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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
1100의 처형일이 다가온다. 벌써 내일이다.
1100은 살인죄로 교도소에 들어왔다. 교도소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재작년에 칠순을 치렀다.
유명훈이 1100을 찾아간다. 막 교도관이 되었을 때=20년 전, 유명훈은 죄수를 번호로 부르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젊은 그는 기억력이 좋았다. 가슴에 번호표가 달린 죄수 하나하나 이름을 물어 전부 외웠다. 한두 해 그런 짓을 하다 기억력의 한계를 느껴 그만 뒀다. 유명훈은 이름 외는 것을 그만둔 뒤로 들어온 죄수들은 번호로 불렀지만 이미 이름을 외우고 있던 죄수에 한해서는 이름을 불렀다. 이제 유명훈이 이름으로 부르는 죄수는 몇 명 없다. 대부분의 죄수가 감옥을 나섰다.
1100의 독방 문을 두드린다. 1100은 20년 전부터 10년 넘게 독방에서 살고 싶다 말했다. 8년 전, 교도소장은 1100이 독방에 사는 것을 허락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서 1100은 크레파스로 벽에 그림을 그렸다. 검은 도시와 붉은 밤하늘과 노란 달을 그렸다. 그의 그림에서 노란 달은 혼자 빛나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유명훈은 1100에게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는다. 1100이 말한다.
「달이 보고 싶어요. 아무 것도 가리지 않는 탁 트인 하늘에 혼자 떠 있는 둥근 달이 보고 싶습니다.」
말씨가 공손하다. 유명훈이 사무실로 돌아간다. 열쇠를 들고 나온다. 동료 교도관=나탐이 그에게 열쇠는 왜 가져가느냐 묻는다. 유명훈은 1100에게 하늘을 보여주고 싶어 그런다고 답한다. 나탐은 유명훈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둔다. 딱히 나탐이 유명훈의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은 아니다. 나탐은 자신이 유명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안다. 유명훈은 수없이 비슷한 짓을 했고 그 때마다 나탐은 유명훈을 말리지 못했다. 나탐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1100의 방으로 향한다. 나탐은 유명훈을 뒤쫓을 생각이다. 여태껏 사고가 난 적은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나탐은 열린 문과 텅 빈 공간을 본다. 유명훈과 1100의 발소리를 듣는다. 주변은 극히 조용하고 발소리는 벽에 부딪쳐 통통댄다. 나탐이 발소리를 쫓는다. 소리가 멎은 것으로 둘이 건물을 나섰음을 안다.
나탐이 운동장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유명훈과 1100이 운동장 한복판에 선다. 1100이 달을 본다. 유명훈은 1100에게서 한 발짝 물러난 자리에 선다. 나탐은 멀찍이서 둘의 모습을 지켜본다. 1100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솟는다. 검은 기운은 하늘을 향해 직으로 올라간다. 천정(天頂)의 달을 향한다. 달에 부딪쳐 산란한다. 검은 기운이 하늘을 뒤덮은 순간, 유명훈이 1100의 몸에 손을 댄다. 1100이 사라진다. 유명훈이 쓰러진다. 검은 기운이 걷힌다. 나탐이 유명훈에게 달려간다.
유명훈은 죽었다. 1100은 탈옥했다. 사이렌이 울린다.

=여자
이른 점심, 여자 하나가 경찰서에 뛰어 들어온다. 붉게 염색한 머리칼을 길게 길렀다. 화장이 짙다. 귀고리와 목걸이에 다이아가 박혀있다. 주황색 코트에 피가 묻었다. 한 손에 총을 들었는데 총 쥔 손에도 핏자국이 있다. 여자가 말한다.
「경... 경찰 아저씨... 저... 저 좀 숨겨줘요.」
회의가 소집된다. 반장 급이 모인 회의로 매주 하는 것이다. 각 반이 쥐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고 큰일을 정한다. 검은 셔츠를 입은 서장은 회의장을 슥 둘러보더니 말없이 방을 나간다. 강력1반 반장=존 맥켄지가 회의를 주도한다. 맥켄지가 말한다.
「여자에 대해 밝혀진 거 있어?」
수사1반 반장=노통이 말한다.
「본인이 입을 안 열어. 그냥 숨겨달라고만 해. 자기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안 하더라. 그냥, 자기를 죽이러 오는 놈이 있다는 거야. 녀석이 누군지는 모르겠대. 처음 보는 인간이 갑자기 제 집에 들어와 칼질을 했다고 하더라. 자기는 총을 쐈는데 상대는 칼을 휘둘러 총알을 튕겨냈다는 거야. 머리칼을 박박 민 녀석이었다고 녀석은 짧은 칼로 인간을 베었다고  주변에 친구가 있었는데 전부 죽었을 거라고 해. 실제로 여자의 피와 여자 옷에 묻은 피는 혈액형이 달라. 아무튼, 여자는 친구가 죽는 동안 대로로 도망쳤어. 곧장 여기로 온 거야. 그렇다고 이야기해. 중요한 건, [그렇다고]지. 실제로 [그런지]는 모른다는 거야.
그 정도는 다들 상상할 수 있지?
여자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자기 집 주소를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 밖에도 자기의 신원이 나타날 만한 어떤 것도 이야기하지 않아. 하지만, 그 여자가 찬 귀고리하고 목걸이는 특수제작된 거야. 사진을 찍어놨어. 알만한 가게를 여기저기 뒤져보면 알 수 있겠지. 또, 여자가 입은 코트도 입이 떡 벌어지는 명품이고. 그 메이커가 못해도 우리 연봉 정도는 된다고 하더라. 우리 애들 중에 그런 쪽에 빠삭한 녀석이 있어서 알아냈는데, 뭐 아무튼 그렇데. 그런 걸 취급하는 가게는 이 근방에 얼마 없어. 여자의 사진을 가지고 돌아다녀보고. 일단 여자의 신원부터 파악해야겠다는 게 수사1반의 의견이다.」
수사2반 반장=케게로가 말한다.
「그래, 니 잘났다. 혼자 다 해쳐먹어라. 자식아.」
케게로가 노통에게 기분 나쁜 미소를 보이고 노통은 케게로를 노려본다. 강력3반 반장=유프가 말한다.
「살인사건이면 얼마 안 가 신고가 올 거다. 집에 친구가 있었다는 걸 보면, 그리고 그 옷차림을 보면 그 여자, 꽤 요란하게 살았던 모양이지. 그런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티가 안날 수가 없어. 이 동네가 무슨 대기업회장님들 동네여서 큼직큼직한 성이 몇 채씩 있는 것도 아니고 잘 살아봐야 마당 있는 단독주택 정도인데. 저런 옷을 입으려면 집안에서 등골이 휘었겠지. 신용불량자나 채무가 있는 집 쪽에서도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 또, 그... 머리를 박박 밀었다는 칼 든 놈도 신경 쓰이고...」
케게로가 말한다.
「애초에 여자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잖아? 정신병자라던가? 의사라도 불러야하는 거 아냐? 난 이 소리가 왜 안 나오는지 그게 제일 궁금하네?」
노통이 말한다.
「여자가 뻥을 치는 거다... 그럼, 팔에 묻은 피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총은? 실제로 총에서는 화약 냄새가 남아있었어.」
케게로가 말한다.
「그런데 총소리가 들렸다는 신고는 아직 접수되지 않았지. 애초에 여자가 총을 가지고 있던 것부터 수상해. 총기 등록번호는 확인했어?」
노통이 말한다.
「총을 안 내놔.」
케게로가 비죽 웃는다. 말한다.
「미친 년.」
노통이 말한다.
「야, 너 말조심해.」
맥켄지가 말한다.
「너희 둘. 그만. 케게로, 너가 생각하는 시나리오를 말해봐. 너는 여자가 왜 피투성이로 경찰서에 왔다고 생각하지? 어떤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 너는 뭘 하고 싶지? 말해봐. 구체적으로.」
케게로가 말한다.
「예, 예. 수사2반 반장, 케게로.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뭐, 분부하신대로.
저는 여자가 죽였을 거라고 봅니다. 그, 친구라는 녀석들을 말이에요. 아마, 친구는 아니었겠죠. 금융관계로 만나는 그런, 친구들이었을 거라고 봅니다. 솔직히 이 동네에 저런 옷 입고 다닐 만한 인간이 어디 있어요? 다들 그냥 죽지 못해 사는 거지. 카드 긁은 거예요. 돈 좀 빌려 쓰다가 뭐, 여러 가지 저런 옷도 좀 사보고 목걸이도 달아보고 한 거죠. 스포츠카도 타보고 잘난 척 좀 하다가 심판의 날이 온 거에요. 아주 그냥, 콰쾅! 하고 천지가 개벽하면서 지옥문이 열리고 천사와 악마가 집에 쳐들어와 난리브루스 생쇼를 떨게 된 거죠. 마침 여자의 집에는 총이 있었고, 탕탕! 아저씨 살려줘요! 우와악!」
케게로가 킬킬댄다. 노통은 이를 악물고 맥켄지는 다음 말을 재촉한다. 케게로가 말한다.
「이건 아까 유프가 말한 걸 구체적으로 말한 것뿐이야. 그런 스토리일 수도 있다는 거지. 나는 오히려 그쪽이 더 현실성이 있다고 봐. 최소한 머리를 박박 민, 총알을 칼로 쳐내는 살인머신이 이 동네에 나타났나는 것보다는 고려할만하다고 생각해.
여자의 신원을 밝히는 게 최우선이야. 이건, 노통이 했던 말의 반복이지. 하지만 나는 여자가 빚을 얼마나 지고 있었느냐에 더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사채 쪽을 뒤져야해. 제2금융권, 제3, 숫자로 쳐주지도 않는 어두운 놈들까지 샅샅이 뒤져서 여자의 채무사항을 확실히 해야 해. 어차피 우리 애들도 명품가게 뒤지는 것보다는 이쪽을 편안해하고. 이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수사2반의 의견이다.」
맥켄지가 말한다.
「인원은? 시간은?」
케게로가 말한다.
「우리 애들 전부 쓰면 일주일.」
맥켄지가 말한다.
「일주일... 1반은? 대강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아?」
노통이 말한다.
「최소 사흘. 아마도 나흘.」
맥켄지가 말한다.
「아직 신고는 되지 않았고?」
유프가 고개를 끄덕인다. 맥켄지가 말한다.
「그럼 우리는 여자가 입을 열 때까지, 신고가 들어올 때까지 관련된 수사를 하지 않는다. 이의 있어?」
마약반 반장=노정일이 말한다.
「여자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맥켄지가 말한다.
「... 말 꺼낸 놈이 알아서해.」
노정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맥켄지는 다른 사건에 대해 말한다. 반장들이 의견을 낸다. 노정일은 입 다물고 앉아 회의장을 떠도는 소리들을 듣는다. 기억하고 암기한다. 회의가 끝난다. 노정일이 여자를 찾아간다. 유치장 구석에 쭈그려 앉은 여자를 일으켜 세운다. 여자를 데리고 2층으로 간다. 2층 구석에 창고가 있다. 빗자루와 걸레가 있는 곳을 알려주며 여기서 지내라고 말한다. 여자가 고개를 꾸벅인다. 말한다.
「고맙습니다.」
노정일은 여자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본다. 마약 중독자라고 생각한다. 노정일은 부하들에게 여자에 대해 조사하라고 말한다. 식사시간에 밥을 들고 2층 창고로 간다. 여자는 깨끗이 치운 창고 구석에 앉아 벽을 보고 있다. 노정일은 여자에게 밥을 준다. 여자가 그릇을 비운다. 노정일은 여자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곁에 있다가 그릇을 들고 물러선다. 여자는 다시 노정일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여자는 젊다. 아름답다. 처음에는 취조실로 쓰였던 창고는 방음이 잘 되어있어 조용하다. 노정일은 욕정을 느낀다. 창고를 나선다. 나머지 일을 마치고 집에 간다. 총을 숨긴다. 여자가 가지고 있던 것이다. 노정일은 가로등 밑에서 총을 꺼낸다. 살핀다.
관리는 잘 돼있다. 총알이 두 발 들어있다. 충분하다. 잘 된 일이다.
이걸로 두 명은 죽일 수 있겠다고 노정일은 생각한다.

=정정당당
노인은 노정일의 아버지다. 20년 전, 아내를 잃었다. 당시 형사였던 노인은 아내를 죽인 자를 잡아 감옥에 넣었다. 사흘 전, 그가 탈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인은 노정일에게 총을 달라고 말했다. 노정일이 집에 들어온다. 노인은 벽에 기대앉아 책을 읽는다. 노정일이 노인 앞에 앉는다. 바른 자세로 앉아 노인에게 오늘 겪은 일을 말한다. 노인은 노정일이 이야기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듣는다. 노인이 말한다.
「그 여자의 생김새를 좀 더 자세히 말해봐라. 코가 길더냐?」
노정일이 말한다.
「예. 코가 길었습니다. 미간은 좁았습니다. 볼살은 두툼하지 않고 얇았습니다. 얼굴이 갸름했습니다. 안색이 흰 편입니다. 손가락이 살짝 굽어있었습니다. 오른 손등에 흉터가 있습니다. 어깨가 좁은 편입니다. 가슴은 크고 허리는 잘록합니다. 스물일곱, 여덟 쯤 되어 보입니다. 적어도 서른을 넘긴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노인이 말한다.
「연필과 종이를 다오.」
노정일이 연필과 공책을 건넨다. 노인이 공책에 그림을 그린다. 노정일에게 이런 얼굴이냐고 묻는다. 노정일은 틀린 부분을 지적한다. 노인이 그림을 고친다. 몽타주가 완성된다. 노인은 몽타주를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말한다.
「이 근처를 뒤져봐야 아무 소용없을 게다. 수도에서 온 계집이야. 너 중앙그룹이라는 조직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노정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말한다.
「조직폭력배들이 만든 의회라고 들었습니다. 몇 번 중앙그룹에 소속된 조직이 얽힌 사건을 접해보았습니다. 녀석들은 격이 다릅니다. 위험한 집단입니다.」
노인이 말한다.
「모든 회에는 우두머리가 있는 법이지. 나는 중앙그룹의 우두머리의 전화번호를 알아. 그러니까 XXX-XXX-XXXX였지. 녀석은, 믿기지 않지만 녀석은 내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어.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이 10년 전, 내가 은퇴했을 때야. 녀석은 여러 가지가 무섭다고 했지. 녀석은 여러 가지가 정확히 무엇인지 말하지는 않았어. 나는 녀석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지. 그 때, 녀석의 딸을 보았어. 그게 둘째였나, 첫째였나. 무서운 년을 보았지. 왜 그 년이 무섭다고 생각했는지 이유는 모르겠어. 그냥, 무서웠어. 쥐가 고양이를 무서워하듯 본능적인 것이었겠지. 이 그림은 그때 본 딸을 닮았어.」
노정일이 말한다.
「예.」
귀담아듣지 않는다. 노정일은 가방에서 총을 꺼내 노인에게 건넨다. 노인이 총을 쥔다. 벽에 겨눈다. 총구가 떨린다. 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노정일은 샤워를 하고 요와 이불을 편다. 잠든다. 노인은 노정일이 잠들고 한참 뒤까지 총을 벽에 겨눈다. 팔이 떨린다. 노인이 총을 내린다. 손바닥의 진물을 옷에 문질러 닦는다.
노정일이 출근한다. 노인은 총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선다. 후배를 만난다. 노인에게 일을 베웠고 노인 덕택에 공을 세웠고 높은 자리에 오른 자다. 후배는 노인에게 교도소장을 소개시켜주었다. 노인은 감사하다고 말한다. 덕분에 노인은 1100의 탈옥에 대한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후배는 노인을 걱정한다. 후배는 노인이 1100을 쫓으려한다 생각한다. 무의미한 짓이다. 1100은 이미 칠십이 넘었고 지금은 겨울이다. 1100은 돈이 없다. 1100은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다. 후배가 말한다.
「형, 괜찮아요?」
노인이 말한다.
「살인허가는?」
후배가 입을 다문다. 고개를 젓는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후배가 말한다.
「아직, 차 다 안 드셨잖아요.」
노인이 자리에 앉는다. 찻잔을 들고 단숨에 삼킨다. 일어선다. 후배가 말한다.
「죽지 마요.」
노인이 지갑에서 지폐를 꺼낸다. 후배가 말린다. 노인이 찻집을 나선다. 골목에 들어간다. 골목은 좁고 어둡고 위험하다. 마약에 찌든 자들이 몇몇 무리지어 앉아있다. 노인은 그들 중 하나에게 다가가 어떤 단어를 입에 담는다. 회색 모자를 깊이 눌러쓴,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딘가로 향한다. 노인이 그 뒤를 쫓는다. 남자가 붉은 문을 연다. 노인을 안에 들인다. 문을 닫는다. 노인이 제 앞에 펼쳐진 복도를 끝까지 간다. 파란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간다. 노란 옷을 입은 사내가 둥근 의자에 앉아있다. 사내가 말한다.
「무슨 일로 오셨나? 자네.」
노인이 말한다.
「이 총을 가볍게 만들어줘. 오늘 내로. 당장. 무슨 짓을 해도 좋아.」
사내가 말한다.
「3백.」
노인이 전화를 든다. 어딘가에 전화를 건다. 몇 마디 말한다. 사내에게 말한다.
「입금했어.」
사내가 말한다.
「확인했네.」
노인이 사내에게 총을 건넨다. 총을 받아든 사내가 총구를 제 눈에 댄다. 말한다.
「총알이 두 발, 들어있군.」
사내가 총을 열어 총알 하나를 꺼낸다. 총을 닫는다. 노인에게 총을 건넨다. 말한다.
「가능한 내에서 최대한 가볍게 만들었다.」
노인이 총을 받는다. 총을 든 손을 밑으로 내린다. 치켜든다. 벽을 겨눈다. 굉장히 빠르다. 정확하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내에게서 총알을 받는다. 골목을 나선다. 목욕탕에 간다. 몸을 씻는다. 집에 돌아와 잔다. 총은 머리맡에 둔 채다. 노인이 눈을 뜬다.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방 한복판에 방석을 두 장 둔다. 무릎 꿇고 앉는다. 총을 장전해서 오른손 밑에 둔다. 문이 열린다. 본래 잠겨있던 것이다. 백발의 남자가 방에 들어온다. 노인은 그의 주황색 죄수복, 가슴에 새겨진 1100이라는 글귀를 본다. 노인이 말한다.
「앉아.」
1100이 방석에 앉는다. 노인과는 다르게 양반다리다. 무릎에 양손을 올리고 1100이 말한다.
「20년 전, 나는 그 여자를 죽이지 않았어. 그녀가 죽은 건 사고였어. 모든 건 조작이야. 당신의 작품이었지. 당신은 없던 죄를 만들었어. 그 여자와 일 관계로 트러블이 있었을 뿐인 내게 죄를 뒤집어 씌었어. 나는 필사적으로 무죄를 주장했어. 하지만 당신은 너무나, 너무나 유능했어. 내가 고용한 변호인은 당신이 만들어낸 논리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어. 결국 난 사형선고를 받았지. 당신 때문에. 기억해?」
노인이 말한다.
「기억한다.」
1100이 말한다.
「사과할 생각은 있어?」
노인이 말한다.
「없다.」
1100이 말한다.
「왜 그랬던 거야? 왜 나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 덕택에 난 박살이 났어. 아내는 떠났고 자식 놈은 지 아버지 얼굴도 기억 못해. 난 20년이나 감옥에 있다가 이제야 사형된다는 소리를 들었어.」
노인이 말한다.
「사랑하는 여자가 죽었다. 그건 사고라 한다.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 태어났다는 것과 그 여자의 죽음은 비슷한 성질을 가졌다고 한다. 즉, 잘못한 인간이 없는 거라고 한다. 잘못한 인간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한다. 누군가는 악(惡)을 뒤집어쓰고 비난받아야 한다. 아니, 아니다. 말이 정확하지 않았다. 나는 잘못한 인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책임져야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누군가를 악(惡)의 화신으로 칭하고 비난하고 싶다. 그 누군가가 너가 된 것은 그저 우연이다. 너가 마침 손쉬운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너가 아니어야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너다.」
1100이 말한다.
「개소리 하지 마!」
노인이 말한다.
「화났나?」
1100이 말한다.
「미칠 지경이다.」
노인이 말한다.
「난 너가 밉다. 너는 내 아내를 죽인 살인자다. 너가 내 앞에 있다. 뻔뻔하게 유가족인 나에게 화를 내고 있다. 밉다. 증오스럽다. 나는 너를 죽이고 싶다.」
1100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솟는다. 노인이 한 손을 총으로 향한다. 검은 기운이 노인을 향한다. 노인이 총을 겨눈다.

=로맨스
출근길, 노정일은 서점에 들른다. 책 한 권을 산다. 고등학생 시절에 재밌게 읽었던 소설이다. 노정일은 분홍색 표지의 책을 가방에 담는다. 경찰서로 향한다.
시간은 오전 아홉시다. 부하에게 말한다.
「그 여자, 밥 줬어?」
부하가 고개를 젓는다. 노정일이 서를 나선다. 경찰서 맞은편 편의점에서 도시락 하나, 우유 하나를 산다. 검은 비닐봉투를 들고 자리로 돌아온다. 가방에 든 책을 봉투에 옮겨 담고 창고로 향한다. 여자는 창고 구석 벽에 기대 잠들어있다. 노정일은 여자 앞에 봉투를 두고 창고를 나선다. 부하가 말한다.
「연애하시려고요?」
노정일이 고개를 젓는다. 말한다.
「일 해.」
부하가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난다. 곧 서를 나선다. 어제 노정일이 명령한 것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노정일은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는다. 피곤하다. 어제, 아버지가 계속 총을 겨누는 통에 잠을 자지 못했다. 무서웠다. 아버지가 누군가를 당장이라도 죽일 것 같았다. 누군가가 자신이 될 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일 이유가 있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건 절대로 아니지만 그 것이 아버지의 살의가 자신을 향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거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어머니의 죽은 모습을 떠올린다. 어머니는 비오는 날 차에 치여 죽었다. 범인은 어머니가 일하던 회사와 거래하던 작은 회사의 사장이었다. 어머니 때문에 어떤 거래가 틀어졌다고 했다. 고작 그런 것이 살인의 이유라고 했다. 무엇 때문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도구가 수없이 만들어져 판매되는 세상이다. 노정일이 눈을 뜬다. 눈앞에 박스가 놓여있다. 박스를 뜯어보니 박스 안에는 A4용지가 가득하다. 긴급히 확인하라고 첫 페이지에 쓰여 있다. 경찰 상층부로부터 내려왔다는 뜻이 담긴 도장이 수없이 찍혀있는 보고서다. 노정일은 상자에서 보고서 뭉치를 꺼낸다. 펼친다. 보고서를 읽는다.
[중앙그룹의 총수=임정세가 죽었다.]
전화가 울린다. 번호를 확인한다. XXX-XXX-XXXX다. 등록된 적 없는 번호임에도 노정일은 번호가 낯익다. 전화를 받는다. 상대가 말한다.
「안녕하세요. A서 마약반 노정일 씨 맞죠?」
노정일이 말한다.
「그렇습니다만. 그쪽은 누구십니까?」
상대가 말한다.
「저는 타지온타라고 해요. 나이는 스물일곱이고 목소리를 들으면 아시겠지만 여자입니다. 제 언니가 거기 있다고 해서요. 혹시,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제 나이 또래의 여자 한 명이 그쪽 경찰서에 있지 않아요?」
듣지 않는다. 노정일이 말한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상대가 말한다.
「저는 중앙그룹의 총수입니다.」
노정일은 보고서를 들춘다. 중앙그룹의 총수였던 임정세에게는 세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었다. 세 명의 아들 중 첫째는 다른 조직과의 항쟁으로 숨졌고 나머지 두 명은 1년 전에 행방불명되었다. 첫째 딸은 지난주 이후로 행적이 묘연하다. 타지온타는 임정세의 둘 째 딸이다. 노정일이 말한다.
「용건이 뭡니까?」
타지온타가 말한다.
「언니, 거기 있죠?」
보고서를 넘긴다. 임정세는 양팔이 잘리고 양 눈에 대못이 박혀죽었다. 시체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노정일이 말한다.
「답할 수 없습니다.」
타지온타가 말한다.
「뭐, 좋아요. 답하지 않아도. 조만간 제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저를 도울지 돕지 않을지 대답해줘요.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건 좀 무리일 테니까. 아홉 시간 드릴게요. 오늘 밤 11시, 그쪽으로 전화할게요. 전화기 끄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기다려요. 어차피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만.」
전화가 끊긴다. 노정일은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낀다. 양손을 깍지 낀다.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댄다. 숨을 몰아쉰다. 힘겹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본다. 벌써 6시다. 노정일이 식당에 전화를 걸어 밥을 주문한다. 15분 뒤 머리를 파마한 아주머니가 큰 쟁반에 밥을 담아 가지고 온다. 노정일은 쟁반을 들고 창고로 향한다. 여자는 책을 읽고 있다. 노정일이 준 책이다. 꽤 두꺼운 책인데 거의 다 읽었다. 여자는 노정일에게 이 책, 형사님이 갖다 놓은 거냐고 묻는다. 노정일이 그렇다고 답한다. 여자가 말한다.
「취미가 좋네요.」
노정일이 쟁반을 박스 위에 놓는다. 숟가락을 든다. 쟁반 위의 밥은 두 공기다. 수저도 두 세트다. 여자가 쟁반을 사이에 두고 노정일과 마주보게 앉는다. 밥을 먹는다. 여자가 말한다.
「나 심심하지 말라고 갖다 놓은 거예요?」
노정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동작이 흐릿해서 여자는 알아보지 못한다. 여자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노정일에게 자기 말 무시하지 말라고 말한다. 다시 묻겠다고 한다. 질문을 반복한다. 노정일이 말한다.
「어.」
여자가 말한다.
「고마워요. 덕분에 재미있는 책을 읽었네요. 책 좋아해요?」
노정일이 말한다.
「별로.」
여자가 말한다.
「그런데 이런 책은 어떻게 알았어요?」
노정일이 말한다.
「친구가 좋아하던 책이었어. 책을 좋아하던 녀석이었는데 녀석은 나한테 항상 책을 읽으라고 재잘댔어. 녀석이 추천해준 수많은 책 중에서 내가 읽은 건 그거 한 권 뿐이야.」
여자가 말한다.
「그 친구 분 지금은 어떻게 지내요?」
노정일이 말한다.
「죽었어. 그 때 나이가 서른셋이었나? 대기업 다니던 놈이 마약에 손을 대더니 마누라랑 애 죽이고 자살해버렸어.」
여자가 입을 다문다. 노정일은 천천히 숟가락을 놀린다. 그릇을 비운다. 팔을 늘이고 잠시 가만히 있다. 여자가 그릇을 비운다. 노정일이 남은 음식을 한 그릇에 모은다. 그릇을 쌓아 정리하고 구석에 치운다. 여자는 조금 물러나 노정일을 지켜본다. 정돈을 마친 노정일이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본다. 노정일이 말한다.
「입 맞춰도 될까?」
여자가 말한다.
「좋아요.」
노정일이 여자와 입을 겹친다. 여자 속으로 노정일이 침범한다. 노정일의 양손이 여자의 얼굴에 닿아있다. 손이 단단하다. 노정일이 물러난다. 쟁반을 들고 창고를 나선다.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한다.
퇴근하기 전, 노정일이 창고에 들른다. 여자는 노정일에게 만화책을 사달라고 한다. 노정일이 경찰서를 나선다. 서점에 들러 만화책을 산다. 겉표지가 분홍색이다. 반짝거린다. 순정만화다. 현관 앞에 선다. 문고리를 잡은 순간, 문이 잠겨있지 않음을 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노인의 목소리가 아니다. 집에는 노인 혼자뿐이고 TV가 없다. 노정일은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노인과 1100의 대화를 전부 듣는다. 마지막 순간=총알이 발사되기 직전 노인이 말한다.
「넌, 교도관을 죽였다. 너는 살인자다.」
총소리가 울린다. 노정일이 현관을 열고 들어선다. 노인 앞에 죄수복을 입은 시체가 있다. 무릎 꿇은 노인은 한 손에 총을 쥐고 있다. 주머니에서 총알 하나를 꺼내 총에 채운다. 노정일에게 건네며 이제 자기는 이것이 필요 없다고 돌려주겠다고 말한다. 노정일이 총을 받은 순간, 흐른 피가 노정일의 신발바닥에 닿는다. 전화가 온다. 노정일이 시계를 본다. 11시다. 발신자 번호를 본다. XXX-XXX-XXXX다. 노정일이 전화를 받는다. 타지온타가 말한다.
「대답은?」
노정일이 창밖을 본다. 건너편 아파트 옥상에 누군가가 서있다. 쌍안경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
사흘이 지난다. 전 직원이 참석하는 큰 회식자리가 열린다. 최소의 인원만 경찰서에 남는다. 노정일이 경찰서에 남는다. 반장들 중에서 회식에 참석하지 않은 자는 노정일 한 명 뿐이다. 노정일이 가방에서 총을 꺼낸다. 분해해서 기름칠한다. 조립한다. 벽에 총을 겨눈다. 총을 허리춤에 넣는다. 가만히 있다. 부르르, 진동음이 들린다. 노정일이 전화를 받는다. 상대가 말한다.
「지금.」
노정일은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경찰서 뒷문으로 향한다. 문을 연다. 바람이 차다. 노정일은 부르르 떤다. 뒷문 앞에 남자가 서있다. 키가 작은 남자는 머리를 박박 밀었다. 갈색 코트를 입었다. 목이 닭목 같다. 비쩍 말라 우둘투둘하다. 노정일과 남자가 복도를 걷는다. 노정일은 남자를 창고 문 앞에 데려다놓는다. 노정일이 물러난다. 남자가 문고리를 잡는다. 비튼다. 문을 연다. 창고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여자의 목소리다. 노정일이 총을 꺼내 남자의 머리를 겨눈다. 남자의 손이 번쩍한다. 노정일의 손에서 총을 뺏는다. 남자는 총으로 노정일을 쏜다. 여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총알이 없다. 남자가 제 품에서 총을 꺼내 여자를 쏜다. 경찰서를 나선다.

=삶은 계란
노인이 병원에 간다. 노정일은 머리에 총을 맞고도 살았다. 수술이 끝나고 완전히 회복되었다. 여자는 죽었다. 노인이 삶은 계란 가득 든 바구니를 든다. 노정일의 병실에 닿는다. 노정일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본다. 눈이 어둡다. 노인은 노정일의 옆에 계단 든 바구니를 놓고 가만히 있다. 노정일이 몸을 일으킨다. 삶은 계란을 집는다. 노정일의 방은 일 인실이다. 주위에 아무도 없고 조용하다. 노정일이 계란 잡지 않은 손으로 노인을 잡는다. 입을 벌리게 한다. 계란을 노인의 입에 쑤신다. 노인이 컥컥댄다. 노정일은 바구니에 든 계란을 집어 노인의 입에 넣는다. 노인이 버둥댄다. 노정일은 멈추지 않는다.

=다시 탈옥
노정일의 가슴에 1101이라는 번호가 붙는다. 노정일은 사형수다. 보라색 죄수복 옷을 입은 남자가 노정일에게 다가온다. 마법을 가르친다. 마법을 베운 노정일이 벽에 그림을 그린다. 세계는 붉은 하늘, 검은 도시, 노란 달로 이뤄진다. 27년 뒤, 노정일이 탈옥한다. 타지온타를 쫓는다. 노정일이 길 한복판에 선다. 노정일의 몸에서 검은 것이 솟는다. 타지온타를 태운 자동차가 노정일을 향한다. 빠르다. 타지온타는 노정일을 치여 죽일 생각이다. 격렬하다. 노정일의 검은 것이 자동차 사이 틈새를 타고 타지온타에 닿는다. 타지온타가 죽는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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