앞에서 연기를 하고 내 등에 카툼 나이프를 꽂은 것이다.
그들의 의도는 선할 지도 모른다. 선한 의도만을 가진 어리석은 자라면 몇 명의 생목숨을 희생해서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자신의 아이를 내 던질 것이고, 비겁한 자라면 자신의 이웃이나 관계없는 타인을 내던질 것이다. 적어도 아르테눔과 그의 사생아 딸은 행성 하그무스를 지키려 한 것이다.
거울이 깨져 문을 닫는 힘을 제대로 불어넣지 못했지만 제물인 어린 자눈이 죽어 일단은 문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산 자에게는 산 자의 일이 있다.
복수.
나는 등에 박힌 칼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섣불리 뽑았다가는 출혈과다로 죽을 수 도 있다. 나는 베슨의 짬을 찢고 몸을 뒤졌다. 입에서 흐르는 피로 얼룩진 유방 틈새로 나의 카툼 나이프를 찾았다. 내 행운의 부적. 나는 그녀의 배 위에 올라탄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양 손목이 땅에 박힌 채로 피를 흘리고 있다. 얼굴이 부어올라 평소의 미모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람의 생명력이 있으면 그 문을 닫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지?”
“……”
나는 조용히 방아쇠를 당겨 카툼 나이프를 예열시켰다.
탁, 타탁, 탁, 탁탁 타탁, 탁.
카툼 나이프가 몸을 떨더니 붉은 색으로 변해갔다. 보기만 해도 뜨겁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베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달궈진 카툼 나이프를 가져다 댔다. 살이 타는 냄새가 풍기고 그녀가 발버둥 쳤다.
나는 미리 표시한 그 곳에 나이프를 박아 넣었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파고든 나이프를 견디지 못한 베슨의 눈이 뒤집어졌다. 죽었다.
내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게른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냐.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몸이 아팠다. 나는 등에 칼을 박은 채로 에짐에게 주려 했던 석단도를 찾았다. 한참을 뒤져 찾아낸 뒤, 돈이 될 만한 것을 챙겨서 저택을 빠져나왔다. 미치광이 아르테눔과 그의 어리고 예쁜 딸 베슨, 그리고 베슨에게 마음을 허락했던 어린 자눈을 비롯한 모든 시체를 뒤에 남겨두고.
곧 있으면 거대한 불길이 이 모든 것을 삼키고 장사지낼 것이다.
조문객은 필요 없다.
비가 그쳐 있었다. 사막에서 축축한 바람이 불어온다. 검은 하늘 위로 두 개의 만월이 보였다. 나는 달을 향해 욕을 내뱉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 동안 휴가를 써야 할 것 같다.
<劇終>
2011년 2월 21일 오전 3시 58분 초고 완성. 원고지 120장.

**연작 단편의 두 번째 글이라, 이해에 조금 곤란한 점이 있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분량도 조금 많고요. 오랜만에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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