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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군견의 편지

2011.01.15 23:5801.15

  반수 생활을 마치고 두 번째로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렇지 않은 때가 있겠냐마는 세상이란 역시 퍽 살기 힘든 동네였다. 막 시험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착각한 어린 녀석들은 벌써부터 술에 취해 주사나 부리고 연일 피시방 당구장 만화방을 돌아다니며 어떻게 소개팅 좀 해볼까 기웃거리고 있었다. 약삭빠른 놈들은 벌써부터 4년 뒤 닥쳐올 취업을 위해 더러는 고시 공부에 매진하고 더러는 스펙이며 학점에 목을 매기도 했다. 이른바 지성의 전당, 학문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에서도 낯간지러운 말이나마 진리를 탐구한다는 일은 딴 세상일이고, 그나마 진지한 말을 걸어오는 것은 젊은 청년의 양심 운운하는 운동권 선배들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조금이라도 진지한 이야기를 할 만한 곳은 그런 운동권 서클 밖에 없는 듯 했다(나중에 그 생각이 잘못이라는 걸 깨닫긴 했지만-서클은 혁명, 계급, 투쟁을 이야기하는 곳이지 그 외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곳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짝지어 놀러 다니고 도서관 학원을 전전할 적에 나는 이념서적들을 읽고 학생회 세미나에 참석하고 민중가요가 울리는 지하 주점에서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녀석을 만난 것은 거기에서였다.
  녀석은 술잔을 돌리고, 민중가요를 따라 부르고, 선배들의 무용담이 오가는 자리에서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자기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자세는 구부정했고, 머리는 제멋대로 구불대는데 안경은 미끄러뜨려 걸쳐 쓴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간 비웃는 듯한 표정만 띠고 있었다. 반복되는 이야기에 지겨워진 탓에, 나는 녀석의 옆자리로 옮겨가 통성명을 했다. 그러나 고향이며 출신 학교 같은 것을 주고받은 직후 다른 취한 고학번 선배가 술잔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늙은이들은 닥치고 새로 들어온 영계들이 자기소개 좀 해보라고 했다. 그 때 녀석이 한 자기 소개의 첫 마디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가 그렇게 강렬하게 기억에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녀석은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 따위 세상을 뒤집어엎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절망했습니다...” 하는 말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던 것이다. 선배들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지긴 했지만, 일제히 술잔을 돌리는 것으로 싸해진 분위기는 무마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때부터 그 녀석을 어느 정도 더 가깝게 느꼈다고 생각한다.
  녀석은 압도적으로 우울한 분위기를 뿜어댔고, 선배들이 보기에는 서클에 잘못 들인 반동분자였다. 녀석은 세미나 내내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다. 어느 날에는 계급 혁명이 일어나려면 학생-노동자 데모에 연대할 게 아니라, 계속 자본가 계급이 폭력적으로 억누르는 것을 묵인해서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력을 가지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해서 옥신각신하는 논쟁으로 끝나기도 했다. 등록금 투쟁 총회 자리에서 동맹 휴업이 제기되자, 1학년 주제에 벌떡 손들고 일어서서는 “기껏해야 2, 3일 정도 동맹 휴업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고 학교 측에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한다, 정말로 하려면 최소한 1달 정도는 해야지 의미 있지 않겠는가, 지금의 물렁한 안은 그저 무능한 학생회의 자위에 불과하다”하는 발언을 해서 고학번 선배들이 저놈 누구냐고 수군거리게 만든 일도 있다. 나는 그 지경으로 막 나가지는 않았지만 서클 선배들이 신입생들의 머리에 주입하려고 애쓰는 이념들이 공감하기 힘든 것들이 많았던 탓에 논쟁에서 같은 편에 설 때도 있었으나, 의견 충돌이 벌어졌던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녀석은 언제나 과격하고 극렬한 의견을 내밀면서도 비관적인 전망과 절망적인 예측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단합을 도모하고 분위기도 쇄신할 겸, 2박 3일 엠티 겸 세미나를 갔을 때 묵은 민박집에 큼직하고 북슬북슬한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선배들은 그 개를 보고 녀석과 닮았다면서 그 자리에서 녀석에게 개라는 별명을 지어 붙였다. 사실 그 북슬북슬한 털이 녀석의 구불거리는 머리털과 닮기는 했다. 하지만 듣기에 따라 모욕적일 수도 있는 별명을 지어 붙인 것은 세미나마다 닥치는 대로 물어뜯으며 날뛰는 녀석에 대한 적개심이 은연중에 묻어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그 별명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후의 어느 술자리에서 묻자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 온 거리에 가득히 개들이 돌아다니는데, 이놈들은 다 자기가 뭔가에 목줄 매여 사는 개인 줄 모르고 저가 사람인 줄로 착각하고들 산다고. 그래도 나는 최소한, 내가 질질 끌려 다니는 개라는 건 알고 있으니 날 개라고 부르지.” 녀석 다운 대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로 학년이 올라가며 학생회 변두리에서 오가게 되면서 벌어진 일들은 아무래도 청년의 양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클 내부의 파벌 싸움, 강경파의 재득세, 학생회 외부의 반동적인 세력과 학생회 간의 전면 충돌 같은 이런저런 지저분한 정치 싸움이 벌어졌다. 나는 그 당시에 상당히 깊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미련을 끊고 바로 입대해 버렸고, 2년여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뒤 얌전하게 공부만 하는 복학생이 되었다. 한편 녀석은 계속 학교에 다니다가-그 정도는 녀석에게 아무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내가 제대한 후에야 뒤늦게 입대했다. 그 전의 술자리에서, 늦은 나이에 입대하는 것을 걱정하는 얘기가 오가는 중 어쩌다 녀석에게 편지하겠다고 하자 녀석도 그렇다면 답장하겠다고 응수했다. 무심하기로 유명한 녀석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이례적이었기에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다그치자, 술기운에서였는지 아니면 입대 직전의 복잡한 심사에서였는지 알겠노라고 약속했다.
  녀석이 입대하고 나서 나는 약속대로 편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거의 잊어버릴 때 즈음해서야 녀석에게서 상당한 간격을 두고 편지가 날아왔다. 과연 녀석 같은 반항파가 어떻게 군 생활을 할 것인지 걱정했는데, 과연 군대 안에 있다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2년 동안 대략 6개월마다 보내온 네 통의 편지들을 이으니 녀석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대강 그려지는 것이 흥미롭기도 하고 특유의 생각의 일면을 엿볼 수 있거니와 녀석의 신랄하고 냉소적으로 찔러대는 글 솜씨도 볼 만 했다. 평소에 취미로 쓰는 글에서, 주요 인명이나 상세한 내용은 삭제하고 신상 정보가 드러날 수 있는 부분은 적당히 바꾸어 글의 소재로 삼아도 되겠냐고 물으니 별 망설임 없이 허락했다. 그래서 여기에 일부 편집한 편지들을 싣는다.

<첫 번째 편지>
  XX 보시오
  자, 국가의 개가 되어 쓰는 첫 번째 편지이다. 그쪽 사람들한테 한통씩 보낼 셈이었는데 이병 달고 나선 바빠서, 일병 달고 나선 게을러져서 흡사 풍화가 끝난 고운 백골가루가 된 마냥 편지를 쓰지 못하였다. 이제 야간 근무 쉬는 시간 중 할 것 없는 김에 이 편지를 쓰노라. 물론 남들 보는 앞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니 인적 없는 화장실 칸에 틀어박혀 긁적이고 있다. 차가운 변기 뚜껑을 체온으로 어중간히 덥혀 가면서, 주위에 벽을 치고 작은 방을 만들고 싶기라도 한 듯이 문을 걸어 잠그고 앉았다.
  ‘군대란 이런 곳이다’고 한마디로 정의하긴 힘든 일이라는 자네 말이 맞네. 부대마다 상황이 다르니 자네도 본견과 같은 군 생활을 보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굳이 그 인상을 묘사하라고 한다면, 한 가지 이야기로 설명을 대신하겠네. 여기 내무실의 세면장은 기묘한 규칙이 있다네. 처음에 신병으로 왔을 때 왜 짬 순으로 왼쪽 끝 세면대부터 써야 하는지는 몰랐지. 그저 문이 오른쪽에 있어서 선임들이 끝까지 들어가기 귀찮은 탓인가 보다 했네. 그런데 본격적으로 추위가 시작되고 나니 이 전통의 의미를 알았다네. 제일 끝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면 더운 물이 나오네. 그런데 오른쪽 수도꼭지를 틀면 왼쪽으로 가던 더운 물이 오른쪽으로 몰려서 왼쪽은 얼음물이 되는데 오른쪽은 김이 모락모락 난다네. 이제 그 오른쪽을 틀면 첫째는 얼음물, 둘째는 좀 뜨뜻하고 셋째가 뜨겁지. 정말 여기 수도를 시공한 녀석은 건물에 숨겨진 상징이 있다는 식의 음모론 소설들을 따라 하기라도 한 모양이네. 이 계급적 착취(?)의 상황을 이토록 뚜렷하게 드러내다니 말일세.
  허나 기세 좋게 말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네. 여기는 그래도 꽤나 사정이 좋은 동네라 구타도 거의 확실히 없고(아마 그런 것 같네) 독서실 및 PC방, 헬쓰장도 짬만 되면 이용할 수 있네. 계급적 차별과 불평등이 애매한 범주를 오락가락하고 있어서 확 분노를 터뜨려버릴 수도 없거든. 분명히 뭔가 있는데 신경을 슬슬 거스르면서도 깊숙이 찌르진 않아서 불편함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진 않네. 물론 본견은 이 상황이 ‘견딜 수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의 종국이 오는 것이 아닌가 싶어 더 거슬리네. 분노를 잃어버리고 개목걸이가 채워진 건 아닌지,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가던 번견이 뒷문에 먹을 것을 놓아두는 ‘친절한’ 손에 감동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실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아이들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나타난 열혈정의파 선생이, 그 한 사람만 내쫓으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악당보다 차라리 현실적이네. 정권에 야합한 주제에 ‘일그러진 영웅’에게 모든 원인을 돌리고 그 지배의 종식을 축하하는 주인공의 시점을 보고 있노라면 구토가 치민다. 그러나 본견이 거기에 있다면 이 한 마리 개는 어디에서 어떤 것을 할 것인가? 그 때 거울을 들여다보면 거울 속의 내가 먼저 하얗게 질려 비명을 지르면서 거울을 떨어뜨리고 말지도 모르겠네.
  일들은 몰아다 막내한테 다 떠넘기며 위로 갈수록 일은 적고 허용되는 건 많아지는 것은 대부분의 군인들이 겪는 일이니 굳이 새삼스러워 할 것은 없다. 그러나 굳이 개의 감상을 적노라면 군대란 이 개 같은 사회의 개 같은 사회화의 개 같은 마지막 관문이라서, 권력에 복종하는 법과 권력을 휘두르는 법을 교육해서 사회가 즉시 구매할 수 있는 상품들을(요즘은 재고가 쌓이는 것 같기도 하다만은) 내놓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권력에 복종하는 건 얼마나 더러우면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인지, 권력을 휘두르는 건 얼마나 즐겁고 달콤한 일인지를 가르친다고 할 수 있겠지. 제대한 모든 예비역들이 병장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 따위 국민들이 나라의 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눈앞은 캄캄해지고 손이 떨리고 땀이 돋고 속은 뒤틀리는데 헛구역질만 올라온다. 차라리 병역 의무를 진 남성들에게 참정권을 박탈하자! 하고 울부짖고 싶구나.
  일찍이 선임 놈들은 이렇게 말했었다. 한 달만 참으면 된다고, 그러면 후임이 와서 대신 일을 하고 할 만큼 한 너는 편해질 거라고. 이건 실제로 엄청나게 치명적인 유혹이다. ‘할 만큼 한’, ‘자격이 있는’, ‘대우받을 만 한’. 시민권을 얻은 노예가 과연 노예제의 종식을 부르짖을 수 있을까? 노예가 시민권을 얻는 일이 그보단 더 현실적이리라. 어슐러 르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란 단편을 읽어 본 적이 있는가? 이 오멜라스라는 도시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도시의 모든 주민들은 항상 행복하지만 그 대신 도시의 가장 깊숙한 지하실에 한 사람이 갇혀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곳이 더욱 개 같은 것은 ‘한 달만 지하실에서 참아라, 한 달 후엔 너 대신 딴 사람이 들어와서 마법을 유지시켜 줄 테니까’라는 속삭임이다. 지하실에 한 달간 갇혀 있다가 나온 사람은 자유로운 공기와 햇빛에 너무도 감동한 나머지 자기 대신 갇히게 되는 사람은 생각도 않는다. 조금쯤 신경써주면 생글생글 웃으면서 ‘너도 한 달만 참아라’의 대열에 동참하겠지. 본견은 지하실에서 나온 지 두 달 째이다. 본견 또한 똑같이 말하고 있는 걸까?
  그런데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꼬인 기수’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 지금 지하실에 들어있는 후임은 교대자가 오려면 1년 이상 갇혀 있어야 한다. TO가 다 차버려서 더 이상 신병이 유입되지 않는 탓이다. 마치 노후 보장제도와 비슷한 패러다임의 허점을 보는 기분이다. 젊어서 열심히 일한 당신, 늙어서는 햇살이 내리쬐는 남태평양의 섬에서 낚시질을! 이란 캐치프레이즈는 고령화가 진행될 때 무색해진다. 늙은이들을 먹여 살릴 젊은이들이 없는 것이다. 병장들을 위해 반짝반짝 쓸고 닦아줄 이병들이 없는 것이다. 이러매 체제는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런저런 둘러대는 말들을 고안해내고, 체제에서 이득을 보는 층들이 대변자가 된다. 자본가들이 자본의 충실한 손가락으로써 ‘섬세하게’ 노동자들을 ‘어루만져’ 불만을 ‘가라앉히려’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내 안에 자리 잡은 체제의 복사물, 자유를 누리고 기뻐하고 싶은 지하실 졸업자도 마찬가지다. : “막내가 하는 일이 사실 별로 많진 않잖아, 안 그래? 거기다 다 사람 사는 동네잖아, 서로 오래 부대끼고 살자면 안 떠넘기고 도와주고 괴상한 관습이니 제한(삼국시대 신라의 골품제를 보는 것 같은 부류들)들도 풀릴 거야. 어차피 나중에 다 보상이 있을 건데 뭘, 아무렴 선임들도 미안하니깐 편한 데로 빼주겠지. 거기다, 봐, 당사자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서 받아들이는데 엉뚱하게 네가 왜 그래.” 나태해진 나는, 선임이 된 나는, 짬이 차는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약해진 나는, 무디어진 나는, 견디는 법을 익히느라 등은 구부러지고 고개는 어깨 아래로 꺼진 나는 그 말에 번뇌하고 갈팡질팡한다. 공정한 체 하는 나는, 객관적인 체 하는 나는, 중재자로 나서서 타협점을 제시하고 중용을 택하길 종용하는 나는 내가 올챙이적 시절에 사로잡혀 있다고,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맞선임에 대한 개인적 원한을 체제 전체에 투영시키고 있다고 점잔빼며 지적한다.
  그러나 이 모든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단 한 가지 질문이 있다 : 네가 ‘어쩔 수 없이’ 이 체제를 인정한다고 치자. 그래서 네가 다시 막내가 되면, 지하실에 들어가면, 노동자가 되면 어쩔래? - 이 질문의 비정한 잔인성에, 악마 같은 예리함에 찬사를 보낸다. 눈물을 땀처럼 흘려가며 벽을 붙잡고 웃는다. 내재화된 체제도, 선임들도, 모두가 낯빛이 변해서 손을 들어 올리며 뒤로 주춤 물러나 ‘아니, 그 말이 아니고...’하고 당황하는 것이다. 그 꼴을 보고 어찌 웃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이 개 같은 꼴을 보고서! 이것이야말로 부동명왕의 웃음이로다. 분노하기 위해 살고 있는 자, 분노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에게 최상의 양식이구나! 이 질문에서야 본견은 심장 속의 기생충을 뽑아내어 짓이긴다, 피가 쏟아져 발을 적시는 것을 아랑곳 않고.
  하지만 실컷 웃는다 해도 그걸로 끝이 아니지, 산상 수훈에서 기독 성경이 끝나지 않는 것처럼. 남은 건 실천적인 문제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어떻게 이 체제를 뜯어고칠 수 있을까? 실상 본견의 길고 지루한 우울함은 여기서 시작된다. 주춤거리고 물러섰던 것도 잠시, 체제는 음흉하게 웃으며 제 본래 이빨을 드러내고 그래서? 그래서 네가 어쩔 건데? 하고 묻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왈가왈부는 차치하고, 이 조그마하고 어리친 개는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묻겠네 ― 자네는 민중을 믿을 수 있나? 자본가의 섬세한 어루만짐을 으르렁거리면서 물어뜯는 노동자의 존재를 믿는가? ‘더, 더 내놓아라. 일체의 전부를 내놓아라! 선심 쓰듯 베풀어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게 아니다. 네가 부당하게 차지한 전부를 다 내놓아라!’ 라는 외침이 들릴 수 있다고 믿나?
  불행한 일이다. 빌어먹을 일이다! 아직까지도 혁명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 이유이다 : ‘못 가진 자’란 실상은 ‘아직 못 가진 자’가 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 물론 그 전에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휘두르고 침을 뱉고 부르짖으며 아우성치겠지, 허나 일단 가지게 되면 무엇이 달라지랴? 그들의 증오며 분노란 기껏해야 질투에 지나지 않는다. 달래는 선물이 주어지면, 잔뜩 찌푸렸던 얼굴을 활짝 펴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기꺼이 머리를 조아리는구나! 분노는 겨우 수단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너희들의 분노는 그렇게 값싼 것이란 말이냐! 더 많은 어루만짐을 받아내기 위해 배를 드러내고 누워서 가르랑거리던 것에 불과하단 말이냐! 진짜 혁명을 바라는 자는, 저 무수한 젊은 혁명가며 개혁가들 사이에 몇이나 된단 말인가? 모두가 역성혁명만을 꿈꾸고 있는 것이겠지- 저 엄숙한 종묘가 불길에 휩싸여 우지끈 무너져 내리는 것은 저들에게 악몽이리라. 그렇게 되면 제 신주를 공손히 올려두고 절할 곳이 사라져 버릴 테니까.
  음울하게 말하자면, 가장 말단의 이병조차 묵묵히 참고 병장이 되기만을, 1년 동안 후임이 없을 막내조차 언젠가는 왕고참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게다. 이런 치들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체 어떤 종류의 ‘연대’가 가능할까. 어떻게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가능하단 말인가. 체제의 복사물은 절망을 충동질하고 회유한다. 이 몸의 전부를 내던져 투쟁하기엔 문득 그것이 사소해 보이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윗선임들을 달래어 위로부터의 개혁을 종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묵인하고 있다가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길 때 묵혀둔 분노를 끄집어내라는 말인가, 변절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서? 내재화된 체제는 절망을 먹고 자라서 지치지도 않고 꾸준히 유혹하는구나. 분노하지 않으면, 익숙해지면 편한 법이라고-. 그러나 분노하는 것 말고 무얼 할 수 있는가.
  체제는 개별 세포의 내부에 각인되어 있고, 다시 그 세포가 체제를 구성한다. 분노와 함께 해 줄 것은 아무도 없다. 주위는 온통 적뿐이다, 심지어 이처럼 결백한 척 떠드는 자신마저도. 이러매 어찌 살아있는 것을-세포와 체제 모두-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긴, 이 정도로 교활하고 간악하지 ‘못했던’ 것들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혁명 당해’ 사라졌겠지. 살아남은 것들은, 그런 종류의 미덕에서는 최선일 게다.
  나는 어째서 이리도 분개하고 있으며 개는 어째서 이리도 짖어대는가? 그건 체제 앞에서 스스로 무력함을 통감하는 동시에 자기 안에서 ‘저들이니 ‘그들’이니 ‘너희’로 부르던 것들을 발견하는 까닭이다. 너무도 자주 대면하는 까닭이다! 그것이 괴로워, 괴로워 견딜 수가 없구나. 모두가 이렇다는 걸 생각하면 차마 어디 눈을 둘 곳이 없다. 절망적인 분노의 급진화, 저기 저 너머의 낡아빠진 ‘청년의 양심’, 눈멀고 귀먹은 ‘시대의 변화’ 따위 밖에 기댈 곳이 없는 본견이 부끄럽고 원통하다. 이 모든 분노, 욕설, 저주, 꾸짖음은 또한 무력한 개에게로 오는 것이다. 다들 ‘나이를 먹어서’ ‘철이 들고’ ‘둥글둥글 원만해’지는 건 체제가 자신의 강대함과 그 상대의 무력함을 심장 속에 새겨 넣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본견이 손가락질하던 그 모든 것이 한 때는 나와 같았고, 본견 또한 곧 그처럼 되리라고 생각하면,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비통함이 솟구쳐 올라와 목구멍을 꽉 틀어막고 분노는 당황해서 갈 곳을 모른 채 심장 속에서 떠돈다. 어찌해야 하는가? 어찌해야 하느냐? 웃음 짓는 체제의 자그마한 작디작은 세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제 무력함과 분노에 몸을 떨고만 있다. 차마 눈물지을 수조차 없다. 이게 무슨 꼬락서니란 말이냐, 대체 이 꼴은.

2009. 1. 1
개는 밤에 압도당하지 않으려고 짖는다

<두 번째 편지>
  XX 에게
  두 번째 편지가 이토록 오랜 시간 만에 쓰인 것을 보면 아마도 둘 중 하나이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 첫째는 편지를 6개월 동안 썼다는 것, 둘째는 6개월간 그만큼 더 게을러졌다는 것. 이전 편지가 절망에 빠진 이병의 읊조림이고 이제의 것이 안온한 상병의 중얼댐이라면 아마도 후자에 가깝겠지만, 그 게으름 또한 6개월간 편지를 쓰는 과정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해 주게나.
  군대가 6개월 전에 비해 달라진 것이 크게 있을 리 없으니 달라졌다면 자신 밖에 없을 것이다. 일에 지치고 사회로 돌아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노동하는 대지의 아들 될 것이 두려우며 반역의 진전 없음과 공범 관계 속에 싹트는 밀접한 느낌 따위가 있으렷다. 허나 투쟁은 언제나 여로에 있고 죽어버린 반역에만 혁명이란 묘비를 세워 주는 것이니 본견은 아직 죽기에 길게 남았다. 영광된 변혁보단 지루한 밀고 당기기, 편싸움, 회유와 위협, 어중간한 타협, 정당성을 내세운(애당초 군대의 정당성이란!) 이데올로기 싸움뿐이네. 예비역이 된 후 무공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일 때에나 반역은 혁명으로 발효하겠지. 그래서 이 국가의 개는 오늘도 조국 수호와 영공 방위에 한 몸 바치고 있으니 자유 민주주의 만세고 국가 민족의 염병할 개지랄은 무한한 엿이나 먹으라고 하세.
  이곳은 실상은 일거리가 별로 없으며, 쓸데없이 자질구레한 업무를 시급 100원짜리 노동력에게 별 생각 없이 떠넘기는 자리다. 그래서 가끔은 사람이 엑셀 파일 및 메모장 수준의 노동을 하고 그도 아닐 때는 컴퓨터 모니터가 켜져 있는 수준의 노동-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잠들지 않는 것-이 되기도 하지. 그런데도 그 일이나마 조금이라도 덜 하려고 눈치보고 살살 달래고 윽박지른다.
  이곳의 기수는 왕고참에서 아래에서 두 번째 기수까지 매 기수에 한 두 명씩은 줄줄 있고 건너뛰어 바로 위와 3개월 차이나는 마지막 기수의 막내가 이제 대충 6개월 째 계급 구조의 맨 마지막에서 질질대고 있네. (본견은 아래에서 4번째 서열이다) 보직이 크게 네 가지로 나뉘어져서 하나는 간부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 처음부터 운 빨로 가는 자리라 모두가 노리지만 일단 정해지면 별 수 없다. 나머지 셋 가운데 본견의 보직은 최선임이 평등주의적이라 그래도 좀 나은 곳에 속하지만, 다른 한 쪽은 자잘한 일이 많은 것을 막내한테 다 떠넘기며, 마지막으로 행정은 보통 최고참들이 맡는다네.
  밖에서의 본견을 생각해 보면 대충 감은 올 것으로, 본견은 겨우 이까짓 것에서 권력과 불평등이 생기며 스무 명도 안 되는 곳에서 이까짓 것을 가지고 싸우는데도 이처럼 시간과 정력을 소모한다는데 무한한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 사람이란 권력을 쥐어줘 봐야 아는 일이고 기득권 보수층 욕할 것 없는 게 이 세상이 그나마 이 정도인 건 재화의 희소성 덕일 따름이라, 본견은 연대 따위가 불가능함을 진심으로 깨닫는 중이다. 군 안에서 무언가 바꿔 보려 했다면 이 말을 이해할 게다. 선임이고 동기고 후임이고 다 한 통속이며 가진 놈은 가진 것 때문에, 아직 못 가진 놈은 제가 가지게 될 것 때문에 현상 유지를 원한다. 그래, 평생 그 근성으로 돈에 목줄 매여 끌려 다니다 뒈져라! 하고 악담을 퍼부어 봐도 별수 없이 우울한 일이다.
  한번은 끽해야 2년 빨빨거리면서 짬 찾는 병사가 웃긴 20년 짬 주임이 막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변덕을 부려 우스꽝스러운 일이 생겼다. 숨겨진 욕심과 공범 관계며 껄끄러운 암묵적 약속이란 것들이 여지없이 깨져나갈 때 본견은 비틀린 즐거움을 느낀다. 그 균열의 어색함 앞에 아무도 말하지 못하고 심지어 보지 못한 척 할 때, 울고 싶은 만큼 웃고 싶어진다.
  앞서 막내가 6개월째 막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었다. 주임은 막내를 가엾이 여겨 간부들한테서 떨어져 있어 자유로운 보직으로 막내를 보내려 했다. 주임 입장에서야 자꾸 기어오르는 병사들을 한바탕 뒤흔들어 위력을 보여주는 일이 좋은 일이다. 이전에 그 보직이던 사람한테야 날벼락이지만. 그런데 반발은 도리어 그 아래에서 터져 나왔다. 아래에서 두 번째 서열에 있던, 이제 막내가 되게 생긴 사람이다. 둘 다 같은 보직으로 막내한테 떠넘기는 게 많은 곳이고 거기다 이 편한 보직 자리는 아예 근무장도 다르기 때문에 아예 자기 보직과 근무장에서 동시에 막내로 내려앉을 지경이 된 게다.
  처음 입대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한동안 선임=기득권층=나쁜 놈, 후임=못 가진 놈=착한 놈의 단순한 구조를 믿고 싶은 열망이 간절했었지만 곧 그게 헛소리인 것을 깨달았다. 계급적 위치가 그 사람을 규정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라면 그 말은 계급 차별에 대한 의분보다는 인간에 대한 중첩된 회의와 불신을 담아서, 인간이란 자신의 계급에 의해 정해지는 것에 불과하며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서 무슨 짓을 하는지 달라질 뿐이고 개인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없다고-그렇게 될 주체성조차 없다고-말해야 할 것이다.
  녀석은 그전까지 참 싹싹하고 시키는 대로 일 잘하고 곧잘 재롱도 부리고 다른 선임들과 함께 막내 갖고 노는데 열중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게 된 거지. '주임이 저렇게 말하니 막내를 보내야겠다'고 하는 행정 선임 앞에서 정색해서 따지고 들었다. 현재 최고참이 나가고 신병이 들어오려면 아직도 6개월은 남았는데, 막내가 6개월 일한 게 불쌍하다고 보내놓으면 자기는 그 전에 3개월 한 것에 더해서 총 9개월 막내일 할 게 아니냐, 둘 다 기준을 공평히 적용해야지 막내는 편한데 보내고 나는 이렇게 만드느냐. 그 바람에 온 내무실에 격론이 많았다. 본견은 그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은근슬쩍 논점을 옮겼고(세미나 때 날뛰면서 전체 논의를 산으로 끌고 가는 본견의 솜씨를 기억하라), 막내 생활의 개선으로 논의가 가다가 갈팡질팡 모두가 떨떠름하고 씁쓸해진 기분을 말을 더 못하고 자러갔다. 평화롭고 화기애애하던 내무실 분위기가 어색해진 걸 보니 참으로 유쾌하였다.
  굳이 버림받고 가엾은 녀석의 흉을 보거나 인간성을 문제 삼으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잠 안 오는 밤, 녀석은 흡연장으로 쓰는 건물 옆쪽에서 본견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OOO 상병님은 바꿀 수 있게 되면 한꺼번에 뒤엎어 버리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시면 이렇게 저처럼 또 피해 보는 사람이 아래에도 생기는 겁니다." 그래, 바로 이 말에 매우 중요한 함의가 있다. 분명 녀석은 억울할 것이다. 선임들한테 인정받았다고 생각했으나 버림받았고 나름 막내를 도와 고통을 분담했는데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본견이 보기에도 녀석은 열심히 노력했다. 불평등한 체제에서 불평등을 배분하려 애썼고 일을 떠넘기거나 피하지 않고 선임들이 빈둥거리는 부분까지 도맡아 했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왜 억울한 일이 생겼을까 -왜 억울하다고 느꼈을까.
  문제는 녀석이 암묵적인 약속을 너무 충실하게 잘 지켰다는데 있다.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억울한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열심히 했고, 인정받았다고 믿었고, 그래서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 놈의 '인정받음'은 자애로우신 선임님께서 자비심을 발동시켜야 베푸는 하사품이다. 녀석은 불평등한 관계에서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를 위해 녀석은 무얼 했던가? 피해보는 사람이 아래에도 생기는 이유는 불평등에 동의하고 권력에 종사함으로써 하위 계급도 반드시 무언가를 얻기 때문이다. 녀석이 불만을 가져야 하는 건 왜 제가 다시 막내가 되어야 합니까? 엘레, 엘레, 라마 사박타니? 가 아니었다. 그 이전에 먼저, 어째서 이런 불평등이 있는 겁니까? 하고 부르짖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불평등에 눈 감고 열심히 하면 인정해 주겠지, 그 이상으로 하면 그 이상을 보답 받겠지, 하고 믿어 버렸다. 그 대가가 바로 배신감과 억울함이었던 것이다.
  아아 가엾은 지고, 세상 사람들이여. 불평등에 대적하기 보다는 성의로 거래하려는 소박하고도 비열한 보통 사람이여. 당신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저들이 누구와 동의했겠는가? 앞 다투어 무너지는 연대, 토막토막 끊어지는 믿음, 새로운 약속과 타협, 공범관계. 당신들은 당신들이 착취당하게 하도록 동의하고 평온함을 얻었다. 그렇지 않으면 평온함을 깨뜨리겠다는 협박을 두려워한 나머지, 너무도 몸과 마음을 다해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 일 없다면 복종하는데 적응해서 행복하게 배를 두드리고 살겠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의 욕심은 한없고 가끔은 시장을 잘못 분석하고 원가도 폭등하는 걸. 그럴 때에나 총력 투쟁하고 점거 농성 하면서, 우리의 노동을 사 달라! 우리를 계속 착취해 달라! 하고 아우성치겠지.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되는가? 며칠 후 밤 녀석은 조용히 찾아와 말했다. 자신은 여기에 실망했으며, ㅇㅇㅇ상병님은 절 이해하시리라 믿기 때문에 말씀드리는데, 인사 쪽 빽을 써서 다른 데로 파견 나가려 한다, 여기선 더 이상 못 있겠다, 하고. 본견은 그가 아직도 현실에서 도망쳐 어딘가 자애롭게 자신의 복종을 받아줄 곳을 찾아간다는데 잠깐 우울했으나, 곧 이러한 환멸과 아픔이 그에게 불신과 회의를 가져다주리라 생각하고 그의 앞길을 축복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 변화를 더욱 싫어하는 늙은 감독관이 자기 심부름 역할인 편한 보직이 바뀌는 걸 버럭 역정 내어 주임의 얇은 계획은 파삭 무너져 버렸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내무실은 평온하고 녀석도 이곳에 남았다.
  아아, 국가 민족 만세, 자유 민주주의 만세, 시장 자본 만세, 온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 있으라. 눈 밝은 이, 혹은 편집적이고 불안정한 이들만이 그 평화의 미세한 균열을, 여러 차례 깨졌다가 다시 붙은 흔적을, 그리고 거기서 다시 시작될 파열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2009. 8. 15
먼지 같은 세상에 먼지로 된 비가 내려
먼지가 먼지를 쓸어내리네.

<세 번째 편지>
  XX 보시게
  날씨는 날로 추워지는 데 망할 신종 플루는 줄어들 기세는 안 보이고 멍청한 국방부는 외출 제한을 풀어줄 기미를 안 모이니 만나기는 요원한 일이렷다. 해서 안에 갇힌 동안 여러모로 구르며 책을 읽기도 하고 끄적거리기도 하는 즉, 이 편지 또한 그리 쓰인 것이니 만일 나갈 수 있었으면 쓰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본견의 나태해짐이 끝이 없는가 싶구나. 본디 쓰려고 마음먹을 제에는 막 신병이 들어오고 이에 구름처럼 새로운 논의가 일어 차세대에게 물려줄 전통-압제라고 읽어주게-을 논할 차였거늘 그로부터 꽤 지난 지 오래니 다시금 스스로를 탓하노라. 그러나 유려하고 매끄러운 문투로 압제의 영구적인 종식을 내려쓸 날이 오기 전에 느끼는 바 있어 적게 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니, 편지에 옮길 일이 많아지는 것을 기뻐해야할지 사실상 그러한 종식 따위가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는 것을 깨닫는데 씁쓸해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생각만 천 갈래 만 갈래 내닫는데 이루 말할 길 없는 심사를 한 잔 뜨거운 차를 마셔가면서 적는다.
  각설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많은 세미나에서 본견이 이른바 고통 받고 압제당하는 이들을 위해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기 전에 문득 돌이켜 과연 그들이 선한지, 단지 그들이 그 위치에 떨어졌을 뿐인지 주저하던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심리학은 문제를 개인으로 돌리고 사회학은 문제를 체제로 돌려 상극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본견이 보기로는 심리학은 문제를 인간 그 자체의 특성으로 돌리는 것이라 무리에서 나타나는 현상-체제-역시 아울러 설명하고 있네. 그러므로 재차 말하건대 "계급과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개인"이란 말은 계급에서 희망을 찾고 체제를 타파할 논의를 하기에 앞서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를 길게 던지고 있다. 열정적 어조로 ‘필연적인 역사의 법칙’ 같은 것을 논의하거나 젊은 양심의 의분으로 분연히 일어서는 일에는 도리어 독이 될 수도 있지. 왜냐하면 살아남는 체제는 구조는 유지하되 세포를 갈아 끼우는 것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악은 계승되고 누구든 단지 그 위치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가하거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네. 그러므로 계급 혁명은 일종의 외과 수술과 같은 무정함과 냉혹함을 필요로 하리라. 허나 그를 논하는 치들은 대개 타오르는 불같은 어조로 젊은 혈기를 토해내니 본견은 거기서 느껴지는 자기와 적 사이의 뚜렷한 경계에 실소하게 된다. 계급 앞에 민족도 국가도 없으나 그들에게 계급이란 또 다른 국경선에 불과한 것이리라.
  본견은 다음 달이면 벌써 병장을 달게 되나, 현재 병장은 여섯 기수째이고 막내 기수는 상병 2호봉이 되어가고 있다. 한데 의외로 전혀 기대치 않던 신병이 들어와 이제까지의 막내는 1년여의 군 생활 만에 겨우 막내 신세를 벗어나게 되었다. 물론 현 세대 이전에 병장 달도록 막내 생활 하던 사람도 있었고 본견은 그 사람이 제대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으나 1년이건 1년 반이건 무지막지한 일인 것은 틀림없다- 특히 어떤 사람은 단지 운이 좋아 1개월간의 막내생활 후 아직까지 최고참으로 권력을 전횡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이런 불합리가 "군 생활은 운이다." 라는 한마디로 설명되고 죄다 그 설명에 수긍하는 것을 보면 이토록 정신 나간 놈들이 있는가 싶지만(그 말을 하는 놈이나 끄떡거리는 놈이나) 이런 미친 체계가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으로 보아 봉건제라든가 노예제도 "인생사는 운이다." 한 마디로 삐걱삐걱 유지되었으리라. 여튼 이렇게 뜻밖의 신병을 받아 막내는 뭇 선임들의 축복을 받으며 드디어 선임의 대열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본디 성격이 온순한 편에다 1년 만에 받는 후임이 얼마나 귀하게 느껴졌을지 헤아려보면 그가 신병에게 어떻게 대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하게 마무리 될 터이면 본견이 굳이 연필을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선량한 보통 사람'이 당하게 되는 불행이 있는데 조금쯤 약게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신병은 앞으로 남은 막내 생활이 엄두가 안 났던지 무릎이 아프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으로 전입 가 버렸네. 물론 정말 무릎이 아팠을 수도 있고 본견이 보기에는 퍽 완화된 분위기도 폭력적으로 느껴졌을 수는 있으나 일단 이런 이야기는 논외로 하지. 불행히도 막내는 도로 돌아왔고 그는 선임들의 동정어린 시선 속에-그 동정이 얼마나 욕지기나는 것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으련다― "가는 말이 고우면 사람을 얕본다"라는 명언을 되새기며 이를 득득 갈았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 다시 그는 신병을 받게 되었다. 선임들의 축복도 재차 받으며. 그리고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묘해진다.
  새로 온 신병은 알아서 기는 타입은 아닌 소위 "신세대 장병"이었다. 본견도 다음 세대의 왕고참에게 거는 기대가 큰지라 데리고 이야기해 본 일이 있는데, 본견이 입 밖에 내는 화제를 제 마음대로 바꾸는 것을 보고 신병영문화 창조에 앞서서 요즘의 대화 예절은 발화자가 택한 주제와는 상관없이 화젯거리를 이리저리 굴리는 것인가 싶어 낭패스러운 적이 있다. 이런 성격인지라 계급과 기수가 까마득히 차이나는 선임들이 보기에 건방진 것이 도를 넘어 보였다. 그러면 당장 이제까지의 막내와 관계는 어떠한지 궁금할 것이다. 놀랍게도 그 둘의 관계는 지나칠 정도로 적대적이었다. 녀석은 신병의 사소한 구석구석을 마음에 안 들어 했고, 신병은 녀석에게 경멸적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공론이 오가기로는 신병의 학벌이 녀석에 비해 월등하여 열등감을 줄 가능성이 있고, 여태까지 녀석을 막내로 대하던 분위기와 녀석이 막내로 행동하던 태도가 막내 자리는 넘어갔는데도 쉽게 변하지 않아 신병에게 맞선임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으리라는 정도였네. 허나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녀석이 신병을 대할 때 드러나는 태도가 너무 지독하고 가혹했다. 본견이 그 문제를 주시하는 것은 그 징후가 기묘해서였고, 다른 선임들은 설령 사고라도 날까 싶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러던 차에 본격적으로 사건이 발생한 것은 대강 일주일 전의 일이라네- 높으신 분들의 공관에서 항시 대기하며 잡무를 맡는 공관병을 뽑게 된 것이다. 공관병은 정말로 드물게 좋은 보직 가운데 하나다. 핸드폰도 쓸 수 있고 일이 없으면 자유로우며 선후임도 없이 장군님, 사모님, 자제님만 모시면 된다. 아마 이런 자리가 나면 누구든 입맛이 당길 것이라 생각되네, 특히 기수가 낮은 사람일수록 말이네. 그 와중에 신병이 그 모집에 지원했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확 퍼졌다. 주임이 대충 봐서 가면 오래 있을 만한 신병을 집어넣은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평소부터 그를 괘씸하게 여기고 있던 행정 선임들의 입을 통해 ‘자기가 가고 싶어서 썼다’는 식으로 흘러나오자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되었다.
  다들 다시 막내가 될 위기에 처한 녀석이 안 됐다고 수군거리던 차에, 쉬는 시간에 한 선임이 본견에게 말했다. 거 참 자기는 고양이 정도만 만들려고 했는데 호랑이가 됐다고. 본견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묻자 얘기인즉 이러했네. 자기가 평소에 녀석이 물렁한 걸 유심히 봐가지고, 후임 받고 나면 나름 군기 잡을 수 있게 몇 가지 수법을 알려줬다고 했다. 예를 들면 후임 놈이 좀 쪼개고 있다 싶으면 슬쩍 가서 너 이 새끼 이따 두고 보라고 한 마디 하고 간다. 그러면 후임은 근무 내내 이후의 벼락을 생각하며 쫄지만 정작 자기는 가서 자 버리고, 불안에 차 어쩔 줄 모르다 잠든 후임이 다음날 일어나면 너는 분명히 선임이 말했는데 자냐, 이 새끼 싸가지가 글러먹었다 하는 식으로 이어지는 수법이다.(본견도 이 수법은 당해본지라 그 악랄함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녀석이 신병이 지원 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전화를 들고 신병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짜고짜 전화를 걸더니 너 이따 하번하고 두고 보자 하고 끊더라, 애가 요즘 너무 독살스러워져서 큰일이다, 호랑이가 됐으니 이제는  발톱을 잘라 놓을 때가 되었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들었네.
  그래서 본견이 그것 참 일이 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 다음날이 신병의 휴가 날이었고 (신종플루라도 가족들 걱정 때문에 신병 첫 휴가는 자르지 않는다네) 나가기 전날 밤 녀석이 신병을 불러내는 걸 보았지. 몇 마디 짤막하게 하고 돌아오는 걸 채근하여 무슨 소리를 들었나 캐니 녀석이 신병에게 휴가 나갔다 오거든 각오하라고, 지옥을 보여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본견이 어이가 없었던 것은 본견도 1여 년 전 휴가를 나가기 직전에 그와 똑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점이네. 본견은 그 때 무수히 다짐했던 대로, 단순히 잘해 주는데 그치지 않고 후임들 간에 군기 잡지 못하게 하며 새로 신병이 들어올 때마다 각별히 신경 써서 그 같은 위협과 압제들이 아래로 더 이어지지 못하게 막았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도 없는 녀석이 이제 와서 1년 전의 그 말, 휴가 내내 불안하게 만들었던 그 말을 제가 스스로 생각해내서 제 후임을 위협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네. 역사란 반복되고 이런 것이 본성적이어서 계승되지 않아도 자생해 나가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후의 일은 진행형일세― 본견과 어느 정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위 아래로 지켜보는 눈이 열 개가 넘으니 실제로 무슨 일을 저지를 수는 없고, 본견은 녀석을 불러내서 달래고 어르고 하고 있다네. 아직 신병이 휴가에서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그 후의 일은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 하지만 신병의 앞날을 걱정하기에 앞서, 본견은 대체 무엇이 녀석을 그렇게 만들었나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녀석은 성격이 온순하고 말이 적으며, 고등학교에서라면 으레 반마다 있기 마련인 조용하고 잘 어울리지 않은 채 자기 취미에만 골몰하는 얌전이에 가깝다. 어째서 아랫사람에게 그렇게 괴물 같이 되었을까? 아랫기수끼리 일종의 연대를 형성하여 다음 세대로 넘기는 압제를 최소화하려는 본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런 것이 나타나는 것은 왜일까?
  본견은 녀석이 특별히 잔인하거나 폭력적이라 생각하지는 않네. 녀석도 대체 신병의 무슨 점이 그렇게 싫냐고 물으면 “모르겠습니다. 그냥 다 짜증나고,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하는 대답이 다였다. 본견은 아마 이러한 이유가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 녀석은 오랫동안 막내 생활을 하면서 부당한 처우를 매우 많이 받았다. 일 외에도 녀석은 일종의 웃음거리, 어릿광대 같은 역할도 맡고 있었다. 녀석의 웃음소리나 반응은 점점 과장되었으며 자꾸 우스꽝스러운 취급을 당했다. 본견은 몇 번씩이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스스로를 존중하라고 말하면서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윗사람들은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장난감이 필요했고 본견은 기껏해야 아래에서 네 번째 기수에 불과했다. 근무조 전체에 형성된 분위기는 녀석에게 폭력이라고 하기는 힘든 폭력을 무자비하게 가했다-친해지기 위해서 녀석은 그런 역할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 대신 자신을 인격적으로도 가장 왜소한 난쟁이로 만들고 자신의 자존감을 갈기갈기 찢어 발겼다. 그는 감히 윗사람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었다. 분노는 참고 억누르고 언제나 놀림감이 되는 배역을 자임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단지 밑으로, 아래로 깊숙이 억압되었을 뿐이며 해방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녀석 안의 분노는 건방진 후임이라는 먹잇감을 찾아낸 것이다. 더군다나 윗선임들도 신병을 공격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고, 처음 받았다 가 버린 후임처럼 빠져나가려다 실패했다는 사건은 좋은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녀석은 자기 안에 여태까지 억눌려 온 것을 마구 토해냈으며 누구에게서 자신의 분노가 비롯됐는지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분노를 남에게 떠넘겼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별 문제 없어 보이는 평화로운 체제의 뒷면을 투영하고 있었다.
  녀석은 분명히 피해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해자가 될 권리는 없다.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악당' 따위는 없다. 자기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라는 변명으로 가해자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남에게 고통 주는 것이 자신을 치유해주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생각하도 않고서. 하지만 그렇다고 녀석을 악하다고 해야 할까? 체제 전체를 통틀어 계속 떠넘기고 떠넘겨 온 것들이 그의 대에 쌓여서 괴물이 된 것 뿐인데. 물론 그가 선택했어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진정 자유로운 의지를 지니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을 결정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은 과연 분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떠넘기지 않고,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을 자기가 삼켜 없앨 수 있을까?
  이런 광경들을 보면서 본견은 종종 권위주의 정부 시절 젊은 운동권들을 군대에 쳐 넣은 것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생각하곤 하네. 얼마나 많은 뜨거운 열정들이 자신들이 이제껏 상대하려고 하던 것의 실체를, 자신들이 함께 하려던 것의 실체를, 자신들이 구해 내려던 것의 실체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실체를 맞닥뜨렸는지 생각해 보면 본견의 심장마저 싸늘해지는 듯하다.
  이를 악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 단순히 보여서 그러지는 않겠다. 그러나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도처에 있다네, 그것도 너무도 많이. 그것들은 너무도 많이 널려 있어서, 내가 그 발끝에-내 발 끝에 그것이 아니라- 채일 정도로 많다네. 이러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본견은 이 질문 앞에 오랜 생각을, 질문을 잊을 정도로 오랜 생각에 잠기지만 쉬이 입을 열지는 못하겠네.

2009. 11. 22
Eris palpans in meridie.너희는 대낮에도 더듬으리라<신명기 28:29>

<네 번째 편지>
  XX 전
  친우여, 혁명이다! 혁명이다! 드디어 이 모든 것을 종식할 시기가 왔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비처럼 덧없어 보이던 투쟁이 이제 결실을 맺을 때가 되었다. 적의 피로 물들인 붉은 깃발 아래, 인터내셔널의 노래를 부르며 바리케이드여, 전진, 또 전진하자! 일어서라, 노동자여, 그대들이 잃을 것은 오직 압제의 쇠사슬뿐이고, 얻을 것은 세상 전부이다! - 그러나, 과연 정말 그럴까?
  기나긴 병장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고, 아마 이 편지를 받고 나서 머잖아 말년 휴가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꾸미던 일의 정세가 급격히 변하니, 아무리 미리부터 무엇이든 알고 있는 듯이 태연자약한 척을 썩 잘 하는 본견도 크게 낭패하여 마음을 추스릴 길은 바이없고 누워서도 이리 돌아눕고 저리 몸을 젖히고 하릴없이 생각만 무궁히 만변하는구나. 일찍이 세미나 때마다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나서던 주제에 새삼 무엇을 놀라워하는가 쓴웃음이 절로 이는 한편, 체제, 유령, 살아 있는 것, 고통을 불러오는 것, 악, 권력, 본성, 살아 있던 적이 없되 마치 산 것인 듯 배회하는 그 거대한 것 앞에서 한낱 개의 헤아림이나 굳게 먹은 마음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
  아마도 군 안에서 마지막으로 쓰게 될 것이 분명한 편지가 이처럼 시무룩하고 침울한 것은 씁쓸한 일이나, 이 또한 뒤늦게 술자리에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렁저렁 늘어놓을 이야깃거리는 될 것이다. 그러니 자네는 이 편지를 읽거든 다른 말은 말고 다만 “천하의 개가 이렇듯 크게 낙심한 꼴이라니! 사람이 아닌 개라 해도 결국에는 별 수 없는 노릇이구나!”하고 크게 비웃어주길 바랄 뿐이라네.
  대체 전생에 무슨 공덕을 그리 높이 쌓아올렸는지 그토록 편안한 군 생활을 하고 간-그러나 아마 군대 안에서 그 복을 도로 다 깎아 먹은 듯 하니 세상은 공평한 곳이네- 최고참이 전역하고 나면서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세력구도에도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네. 이전까지 전체 12기수 가운데, 고참과 후임의 선은 내가 병장을 달 때까지 위에서 다섯 번째 기수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고참들부터 차례차례 빠져나가기 시작하며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힘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그렇게 먼저 빠져나가는 놈들이야말로 가장 온전히 보내주고 싶지 않은 놈들이었지만, 개인적인 원한은 접어두기로 하세.
  이제 하나 둘씩 신병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래도 아직 고참이라고 남아 있던 녀석들이 대략 상병에서 병장인 아랫기수들을 모아놓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네. 남아 있는 기간이 더 긴 우리가 편하려면 여태까지 흐트러진 분위기를 다시 바짝 졸라 매서 군기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입버릇처럼 ‘나는 이곳과는 관계없으며 내가 할 일도 아니다’ 운운 하며 손끝 하나 까딱 않던 놈들이 이제 와서 우리보고 신병을 닦달하란 말인가? 일찍이 최고참 놈들은, 뒤로는 맞선임들을 부려 사정없이 괴롭히게 사주하고 정작 저들은 앞에선 자애롭게 감싸는 척 하여 자기들 손은 더럽히지 않은 채 아랫기수 사이를 갈가리 찢어놓아 뭉치지 못한 채 어떻게든 제일 위 선임들 마음에만 들기를 바라게 만들어 손쉽게 아랫기수를 부려 왔다. 그래서 본견이 후임을 받은 뒤 쓸데없는 군기 잡는 것을 거부했을 때 밤 늦게 끌려 나가 몇 차례나 ‘네놈이 착한 척 하면 우리가 나쁜 놈 되란 거냐’ 소리를 들은 바 있다-그 말인즉 내가 나쁜 척을 해야 자신들이 착한 놈이 된다는 소리겠지. 본견은 후임들에게 이제껏 내가 너희들을 건드린 적은 전혀 없지만 제 후임에게 군기를 잡으려는 놈은 가만두지 않으리라 일러두고, 위에서 떨어지는 욕은 어쩌건 내 선에서 막으면서 윗선의 압박을 버틴 덕에 그나마 본견 아래 기수들끼리는 위쪽 기수들에 비기면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전역이 얼마 남아 제 몸 건사해서 무사히 빠져나갈 생각에 골몰해도 모자랄 놈들이 이따위 수작을 부리고 있으니 네네 하며 넘어갈 리 없는 일이지.
  이래서 몇 가지 사건을 거쳐 주도권이 이쪽으로 넘어왔다네. 몇 남지 않은 선임 놈들을 밀어 붙여 무력화시키고, 그 동안 압제 받아왔던 아랫기수들이 드디어 힘을 갖게 되었네. 물론 그것만으로는 누구든 제대 한 달 전에 최고참이 되어 누릴 것을 좀 더 빨리 빼앗아 온 것에 지나지 않네. 본견이 그렇게 아랫기수들을 모아 일종의 공공 통치기간을 만든 것은 이전의 악습들을 혁파하고 나름 병사들 간의 신병영문화를 창조하려는 것일세. 뭐 간부들도 사고 터져서 저들 승진길이 가물거릴 때마다 아우성치면서 신병영문화를 운운하긴 한다만, 본견이 꾀한 것은 지극히 간단한 일이네. 이곳에 병사로 온 사람 중 충심으로 이 한 몸 나라와 민족에 바치러 온 부류는 없는 터라, 피차 2년을 버텨야 하면 간부들이 닦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병사들끼리는 가급적 서로 괴롭히지 말고 떠넘기지 말고 해야 할 일만 적당히 나눠서 해치워버린 다음 그 다음은 각자 알아서 하자는 수준의 것이다. 이런 생각을 두고 굳이 신병영이니 혁파니 개혁이니 하는 말을 갖다 붙이는 일도 우스운 일일세.
  그래서 그 전부터 있어온 사소한 하나하나를 붙들고 이건 하지 말고 이건 같이 하자 이건 나눠서 하자 하는 일은 남들이 보기엔 퍽 새삼스럽고 치졸하고 체신 머리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길들여진 우리에게 체제는 지극히 평범하기 때문이며, 별것 아닌 부당함,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인내를 친절하게 가리켜 보이는 부당함, 다름 아닌 우리에 의해서 행해지는 부당함, 그 모든 부당함이 우리 개자식들을 을러대고 달래고 길들여 결국에는 굴복시켜 목줄을 매다는 까닭이네. ‘누구나 받아들이는 것을 왜 너는 인정할 수 없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는 너무도 충실하게 길들여진 나머지 아마도 간부들이 4시에 사역을 시키거든 3시부터 기다려지기 시작할지도 모르지. 그 ‘당연함’에 맞서려면 한 마리 개는 우스꽝스럽고 치사하고 어이 없이 나뒹굴고 짖어대고 물어뜯어야 한다네. 선임놈들은 ‘겨우 그 사소한 것을 가지고, 그 정도도 하지 못하느냐’라고 말했지만, 그래서 사소한 것들이 자신들에게 닥쳐들면 그 때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겨우 그 사소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래서 힘을 얻자마자 본견과 뜻을 가장 같이 하는 맞후임 분대장의 도움을 받아 이런 저런 실험들을 해 가며, 계속 분배를 다르게도 해 보고, 사역은 공평하게 나누고, 청소구역 전체를 다시 배분하고, 이런 저런 잡다한 금기 사항들은 죄다 없애고, 이병이든 일병이든 자기 일만 다 해놓는다면 아무 거리낌이 없도록 만들려고 애썼네. 대저 무언가를 새로 바꾸려면 계속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는지라, 조직 개선 사례 보고서를 쓸 것도 아니고 그 구구한 과정을 다 글로 옮길 이유는 없을 듯하다. 혁파든 개혁이든 혁명이든 결국에는 실무란 영광된 과업이라기보다는 자꾸 반복되고 지루하고 짜증을 유발하는 일이다.
  하지만 역시 사람이란 힘을 쥐어 줘 보아야 비로소 그 본성을 아는 동물이고, 더군다나 아무리 본견이 무수한 노력을 들여 아랫기수끼리 연합 전선을 형성했다고 한들, 같은 이념으로 모인 세미나 자리에서도 매번 얼마나 격론이 벌어지는지 생각해보면 이렇게 모인 사람들의 생각이 결코 같은 방향으로 나갈 리 없다. 윗선임들의 압제 하에 떠넘긴 일들이 쌓일 때에는 같이 고생하는 사람들끼리 이상에 어느 정도 동조하다가도, 더 이상 압제가 없고 이제 자신이 남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을 때에는 각기 딴 마음을 먹고 제 갈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네. 그래서 본견이 이런 저런 것들을 바꾸는 시도에 골몰한 동안 남아있는 병장들 간에 성향에 따라 서서히 파벌이 생기게 되었네.
  의견이 달라지는 부분은 공평한 일의 분배를 얼마만큼 중시하느냐, 자유로운 분위기를 얼마나 허용하느냐의 두 가지 기준이었다네. 첫 번째 세력은 본견과 본견의 맞후임 분대장을 중심으로, 일의 공평한 분담을 가장 중시했으며 떠넘기는 것이 없어지고 각자 자기 일을 하게 되면 분위기는 절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보았네. 그러나 계속 자신을 복제하는 구조의 특성상 강제로 그 과정에 개입하지 않으면 구조가 지속될 것이었으므로, 일단은 평등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는 쪽이 강제적으로 일들을 분배하려고 했지. 두 번째 세력은 본견의 동기들 및 그 쪽과 더 친한 후임들로, 수도 가장 많고 특히 동기들에게는 의견을 강제하기도 힘든데다 본견이 아직 후임들과 함께 하는 동안 벌써 슬슬 뺑끼치는 부류였다. 이들은 분위기는 이미 충분히 좋아졌고, 자신들은 일을 할 만큼 했으니 더 바꿀 필요는 없으며 다음 세대는 다음 세대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주장했네. 그러면서 본견이 강하게 개혁안을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일을 진행한 뒤에 멋대로 공표하는 것이 불쾌하다는 기색도 내비쳤지. 세 번째 세력은 여태까지 가장 아래에서 고생한 막내들 및 그 쪽에 가까운 후임들로, 일을 공평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면 군대란 군대답게 군기를 잡아야 일이 제대로 돌아간다는 입장이었네. 두 기준에 모두 모두 극단적이어서, 본견이 행한 개혁은 시도는 칭찬할 만하지만 결과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군기는 본견의 성향과 맞물려서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했네.
  이 가운데 어느 부류가 가장 본견의 심기를 거슬렀을지는 분명한 일이네. 두 번째 세력은 선임들이 무력화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마음껏 누리려고 하면서도, 실제로 일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충분히 했다’는 권리 주장은 가장 큰 목소리로 내고 있으며-본견은 일을 재분배할 때 1년 동안 막내생활을 해 온 후임들은 우선적으로 제외시킨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일은 하지 않고 기수만으로 발언권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다. 군기 잡는 짓을 안 할 뿐이지 이전의 선임들과 사실 거의 비슷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기들이라 지지 않으려 하고 머릿수가 많으니 그만큼 충돌이 늘어났다.
  “지금 네가 벌이고 있는 것들은 그저 자위하는 것에 불과하다”라는 말도 들었지. “선임이란 일을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지휘 및 관리 감독과 같은 특수한 일을 더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선임인 것이고, 그럴 의지조차 없다면 선임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지금 우리도 ㅇㅇㅇ병장님이 하는 행동을 보고 선임다운 선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꾸하더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우리에 비해서 ㅇㅇㅇ병장님도 말할 자격이 없지 않습니까?”라는 말이나, “민주적으로 한다고 하시는데 왜 이리 비민주적으로 하십니까? 다 독단적으로 결정해서 공표하면서 무슨 의견 수렴을 하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하는 말도 들었다. 이렇듯 험악한 대화들이 오간 것을 보면 본견의 시도가 이미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터이네.
  그러나 정작 일의 갑작스러운 마무리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상대적으로 더 강경파라고 할 수 있는 세 번째 세력이 치고 올라온 것이다. 본견과 뜻을 같이 하는 맞후임 분대장이 그래도 분대장인 덕에 그때까지 개혁 시도에 제도적인 권한을 더할 수 있었는데, 분대장 임기가 끝난 고로 이제까지의 막내 병장들에게 분대장 자리를 넘기게 되었다. 분대장에 취임하자마자 녀석이 취임 기념사를 겸해서 여태까지 자신들이 주장해오던 일의 분배와 군기 강화를 위한 초강경 개혁안을 발표한 것이다. 일의 분배 문제는 아예 기수에 따른 막내 제도를 폐지하고 일종의 내무실 당번병을 정하는 식이었으며, 군기에 관해서는 “여기는 그래도 군대고, 기숙사가 아니다. 이러다가는 선후임끼리 형 동생하게 생겼다. ㅇㅇㅇ병장님이 워낙 좋은 분이셔서 여태까지 놔둔 거지만, 분위기가 완전히 개판 아니냐? 너희들이야말로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잡을 것은 잡고, 조일 것은 조이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심지어 너무 친해서 좀 막나간다 싶은 일병들의 내무실 자리를 조정해서 갈라놓겠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사실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서 총력으로 맞부딪혀야 했다는 생각도 든다. 이취임 전에 녀석이 자신이 분대장이 되면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할 것인지 미리 이야기하기는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서 본견이 대놓고 반박하고 병장들끼리 충돌을 벌여 일이 커졌더라면 그 이후 어느 쪽이든 이전처럼 주도적인 결정권을 쥐지 못할 것은 자명하네. 더군다나 남아 있을 시간이 더 긴 것은 그쪽들이기 때문에, ‘떠날 사람’인 본견이 이래라 저래라 하고 나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그래서 결국 세 번째 세력에게 힘을 내주고, 더 이상 내무실 안의 개혁에 손을 직접 대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었네. 자칫하다가는 분위기 문제에 얽혀 역으로 두 번째 세력이 득세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것이 걱정되기도 했고.
  생각건대 본견이 한 일들은, 내용만 놓고 보면 정말 별 것 아닐 것이네. 세 번째 분파가 주장한 당번병제 같은 파격적인 안정도는 되어야 공평하다고 할 수 있고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을 만했지만, 본견은 그 정도까지 가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고 어쩌면 세대를 넘어가야 할 수도 있다고 보아 지금의 시도는 그저 변화의 물꼬를 터는 정도만이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생각보다 훨씬 빨리 과격파가 주도권을 잡은 셈인데, 너무 무리하다가 저항이나 반동에 맞닥뜨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네. 이제까지에 대해 자평하자면, 본견의 시도는 실제로 이상적인 변화를 불러올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두 번째 세력 같은 분위기가 일상적이 될 것이고, 이전에 본견이 역겹게 생각했던 상황-중간층은 개별적인 인간관계로 때우고, 일은 아래로 모조리 쓸려 내려가는-이 반복되었을 거라고 보네. 이미 일이병 중에도 병장들에게 붙어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 놈들이 있었거든(한 놈이 ‘이병한테는 잘 해도 잘 했다고 말해주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본견의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해보라). 그런 상황에서 분위기를 반전시켜서 세 번째 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 그나마 할 수 있던 역할이 아니었는가 싶다.
  본견도 이미 지치고, 혹은 지친 것을 핑계 삼을 만큼 나태해져서 더 이상 싸울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부질없이 바득바득 싸운들, 본견이 떠나고 나면 어쨌든 남은 일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며 거기에 더 참견하려 들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전 세대에도 본견처럼 시도한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세대가 지나면서 그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고, 또다시 여기에서 본견이 왕왕 짖어대고, 이제 본견이 가고 난 다음의 세대에서 잊혀지고, 그 다음에 이 모든 것이 다시 반복되고... 이야말로 가장 큰 악이 귓가에 앉아서 ‘네가 한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지금의 모든 것이 똑같이 다시, 또다시 영원히 반복된다면, 네가 그 모든 것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겠느냐?’하고 속삭이는 것 같구나. 지치고 생채기 나고 축 늘어진 개는 더 이상 짖어댈 기력도 없이, 혀를 길게 빼 물고 헐떡거리며 적의 조롱에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시간이 덧없이 그를 관통해 지나가도록 내어두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이 생이런가, 좋다, 그렇다면 한 번 더!’라고 외치기에는 아직도 집착을 벗어 던지지 못한 까닭이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패배란 찾아오지 않는 법이지만, 그러나 이미 선택해 버린 후라면-.
  별난 것도 없는 글이 길었다. 조만간 밖에서 볼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이제껏 했던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탄식하고, 또 이야기는 되풀이 될 터이다. 패배한 개는 하릴없이, 다만 그것만을 기다릴 뿐이네.

2010. 6. 23
혁명보다 반역을

  과연 녀석이 제대하고 얼마 지나서 다시 술자리에서 만났을 때, 녀석은 특별히 군대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적당히 술이 돌아가길 기다리다가, 녀석이 어느 정도 들이켰고 자리에 사람이 빠진다 싶어지자 짐짓 군대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러자 녀석은 의뭉스럽게 눙치면서 이야기를 빼어 그 쪽으로 화제를 돌리지 않으려 했다. 알아차리지 못한 척 계속 추궁하자, 녀석이 웃으며 말했다.
  “무어, 다 소용없는 일이지! 말 그대로 자위질에 불과하니, 백설이 만곤건할 제 독야청청했다는 정도로 제 위안을 삼아야지.”
  “그래도 군대에서 자네 같은 사람은 퍽 드문 경우가 아닌가.”
  “그래봤자 지금 무슨 상관이 있으리? 무엇을 하든지 이전처럼 그대로 돌아가 버리면 그만이네. 역시 세상사가 고등학생 때의 깨달음에서 벗어나지 않는구나.”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하룻강아지가 군대 갔다 오더니 좀 사람이 되었나?”
  녀석의 자조에 쓰게 웃으며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군견일 적에는 국가의 개, 제대하고 학교로 돌아왔으니 이제는 학점의 개, 졸업하고 취직해서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려거든 자본의 개... 개가 개의 개가 될 날이 언제 있더뇨? 개란 별 수 없이 언제까지고 개일 수밖에.”
  그 말에는 나도 그만 입을 다물고, 바로 옆에서 요새 고시가 어떻고 취업이 어떠니 누구는 휴학 뒤 감감무소식이니 누구는 졸업은 하긴 할 건지 모르겠다느니 하는 이야기만 듣고 있어야 했다.
  이따금 마주칠 때 보면, 녀석은 아직도 군대 갔다 오기 전처럼 약간 구부정하고 삐딱한 자세로 여전히 학교를 오가고 있다.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닥치는 대로 짖어대던 개가 세상사 쓴 맛을 톡톡히 본 것이 우습기도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는 길들여지지 않기를, 언제까지고 세상 무서운 줄 알고 자기를 구부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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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다들 듣기 싫어한다고들 하는 군대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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