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냉수

2010.12.03 18:5512.03

~똑똑똑

ㅡ... 누구세요?
ㅡ저 문 좀 열어주세요. 여태껏 이 오밤중에 사람 사는 곳 찾아다니다가 겨우 발견했습니다."


집 안의 사람은 작은 구멍으로 외부인을 보았다. 곧 문을 열어주었다.


ㅡ아이구, 감사합니다. 이 근방엔 온통 황무지뿐이군요. 하룻밤만 신세지고 가도 될까요?"
ㅡ아, 네에……. 괜찮습니다. 많이 추워 보이시네요. 안으로 들어오셔서 몸이라도 좀 녹이세요. 커피라도 한잔 드리겠습니다."
ㅡ커피보단……. 혹시 차가운 냉수 있나요? 갑자기 마시고 싶네요."
ㅡ냉수요? 뭐, 있기야 하지만……. 갖다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집에 살던 사람은 냉장고로 가고, 외부인은 소파에 앉아 집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곧, 집에 살던 사람이 냉수 한 컵과 자신이 먹을 커피 한잔을 들고 왔다.


ㅡ아 감사합니다. ... 그런데 저 혼자 사시나요?"
ㅡ네? 네. 그렇죠..."
ㅡ이런 외딴 곳에서 혼자 사시면 정말 외로우시겠군요. 그래도 집 이곳저곳에 꽤 사람들이 많이 다녀간 흔적이 있네요.
ㅡ... 그건 여기가 원래 마을회관이라 그렇습니다. 시설은 좋았지만 위치선정을 아주 잘못해서 폐쇄되고 지금은 마을 중앙에 설치됐죠. 전 여길 허락받고 사는 거구요.
ㅡ아. 그랬군요.
ㅡ그래도 있을 건 다 있습니다. 이따금 심심하면 혼자서 카드를 치기도 하고, 라디오도 듣고 은근히 재미가 쏠쏠하죠. 그나저나 이런 황무지까지는 어쩌다 오시게 된 겁니까?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요.


외부인은 뭔갈 말하려다 입을 그냥 다물었다.


ㅡ그냥 조그마한 일이 있어서 왔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길을 잃어버려서요..
ㅡ.. 아 그렇군요.. 음... 바로 주무실 건가요? 주무실 거면 이부자리 펴드리겠습니다.
ㅡ아 아닙니다. 지금은 아직 잠이 안 오는 터라..
ㅡ딱히 하실 것이 없으실 텐데...
ㅡ그럼 여기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으셨죠?
ㅡ네? 저야 뭐,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으니...
ㅡ음...
ㅡ저.. 사실 전 여기서 소설을 씁니다. 그.. 조용하고 풍경도 적막해서 소재가 잘 떠오르거든요.
ㅡ아, 정말요? 그 소설 한번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ㅡ아하하.. 아직 플롯만 짜고 있는 중이라...
ㅡ플롯만이라도 안 될까요?
ㅡ죄송합니다.. 좀 부끄러워서요...
ㅡ... 아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군요. 혹시 저 때문에 오늘의 작품 활동에 방해라도..?
ㅡ그건 아닙니다. 전 .. 그 낮에 작품 활동을 하죠.
ㅡ그렇군요...


잠시 고요한 침묵이 감돌다가 외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ㅡ우리 심심한데 카드게임이나 좀 할까요?
ㅡ아, 네. 그럽시다.
ㅡ트럼프로 포커나 원카드하기엔 좀 식상하고.. 진실게임이였나? 여튼 그거 하실래요?
ㅡ진실게임이요?
ㅡ게임이름이 자세히 뭔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서로 패를 나눠서 카드 한 장을 깔고 그 위에 번갈아가며 제일 밑의 카드와 같은 색의 카드를 계속 뒤집어서 올려놓는 게임이죠.
ㅡ아아... 뭔지 알겠네요. 같은 색이 아니더라도 계속 올리다가 상대방이 거짓말 같다고 의심되면 게임 도중에 뭔갈 외쳐서 다른 색이였으면 상대방이, 같은 색이 맞았으면 자신이 지금까지 낸 카드들 다 가져가는 거 맞죠?
ㅡ네. 잘 아시네요.
ㅡ그런데 이 게임을 둘이서 해도 재밌나요?
ㅡ재밌을 겁니다.
ㅡ... 알겠습니다. 카드를 가져오죠.


집에 살던 사람은 잠시 후 카드를 가져왔다.


ㅡ심심할 때 카드를 혼자 자주 치신다더니 먼지가 좀 많이 쌓여있네요.
ㅡ아, 요즘은 거의 안해서요..
ㅡ그렇군요.. 자, 밑에 놓을 카드 하나만 빼면 52장이니 섞어서 딱 반절 나눠가집시다.
ㅡ네.
ㅡ음.. 검은색이군요.. 저 먼저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정말 지루하게 번갈아가며 카드를 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외부인이 스톱을 외쳤다.


ㅡ어, 어. 잠깐만요. 카드 좀 한 번 봅시다.


집에 살던 사람은 쑥스럽게 웃으며 방금 놓은 카드를 보여줬다. 빨간색이었다.


ㅡ이야.. 그것 참 기가 막히게 잡아냈네요. 그냥 찍은 겁니까?
ㅡ처음엔 그냥 순서가 오는 대로 놓다가 어느 순간부터 생각하는 시간이 차츰 길어지더군요. 그리고 빨간색을 놓을 땐 미간이 살짝 올라가는 것 같더군요. 맞나요?
ㅡ네? 전 잘 모르겠네요.. 여튼 대단하십니다. 전 그냥 막 놓았는데 말이죠.
ㅡ막 놓긴요, 그 쪽도 절 흘겨보던데요? 그런데 좀 특이하시더군요. 얼굴이 아니라 몸통 쪽을 보시던데..
ㅡ아 그건 그냥 팔을 본 겁니다.
ㅡ그런가요? .... 그런데 재미없죠?
ㅡ... 솔직히 말해서 둘이서 딱히 재미를 느끼기가..
ㅡ하하, 저도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ㅡ아 아닙니다. 저야 이렇게 말동무가 잠시 생긴 것만으로도 기쁜걸요.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흐르다 외부인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ㅡ그나저나 이 마을은 어떤 마을입니까?
ㅡ아 여긴 처음이라고 하셨죠. 뭐 그냥 조용한 마을입니다. 안개가 착 내려앉아 있는 것 같아 좀 분위기가 으스스하긴 하지만 그냥 괜찮은 마을이죠.
ㅡ그런데 마을회관을 어떻게 이렇게 외진 곳에 지었는지 의문이군요.
ㅡ저희 마을 특성입니다.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집집마다 간격이 상당히 넓어요. 이 마을회관은 별장 분위기 나게 지은 거구요. 살짝 멀어서 흠이지만.
ㅡ그럼 여긴 이제 아무도 안 오나요?
ㅡ네.. 그럴 겁니다. 조금 멀기도 한데다 책임자도 없이 그냥 버려졌다시피 계속 있었거든요.
ㅡ..... 소설 쓰기 딱 좋으시겠네요.
ㅡ네.. 그렇죠..


외부인은 잠시 집에 살던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꺼냈다.


ㅡ음... 어느 정도 친해졌으니 저도 솔직하게 하나 얘기하죠. 전 사실 이 쪽에 뭔갈 조사하러 왔습니다.
ㅡ.... 뭐죠?
ㅡ그건 비밀입니다만.. 일단 사람이라는 것만 알려두죠.
ㅡ저랑은 상관없겠군요.. 세상과는 거의 동떨어져 살아왔으니..
ㅡ아주 악질인 놈이죠... 내일 동이 트면 본격적으로 찾아 볼 생각입니다.
ㅡ잘 찾으시길 바래요...
ㅡ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종이뭉치들은 뭐죠?
ㅡ아 신문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모아놓았던 거죠. 마을 자체발행신문인데 제가 신문을 안 버리고 모으는 습관이 있어서...
ㅡ조금 봐도 되겠습니까?
ㅡ... 네. 상관없습니다.


외부인은 종이뭉치에서 차근차근 신문들을 읽어보았다.


ㅡ마을에서 발행하는 것 치고는 꽤 잘 만들었군요.
ㅡ그렇죠? 저도 그런 생각 했었는데..
ㅡ..... 여기 오신 지 어느 정도 되셨죠?
ㅡ네? 그건 왜...


집에 살던 사람은 달력을 보며 말했다.


ㅡ그... 4월 6일에 여기 왔었죠.


외부인은 시계를 봤다.


ㅡ오늘이 4월 20일이니.. 온 지 며칠 되진 않았군요.
ㅡ네...
ㅡ그런데 신문이 왜 3월 3주차까지밖에 없죠? 4월 초에 왔으면 4주차도 있을 것 같은데...
ㅡ... 그 땐 짐 정리하느라 좀 바빠서요..
ㅡ아.. 그렇군요...


외부인은 신문을 마저 훑어보다가 다시 정리를 해놓았다.


ㅡ그런데.. 안 주무시나요? 벌써 자정이 지났는데...
ㅡ제가 좀 늦게 자는 편입니다. 가지고 온 책이나 좀 읽다 자죠. 졸리시면 먼저 주무세요.
ㅡ저도 꽤 늦게 자서요.. 그럼 전 소설 구상이나 좀 하다가 자겠습니다.
ㅡ네. 아, 잠자리 제공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ㅡ아니에요. 지금 이 밤에 갈 곳도 없을 텐데...
ㅡ그러고 보니 오면서 들은 말인데 이 마을에 얼마 전에 살인마가 돌았었댔죠? 4명인가 죽이고 갑자기 사라졌다던데.. 저도 밖에서 그냥 자려다가 무서워서 집을 찾은 거죠.
ㅡ아 정말요? 전 여기 박혀 살아서 잘 모르겠네요... 그런 일이 있었다니..
ㅡ마을사람이었는데 그런 것도 몰랐나요? 마을이 정말 흉흉해졌다네요..
ㅡ큰일이군요..


외부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ㅡ... 살인마가 돈 건 3월이었다고 하던데 정말 모르십니까?
ㅡ..... 절 의심하는 건가요?
ㅡ아 아닙니다. 단지 뭔가 이상해서요.
ㅡ전 선량한 사람입니다.


외부인은 들고 온 가방에서 몽타주 그림을 꺼냈다.


ㅡ빌 스미스씨... 맞으시죠?
ㅡ.........
ㅡ맞으시네요. 얼굴이 딱 똑같은데.
ㅡ절 잡으시러 오신 겁니까?
ㅡ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ㅡ저... 전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현장에 있었을 뿐이라구요!
ㅡ네. 네. 그러시겠죠... 그런데 이곳에 왜 도망쳐오신겁니까?
ㅡ으으... 전 그냥 그 때 실루엣만 보이는 위치에서 마지막에 그 사람 뒷모습만 본 것뿐이라고요! 그런데 사람들이 절 범인으로 몰아가려고 하니...
ㅡ.... 안타깝군요.. 전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것입니다.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나요?
ㅡ이제 필요 없습니다. 전 그냥 여기 쭉 갇혀 살 꺼 에요!
ㅡ여기서 말 안 하시면 당신을 바로 경찰로 넘기겠습니다. 전 이런 걸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죠...


빌 스미스는 의자에 앉아 잠시 고민을 하다 자신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자신이 본 상황을 그대로 다 말했다.


ㅡ꽤나 자세히 보셨군요.. 실루엣만 보이는 위치에서 그렇게 상세하게..
ㅡ보인 걸 어쩌라구요! 다행히 그 놈 눈에 안 띄어서 다행이지, 무서워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ㅡ... 그 범인에 대해서는 뭘 보셨나요?
ㅡ그냥 뒷모습뿐이었습니다.
ㅡ아니 뭐 특징적인 것이라도?
ㅡ전 모릅니다! 아 목 뒤에 하트무늬의 문신이 있었을 겁니다.
ㅡ... 정말입니까?
ㅡ네..
ㅡ당신 목 뒤 좀 봅시다.
ㅡ이 사람이 진짜...


빌 스미스는 웃통을 벗고 목 뒤를 보여줬다.


ㅡ... 없군요.
ㅡ맞잖아요.. 전 범인이 아닙니다.
ㅡ음... 그런데 당신에겐 한 가지 흠이 있습니다.
ㅡ네?
ㅡ.... 너무 많이 알고 계시군요.
ㅡ네?
ㅡ제 목 뒤를 보시죠.
ㅡ........!!

외부인은 가방에서 총을 꺼내 빌 스미스에게 겨눴다.

ㅡ여기서 당신만 죽이면 이 사건은 미스터리로 남고 깔끔하게 문제없이 끝납니다.
ㅡ이... 씨...씨발.. 아 어떻게 이런 일이..
ㅡ보고나서 아무 말 안 하셨으면 상관없으실 텐데 너무 말을 많이 했군요.
ㅡ진실은 말해야 되는 거니까요...
ㅡ아니죠. 이런 건 그냥 눈감아주는 겁니다. 그랬으면 이런 비극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죠.

탕!

ㅡ윽...으...
ㅡ... 수고하십시오. 전 물이나 마시고 가야겠군요.

탕!

외부인은 빌 스미스에 이마에 총을 한 번 더 쏘고 물을 한 번에 들이켜고 밖으로 나섰다.

ㅡ윽.

외부인은 갑자기 숨이 턱 막히더니 문 앞에서 쓰러져 죽어버렸다.
집 안의 빌 스미스는 안도의 표정을 지은 채로 죽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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