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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오늘 밤의 여인들

2011.02.18 14:3202.18

노아가 눈을 떴을 때, 느네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진 냄새만으로 그 요리가, 언니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모듬 소시지 구이라는 것을, 노아는 단번에 알아챘다. 어린 동생은 눈을 비비며 까페의 양탄자를 쪼르르 기어가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바지 아래 숨겨진 늘씬하고 단단한 종아리를 주무르자 느네가 빙그레 웃으며 내려다본다.


"노아, 깼니?"

"응, 언니. 밥 먹을거야?"

"아니- 손님."

"이 시간에?"

노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방 바깥으로 까페의 홀을 넘겨다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노아가 잠든 사이, 손님이 하나 왔는가 보았다. 앉은 키가 성큼하게 크고, 온 몸이 통나무나 작은 바위처럼 단단해보이는 청년 하나가 무쇠처럼 고독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로 파라핀 등불이 어지럽게 불꽃을 흩날리며 어둠과 춤을 추고, 홀 중앙에 놓인 낡은 피아노와 옛 토착 원주민들의 먼지 낀 전통 악기가 들을 수 없는 노래를 흥얼대었다.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언니의 종아리를 꽈악 움켜쥐었다. 아직 열두살, 어린 소녀지만, 두꺼운 천 사이로 느껴지는 그녀의 손아귀 힘이 제법 세어서, 느네는 소시지를 굽던 손길을 잠깐 멈추었다.

"그렇게 하면 언니 아프다~"
"우웅, 하지만 저 아저씨 무서운걸."

노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밤을 잊은 손님들조차 잘 찾아오지 않는 이런 시간에, 녹슬고 낡은 갑옷에 괴상한 꾸러미를 지팡이처럼 짚고 찾아온 손님은 확실히 어딘가 낯설고 불균형스러운 공포를 간직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잘 가꾼다면 고작해야 느네보다 몇 살 위로 보이련만,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받아낸 듯한 이목구비와 마치 옷처럼 익숙하게 걸치고 있는 갑옷 전면에 새겨진, 수없이 자잘한 흠집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수줍어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는 두 자매가 유일하게 부모님을 추억할 수 있는, 까페의 실내 인테리어를 뜯어낼 듯 꼼꼼히 훑어보더니, 굵게 성긴, 레게 스타일 머리에 검은색 플라스틱테 안경을 쓴 느네를 또 한참 쳐다보고, 까페의 양탄자 구석에서 자기 몸보다 훨씬 큰 재킷과 셔츠, 바지를 입은 탓에 마치 구겨진 걸레뭉치처럼 보이는 노아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술은 맥주로. 안주는 되도록 요기가 될 수 있는 것, 그리고 빨리 나온다면 아무 것이나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갑옷 소리를 철크럭철크럭 요란하게 내더니, 지팡이처럼 짚고 온 꾸러미를 조심스럽게 옆에 내려놓고 파라핀 등불이 너울대는 조그마한 소반 앞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그저 조용히 어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느네도 노아도 까페를 운영한지 벌써 4년이 다 되어가지만, 어지간히 별난 손님들이 모여드는 이 밤, 이 거리에서도 저렇듯 낯선 분위기의 손님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느네는 가볍게 노아를 타일렀다.

"못써, 노아. 엄마 아빠 말씀 기억하지? 늦은 밤 홀로 찾아오는 손님일수록 숨겨둔 이야기 보따리가 아주아주 많다는 거. 가서 맥주랑 과자랑 챙겨드리렴. 언니도 금방 갈게."

언제나 싹싹하고 애교를 많이 부려 이 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귀여움을 받곤 하던 노아도 이번만큼은 좀 망설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곧 별 수 없다는 듯, 눈두덩을 두어번 더 비비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냉장고에서 시원한 병맥주를 가져오고, 또 근처 거리에서 산 커다란 봉지과자를 적당히 그릇에 옮겨담아 쟁반에 얹고는, 쫄랑쫄랑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막상 앞으로 다가가자 노아는 더욱 그 남자가 무섭게 느껴졌다. 그 남자는 노아가 보던 동화책에 나오는 괴물처럼 눈이 세 개도 아니었고, 뿔이 돋아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손질하지 않은 검은 머리칼과 거친 피부, 그리고 음울한 작은 두 눈은 아직 어린 노아에게 지나치게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던져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 했지만, 노아는 늘 하던 대로, 그러나 무척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발악하듯 외쳤다.

"매, 매매매맥, 맥주 나왔습니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노아는 마치 커다란 동상이 육중한 목을 치켜들어올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느닷없는 노아의 고함 때문에 혹시나 동생이 실례라도 한 것이 아닌가 싶어 주방에서 목을 쭈욱 빼고 남자를 바라보고 있던 느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남자는 말없이 맥주와 과자가 담긴 쟁반을 보더니 메마른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어 그 것을 건네받았다.

"언니랑 둘이서 하는 거니? 힘들겠구나."

목소리는 굵고 낮았지만, 워낙 첫인상이 무거웠기에 오히려 가볍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노아는 조금 긴장이 풀린 듯 반사적인 미소를 지어보였고, 남자는 손을 뻗어 노아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커다란 골격과 달리 손은 비교적 가늘고 섬세한 편이었다. 울퉁불퉁 굳은 살이 박혀 있는 탓에 뺨이 조금 따갑긴 했지만, 그 남자의 손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따스한 온기에 노아는 순식간에 발랄함을 되찾았다. 노아는 방글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우리가 바로 오늘 밤의 여인들인걸요!"
"음? 뭐라고?"

갑자기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미간을 찌푸린 그의 얼굴은 방금 전 심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보다 더욱 견고하게 느껴졌고, 마치 제멋대로 부숴서 헤집어놓은 건물의 파편 같기도 했다. 그 급격한 변화에 노아가 또다시 적응하지 못하고 뒤로 후다닥 물러서려 할 때, 느네가 재빨리 동생의 등을 무릎으로 떠받치며 작게, 그러나 경쾌하게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오늘 밤의 여인들>에서 가장 자신 있게 선보이는 모듬 소시지 구이랍니다. 이거라면 속도 든든하실 거예요."

남자가 어설픈 손놀림으로 느네의 손에서 음식을 받아들었다. 기름기가 도는 알싸한 냄새가 세 사람의 코를 자극했다.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느네에게 물었다.

"오늘 밤의 여인들…이라구요?"

"네. 부모님이 남겨주신 이 까페의 이름이죠. 사실 원래는 부모님께서 이 까페를 처음 지으실 때에,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정표로 <오늘 밤의 여인>이라는 간판을 다셨었는데, 우리가 여길 물려받고 나서 <들>이라는 글자를 하나 더 붙였어요. 그 다음부터 종종 짓궂은 손님들께서 우리 자매가 오늘 밤의 여인들이라고 농을 거시는 걸 우리 노아가 가끔 듣고 속없는 말을 옮겨요. 이해해주시면 고맙겠네요."


남자는 그제서야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아이가 많이 놀랐겠군요. 사실 고향 말을 쓴 게 참 너무 오랜만의 일이라서요. 난 내가 이 아이 말을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괜찮습니다."

느네의 미소를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느네에게 어정쩡하게 시선을 거둔 남자는 곧 포크로 커다란 소시지를 찍어 우적우적 씹어먹기 시작했다. 보통은 칼로 먹기 좋게 자르는 것이 먼저인데도, 남자는 자기 손가락보다 훨씬 길고 굵은 소시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뽀독뽀독 하고 소시지 껍질 찢어지는 소리, 육즙이 밴 살점이 아작아작 씹히는 소리가 맹렬하게 들려오자 노아와 느네는 민망함에 다시 까페의 한 구석으로 물러났다. 남자가 어색한 손놀림으로 맥주병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을 즈음, 느네는 노아가 잠들 무렵 보기 시작했던 책을 다시 폈다.


손님이 오지 않으면, 자매는 이렇듯 독서를 하거나, 혹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거나, 악기 연습을 하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부모님을 추억하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곤 했었다.


느네가 커다란 검은색 플라스틱 테 안경을 다시 콧등 위에 얹는 것을 보며, 노아는 재킷의 지퍼를 올렸다 열었다 장난을 치다가 문득 한 마디 던졌다.

"언니이. 저 아저씨 디게 배고팠나봐. 그지?"

"그래, 그랬는가보다."

"보통 아저씨들은 저거 잘라서 먹는데. 한 입에 다 들어가지도 않잖아. 우와, 입 엄청 크다. 맥주도 디게 잘 마셔!"

"노아. 언니가 뭐라 그랬지? 손님 식사하시는데 그거 빤히 쳐다보면서 큰소리로 얘기하는 거 아니랬지?"

느네의 타박에 노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독서와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어린 소녀지만 또한 분별력은 있는 나이였고, 언니 말을 잘 듣는 무던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남자의 실로 전투적인 식사 예법에 관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공포마저도 걷어낸 어린아이 특유의 강렬한 호기심이 그녀의 눈망울 깊숙한 데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언니, 보통 여기 혼자 오는 사람들은 다 언니랑 얘기하고 싶어하잖아. 아님 나랑 놀아주거나. 엄마 아빠가 여긴 사람들한테 술이랑 음식이랑 음악 말고도, 평화와 안식과 친구를 선물할 수 있는 곳이랬는데, 저 아저씬 아무데도 관심없는 거 같아. 그냥 밥 먹으러 온 사람인가봐."

느네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저 사람, 아마 기사일꺼야."

"기-사?"

"전쟁하는 사람들 말이야. 갑옷을 입었잖니. 구석구석 부서져 있는 걸 보니 아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퍽 오래 싸운 모양이지. 저 꾸러미 안에 든 것도 아마 그 때 쓰던 무기일지도 모르고."

"음- 하지만 여긴 싸움터가 아니잖아. 근데 왜 갑옷에 무기까지 가지고 와서 밥을 먹어?"

느네는 잠시 안경을 쓴 콧잔등을 긁적였다. 집착과 애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부 어른들의 습관적인 착각과, 혹은 저 손님이 정신이 반쯤 나간, 미치광이 퇴역 군인일 수도 있다는 점은 모두 제외한 채, 그녀는 노아의 수준을 철저히 고려하여 간단하게 설명했다.

"저건 노아의 곰인형과 동화책이랑 똑같은거야. 없으면 무지무지 허전하거든. 그래서 늘 갖고 다니는 거란다."

"와, 남자들도 그래? 게다가 어른인데?"

느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아빠가 예전에 그러셨잖아. 손님들은 다 똑같다고. 저 손님도 노아랑 똑같은거야."


언니의 말을 들은 노아는 까페 벽 한 구석에 걸어놓은 커다란 은막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빨려들듯 생각에 잠겼다. 은막 맞은편에는 아직 부모님이 건강했을 무렵 거리의 잡동사니들을 주워다가 조립한 낡은 영사기가 까페 구석에 기대어져 있었고, 자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그 영사기는 잔고장 한 번 없이 끊임없이 작은 밤하늘을 뱅글뱅글 토해내고 있었다. 그걸 볼 때마다 노아는 모르는, 느네만이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의 옛 모습이 종종 떠오르곤 했는데, 알츠하이머 병에 걸렸던 자매의 어머니 역시 죽기 직전까지 은막 속 작은 밤하늘을 쳐다보며 멍하니 시간을 많이 보냈었다. 마치 밤하늘과 대화하듯 끊임없는 혼잣말을 계속하며 어떻게든 제 자신을 되찾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어머니는 또한 그렇게 밤하늘 속으로 사라지듯 젊은 나이에 목숨을 놓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그녀의 습관만이 어린 여동생에게 남아 지금처럼 때때로 느네의,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삶의 방향을 종종 역주행시키곤 했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은막 속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노아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기사라면, 동화책에 나오는 사람을 말하는 거지? 나쁜 사람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고, 공주님이랑 결혼하는, 그런 사람."

'그런 거라면 보통 왕자를 생각하지 않니?' 라고 되묻기에 앞서, 동생의 말을 들은 느네가 아차 싶어 재빨리 어머니의 추억에서 벗어나 노아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작고 빠른 그녀의 여동생은 잽싸게 양탄자를 가로질러 맹렬한 식사의 끝을 질주하고 있는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느네는 가능한 한 손님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천천히 뒤따랐고, 그 사이 노아는 작고 예쁜 입술을 마음대로 움직여버렸다.

"아저씨, 아저씨는 기사님에요?"

느네의 낭패한 표정이 파라핀 등보다 더욱 밝게 잘 보였던 모양이다. 남자는 맥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비우면서 씁쓸하게 대꾸했다.

"언니가 말해줬니?"

"네." 느네는 속으로 노아에게 외쳤다. '아이구, 이 눈치없는 것아! 언니 얼굴을 갖다팔아도 유분수지!'

"비슷하구나. 아저씬 군인이란다. 기사는 아니지만."

"군인이요? 그게 뭔데요? 기사가 아닌 사람도 싸울 수 있어요?"

"난 떠돌이 용병이거든. 그러니까 돈을 받고 싸워주는 사람이란 뜻이지. 예를 들어서, 언니가 돈을 주면 아저씨가 언니 말을 듣고 음- 네 이름이 노아였지? 그래, 노아를 혼내주기도 하다가, 노아가 돈을 더 많이 주면, 또 그 돈을 받고 다시 언니를 혼내주러 가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야."

아무래도 남자의 말이 노아에게 적잖은 혼란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노아는 어렵다는 듯이, 언젠가 언니처럼 굵게 머리를 꼬기 위해 엉덩이까지 기른 치렁치렁한 머리칼 사이를 벅벅 긁었다. 느네가 등 뒤에서 조바심을 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아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아저씨는 마녀가 돈을 주면 마녀 편도 되는 거예요? 공주님을 구하러 가는 길인데도요?"

남자가 다시 아연한 듯이 느네를 쳐다보았다. 예전부터 퇴역 군인들이 가끔 정신병을 앓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느네는 어서 빨리 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느네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남자가 먼저 제정신을 되찾았다.

"그래, 아저씨는 그런 사람이란다. 돈만 주면 누구 편에나 서서 싸워주는."

눈빛만큼이나 음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 어딘가에서 짙은 어둠의 울림과 냄새 같은 것이 느껴졌기에 노아뿐만 아니라 느네까지도 움찔했다. 순간 느네의 몸이 굳어져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남자는 고요한 눈으로 소시지 접시를 밀어내고 빈 맥주병을 손가락으로 톡톡 튀기다가 비로소 느네를 발견한 듯, 눈망울을 가볍게 굴렸다.

"아, 여기 혹시. 칵테일도 됩니까?"

"네? 아…네!"

"그럼, 블랙 러시안 한 잔 부탁해요. 조금 독하게 해주면 더 좋겠군요."

남자의 어두운 목소리로부터 느네는 약간의 해방감까지 느끼면서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 주문대로 칵테일을 만드는 동안, 혹시 무슨 얘길 나눌까 싶어 귀를 쫑긋 세웠지만 별다른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남자가 움직이고 있는지 쇠 긁히는 소리만 까랑까랑 울릴 뿐이었다.


잠시 후, 블랙 러시안을 들고 나온 느네는 눈 앞에 펼쳐진 낯선 풍경에 하마터면 잔을 받쳐든 쟁반을 떨어뜨릴 뻔했다.


남자가 돌아앉아 있었다. 거의 다 먹어치운 소시지 접시와 빈 맥주병이 놓인 소반을 밀어젖혀놓고, 앉은 다리를 한 채 똑바로 노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노아는 약간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약간 비스듬하게 둔 채 남자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도대체 무슨, 눈싸움이라도 하려는 걸까. 왠지 모를 묘한 균형감 같은 것이 팽팽하게 둘 사이를 채우고 있는 기분이었기에 느네는 섣불리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한없이 양쪽으로 잡아늘인 고무줄 같은 그 분위기를 깬 것은, 역시 천진난만한 노아였다.  

"무서운 아저씨. 아저씬 이름이 뭐예요?"

그제서야 남자는 정신을 차린 듯 했다. 노아가 밤하늘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정신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던 남자는 다시금 예의 그 메마른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미안, 잊어버렸구나."

"이름을요? 자기 이름도 잊어버릴 수가 있어요?"

"응.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녔거든. 이 세상에는 정말 많은 나라가 있고, 정말 많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또 그만큼 다른 말들이 아주 많이 있다는 걸 아니? 하루에 해가 세 번 뜨는 섬의 해안가에서는 내 이름이 냐크모치치였던 적이 있었고, 달빛이 고드름처럼 맺히는 북쪽 얼음산에서는 하야므라고 불렸던 적이 있었고, 또 별빛조차 쉴 곳이 없는 머나먼 황야에서는 혼륜이라는 이름을 받은 적도 있었지. 돌아다니는 곳마다 새로운 이름이 자꾸만 생겼고, 그 때마다 내 모습도 자꾸 달라지는 것 같아서, 이젠 고향에 돌아왔는데도 말만 어렴풋이 기억날뿐, 원래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원래 내 모습은 어땠는지 도통 생각나질 않는구나."


처음으로 긴 말을 토해낸 남자는 머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마 잘 알아듣지도 못할 어린 아이에게 쓸데없는 얘기를 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남자의 시선과 느네의 시선이 우연히 서로 부딪히는 순간, 그제서야 느네는 남자가 왜 그토록 어정쩡하고 불편한 모습을 보였는지 깨달았다. 오랜 세월 외지만을 떠돌다가 한참 만에 돌아온 고향이, 고향의 말이, 그리고 고향 사람들이 너무 낯설어 어찌 대해야 할지 무척 난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타인을 솔직하게 대하는 어린 노아에게 부담 없는 호감을 느꼈던 것이 분명했다.


언니도 가끔 동생을 본받아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하며 느네는 천천히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따뜻한 미소와 함께 블랙 러시안이 찰랑거리는 잔을 건네자, 남자도 한결 편한 모습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노아가 불쑥 대꾸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들으셨다면 틀림없이 무척 슬픈 일이라고 하셨을 거예요."

남자와 느네의 손이 얽혀 있던 유리잔이 허공에서 바르르 떨렸다. 남자보다도, 느네의 말이 더 먼저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 뜻이니, 노아?"

"엄마 아빠가 꿈에서 그랬어. 엄마 아빠, 라고 부를 때마다 정말로 엄마 아빠가 생각나고 떠오르는 것처럼, 가장 자기 모습에 어울리게 만들어진 단어가 이름이라구 말야. 내 이름 노아, 언니 이름 느네. 괜히 그렇게 지으신 게 아니라구, 항상 그 이름에 어울리게 살아야 한다고. 그런 말씀을 하셨었거든. 근데 이 아저씬 자기 이름도 잘 모른다잖아.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잘 모르는 거지? 그러니까 슬프지. 엄청, 무지무지.“


남자에게 간신히 잔을 넘겨주고도, 그 무게가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듯한 느낌에, 느네는 손가락 끝을 바들바들 떨었다. 부모님의 모습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노아와는 달리, 느네는 부모님과의 짧은 추억을 떠올릴만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단지 비슷한 의미의 말을, 훨씬 어른스러운 표현으로 들은 기억은 있었다.

"그래, 슬픈 일이지.“

남자가 무심하게 대꾸했고, 느네는 왠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에 잠시 휘청이다가, 노아의 곁에 조심스럽게 주저앉았다.

"미안하지만, 좀 앉을게요."

남자의 경직과 당황이 공기를 통해서 은은히 전해져온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 곳은 아주 편한 소통의 공간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알맞은 가격을 내고 술과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듣지만, 사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건, 격의 없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소통의 출구예요. 우리 부모님이 여길 만드셨을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비밀을 안고 이 곳을 찾아왔고, 또 많은 사람들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종종 단골이 되어 후련한 기분을 함께 나누곤 해요.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좋을텐데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굴러다니는 온갖 무쇠덩어리를 꿰어다 두드려 맞춘 듯한, 갑옷 아래에 숨겨진 이질감과 긴장, 당황 등이 많이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노아는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리며 언니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고, 느네는 웃으며 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노아, 미안하지만 언니 블랙 커피 한 잔 갖다줄래?"

"…물 맞추는 거 자신 없는데."

"나중에 언니 없을 때 손님 오면 어떡하려구. 연습해봐야지."

노아가 주방으로 스르륵 미끄러지듯 기어가는 것을 보면서 느네는 안경을 벗은 콧잔등에 잔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착한 동생이에요. 말 잘 듣고 성격 좋고. 커피 물은 잘 못 맞추지만."

남자는 대답 대신 소반을 끌어당겨 식어버린 소시지를 먹기 시작했다. 꼬독꼬독, 아작아작, 소시지 씹는 소리로 둘 사이의 침묵을 가득 메우면 구태여 느네에게 말을 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느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듯, 또 동생이 그랬듯, 부모님의 손때가 묻은 영사기가 펼친 밤하늘에 시선을 던진 채 무심하게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거… 정말이에요?“

남자가 고슴도치처럼 등을 세웠다.

“무엇 말입니까?”

“이름도, 과거도, 자신의 원래 모습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

옅은 불빛이 남자의 얼굴 위로 복잡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남자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결국 고개를 푹 꺾어버렸다.

“……화를 내야 할까요.”

“네?”

“타인이 내 말을 불신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대체적으로 화를 내거나, 아니면 타인을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하겠죠. 그런데, 나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상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내가 정말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찌 납득시켜야할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는군요. 그리고…….”

남자는 쉬어가듯 한숨을 삼켰다가 다시 풀어놓았다.

"아까부터 느낀 것이지만 당신은 낯선 이와 대화를 참 잘하는군요.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보여서 무척 부럽습니다."

"아까 노아와 얘기할 때는 말을 잘 했었던 것 같은데요. 저랑 얘기하는 건 힘드세요?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도 너무 달변이신걸요?"

느네의 조롱하는 듯한 말에 남자는 곤혹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그 쪽은 뭐랄까……."

"그 쪽? 별로 듣기 좋은 호칭은 아니네요. 내 이름은 느네예요. 느네라고 편하게 한 번 불러볼래요? 여기 오는 사람들은 누구든 우리를 <거기 아가씨!>라든가 <꼬마야!> 이렇게 부르지 않는다구요. 모든 이름에는 다 불러주어야만 할 이유와 의미가 있으니까."

"그래요…………느네."

남자가 발음한 <느네>는 뜻밖에도 꽤 아련한 느낌이었다. 그 것은 오랜 싸움을 마치고 돌아온 퇴역 용병답게 푸석푸석한 향수병 같은 느낌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슬프고 우울할 정도로 짙디짙은 그리움이 한껏 묻어나기도 했다. 남자가 발음한 제 이름에 느네가 약간 취해 있었을 때, 남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느네 같다면 좋겠군요. 대화하기 편하도록 상대를 배려해주고, 어긋나는 분위기를 조율해주는 사람을, 고향에 돌아온 이후로 거의 만나지 못했으니까요."

"와, 정말이죠? 그 말, 이 까페 벽에다가 새겨놓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저더러 늘, 나이는 점점 먹어가는데 남자친구도 하나 없고, 결혼할 생각도 거의 없는 바보 같은 노처녀라고 하던데요."

"그런가요?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는데."

"나이에 상관없이 여자 인생의 가장 큰 과제가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꽤 많거든요. 그런 분들이랑 얘기하고 있자면 사실 제 머리가 다 아파요. 부모님은 이미 다 돌아가셨는데도, 수많은 부모님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결혼해라, 결혼해라, 성화해대는 기분이랄까요."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포크로 접시 바닥을 탁탁 가볍게 내리쳤다. “부러운 일이군요.”

"나에게는, 그런 말을 건네줄 사람들조차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설사 옛 인연들이 남아 있다고 해도, 내가 그들을 알아볼 수조차 없고. 많은 것이, 내가 떠난 사이에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해버렸어요. 심지어 나 자신마저도…….“

때마침 짙은 커피 향이 남자의 코끝을 살짝 스쳤다. 남자는 코를 벌름거리더니 커피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아장아장 걸어오는 노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느네, 당신의 동생에게는 많은 미래가 있겠지요. 저 아이가 가지고 있는 과거와 현재가, 앞으로 알 수 없는, 수많은 가능성을 생산하면서, 또한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표류하지 않도록 하는 닻이 될테니까요. 하지만 난 그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되찾고 싶은 겁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앞으로도 많이 남아 있을 내 미래를 위해서.”

느네는 안타까운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것 같네요. …혹시 병원에는 가보셨나요? 요즘엔 마법사들의 주문보다, 병원에서 치료가 더 믿을만하다고 하던데요. 거기 가면 무슨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병든 이들과, 그들을 고치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곳 말이군요.”

“네. 이 까페에도 가끔 당신 같은 퇴역 군인들이 찾아오거든요. 그들 중에서도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병원으로 간다고 들었어요. 도움이 되긴 하는가봐요.”

남자는 제대로 면도를 하지 않아 까칠까칠한 수염이 드문드문 고개를 내민 턱을 긁으며 곰곰이 느네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삼킨 소시지 조각을 뱉어내듯, 차갑게 대꾸했다.

“가보긴 했지만, 역시 좋은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왜요?”

“현역 시절에 만났던 군의관이나 위생병들도 그랬었지만, 소위 병원이라는 곳의 의사들도 다 마찬가지더군요. 사람을 자르고 붙이고, 고쳐야할 물건으로밖에 보지 않는 느낌이랄까요. 자기 할 말에 바쁜 그런 자들을 찾아가느니, 차라리 뒷골목의 돌팔이 마법사들을 찾아가는 게 마음은 더 편할 겁니다. 낫지는 못하게 해주더라도, 최소한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려고 노력하니까.”

느네는 턱을 괸 채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다소 장황하긴 했지만, 군인다운 무뚝뚝한 말투에 비해 묘사가 넘치고 감정 표현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병원의 의사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느네의 질문에, 뜻밖에도 남자의 얼굴에서, 그 얼굴에 가장 어울릴법한, 피곤함과 모멸감이 짙게 떠올랐다. 그리고 느네는 그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까페에 가끔 찾아오곤 하는 늙은 퇴역 군인들도, 그녀의 앞길과 혼사에 대해 노망기 섞인 참견을 하다가도, 그 단어를 듣거나 혹은 입에 올리게 될 때면, 바로 지금처럼, 경멸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이곤 했었던 것이다.

남자는, 느네가 예상하고 있었던 답변을 꺼냈다.

“참전 후유증이라고 하더군요.”

“……역시 그거군요.”

남자는 싸늘하게 웃었다.

"네, 역시 그거지요. 퇴역 군인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위 사람과 마찰을 빚는 일 같은 건 흔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참전 후유증처럼, 사회의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제멋대로 분류하고 레테르를 붙이기 좋아하는 족속들이 지어준 병명들이 일종의 면죄부가 되기도 하죠. 하지만 나는 참전 후유증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정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서 미쳐버린 전우들처럼,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죽일 것만 같은 환상에 시달리진 않으니까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 숱한 전투에서도 살아남았고, 그 후에도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현실과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감각 또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리 바깥에 목이 걸린 다른 용병들처럼, 나 역시 어느 술집, 어느 뒷골목에서 난동을 부리다 그들과 똑같은 신세가 되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곳에서 어떤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방법들만이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겁니다. 마치, 몇십 번이나 외우고 바꾸고 섞기를 거듭하다 그예 잊어버린 변방 소국의 사투리들처럼."


남자가 토사물처럼 쏟아내는 말에 분위기가 약간 어색해진 듯했다. 노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만 꼬았고, 느네 또한 이런 손님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그저 커피만 홀짝거렸다. ‘엄마 아빠라면 이럴 때 어떤 말을 하셨을까? 차라리 지금 노아가 자고 있다면, 꿈에라도 나타나실지 모르는데.’ 느네의 생각을 알리가 없는 남자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무릎 앞에 다가와 앉은 노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래, 노아. 네 말이 맞아. 그건 정말로 슬프고 슬픈 일이란다. 지금 여기서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는 내가, 전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니까. 나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유령이 된 기분이야.”


겨울밤, 산봉우리 위에 올라앉은 늑대처럼 외로워 보이는 남자의 목덜미에 눈길을 던지면서 느네는 남자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고 느꼈다. 부모님이 까페의 문을 열었을 때부터, 늦은 밤, 가끔씩 지친 그림자를 질질 끌며 홀로 찾아오는 손님은 언제나 다른 손님들과는 거의 어울리지 못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에 앉아 파라핀 등불의 작고 정열적인 춤을 바라보며, 혹은 아버지가 연주하는 해금 소리를 말없이 귓가로 받으며, 천 마디 만 마디를 침묵으로 대체하는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손님들을 아침 햇살이 섞인 아쉬운 미소와 함께 돌려보낸 후에는 갓난쟁이 노아를 돌보고 있던 느네의 귓불을 어루만지며 부모님은 가슴이 터져나갈 정도로 벅찬 뿌듯함과 함께, 두 딸에게 부드럽게 속삭이곤 했었던 것이다.


"사랑스러운 내 딸들. 밤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하고 총명하게 자라서, 귀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의 깊은 속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느네는 지금에서야 어쩌면, 부모님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까페를 열었으리라고 조심스럽게 확신에 가득찬 짐작을 하기 시작했다. 비록 풍족하게 살아본 경험은 한 번도 없지만, 부모님에게는 바로 지금과 같은 순간이 두 딸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라고 확신하며, 언제나 이 작은 보금자리에 남들의 배 이상 가는 열망과 노력을 가득 쏟아부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괜시리 눈가가 뜨끈해지고 말았다.


언제나 눈치 없는 어린 동생이, 이럴 때는 또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쪼르르 언니의 무릎을 타고 앉아 느네의 고운 이목구비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걱정스레 묻는다.

"언니이. 울어? 왜 울어어~ 울지 마아~"

"아, 아, 안 울어!"

여덟 살 터울의 어린 동생이 위로를 건네자 느네는 당황해서 얼른 안경을 벗어 눈가를 쓱쓱 문질렀다. 남자는 여전히 목석 같은 자세로 멀뚱하게 두 자매를 바라보다가, 괜시리 빈 잔만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의 오랜 버릇인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실 생각이세요? 자신이 누군지도 정확히 모르고, 사람을 대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리셨다면."

남자가 톱밥가루처럼 껄끄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사실은 그걸 찾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는 중입니다. 조금씩 이 근방을 산책하며, 행여나 예전의 나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혹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 찾고 있죠. 하지만 말하는 법을 빼고는 기억 나는 게 더 이상 없었어요. 무엇보다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잊어버려서, 행여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은 이들에게도 말 한 마디 붙여보질 못했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남자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들이 모두 느네, 당신처럼 편안했다면, 조금 더 수월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느네는 빙긋이 웃었다. "아마, 틀림없이 이제 좀 더 쉬워질 거예요. 나랑도 얘기 잘하잖아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남자의 까끌까끌한 미소가 느네의 미소를 닮듯이 조금씩 부드럽게 눅어지면서, 그녀는 훨씬 더 남자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다른 손님들에게 하듯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빈 술잔을 치우면서 발랄하게 물었다.


"저런, 밤은 깊어가는데 마실게 없네. 한 잔 더 하실거죠? 같은 걸로 가져다드릴게요."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느네가 주방에서 바쁘게 손을 움직일 무렵, 노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근데 아저씨, 그건 뭐예요?"

"이거?"

남자가 옆에 기대어 세워둔 꾸러미를 툭 치자 따앙 하고 무거운 금속음이 손끝을 타고 울렸다. 남자도 상당히 체격이 컸지만 꾸러미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길었다. 그 것이 마치 애완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자는 소중하게 싸안아 자신의 무릎에 얹어놓았다.

"약이란다. 불면증 치료제."

"에?"

"이게 없으면 잠을 못 자거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노아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빙빙 돌리며 꾸러미를 톡톡 건드려본다. 한편 느네는 칵테일 잔을 소반 위에 올려놓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불면증 치료제라구요? 뭔지는 몰라도 불면증에 이만큼 효과 있는 건 아마 없을걸요.“

"어스퀘이크(Earthquake)군요. 예전에 자주 마셨죠. 그 정도가 아니면 잠 못 드는 밤이 많아서.“

“어스퀘이크를 수면제 대용으로 여길 정도라면 상당히 센데요? 그런데 대체 그 꾸러미 안에 든 게 뭐예요? 무긴가요?"

남자는 술잔을 받아든 채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맞아요. 퇴역 군인들의 고질병 같은 거죠. …노아, 보고 싶니?"

"응! 보고 싶어요!"

노아가 튕기듯 대답했고 남자는 망설임없이 꾸러미를 풀어헤쳤다. 그 때 느네는 남자의 미소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순간 남자의 미소는 이제까지의 수줍으리만치 어설픈 느낌도 없었고, 그렇다고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지도 않았다. 남자의 일그러진 입가는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자만심과 우월함이 도가 지나칠 정도로 응축되어 마치 금방이라도 폭발하여 사람을 다치게 할 듯한, 비릿한 살기마저도 언뜻 비쳤다. 그 미소를 본 느네는 닭살이 돋은 손등으로 얼른 자신의 무릎을 다잡았다.


아마, 이 남자는 전쟁터에서 바로 저런 표정을 지은 채 싸웠었겠지.


남자가 풀어헤친 꾸러미 안에서 갑옷만큼이나 자잘한 흠집으로 가득 덮인, 길다란 낡은 금속 막대기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붙이는 달려 있지 않았지만, 군데군데 깨져 있는 곳마다 말라붙은 핏자국이, 오래 사용한 병장기 특유의 불길한 위압감을 가득 뿜어내고 있었다. 술을 마셨더라도 순식간에 깨버렸을 거야. 느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노아의 손을 꼬옥 잡았다. 노아의 작은 손도 촉촉한 땀이 가득 배어 있었다.

"쇠지팡이… 네요?"


"아뇨. 바다 건너, 성(姓)과 이름을 거꾸로 쓰는 땅의 금발벽안의 전사들이 많이 쓰는 무기입니다. 그쪽 나라 말로 핼버드(Halberd)라고 하죠. 창과 도끼를 하나로 합친 듯한 모습인데, 내 힘으로는 이 무기를 쉽게 휘두르기가 어려워서, 칼날의 크기를 조금 줄이는 대신, 쇠뭉치를 달아 균형을 맞췄지요. 지금은 물론 하도 많이 써서 다 깨져나가버렸지만요. 그 쪽의 전사들은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한데, 이 커다란 무기를 다루는 모습이란, 그야말로 폭풍 같아요. 수백이나 되는 장정들이 이 무기를 들고 싸움터를 내달리면, 창날로 찌르고 도낏날로 훑어내리고, 쇠뭉치로 깨부수는, 그야말로 종횡무진, 피와 살점이 눈보라처럼 튀어오르지요."


노아와 느네는 마치 열병처럼 기괴한 흥분에 휩싸인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오로지 이 까페에서만 살아온 두 자매는 전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도리가 없었고, 더군다나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 - 흔히 말하는 무용담을 이처럼 신나게 떠들어대는 모습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두 자매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본 남자는 순식간에 풀이 죽어버렸다.


"미안합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군요."

"아녜요."

또다시 남자와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느네는 말없이 노아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꾸러미를 주섬주섬 대충 묶어서는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놓았다. 느네와 남자 간에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고, 노아만이 자꾸만 바뀌는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려운 듯, 괜시리 관심을 끌고 싶어 떼굴떼굴 바닥을 굴렀다.


한참 뒤에, 하마터면 파라핀 등불 하나를 엎어버릴 뻔 하고, 천장과 바닥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닥을 굴러다닌 후에야, 노아는 제멋대로 뒤엉킨 머리카락을 쓱쓱 정리하며 물었다.

"악당이랑 싸운 적은 없어요?"

차라리 침묵을 깨뜨리는 노아의 질문이 몹시 반가웠던 듯 남자는 재빨리 대답했다.

"악당?"

"응, 악당. 용을 부리고 공주님을 납치하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 말예요. 난 아저씨가 그런 악당이랑 싸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남자는 칵테일 잔을 순식간에 비워버리고는 끄으윽- 작은 트림과 함께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처음부터 누구와 싸우고 싶어서 군인이 된 건 아니었단다."

"그럼요? 군인은 원래 항상 누구랑 싸우는 사람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글쎄다… 굳이 싸우고 싶었던 상대를 꼽아보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었던 거 같구나."

"자기 자신이랑 싸운다구요?"

"응. 아마 그랬던 것 같아.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노아는 이제 어린 나이에 관절염을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또다시 목을 꼬았다. 남자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몸을 까닥거렸고, 그 때마다 마치 갑옷이, 추억을 향해 되돌아가는 열차처럼 덜컹덜컹, 서글프게 울었다. 틀림없이 술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한 느네는 말없이 주방으로 살그머니 들어가 이번에는 데낄라와 오렌지 접시를 가져왔다. 눈을 뜬 남자는 고맙다고 눈인사를 하며, 오렌지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단숨에 황금빛 잔을 몇 번이고 빠르게 뒤집어 순식간에 술병을 반너머 비워버렸다. 그리고는 께느른한 눈으로 느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후임병 같은 서비스군요."

"칭찬이죠?"

"그럼요. 아주아주 눈치 빠르고 장사를 잘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죠."


취기가 많이 오른 듯, 아니면 잃어버린 여유를 되찾은 듯 남자는 두 자매를 훑어보곤 갑자기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거친 머리카락과 갈라진 피부, 짧은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수염을 천천히 쓸면서 자신의 인상을 스스로 가늠해보는 듯했다.

"나, 몇 살처럼 보이나요?"

"백 살!"

"글쎄요. 서른은 안 넘었을 것 같고, 스물일고여덟 정도? 면도하고 이발 잘하면 그렇게 보일 거예요."

"그런가요?" 남자가 되묻자 노아가 놀리듯이 혀를 내밀어보였다.

"아저씬 진짜 바본가부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자기 나이까지 잊어먹어요?"

"나라마다 역법(曆法)이 다 다르더구나. 머물렀던 곳마다 기후도, 나이를 세는 방법도 제각각이라서, 그 것 또한 오래토록 기억할 수가 없었어. 어느 곳에서는 내 나이가 세 살이기도 했고, 어느 곳에서는 내 나이가 천 살이었던 적도 있었으니까."

느네가 약간 안타까운 듯이 물었다.

"생일마저 잊어버린 거예요? 그건 정말 중요한 날이잖아요. 잘 생각해보면 기억날지도요."

"하루하루 살아 있는 날이 생일이지요.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 그런 건 없더군요. 특별한 나날을 챙길 여유도 없었어요. 한 시간 전만 해도 나와 함께 야참을 나눠먹던 동료가 죽어 나자빠지는 일에 익숙해지다보면, 삶과 죽음 사이의 견고한 경계마저 허물어지고, 끝없이 무감각한 혼란만이 찾아오죠. 죽든 살든 차라리 별 관계 없겠다… 하는 그런 생각. 내 스스로를 잊어버리기 시작한 때도, 아마 그러한 혼란에 익숙해진 무렵이 아닐까 싶어요."


카라랑. 갑옷의 모서리 부분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다시금 무릎을 끌어당겨 제 가슴에 싸안고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자신에게 남아 있는 기억들을 정리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남자의 조그마한 눈빛이 흐려지자, 느네는 남자가 제 스스로에게 깊이깊이 잠겨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말없이 빈 술병을 치우고, 새 술을 내왔으며, 노아는 조그마한 그릇에 봉지과자를 계속해서 채워주었다. 두 자매가 끊임없이 제공하는 술과 안주를 기계적으로 입가에 가져가며, 남자는 아무도 모르는 기억의 숲을 헤매었고 조각 난 제 자신을 그러모으는데 열중했다.


남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어둠이 깊어진 만큼 등불들은 잦아들어갔고, 그래서 느네는 소반 위에 놓인 램프 안에 걸쭉한 파라핀을 부어넣으며 등불의 기운을 돋워주고 있던 참이었다. 옆 자리에서는 노아가 지루했던지 제 입술을 비틀며 거울을 보고 있었다.


"언니, 나 몇 밤 자면 언니처럼 입술에 고리 끼울 수 있어?"

느네가 파라핀을 붓다 말고 실소한다. "글쎄- 한 백 밤?"

"칫, 언닌 완전 거짓말쟁이. 그 백 밤, 다섯 번도 더 써먹었잖아. 저번에 언니가 말해준 마지막 백 밤도 일주일 전에 지나갔다 뭐."

"세상에, 그 백 밤을 일일이 다 세고 있었던 거야? 으이그, 그 끈기로 공부 좀 해라. 공부 좀."
"피, 어차피 학교도 안 보내주면서 뭐."

"맨날 밤에 잠 안 자고 언니랑 놀면서 어떻게 학교를 다니니? 학교는 밤에 자고 낮에 공부해야 갈 수 있는 곳이야."

자매가 티격태격하는 것을 바라보던 남자는 문득 옛 전우를 떠올렸다.

"케르바도의 아들, 코 모둠."

갑작스러운 남자의 중얼거림에 느네와 노아는 깜짝 놀라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 아저씨 자는 줄 알았는데!"

"뭔가 생각난게 있으세요? 코 모둠이 누구죠?"

"중앙해(中央海) 남쪽 대륙에, 숲이 하늘을 덮는, 커다란 밀림 지역이 있지요. 덥고 습한 그 곳에 푸르고 단단한 피부를 가진 오크(Orc)들이 살고요. 코 모둠은 그 오크들 중에서도 가장 강맹하기로 이름난 족장, 케르바도의 피를 이어받은 전사였어요. 우리들처럼 가문이라는 개념이 없는 그들은, 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혹은 약속한 배열에 따라 몸에 고리를 끼움으로서 서로 혈족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풍습이 있는데, 코 모둠도 입술에 고리를 아홉 개나 끼웠었지요. 그만큼 입술이 두껍기도 했지만, 그의 이복 형제 아홉 명을 모두 죽이고 장자로서의 정당한 계승권을 이어받았던 날을 기리기 위해서였다고, 그런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럼 이제 전부 다 기억난 거예요?"

노아의 물음에 남자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단지 마지막 기억만이 문득 떠올랐어. 기나긴 방랑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던 마지막 전투의 나날들 말야. 그 최후의 싸움에, 잊지 못할 전우가 있었단다. 케르바도의 피를 이어 받은 열 명의 전사 중 가장 용감했고, 가장 지혜로웠던, 위대한 내 친구 코 모둠."

"이 곳에서 오크 족을 본 일은 없는데…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지요? 그 사람을 찾아가면 기억을 찾기가 쉽지 않을까요?"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사했습니다. 나와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에서."

"하늘을 덮는 거대한 밀림 지역의 외곽에, 남쪽 대륙을 절반으로 가르는, 구렁이를 닮은 강이 있고, 그 강 건너편에는 인간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는, 태초의 산맥과 구릉과 땅이 있답니다. 가장 깊은 땅 아래의 비밀까지 모두 알고 있는, 지혜롭고 재주 많은 난쟁이들이 그 곳에서 살고 있고. 그들은 태초의 대지가 감추어둔 비밀을 토대로, 강력한 무기들을 만들어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죠. 지혜로운만큼이나 욕심 많고 음험한 난쟁이들과 오크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고, 많은 전사들이 고용되어 그들과 승부를 벌였지만, 지고 말았어요. 남쪽 대륙의 패권을 판가름할만한 커다란 전쟁이었고, 목숨을 건 퇴각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최후의 최후까지 용감히 싸우다가……."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잡았다.

"내 기억 속에서 영원할 그를 위해 건배해야겠군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남자는 빠르게 술병을 비워나갔다. 벌써 그 주위에 뒹구는 술병들이 눈짐작으로는 세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폭음을 부추기는 그의 손목을, 노아가 덥썩 붙잡았다.

"이제 그만! 술에 잡아먹히면 아저씨, 나쁜 사람이에요!"

남자는 불콰한 얼굴로 노아를 바라보았다. 흥분과 취기로 물든 시선을 노아의 작은 손을 향해 떨구더니 자조적인 웃음을 짓곤 순순히 잔을 놓았다.

"그래, 이제 그만. 이렇게 계속 마시다가, 지금 여기 있는 나마저도 잃어버릴 것 같구나. 미안하지만, 얼음물 좀 가져다줄래?"

"내가 하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노아를 주저앉히며 느네가 주방으로 달려갔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감당하기 어려운 탓도 있었고, 남자가 노아 앞에서는 유달리 온순해지는 모습을 보이기에 그를 달래려는 생각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노아에게 말을 건네는 남자의 목소리에서는 취기가 많이 가셔 있었다.

"술에 잡아먹히면 나쁜 사람이라. 그것도 언니가 했던 말이니?"

"아뇨. 아빠. 돌아가시기 전에."

"돌아… 가셨다구?"

노아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얼음을 재운 컵에 물을 붓는 느네의 등 뒤로, 이 까페에 처음 찾아왔을 때 그의 온 몸을 감싸던, 육중한 침묵이 느껴졌다. 느네가 얼음물을 가지고 돌아오자 남자는 어색하게 더듬거렸다.

"미안합니다. 난 양친께서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가신 줄 알았는데."

느네는 잔잔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당신만큼은 아니겠지만, 우리도 이제 적어도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에는 어느 정도 익숙하거든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이, 이 곳에 항상 부모님의 흔적이 남겨져 있으니까요. 나도 노아도, 부모님과 사랑했던 시간이 충분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이 모자라서 외롭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오늘 밤의 여인들>이 있으니까. 항상 어머니 아버지의 온기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의외로군요."

"뭐가요?"

"죽음에 익숙한 것처럼 보여서요. 베개 대신 투구를 베고 자야 마음이 편해진다는 늙은 전사들도 쉽게 초연해지지 못하는 일인데."

느네는 빙그레 웃었다.

"글쎄요.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 당신들과 달리, 부모님과의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코 모둠뿐만 아니라,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의 곁을 떠났던 많은 전우들은 모두 삶의 무게와 비례할 정도로 죽음의 무게를 공평하게 나눠갖지 못했었다. 함께 보냈던 친숙한 추억을 되새기기도 전에, 죽음은 너무나 빨리 전우의 빈 자리에 이별을 던져주고 도망쳐버렸다. 소중한 것을 빼앗아버리는 운명의 손길이 지독히도 빠르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도 이별도, 심지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조차 너무 생소해져버린 게 아닐까, 하고 남자는 생각했다.

“문득, 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과 노아처럼, 훌륭한 딸들을 두신 분들이라면, 틀림없이 나와 같은 이에게도 호수처럼 편안한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남자의 중얼거림에, 느네는 깔루아 밀크 잔의 끄트머리를 어루만지며 잔잔하게 웃었다.

“자주 오시면 돼요. 어머니 아버진, 언제든 찾아오는 손님을 불편해하신 적이 한번도 없으시니까요. 언제든찾아오시고, 편안하게 쉬었다가 또 그렇게 가시면 된답니다. 여긴 항상 그렇게 지친 길손들을 위한 곳이니까요.”


느네의 말을 들은 남자는 처음으로 편안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는 목석 같은 투박함도, 누구든 찔러버릴 것 같은 사나운 살기도, 얼음장 같은 고독감도 보이지 않았다. 짧지만 깊은 소통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따뜻하고 신비한 온기가 그의 얼굴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 것은 또한 어느 틈에 서서히 찾아온, 아침 햇살이기도 했다.


“어머, 벌써 날이 밝았네.”


느네가 깜짝 놀라 창문을 바라보았다. 밤 기운이 섞였던 새벽의 끄트머리마저도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고,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낮에 깨고 밤에 자는 사람들의 활기가 서서히 차올랐다. 이제, 노아와 느네는 잠이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노아는 벌써부터 까페 한 구석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고양이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일어나야 할 때임을 알아차린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게도, 녹슨 갑옷이 많이 부드러워진 것 마냥, 소리가 시끄럽지 않았다. 한때 애용했던 무기를 싼 꾸러미를 들어올리다가 잠시 손을 멈추고 그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 녀석이 싫었습니다.”

“네? 뭐가요?”

“이 녀석 말입니다. 낡고 부서진 구닥다리 핼버드 자루. 녹슨 갑옷과 함께 나를 증거하는 유일한 것이지요.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 부정했던 도구가 내 과거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흔적이라니, 어이가 없고 무서웠어요. 이 것들에게 손을 댈때마다, 끊임없는 증오가 솟구쳤었죠. 상대의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고, 그 것을 토대로 의미 없는 목숨을 이어온  내 스스로에게 말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미워하고 부정할 수는 없었지요. 그 것이 무엇이 되었든, 나를 지탱해주는 삶의 일부였으니까.”


말을 마친 남자는 부서진 핼버드의 자루를 정성스럽게 싸서, 자신의 어깨에 걸쳐메었다.

“그 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까페, 오늘 밤의 여인들. 이 것에 바로 부모님의 삶과 애정이 녹아 있기에 외롭지 않다구요. 그렇다면 나 또한 혼자는 아니겠지요. 바로 여기에 살아온 흔적이 있으니까요. 이 것으로 내 삶을 지탱하고 열심히 살아봐야겠습니다. 예전의 나를 찾든, 그러지 못하든 간에.”

느네는 남자를 격려하듯 주먹을 가볍게 쥐어 들어올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힘들고 지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오늘 밤의 여인들>은 언제나 항상, 이 자리에 있으니까.”

남자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뚜벅뚜벅 걸어가 잠들어 있는 노아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뺨에 닿은 그의 손가락이 간지러운지 노아가 뒤척이며 음냐음냐 가볍게 잠꼬대를 한다. 남자는 그 귓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아까, 말해주지 못한 대답을 해주고 싶구나. 노아. 언니와 얘기하던 중에,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내 이름과 나이가 떠올랐거든.” 잠시 숨을 고른 뒤, 남자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죽음의 순간마저도 가장 용감했던 내 친구가 나에게 지어주었던 이름은, 테바이. 오크 고어(古語)로 <전사>라는 뜻이란다. 그리고 내 나이는, <가장 피가 붉고 뜨겁게 흐를 때>야.”


남자, 테바이는 조심스럽게 수염 가득한 얼굴을 노아에게서 떼내었다. 잠든 그녀의 얼굴은 부모님의 꿈을 꾸는 듯이 평온했다. 가끔 입술을 달싹이고 있는 모습이, 어쩌면 꿈 속에서 오늘 밤 만났던 신기한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부모님께 <누구>를 만났는지 얘기해 줄 순 있겠지. 테바이는 속으로 웃으면서 그대로 몸을 돌려 느네에게 작별을 고하고, 까페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노아의 언니이자 <오늘 밤의 여인들>의 두 번째 주인이며, 첫 번째 주인이었던 여(餘)와 여(與)의 맏딸인 느네는 빙긋이 웃으며 그 날 하루의 영업을 마쳤다. 파라핀 등불이 꺼진 까페에 조용히, 그녀가 그 날 하루 매상을 정리하는 연필 소리만이 사각사각 햇살에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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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습작을 두어 편 쓰고 있는 중입니다만,
병원에 2연속으로 장기 입원을 하는 중이라 진도가 영영 지지부진하네요.
(연말과 새해를 모두 병원에서 보냈습니다. 지금도 병원이구요 ㅠㅠ
무선 인터넷 감사합니다 ㅠㅠ)


이 글은 제가 전경으로 복무할 때,
그러니까 부대에 있을 때는
예쁜 의동생이 선물해준 G.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과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에 힘입어 남미 문학에 빠졌고,
덕분에 휴가 때에는 홍대의 레이디 피쉬와 마꼰도에서 죽치고 있을 때
썼던 글입니다.


그다지 흥미있거나 흡입력이 강한 글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악전고투하며 나름 만들어낸 보람이 있는 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특히 건강 조심하세요.
한 번 아프기 시작하니까 대책이 없네요 ㅎㄷㄷ


보탬.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자꾸 하다보니 재밌네요. 역시 병원 생활은 너무 심심해요 ㅎㅎ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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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赤魚 11.03.14 00:55 댓글 수정 삭제
    저도 마르케스를 정말 좋아합니다. 혹시 안 읽어보셨으면 이사벨 아엔데의 '영혼의 집'을 추천하고 싶어요. 여성버전의 마르케스 같아서 마르케스의 느낌과 비교하면서 읽으면 재미있어요. ^^ 빨리 쾌차하시기 바랍니다. 창작도 체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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