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잭
어머니가 말했어. 천국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너만은. 무릎 꿇은 어머니가 한 손으로 내 팔을 잡고 계셨어. 나는 천국이 뭐냐고 물었어. 나는 어렸고 교회에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단어는 무척 생소한 것이었지. 그 때 내가 아홉 살인가 그랬을 거야. 어머니는 내게 아까 한 말은 잊으라고 심심해서 헛소리 좀 해봤다고 말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 어머니는 빙긋 웃으며 양 손바닥으로 내 팔을 두드렸어. 양 손을 팔락였어. 정신병자처럼, 입꼬리가 심하게 치솟아있었어. 양팔에 피멍이 들었어. 나는 도망쳤는데 어머니가 내 뒤를 쫓았어. 파리날개에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어. 어머니의 팔은 초당 3만 번 진동했고 나는 폭력에 저항할 수 없었어. 집을 나서려했지만 번번이 어머니에게 팔을 잡혀 집안으로 내동댕이쳐졌지.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었겠지만 말야. 그 때 나는 아홉 살이었으니까. 어머니는 천국에 대해 말했어. 그 것은 굉장히 돌연한 일이었어. 전날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무척이나 다정한 분이었거든. 천국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어.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머니는 아버지였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머니는 트랜스젠더였어. 나는 입양아였고 어머니는 작은 카페의 주인이었어. 별명이 미스터리였다고 해. 어머니는 카페를 차리기 전의 이야기를 극도로 꺼렸거든. 어머니는 아름다웠고 단골들은 과거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미녀라는 뜻의 미스터리라는 별명을 만들었지.
미스터리. 미스터리. 미스터... 리. 미스터 리.
왜 그랬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구의 탓일까?
어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가을이야. 그 때도 가을이었는데. 올 가을은 무척 추워. 이름 모를 녀석이 올해가 인류 최후의 해가 될 거라고 말했어. 지랄도 그런 지랄이 없지. 어떻게 올해가 마지막이 될 수 있어? 지상에는 몇 억이나 되는 인간이 있고 나도 있는데. 나 같은 놈도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말야. 뭐, 어떤 재앙이 일어나 전부 죽더라도 난 살겠지. 나는 그만큼 나를 믿어. 이게 모두 잭, 네 덕분이야.
...
잭? 여, 잭. 뭔가 대답 좀 해봐.
...
쳇, 퉁명스럽긴. 너 친구 없지?
...
어? 왜 정색해? 정곡이야?
...
미안.
...
아니, 아니다. 잭, 나가자. 집에만 있으니까 기분이 꿀꿀해지는 거야. 가끔은 시원한 바람도 쐐야지. 안 그래, 잭? 자연의 바람이라고. 자연(自然)풍. 자연스러운 바람을 받으면 너도 조금은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겠지. 안 그래? 잭, 뭔가 말 좀 해봐. 잭...
...
이런, 죽었잖아.

=빨간 비키니
잭 유에는 80먹은 여자다. 오십대 중반의 아들이 하나있다. 아들의 이름은 정운철이다. 내게 어머니를 1년간 돌봐달라며 5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에는 천만 원을 선불로 나머지를 계약이 만료될 때 후불로 지불한다고 쓰여 있었다. 어떤 일이 생겨 잭 유에를 1년 동안 모시지 못할 경우 4천만 원은 지불하지 않는다는 말이 덧붙여있었고 잭 유에에게 어떤 불미한 일이 생길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적혀있었다. 그래도 5천이다. 도장을 찍었다. 계약이 성사된 다음날 새벽, 나는 잭 유에를 내 집에 들였다. 다섯 평짜리 좁은 방이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 그 때가 1월 말이었다. 계약은 내년 1월 말에 만료될 것이었다. 지금은 10월 중순이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얼어죽다니.
창문이 조금, 열려있었을 줄이야. 마침 술을 마신 밤에, 말도 안 되는 한파가 몰려왔다. 영하 이십 도라니. 가을인데. 노인네 죽지 말라고 정말 꼭꼭 닫았는데, 술 마시러가기 전 이불도 펴줬는데. 이불은 무척 두꺼운 솜이불인데. 비싼 거란 말야. 솜이불. 그거 15만원 주고 산거란 말야. 시장에서 그거 값 깎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얼굴이 파란 색일까? 이렇게나 창백한 얼굴일까?
죽지 마. 잭 유에! 죽지 마! 내가 이렇게 안아줄 테니까. 꼭 안아줄 테니까. 일어나요. 잭!

여름이었다. 그해 8월은 무척 더웠다. 땀이 흘렀다. 나는 눈을 뜨고 감았다. 바닥에 누워서 그런 짓만 반복했다. 계약에 따르면 나는 잭 유에에게 하루 세 끼 식사를 무조건 차려 줘야 한다. 시간도 정해져있어 아홉 시에는 잭 유에와 아침 식사를 해야 한다. 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 반이다. 나는 내 옆에 누운 잭을 보았다. 말했다.
「잭, 살아있어?」
매미가 울었다. 맴맴맴. 나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굉장히 시원한 광경을 떠올렸다. 크게 불룩한 가슴 사이에 아이스크림을 꽂은 미녀 같은 것 말이다. 태곳적부터 미녀의 옷은 비키니다. 천낭비를 줄이기 위한 조상의 지혜다. 비키니는 빨간색이 좋다. 이것 또한 팔에 상처가 났을 때, 옷으로 스윽 문질러 닦아도 티가 나지 말라는 조상의 지혜다. 바다가 철썩 대고 모래는 희다. 내가 있다. [내]가 [그런 세상]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 세상]은 바다가 철썩 대고 모래가 하얀 세상에 빨간색 비키니 입은 미녀가 있는 곳이다. 미녀의 가슴골에 묻혀있는 아이스크림은 과연 얼마나 변태적인 아이템인가? 변태도(度)를 측정해보자. 잭이 말했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내가 말했다.
「잭, 오늘 아침, 아이스크림 어때?」
잭이 말했다.
「누가 사올래?」
내가 말했다.
「가위바위보 하자. 나 주먹 낼 게.」
잭이 말했다.
「주먹 안내면?」
내가 말했다.
「아이스크림 사올게.」
가위바위보! 나는 보자기다. 잭은 주먹이다. 나와 잭이 몸을 일으켰다. 나는 잭이 몸을 일으키는 걸 도왔다. 잭이 휠체어에 앉았다. 내가 말했다.
「가위바위보 되게 못하네.」
잭이 말했다.
「보태 준 거 있어?」
슈퍼에 갔다.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서 나왔다.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잭이 말했다.
「우리, 바다에 가자.」
내가 말했다.
「좋아.」
터미널로 향했다. 택시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택시 잡기를 포기하고 걷기로 했다. 집에 돌아가 우산을 가지고 왔다. 휠체어에 우산을 묶었다. 펼쳤다. 둥근 그늘이 생겼다. 잭이 손뼉 치며 행복해했다. 치매 걸린 노인 같아서 조금 섬뜩했다. 나는 잭에게 혹시 벽에 똥칠하고 싶어지면 말하라고 했다. 잭이 욕설을 뱉었다. 잭 유에는 80대지만 잭은 20대다. 그렇게 정했다. 20대인 잭은 뭐든 할 수 있다. 비키니만은 안 되지만. 빨간 비키니는 절대 안 돼.
안 됀 다니까 어디로 가자는 거야! 잭! 오! 잭! 그건 안 돼! 영혼을 더럽히지 마!
천사여.
다행이다. 잭, 착하지. 그러면 안 돼요. 심장 멎을 뻔했잖아. 아이구아이구, 우리 잭. 울룰룰루 착하지~. 잭이 말했다.
「사랑을 합시다.」
뭐?
잭과 터미널로 향했다. 대형마트에 들렸다. 이것저것 사들고 발길을 재촉했다. 휠체어바퀴가 달그락거렸다. 매미가 우는 좋은 날이었다. 버스표 두 장을 샀다. 정류장에 섰다. 버스가 잔뜩 늘어서있다. 3번 버스로 향했다. 기사아저씨가 잭을 업는 사이, 휠체어를 접어 짐칸에 실었다. 아저씨로부터 잭을 받아 버스에 올랐다. 잭을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잭은 내가 제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좋아했다. 내가 손을 치우자 잭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잭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했다. 버스가 출발했다. 오후 한 시, 잭 유에에게 점심을 먹여야 하는 시간에 도시락을 먹었다. 김밥이 짰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가 많았고 버스는 느리게 나아갔다. 버스가 바다가 근처에 있는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오후 여섯 시가 가까워서였다. 나는 잭을 휠체어에 태우고 바다로 향했다. 바다를 보았다. 잭이 말했다.
「많다.」
인간이 많았다. 바글바글 했다. 잭은 내게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했다. 휠체어를 밀었다. 일곱 시, 잭 유에에게 저녁을 먹여야 하는 시간에 핫바를 먹었다. 잭이 말했다.
「갈수록 먹는 게 부실해지는 것 같아. 돈 받기 싫어? 확, 이른다?」
그건 안 될 일이다. 나는 잭을 데리고 근처의 식당으로 갔다. 조개구이를 먹었다. 핫바가 저녁이고 조개구이는 후식이다. 나는 잭에게 그 것을 확인시켰다. 잭과 바닷가를 걸었다. 어느 순간 주위가 조용했다. 잭은 자기 앞에 보이는 거대한 구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것은 하수도의 출구였다.
축축한 소리가 났다. 후웅 했다. 인공의 동굴이었다.
들어갔다.
팔십대의 잭과 오십대의 내가, 이십대의 잭과 이십대의 나로 둔갑한 채로 말이다.

=제다이
두 달이 지났다. 지금은 12월 중순이다.
사상최악의 한파가 찾아왔다. 10월 중순에 영하 20도까지 떨어졌던 기온은 지금 영하 36도까지 떨어져있다. 난방비는 생명이다. 살고 싶다. 많은 이들이 무리하게 난방을 돌렸다. 가스회사가 난방비를 올렸다. 공급이 수요를 쫓지 못했다. 버틸 수 없었다. 배관이 파열되고 난방이 무너졌다. 연장을 든 인간들이 두꺼운 옷으로 온 몸을 칭칭 감고 무리지어 길가를 걷는다. 가로수를 부순다. 제각기 지게에 나뭇가지를 싣는다. 지하주차장 혹은 공동구에 모인다. 장작을 쌓고 불을 피운다. 연기가 오른다. 아이들이 기침하고 약한 자는 운다. 모두를 아프게 하는 연기 근처에 모여 제 몸을 데운다. 키 큰 자가 천장에 달린 마개를 치운다. 마개로 연기가 빠진다. 본래 환기구로 쓰이던 구멍을 연장을 든 인간들이 막았다. 관을 달았다. 관은 땅에 묻혀있고 먼 곳에서 연기를 뿜게 되어있다. 약탈자를 경계하기 위함이다.
약탈자들은 예전에 군인이었던 자들이다. 혹은 군대에서 무기를 빼돌린 자들이다. 무기상에서 일하고 있던 자들도 있고 범죄자 그룹도 있다. 그들은 인간을 죽인다. 그들은 처벌받지 않는다. 죄를 심판할 법원이 없다. 판사들이 얼어 죽었거나 지하주차장으로 숨어들었다.  
올해가 인류의 마지막 해가 될 거라는 누군가의 말은 틀렸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는다. 정운철이 말한다.
「어머니는 잘 계신가?」
나는 잘 계시다고 말한다. 정운철이 전화를 끊는다. 그는 요즘 굉장히 바쁘다. 무슨 일로 바쁜지는 모르겠다. 나는 정운철에게 잭이 무사하다고 말한다. 4천만 원을 받아야 한다. 5천만 원이면 적도로 향하는 배를 탈 수 있다. 배를 타지 못하면 죽는다. 정운철은 일주일에 한 번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한다. 15초도 안 되는 짧은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는다. 그의 전화만 잘 받으면 정운철은 내게 4천만 원을 줄 것이다. 이불을 둘둘 말고 창밖을 본다. 전화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나는 어떠한 지하주차장에도 공동구에도 속하지 않고 집에 있다.
창밖을 노려본다. 창문에 다가가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창가에 서있는 나를 보고 우리 집에 쳐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이 내린다. 많이 죽겠다. 나는 붉은 밤하늘을 본다. 아직 살아있는 가로등이 노랗게 탄다. 밤이 지나는 것을 기다린다. 새벽, 가장 추울 때 집을 나선다.
누군가는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푸른빛의 마녀가 화가 났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좀체 화를 내지 않는데 한 번 화를 내면 두고두고 곱씹으며 상대를 한평생 저주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그녀는 불노불사이고 죽을 때까지 화를 풀지 않음으로 이 추위는 영원할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지구의 자전축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어떤 나라의 어떤 병기가 자전축을 틀어버렸다고 맨틀의 대류와 관계가 있다고 했다. 누군가는 어떤 나라의 어떤 시설이 자기 말의 증거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그 시설의 형태를 보고 용도를 추측했다. 말이 그럴싸했지만 여전히 추웠다. 눈이 표백된다. 미쳐라. 아직 눈이 내린다. 하늘 향해 손을 뻗어 눈을 받는다. 눈물을 핥는다.
저쪽이다.
걷는다. 우연히도 잭과 함께 걸었던 그 때의 길이다. 대형마트 뒤쪽 그늘에서 당신을 만난다. 당신은 몸을 웅크리고 있어. 당신은 양손을 입에 넣고 있어. 쭉쭉 빨고 있어. 나는 당신 앞에 몸을 구부려. 쭈그려 앉아 당신의 눈을 들여다봐. 무척 추운 날의 가장 추운 새벽이야. 붉은 하늘이 물러난 자리에 보랏빛 하늘이 들어서. 보랏빛 하늘은 찰나의 것이지. 그래서 시작과 끝은 언제나 찰나인 거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나도 몰라. 그냥, 내가 지금 당신을 향해 품고 있는 이, 애절한 감정만큼은 알아줬으면 해.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말야.
사랑해.
가방에서 쇠작대기를 꺼낸다. 끝이 구부러져있고 뾰족하다. 나는 양손으로 작대기를 단단히 잡고 쳐든다. 근육을 단단히 당긴다. 피가 울린다. 쿵쿵댄다. 내린다. 작대기 끝이 너의 팔에 박힌다. 작대기 끝을 밟아 깊이 박는다. 너는 단단하고 쇠작대기는 네 몸에 잘 박힌다. 너를 끈다. 서벅서벅 소리가 난다. 맨홀 앞에 선다. 너에 닿은 작대기를 놓고 다른 작대기를 꺼내 맨홀을 연다. 나는 맨홀이 열리는 순간이 좋다. 후웅하는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일까? 지구의 소리? 아기의 울음? 따뜻한 커피 한 잔, 차가운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추억? 나는 답을 안다. 적막해진다. 너에게서 작대기를 뽑는다. 너를 민다. 맨홀에 너를 떨어뜨린다. 잘 가. 손을 흔든다. 물러난다. 맨홀을 닫는다. 전에 한 번, 맨홀을 열어두고 갔다가 어린 아이 하나가 맨홀에 빠졌었다. 근처 지하주차장에 살던 아이가 심심함을 못 이겨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었다. 아이는 살았지만 발목이 부러졌다. 슬프고 서글픈 일이다. 작대기를 가방에 넣는다. 돌을 주워 너를 끄는데 썼던 것에 문지른다. 돌을 던진다. 당신을 찾는다.
수많은 당신을 맨홀로 보낸다.
해가 높아진다. 집으로 돌아간다. 문을 걸어 잠그고 눕는다. 한참 뒤, 아홉 시에 통조림을 까먹는다. 한 시에 통조림을 마저 먹는다. 여섯 시에 통조림을 비운다. 잔다. 눈을 뜨면 밤이다. 하늘이 붉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한 손에 작대기를 들고 있다. 끝이 굽은 쇠작대기다. 소년이 내게 다가온다. 나는 소년이 작대기를 쳐드는 것을 본다. 나는 소년이 아홉 살 쯤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삐쩍 말랐고 더럽다. 소년이 작대기를 휘두른다. 동작이 크다. 콘크리트 바닥에 작대기가 박힌다. 소년이 말한다.
「이 정도면 되나요?」
나는 소년의 말을 이해 할 수 없다. 입을 다물고, 소년을 본다. 소년이 말한다.
「형을 따라가도 되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조건을 말한다. 그 날 밤, 소년이 벌거벗는다. 벌거벗은 내가 소년을 품에 안는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살살 떨던 소년이 잠들자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춘다. 잠든다. 오랜만에 늦잠을 잔다.
아홉시에 통조림을 먹는다. 소년은 냉장고에 가득 든 통조림을 힐끗거리며 허겁지겁 제 앞에 놓인 것을 비운다. 내가 통조림을 조금 먹고 내려놓자 그 것을 자기 먹으라는 뜻으로 알았는지 남은 것을 싹싹 비운다. 씩씩한 녀석이다. 소년이 말한다.
「오늘은 안 나가요?」
내가 말한다.
「응.」
소년이 이유를 묻는다.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소년에게 소년의 내력을 묻는다. 소년의 부모는 동쪽으로 갔다. 소년을 두고 갔다. 잠든 소년을 두고 떠나버렸다. 추라는 남자가 떠나기를 결정했을 때, 소년이 감기에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혼자 사흘을 앓았다. 밖에 나왔다. 그리고 지금이다. 나는 그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을 알지 못한다. 이 땅은 섬이다. 살려면 적도로 가야한다. 적도에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날거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한다. 공항은 불탔음으로 바다를 건너야 할 것이다. 가장 가까운 바다는 남쪽에 있다. 그 바다는 먼 옛날, 잭과 내가 닿았던 곳이다. 동쪽으로 간 것은 잘못된 선택이다. 아마, 그들 중 몇몇은 그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아무 말도 못했으리라. 논쟁은 피곤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지친 상황인 만큼, 아직 지치지 않은 열정적인 남자가 뱉은 소리를 아무도 거역하지 못했으리라. 모두 죽을 것이다. 그만, 꼬리가 얽혀버린 쥐처럼 서로를 할퀴다 죽을 것이다. 잭. 나는 너가 그 때 죽어서 다행이라 생각해. 소년이 묻는다.
「왜, 시체를 맨홀에 빠트려요?」
나는 소년을 데리고 집을 나선다. 맨홀 뚜껑을 연다. 후웅 소리가 난다. 곧 적막해진다. 소년이 맨홀 속을 들여다본다. 나는 오늘 날짜를 헤아린다. 마지막으로 전화를 받은 게 어제다. 닷새, 여유가 있다. 말한다.
「내려가자.」
내가 앞장선다. 먼저 내려가고 소년을 기다린다. 소년은 사다리를 천천히 내려온다. 나는 가방에서 랜턴을 꺼낸다. 주위를 밝힌다. 소년에게 랜턴을 쥐어주고 위로 간다. 뚜껑을 닫는다. 소년의 곁에 돌아와 공동구를 걷는다. 그걸 안다고 해서 너가 행복할지는 모르겠다. 소년은 내게 어른들이 나를 제(祭)다이(Die)라 불렀다고 했다. 죽은 것(Die)을 기리는(祭) 자라고 사신이나 저승사자랑 비슷한 것이라고 했다. 소년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절대 제다이에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 가르쳤다고 했다. 어른들 또한 제다이에게 다가가기를 꺼렸다. 차가운 것이 가장 두려운 시대였지만 그런 것을 두려워한다 인정하기에는 아직 인간이 오만한 시대였다. 제다이는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른들 세계에 어떤 협정이 있었다고 했다. 제다이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둔다는 것이었다. 사실 제다이가 시체를 꾸준히 치워주지 않았으면 길거리는 동사자로 넘쳤을 것임으로 제다이를 해하는 것은 모두가 손해보는 짓이기도 했다. 시체를 먹는 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한 이들의 의견이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나, 남이 보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래서 아파트가 조용했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편안했다. 약탈자들이 도시 여기저기를 폭파하고 죽이고 하는 중에도 내가 사는 곳만큼은 아름다웠다. 약탈자들 또한 나를 두려워했다고 소년은 말했다. 나는 약탈자가 두려웠지만 말하지 않았다.
후웅 소리는 이따금 들렸다. 맨홀 속은 어두웠지만 춥지는 않았다. 랜턴 불이 밝힌 벽면에 노란 페인트로 [슈퍼]라 쓰여 있다. 여기가 시작점이다. 나는 이 위에 슈퍼가 있다고 말한다. 보여줄까? 말하며 랜턴 불을 위로 치켜들었는데 소년이 싫다고 한다. 나는 사다리를 오른다. 보고 싶다. 가혹하게 약탈당한 슈퍼는 어느 것 하나 온전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 않다. 소년이 쫓아올라온다. 나는 슈퍼 내부를 기웃대다가 아이스크림 박스 앞에 선다. 아이스크림 박스는 비어있다. 소년이 대체 뭐냐고 투덜댄다. 소년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싶다. 진심이다. 이것은 격렬하고 방향이 확고한 충동이다. 나는 방안을 헤맨다. 슈퍼 깊숙한 곳, 슈퍼 주인의 방구석에서 책 한 권을 줍는다. 여자 사진이 가득한 책이다. 어설프게 야하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헐벗은, 해변의 미녀를 본다. 빨간 비키니를 입고 있다. 그 페이지를 찢어 소년에게 건넨다. 말한다.
「우리, 바다에 가자.」
맨홀 속으로 내려간다. 걷는다. 맨홀 속에는 아직 검은 물이 흐르고 있다. 먹을 수 없는 것임으로 무용하다. 소년은 랜턴 불을 자꾸만 미녀 쪽으로 향한다. 가끔 넘어진다. 소년이 검은 물에 빠지지 않도록 나는 주의를 기울인다. 소년이 말한다.
「형, 저 끝에 뭐가 있어요?」
내가 말한다.
「괴물.」
소년이 몸을 부르르 떤다. 나는 시계를 보고 지금 시간이 오후 한 시임을 안다. 자리에 앉아 소년과 점심을 먹는다. 통조림을 비우고 일어선다. 파리가 날아든다. 소년이 양팔을 저으며 허억댄다. 나는 소년에게 가만히 있으라 속삭인다. 파리 떼가 금방 지나친다. 나도 소년도 다치지는 않았다. 후웅 소리가 난다. 소년이 제 입에 들어간 파리를 뱉는다. 나는 소년에게 파리가 올 떼는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귀를 막으라고 말한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소년의 귀에 파리가 들어가지 않았음을 본다. 다행이다. 너는 나와 오래도록 살아야 할 것이다. 너가 죽으면 외로울 텐데 죽지 않아 다행이다. 내가 말한다.
「너, 이름이 뭐니?」
너가 말한다.
「이중호.」
터미널에 닿는다. 고속도로를 지난다. 그땐 몰랐는데 고속도로는 강변을 따라 놓여있었다. 밑의 구조에 샛길이 많다. 한참 헤맨다. 나는 후웅 소리를 쫓아 길을 잡는다. 소년은 내게 저 소리가 뭐냐고 묻는다. 나는 소년에게 저건 너의 소리라고 답한다. 소년이 머리를 갸웃한다. 무슨 소리냐는 질문에 나는 답하지 않는다. 막힌 길에 고여 있는 것을 본다. 시체와 나뭇가지, 쓰레기가 얽힌 것이다. 전체적으로 썩은 것이다. 각각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뒤섞여 개개의 성질을 잃은 것이다. 조금 따뜻하다. 철창 너머로 얼어붙은 강이 보인다. 강은 희다. 너는 검다. 철벅철벅 소리가 난다. 맨홀 벽에 낙서가 있다. 어떤 녀석들인지 모르겠지만 무척 유쾌한 녀석들임에 틀림없다. 라카라는 것으로 벽을 노랗게, 파랗게, 붉게 칠해놓았다. 검은 빛으로 테두리를 그어놓은 것이 색이 바랬다. 기름 냄새를 맡아보려 코를 댔지만 건조하다. 회(灰)냄새 지독하다. 멀다.

잭. 너는 오래 전, 남편을 잃었다. 아니, 남편이 너를 두고 도망쳤다. 남편은 키가 크고 허리가 가늘었다. 비쩍 마른 체구였다는 것이다. 조각을 전공한 그는 손이 단단했다. 너는 그 손이 너에 닿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머리를 쓰다듬거나 가슴을 주무르거나 너를 애무하거나 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너는 그가 싫었다. 아니, 싫은 척 했다. 그를 싫어하고 싶었다. 그를 두들기고 욕했다. 그러면 그가 너를 때리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그는 너에게 아무 감정도 품고 있지 않은 듯 했는데 너는 그 것이 못 견디게 아팠기 때문이다. 너는 돈이 많았고 큰돈으로 그를 구속, 수감하여 결혼 문서에 도장을 찍게 할 수는 있었지만 거기서 끝. 아이 하나를 낳고 완전 끝. Run away~! Redemption! 잭. 너가 말했다. 잠꼬대였다. [당신은 대체 어디 있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 말은 나를 아프게 했다. 말했다시피 나는 아픈 것이 싫다. 아니, 아픈 것이 싫다는 말을 내가 너한테 한 적이 있었나? 없었다. 그래, 내가 너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 건 너가 죽은 뒤였다. 그 전에 말해줄 걸 그랬다. 그 날 밤, 영하 이십 도의 강추위가 올 줄은 정말 몰랐다.

하! 하! 하! 하! 그 것을 보았을 때, 여름에 우리는 웃었다. 빙긋 웃었다. 아니, 빙긋이라는 수식어는 조금 부적절하다. 미친 듯이, 웃었다. 발광했다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미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임으로 그 것이 옳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 파리만 이따금 온다. 나는 밤을 샌다. 소년이 발치에서 잠을 잔다. 잠시 눈 붙이고 깨어난다. 걷는다. 바다로 향한 넓은 출구에 닿는다. 소년은 철썩이는 검은 바다를 보고 와아 소리를 낸다. 나는 소년을 하수구 안쪽으로 끌어들인다. 후웅 소리를 쫓는다. 소년이 말한다.
「저게, 뭐에요?」
내가 말한다.
「괴물.」
3만 개의 눈을 가진, 3만 개의 팔을 가진, 3만 개의 다리를 가진, 3만 개의 입과 폐, 심장과 림프구, 양물, 음부를 가진 [그 것]이 있다. 소년이 말한다.
「너무나, 아름다워요.」
열린 맨홀에서 빛이 쏟아졌다. [그 것]은 그 아래 서있다. 한 손에 긴 막대를 들고 있다. 형형히 빛난다. 빛의 정체는 포스다. 아름다운, 다정한 기운이다. 검은 양복바지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그 것은 당장이라도 내게 커피 한 잔을 줄 것 같은 기운을 풍긴다. 돌연 [그 것]이 춤춘다. 3만 가지 색을 품고 있는 [그 것]의 춤은 무엇보다 다채롭다. 3만 개의 입이 노래를 뱉는다. 1만 개는 알토, 1만 개는 테너, 1만 개는 소프라노다. 크게 울린다. 하수도가 쿵쿵 울린다. 후웅 한다. 주변 대지가 벌벌 떨린다. 소년이 앞으로 나아간다. 소년은 [그 것]에 홀린 듯하다. 다채로움의 유혹에 걸려든 것이다. 그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남쪽으로 가지 않은 모든 것은 죽는다. 동쪽으로 가면 죽는다. 서쪽으로 가면 죽는다. 북쪽으로 가면 죽는다. 이곳은 섬이다.
나는 소년을 막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소년이 [그 것]의 검에 닿는다. 쓰러진다. 피는 흘리지 않는다. [그 것]은 춤추고 나는 서있다. [그 것]의 이름을 부른다.
「오랜만이야. 미스터리.」
미스터리가 춤을 멈춘다. 나는 3만 개의 시선을 느낀다. 말한다.
「그동안 몇 명이나 여기에 도달했어?」
미스터리는 답하지 않는다. 내가 말한다.
「배고프지 않았어?」
이곳은 바다로 향하는 물줄기의 마지막 지류다. 너는 이곳에 있었다. 이곳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양팔을 초당 3만 번 퍼덕였다. 파리 같았다. 너를 닮은 파리가 네 주위에 가득했다. 쓰고 아프고 가려운 것이 많았다.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너는 미친 듯이 아름다웠다. 나는 너가 무서워 다가가지 않았다. 잭이 네 이름을 크게 외쳤다. 잭은 너와 구면이었다. 나 또한 너와 구면이었다. 당신은 아마도 내 어머니일 것이다. 당신은 아마도 잭의 남편이었을 것이다. 둘이 동일인물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런 건 상관없다. 너는 3만 개의 눈을 가진, 3만 개의 팔을 가진, 3만 개의 다리를 가진, 3만 개의 입과 폐, 심장과 림프구, 양물, 음부를 가졌다. 어떤 하나는 나의 어머니, 잭의 남편의 것일 수도 있다. 너는 내 확률적인 어머니이고 잭의 확률적인 남편이다. 미친 소리인 건 알지만 그렇다. 너에게서 남편을 본 잭은 죽었다. 너에게서 어머니를 본 나는 너에게서 잭을 본다.
너는 시체를 먹음으로 입과 팔을 늘리는 괴물이다.
나는 천천히 미스터리를 향해 걷는다. 미스터리 앞에 쓰러진 작은 인간을 업는다. 작은 인간은 소녀다. 나는 20대다. 나는 소녀와 오래도록 살 것이다. 소녀를 잭 유에라 이름 짓기로 마음먹는다. 집으로 향한다.

=상륙
한 무리의 인간이 죽은 섬에 상륙한다. 얼마 전, 설명이 불가능한 국지적 한파를 겪은 섬은 5월이 되었음에도 얼음이 남아있다. 인간을 두렵게 한다.
인간은 잔인했다. 몇몇 돈 많은 자를 제하고 섬을 탈출한 인간은 전부 죽었다. 난민에 대한 정부의 대응 때문이었고 보도규제 덕분이었고 시민단체가 분노했고 행정처리가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바다 한복판에 주인 없이 떠있는 배에서 다량의 찢겨진 시체와 아사자가 나왔다. 찢겨진 시체는 대체로 어린 아이와 힘 약한 자의 몸이었던 것이었다. 정말 강한 자만이 아사했다. 피 냄새를 맡은 군인이 구토했다.
섬에 오른 인간은 영하 1백도 이하까지 기온이 떨어졌던 지역의 땅에 장비를 꽂고 아직 물러나지 않은 이상저온의 여파를 측정한다. 과학자들은 저희들만의 언어로 조금씩 대화하며 조금씩 나아간다. 도시에 닿는다. 연구원=존 스미스가 말한다.
「이상해.」
입김이 푸르다. 옆에 선 연구원=나카타가 말한다.
「뭐가 이상해?」
존 스미스가 손에 든 총을 높이 든다. 방아쇠를 당긴다. 탕~! 소리가 울린다. 공명한다. 나카타는 총소리가 바람의 창이 되어 자신을 죽일 것 같아 두렵다. 나카타는 총이 싫다. 무섭다. 나카타가 말한다.
「무슨... 짓이야?」
존 스미스가 말한다.
「이 섬은 본래 250만 정도의 인간이 살고 있던 섬이야. 1월 28일, 마지막 배가 떠났을 때 이 섬에는 150만 이상의 인간이 있었어. 그런데, 아무도 없다.」
존 스미스가 몇 차례 방아쇠를 당긴다. 나카타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존 스미스가 총구를 내린다. 숨을 몰아쉬며 앞으로 걷는다. 도시는 눈에 뒤덮여있다. 지금 이 섬의 기온은 영하 20도 정도다. 눈이 얼어있다. 존 스미스는 눈을 만지고 냄새를 맡는다. 조금 먹는다. 물이 시원하다. 텁텁한 맛이 없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결정이다. 아름다운 만큼 먹먹한 것이다. 존 스미스는 열흘 전에 이 섬에 왔다. 종일 인간을 찾았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다. 전부 죽었나? 몇몇은 얼어 죽었을 것이다. 몇몇은 서로를 잡아먹었을 것이다. 잔인한 폭력과 강간과 불합리가 있었을 것이다. 눈은 서벅서벅하고 콘크리트는 물기를 머금었다. 죽은 자에게 눈은 단단했을 것이고 콘크리트는 차가웠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죽으면 단단함도 차가움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많이 죽은 땅에서 존 스미스는 경계에 대해 생각한다. 이내 자신의 생각이 너무나 사치스러운 것임을 알고 생각을 닫는다. 나카타가 말한다.
「난 먼저 돌아가겠어. 추워. 남으려면 혼자 남아. 난 무조건 돌아갈 테니까.」
슬슬 걷는다. 이따금 몸을 틀어 존 스미스를 바라본다. 존 스미스는 나카타의 시선을 무시한다. 나카타는 베이스까지 가는 길이 두렵다. 벌벌 떤다. 하늘이 어둡다. 구름이 많다. 곧 눈이 내릴 것이다. 존 스미스가 말한다.
「춥다.」
존 스미스가 앞으로 간다. 어느 건물에 들어간다. 1층부터 천천히 계단으로 올라간다. 각 층의 복도를 걷는다. 시체를 찾는다. 이 도시에는 시체가 없다. 이상하다. 무언가가 시체를 먹었다고 해도 기온이 낮아 미생물의 활동이 약할 것임으로 어떤 잔해가 아직은 남아있어야 할 것이다. 총을 쥔 손에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모든 층을 살피고 내려온다. 존 스미스는 지도를 꺼내 방금 살핀 건물 위로 빨간색 가위표를 그린다. 빨간 가위표를 헤아린다. 89개다. 열흘 동안 고작 89채 밖에 뒤지지 못했다. 섬에 건물이 몇 채나 있을까 생각한다. 존 스미스는 밤이 늦어서 베이스로 돌아간다. 잠을 자려 누웠는데 군인=영운철이 존 스미스의 막사에 들어온다. 말한다.
「연구원 님. 주무십니까?」
존 스미스가 몸을 일으킨다. 안경을 찾아 끼며 말한다.
「아니. 무슨 일이지?」
영운철이 존 스미스에게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강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영운철이 존 스미스를 이상한 것이 있는 곳으로 이끈다. 존 스미스는 이상한 것을 본다. 유기물이다. 검게 뒤얽힌 시체다. 엄청나게 많다. 수백 혹은 수천이다. 하수도와 강 사이를 가로막은 쇠창살에 걸려있다. 존 스미스는 그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은다. 기도한다. 창살 너머로 손을 뻗어 죽은 것을 만진다. 존 스미스는 이 안에 들어갈 방법이 없느냐고 영운철에게 묻는다. 영운철은 저 위의 맨홀 구멍으로 하수도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말한다. 존 스미스가 맨홀로 향한다. 맨홀 구멍 속은 어둡다. 존 스미스는 랜턴 불을 사방에 뿌려가며 아까의 시체를 찾는다. 멈춘다. 후웅 소리가 들린다. 뭔가가 있다. 뭔가가 있다면 그 것은 이 섬에 살아있는 마지막 생물일 것이다. 소리를 쫓는다. 총을 쥔 손에 땀이 찬다. 존 스미스가 달려 도착한 그 곳에 미스터리가 있다. 춤추던 미스터리가 3만 개의 눈으로 존 스미스를 본다. 존 스미스는 미스터리가 두렵다. 미스터리가 존 스미스에게 다가온다. 존 스미스에게 손을 뻗는다. 끌어안으려 한다. 존 스미스의 몸은 따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존 스미스가 미스터리를 총으로 쏜다. 미스터리가 죽는다. 존 스미스는 전화로 군인을 불러 미스터리의 시체를 연구실로 옮기게 한다. 미스터리가 지니고 있던 긴 막대=미스터리가 쥐고 춤출 때는 푸른빛이 났던 것을 집어 든다. 가방에 넣는다. 존 스미스는 미스터리가 살던 곳에 오랫동안 머문다.
시체 하나가 떠내려 온다.
꽁꽁 얼어붙은 시체의 한 쪽에 무언가에 찍힌 자국이 있다. 이게 뭘까? 시체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석 달은 됐다. 어떻게 여기로 떠내려 온 걸까? 하수도의 물은 아직도 조금씩 흐르고 있지만 그것이 시체가 맨홀 속 검은 물에 떠내려갈 이유는 되지 못한다. 누군가가 있다. 누군가가 맨홀에 빠트렸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시체가 단 한 구도 없다. 누군가가 시체를 이곳으로 떠내려 보냈기 때문인가? 이유는 뭐지? 먹을 것이 없을 것이다. 시체라도 먹어야 간신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존 스미스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고 부르르 떤다. 누군가를 찾아 나선다. 하수도를 거슬러 올라간다. 시체가 검은 물 타고 떠내려가는 것을 본다. 으스스하다. 오래 걷는다. 깊이, 더 깊이 나아간다.
열린 구멍을 본다. 존 스미스는 기다린다. 누군가 구멍 밖에 있다. 잠시 뒤, 풍덩 한다. 존 스미스는 물에 빠진 얼어붙은 시체를 본다. 구멍이 닫힌다. 존 스미스는 잠시 기다렸다가 구멍으로 나간다. 아무도 없다. 하얀 도시가 있다. 존 스미스는 발자국을 찾는다. 발자국이 있다. 큰 발자국이다. 존 스미스가 발자국을 쫓는다.
흰 벌판에서 그 남자를 본다. 남자는 삐쩍 말랐고 한 손에 기다란 작대기를 들고 있다. 존 스미스를 보고 [안녕... 하세요.] 한다. 고개를 꾸벅인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리칼이 길다. 설인 같다. 존 스미스는 남자에게 이름을 묻는다. 남자는 잠시 허공을 보더니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한다. 몇 발자국 걷다가 문득, [제다이]라고 말한다. 제다이는 존 스미스를 데리고 자기 보금자리로 간다. 작은 아파트다. 존 스미스는 주변 건물이 심하게 무너진 것을 보았고 제다이에게 까닭을 묻는다. 제다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존 스미스는 제다이가 50이 넘었으리라 생각한다. 아파트에 들어간 제다이가 방한복판에 앉아 촛불을 켜자 제다이의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존 스미스는 제다이의 얼굴이 무척 젊은 것에 놀란다. 존 스미스는 제다이에게 시체를 맨홀에 버리는 이유를 묻는다. 그 때, 여자아이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존 스미스는 키 작은 여자아이를 본다. 여자아이가 존 스미스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존 스미스는 자기 이름을 대고 소속된 연구소 이름을 댄다. 연구원이라 말한다. 여자아이가 존 스미스에게 매달린다. 여자아이는 존 스미스가 신기하다. 손바닥으로 존 스미스를 두드리며 우와~ 소리를 낸다. 존 스미스에게 바싹 붙어 여러 가지를 묻는다. 존 스미스는 자기 질문을 묻고 여자아이의 질문에 대답한다. 밤을 샌다. 다음날 아침 존 스미스가 잠든다. 이들은 이런 섬에서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영하 백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어째서 맨홀 속에 시체를 버리는 것일까? 아무 것도 묻지 못했다. 춥고 힘겹다. 존 스미스가 눈 뜬다. 오후 2시다. 제다이가 존 스미스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뭔가 사악사악 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언가를 가는 듯하다. 제다이의 몸 너머로 가는 것이 보이다. 하얗고 밝다. 검은 것이 붙어있다. 제다이가 등이 울룩할 때마다 검은 것이 떨어져 나간다. 옆에 앉은 여자아이가 바닥에 떨어진 검은 것을 모은다. 존 스미스가 말한다.
「두 분, 제 베이스캠프에 올 수 있겠습니까?」
궁금한 것 이상으로 두렵다. 여자아이가 검은 것을 씹는다. 존 스미스가 눈 뜬 것을 보고 검은 것을 내민다. 존 스미스가 그 것을 받는다. 씹는다. 존 스미스가 방금 한말을 반복한다. 제다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제다이와 여자아이를 자기 텐트에서 멀찍이 떨어진 텐트에 들이고 존 스미스가 자기 텐트로 들어간다. 존 스미스는 내일부터 제다이와 여자아이에게 질문할 것이다. 총을 둔 군인들이 제 곁을 지키게 할 것이다. 존 스미스가 잠든다. 하늘이 붉게 물든다. 달이 높다. 제다이가 텐트에서 나온다. 하수구로 향한다. 제다이는 몸이 날래다. 다리를 구부리고 펼 때마다 10미터씩 난다.

=미스터리
오랜만이야.
정운철은 약속대로 돈을 보내주었어. 은행 직원이 없고 인터넷이 끊겼음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그는 매주 전화를 걸었고 나는 매주 전화를 받았어. 그는 끝까지 나를 의심하지 않았고 나는 그를 속이는데 성공했어. 그는 내게 돈을 보냈을 거야. 그런데 난 섬을 떠나지는 못했어. 섬에 있던 마지막 배가 1월 28일에 떠나버렸기 때문이야. 5천만 원이 있었으면 떠날 수 있었을 거야. 1월 28일에 나는 5천만 원이 없었지. 계약한 날짜는 1월 말이었으니까. 고작 3일 차이로 떠날 수 없었던 거야. 아! 나 같은 인간이 쓴 어음을 받아주는 녀석은 없더라. 당연한 일이지만 조금 분통이 터졌어. 누구라도 나를 조금 믿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프고 힘들었어.

존 스미스라는 남자의 가방에 미스터리의 검이 들어있었다.

나는 미스터리가 있던 곳으로 간다. 미스터리가 없다. 왜지? 왜 없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누구 짓이지? 미스터리. 너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자다. 너는 이 자리에서 영원토록 춤을 출 것이다. 너는 여기서 내가 주는 밥을 먹고 너를 불릴 것이다. 너는 영원히 아름다울 것이다. 다채로울 것이다. 너는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이다.
콘크리트 벽에 총알 자국이 있다. 핏자국이 있다. 나는 캠프로 돌아간다. 캠프의 이곳저곳을 샅샅이 살핀다. 너가 큰 통에 들어있다. 이상한 용액이 너의 부패를 막는다. 네 숨을 조인다. 울컥 눈물이 솟는다. 가슴이 아프다. 나는 헛구역질을 한다. 고개를 깊이 숙이고 한 팔을 너가 들어있는 큰 병에 댄다. 한 손을 목에 댄다. 헉헉한 목구멍은 넓으며 선연하고 거름막처럼 투명하지 못하다. 나는 녀석들이 마련해 준 텐트로 돌아간다. 잭 유에=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자고 있다. 너가 깨기 전에 전부 죽일 것이다.
나는 가방에서 레이져검을 꺼낸다.
END.

이메일 주소는 aer0700@naver.com 입니다.

곧 군대 갈 녀석이 이런 곳에 이런 글을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재미...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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