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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항로

2014.07.24 05:4707.24

항로

 

일어나자마자 입 안에서 텁텁함이 느껴졌다. 투명한 유리 천장 뒤로 하늘이 조금씩 흘러간다. 그리고 몸이 약간 흔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길지는 아직도 자신이 바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 전까지 느꼈던 차가운 기운이 어쩐지 없다. 손으로 어깨를 쓰다듬자 따스한 기분이 들었고, 그는 창을 열어 밖을 내다봤다. 갑판 위에서 남자가 담배를 태우고 있다. 길지는 남자가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계속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타고 있던 어선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큰 요트다. 남자가 새로 담배를 꺼내 문다.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걸었는데, 아직 어지러운 기운이 남아있었다. 길지는 갑판 위로 올라갔다. 가까이서 바라보니 남자의 옷차림은 군데군데 찢어지고 헤진 곳이 많았다.

일어났어요?”

남자는 담뱃재를 털고 꽁초를 바다 속으로 던진 다음, 몸을 돌려 갑판 손잡이에 등을 기댔다.

, .”

길지는 입 속에 남아있던 소금기를 혀로 모아 침으로 만들어 뱉은 다음, 남자에게 부탁해 담배 한 대를 빌렸다. 한 모금 빨고 내뱉는 느낌이 조금 낯설게 느껴져 길지는 핑 도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몸은 좀 어때요?”

, . 괜찮아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길지가 타고 있던 배는 난파되어버렸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모두 다섯 명. 배는 북쪽의 섬으로 가던 길이었다.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떠올려보려 했지만 이상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그곳이 항해 방향을 기준으로 남쪽이었다는 것뿐이다. 바다로 나간 지 삼일 째 되던 날, 폭풍우가 몰려왔다. 보고도 믿기 힘든 거센 물결과 바람, .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지금 살아있는 것을 보면 구조 받았다는 사실만은 틀림없었다.

전에 있던 배에는 몇 명 있었어요?”

남자가 물었다.

다섯 명이요.”

다섯 명.”

남자는 길지의 대답을 똑같이 반복했다.

한 명은 항해 도중 자살했습니다.”

자살 했다구요?”

남자가 왜 자살했느냐는 말에 길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다만, 그가 원래부터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하고 이야기 해 주었다. 길지가 함께 항해를 시작했던 사람들은 모두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어디로 가던 중이었는데요?”

북쪽이요. 친구 한 놈이 어디서 지도를 가져왔거든요.”

항해는 친구 한 명이 가져온 지도 때문에 시작됐다. 지도의 붉은 ×자 표시는 바다 북쪽 한 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슨 뜬금없는 보물 지도냐며 우습게 넘길 차에 길지는, 자신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몇 년 간 쓸 일 없던 작은 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소주 한 병이 더 돌아갔다. 작은 어선 정도는 운전할 수 있다고 다른 친구가 소리쳤다. 기세를 몰아 평소에 소심했던 친구조차 그럼 한 번 가보자고 농담조로 이야기를 늘어놨고, 어쩌다보니 일은 그렇게 결정 되어버렸다.

그런데 북쪽엔 아무것도 없을 텐데요.”

남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의 손은 다시 담배를 찾기 시작했다.

이 배는 남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남쪽에는 말이죠

구조 받은 건 저 혼자입니까?”

길지의 물음에 남자는 말을 멈추고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게 붙어있는 수염이 쌉싸름한 느낌을 좀 더 현실감 있게 드러냈다. 길지는 배가 난파된 후, 끈덕지게 살려고 발버둥 쳤던 기억이 떠오르려는 것을 애써 지워냈다. 다섯 명으로도 꽉 차 보이는 작은 배였기에 준비된 구명 튜브는 두 개 뿐이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이 차지했고, 다른 하나는누군가 챙겼거니 했다.

이 배 선주 되십니까?”

이번엔 길지가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실저도 얼마 전에 구조 받은 사람입니다. 남쪽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중간에 거대한 암초를 만나서 따뜻한 섬으로 가려던 계획이 완전 틀어져버렸고. 살아남은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배에는 구명 튜브 하나 없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판자 떼기로 용케 살아남아서.”

남자는 얘기를 하면서 다시 몸을 돌려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연기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구조 받았다니, 누가 구조 해줬습니까?”

남자는 손가락으로 길지의 뒤를 가리켰다.

조타실에 가면, 럼을 달고 사는 알콜 중독자 한 명이 있습니다.”

길지는 조타실에 사람이 있다는 말에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남자에게 잠깐 보고 오겠다고 말한 뒤, 조타실을 찾았다. 확실히 열댓 명 정도 탈 수 있을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사람이 더 있을 것이 분명했다. 길지는 가는 도중 선상에 말라붙은 검은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조타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덩치 큰 사내 하나가 럼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배는 자동운행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길지가 인사하자 그는 말없이 잔을 건넸다. 받아든 잔을 들이키자 혀 안쪽으로부터 느껴지는 쓴 맛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술은 미지근했다.

이름이 뭐요?”

조타수는 대뜸 물었다. 큰 체격과 두꺼운 입술, 남자다운 눈매에 비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길지는 생각했다.

길지입니다. 남길지.”

조타수는 바로 자신을 C라 밝혔다. 셰프의 앞 글자를 따서 C로 지었다는 것이다. 길지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C는 웃어보였다.

그럼 자네도 N이라고 하던지.”

C는 사실 조타수가 아니라 요트 파티 동안만 고용되어 있었던 일용 요리사라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원래 배의 선주는 돈이 많고 방탕한 20대 남자였다. 며칠 전, 열 명 정도 젊은 손님을 함께 태우고 배가 출항했고, 배가 떠있는 동안 자신은 매일 술과 호화로운 요리들을 대령해야 했다. 파티를 위한 항해였기에 목적지는 없었다. 마침, 꽁띠를 와인 냉장고에서 꺼내려 했을 때였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뭔가 이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어. 원래 술 들어가면 맨날 여기저기 소리 질러대는 방탕한 년 놈들이었으니까. 근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야. 파트너도 돌아오지 않았고. 한참을 오질 않으니까 뭔가 이상해서 밖으로 나가봤는데.”

그가 선상으로 나갔을 땐 이미 모두가 죽어있었다고 했다. 달도 없는 밤이었다. C는 그곳에 쓰러져있는 사람들을 붙잡고 그들이 죽은 것을 확인했다. 산 사람은 없었다. 파트너는 어디 갔는가? 날이 밝자 시체 몇 구가 부족해보였다. 격렬한 몸싸움의 흔적이 선상 벽과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선체 외곽 쪽의 손잡이에도 피가 잔뜩 묻어있어, 몇몇은 바다 속으로 빠져 죽었으리란 짐작을 가능케 했다. C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친 것만은 기억났다. 원래 있던 조타수조차도 배를 자동운행에다 걸어놓고 정신없이 취해있었기에 배는 계속 해서 흘러갔다. 혼자만 남은 그가 정신을 차리고 조타실로 들어갔을 땐 이미 사방이 망망대해였다고 했다.

왜 죽었을까요.”

글쎄. 싸웠겠지.”

왜 싸웠을까요.”

원래 어린놈들일수록 더 방정인 법이지. 그냥 생각이 달랐던 거야. 거기에 술까지 거하게 마셨으니 뭐 할 말 다 한 거지. 내 파트너도 그냥 거기에 말려들어 버린 거고. 풍덩, 하고 떨어진 거야.”

C는 또다시 럼을 잔에 따르고 있었다. 술병을 내밀며 길지에게 한 잔을 더 권하자 길지는 손을 흔들어 괜찮다고 했다.

이 배, 지금 어디로 가고 있어요?”

길지의 물음에 C는 남쪽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원래는 동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는데 항로가 바뀌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왜요?”

“S와 싸운 뒤였지.”

“S?”

길지는 갑판 위에서 만났던 남자를 떠올렸다.

객실에서 담배 끌어다 태워대는 수염쟁이 말이야. S는 남쪽에 따뜻한 섬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것보다는 좀 더 확실한 쪽에 걸고 싶었거든. 애초에 생각해봐. 내가 아까 그 일이 있고나서 키를 잡았다고 했지? 그 때 배는 서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단 말이야. 그럼 다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겠나? 약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동쪽으로 가는 게 일단 백번 나은 생각인걸 알지. 그런데도 S는 계속 남쪽을 고집하니까 아주 그냥 미칠 노릇인거야. 물론 힘으로 치자면 내가 당연히 질리는 없겠지만, 걔한테는 그게 있었어. 무서웠던 게 아니라 더러웠던 거라구.”

길지가 그게뭐냐며 채 묻기도 전에 CS를 조심하라며 성급히 말을 맺었다. 길지는 잠시 그 다음 할 말을 잊었다. 왜 남쪽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있던 그는 단순히 그런 의미라면 가야할 방향은 북쪽이라 얘기했다.

북쪽?”

얼마 전에 친구가 지도를 한 장 들고 왔습니다. 북쪽 바다 한 가운데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펜에 가려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섬이었고요.”

그 지도 지금 있나?”

길지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빼자, 검푸른 해초가 손등에 딸려 나왔다.

마지막으로 제가 가지고 있었는데, 도중에 잃어버린 것 같네요.”

친구는 그 지도를 어디서 가지고 왔다던가?”

글쎄요. 그런 건 잘. 어디서 우연히 주웠다든가 그런 건 아닐 겁니다.”

?”

찾아다녔을 거예요.”

C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길지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근데 남쪽에 따뜻한 섬이 있다는 거, 결국 말뿐이잖습니까?”

, .”

제가 S를 잘 설득한다면 어떠세요?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주시겠습니까? 어차피 남쪽이나 북쪽이나아저씨가 원하는 방향은 아닐거구. 기왕 남쪽으로 갈 거라면 북쪽이 나은 게 뻔한데, 손해 보는 건 없을 겁니다.”

, 설득을 할 수 있다면야.”

길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S는 분명히 자신이 설득할 것이니 우선 방향부터 북쪽으로 돌려달라고 했다. C가 자신 있느냐고 되묻자 길지는 대답대신 럼을 한 잔 따라주었다. 길지가 조타실 문을 나서려할 때 C가 물었다.

그렇게 북쪽을 고집하는 이유가 뭔가?”

반대니까요.”

그리고 길지는 갑판으로 돌아가는 대신 자신이 있던 방으로 들어가 다시 잠을 잤다.

 

배 안에 있는 사람은 길지와 C, S, 이렇게 세 명이 전부였다. 사람이 늘지도, 줄지도 않았고 사방으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바다 뿐 이었으므로 매일 똑같은 날들이 계속됐다. 식사는 대부분 통조림으로 때웠고, 어제 저녁에는 C가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S는 많은 시간을 갑판에서 보내는 듯 했다. 갑판 위에서 그는 종종 줄담배를 즐겨 피웠고,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았기에 별로 무료해보이지는 않았다. C는 처음에 몇 번 식사를 만들어준 것 외에는-그 뒤부터는 통조림을 먹었다- 거의 모든 시간을 조타실에서 보냈다. 잠도 그곳에서 자는 것 같았는데, 길지는 어차피 자동운행이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신경을 끄기로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길지가 막 잠이 깼을 때,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잠금쇠를 풀자 곧 S가 문을 밀치듯 안으로 거칠게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길지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C한테 들었습니다. 당신이 방향을 북쪽으로 바꿨다구요.”

길지는 그러고 보니 S를 설득하기로 했었는데, 그걸 까먹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변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 제가 북쪽으로 가자했습니다.”

S는 화가 난 표정으로 따지듯 물었다.

왜 북쪽으로 가자는 겁니까? 거긴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망망대해라구요.”

어쨌든 남쪽으로 가는 것보단 나아요.”

?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거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길지는 S가 지금 이상할정도로 흥분해있다고 생각했다.

북쪽이야 말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구요? 제가 북쪽에서 내려왔기 때문이죠. 배가 난파되기 전에.”

그럼 거기에 선착장이 있겠네요.”

아뇨, 아무것도 없는데요.”

길지는 S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어쩌면 약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S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걸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려 했지만 쉽사리 떠오르는 건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식량 때문에 마음이 다급해진 것이라 생각해도 개운하진 않았다. S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번뜩였다. 그는 작은 나이프 하나를 바로 꺼내 길지의 목에 겨눴다.

전 해적입니다. 더 나은 곳을 찾아서 끊임없이 바다를 타는 해적! 그런 제가 북쪽에서 내려왔다는데 왜 내 말을 듣지 않죠? 북쪽엔 아무것도 없어요, -무것도.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북쪽으로 가자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증명합니다. ? 이해됐죠? 지금 당장 배를 돌립시다. 길지씨는 북쪽으로 가고 있었으니까 아마 그 반대편에서 출발했겠죠. 남쪽이야 말로 따뜻한 섬이 없다면 뭐라도 있을 겁니다. 길지씨가 고등학교 동창들과 항해를 계획했던 술집도 거기 있을 거구요. 배를 돌리라고 어서 C에게 전해요.”

길지는 S가 말하는 중간중간 고개를 젓고 싶었으나 목에 들어와 있는 칼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칼을 들고 있던 손이 서서히 내려갔고, 방을 빠져나와서 길지는 C에게 배를 남쪽으로 돌려달라고 말했다. C는 길지의 몰골을 훑어 본 다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을 먹고 갑판 위에서, S는 길지에게 담배를 건네며 아까는 미안하다고 했다. 길지는 담배를 받으며 괜찮다고 했다. 남은 식량을 셋이서 먹으면 앞으로 하루에 두 끼로 줄인다 해도 일주일 정도 밖에 버틸 수 없었기에,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확실히 하는 게 옳았다. S는 먼저 객실로 올라갔다. 길지는 남은 담배를 피우는 동안 생각을 정리한 다음 조타실로 갔다. C는 럼을 마시고 있었고, 배는 자동운행인 것 같았다.

배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남쪽.”

C는 짧게 대답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배는 북쪽으로 가야합니다.”

자네가 남쪽으로 가라했잖나?”

길지는 자신이 협박받은 것이라 얘기했다. 또한 오늘 아침 S가 찾아와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었으며 본인을 해적이라 밝혔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해적?”

한 마디로 낙오자 같은 겁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남에게 피해나 안 주면 다행인데, 그것도 아니죠. 꼭 약탈만 하고 다니는 게 전부는 아니지만 어쨌든 존재 자체가 해악인, 그런.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칼도 들이댔다고. 아저씨가 말한 그게 그 것아니에요?”

길지는 온힘을 다해 해적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C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길 바랐다. 럼을 많이 마신 탓인지 C의 볼은 조금 빨갰다. C가 다시 럼을 따라 한 번에 쭉 들이키는 동안 길지는 다음 말을 내뱉을 준비를 했다.

그를 죽여야 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길지는 아까 설명한대로 그가 해적이기 때문에 위험하며, 두 번째로 남은 식량이 앞으로 하루 두 끼를 먹어도 세 명이서는 일주일 분밖에 되지 않는 다는 점과 마지막으로 남쪽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가 남쪽에서 왔기 때문에 잘 압니다. 남쪽엔 아무 것도 없어요, 거길 가면 우린 다 죽습니다. 굶어죽던가, 아님 어떻게라도.”

“S도 비슷한 말을 했었네. 북쪽엔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전 나아갈 겁니다, 어쨌든. 다시 돌아가는 건 싫다구요.”

잠시 간 정적이 있었다. 길지는 오른쪽에 놓여있던 럼을 한 잔 따라 마신다음 표정을 구겼다.

그가 혹시 남쪽 이야기를 하면서 그 섬이 있다는 어떤 근거라도 댔습니까?”

C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바로 거짓말 이라는 겁니다. 해적 놈들이 원래 그렇죠. 바다를 떠돌면서 가끔씩 마약도 하고 말입니다, 바다 속에서 하루 종일 살다보니까 정신이 헤까닥 돌기도 쉽고. 남쪽 섬이라는 건 그냥 만들어낸 상상이죠. 말하자면 낙원 같은 겁니다. 그런 건 사실 아무데도 없어요. 그거에 비하면, 북쪽은 달라요. 분명 눈에 보이는 지도가 있습니다.”

그 지도는.”

있었어요, 분명.”

길지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C는 배를 다시 북쪽으로 돌려주겠다고 했다. 길지가, S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것에 대해선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길지는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말한 다음 조타실을 나왔다. S는 자고 있을까. 아니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뭘 하고 있든,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다고 판단했다. 길지는 무덤덤하게 주방에서 식칼을 챙기고 객실로 올라가면서 자신의 입 안에서 약내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담배를 너무 피워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는 S의 방문을 노크했다.

노크에 반응한 S는 방금 잠에서 깬 나른한 모습이었다. 길지는 우선 칼을 S의 목에 겨눌 참이었다. 물론 S 역시 칼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웃통을 벗고 아래엔 팬티만 입고 있는 그의 지금 모습으로서는 아무런 위험요소가 없었다. 식칼을 든 손을 치켜들어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댔는데 조금 문제가 생겼다. 식칼이 길지의 생각보다 너무 길었던 탓에 칼끝이 성대와 쇄골 사이의 목 아래쪽을 찌른 것이었다. S는 짧게 신음을 질렀고, 당황한 길지는 칼을 더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이윽고 붉은색 선혈이 가늘게 삐져나왔다. 길지는 한동안 취한사람처럼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식량이 부족했기에 다음 날부터 아침은 먹지 않기로 했다. 길지는 서랍장에서 통조림 두 개와 럼 한 병을 꺼내, 통조림 한 개는 자신이 먹고 나머지는 조타실에 갖다 주었다. C는 통조림과 럼을 받으면서 길지에게 전날의 사정을 듣고는 객실로 올라가 차갑게 식은 S를 들쳐 업은 뒤 바다에다 버렸다.

당연히 기분 좋은 건 아니지만그 날 시체를 하도 버리다보니 별 감흥은 없지.”

C는 다시 조타실로 들어갔다. 길지는 S의 방에 들어가 담배 몇 갑을 챙겨 나왔다. 담배 옆에는 그것이 놓여 있었는데, 그는 칼 손잡이에 새겨진 문구를 보았을 때 그만 웃음이 나올 뻔 했다.-We are Pirates. 적당히 주머니를 채우고 나오려는데 바닥 군데군데 길쭉한 핏자국들이 기어 다녔기에 그는 그것을 밟지 않으려 애썼다. 갑판 위로 나와 담배를 태우면서 길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배는 이상할 정도로 순항하고 있었다. 비는 단 한 차례도 오지 않았으며, 북쪽으로 방향을 돌린 다음부터 바람은 계속 순풍이었다. 이대로라면 곧 섬이 보일 거였다. 섬에는 무엇이 있을까. 설마 아무 것도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벌써 담배 한 대를 다 피웠다. 그는 한 대를 또 물었다. 쓸데없는 물음들이 자꾸 길어지니까 담배나 계속 물게 된다고 생각하며 다 태운 꽁초를 바다에 던지고 객실로 올라갔다. 방문을 열고 천천히 침대로 가 누웠다. 졸지에 살인자가 됐다는 사실이 조금 우스워졌다. 옛날부터 싸움은커녕 집 밖으로도 잘 안 나가는 놈이었는데. 어차피 상관없었다. 섬으로 갈 생각이니까. 나머지 놈들은 어떻게 됐을까. 죽었을까, 살았을까. 구조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짝이는 운과, 보다 강한 생존의지가 잘 맞물려야 이런 행운도 잡을 수가 있는 법이지. 방구석 폐인과 노름꾼, 우울증 환자와 양치기가 한데 섞여 이 기막힌 항해가 시작됐다. 그 중 정말로 섬에 가는 건 자신뿐이군, 하며 콧김을 한 번 뿜고 길지는 눈을 감았다. 처음 어선에 오를 때 분명 다섯 명이었지, 아마? 나머지 한 명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건 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섯 명이 둘러앉아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도를 가져왔던 양치기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이 섬에 뭐가 있을 것 같냐?” 안주로 시켜놓은 오뎅탕이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다. “뭐야 이거. 무슨 지돈데?” 누군가가 되물었다. 지도 가져온 놈이 그걸 알아야지, 하는 말도 덧붙였다. “뭐라도 있으니까 가는 거지?” 방구석 폐인이 끼어들었다. “아 글쎄, 이게 뭐냐니까?” 노름꾼도 거들었다. “북쪽으로 계속 가면 돼.” 양치기가 모두에게 말했다. “북쪽? 총 맞아 죽을 일 있냐.”, “아니 그 북쪽이 아니라.” “그럼 뭐, 판타지야? , 너도 쟤 따라 정신 놨어?” 누군가가 방구석 폐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신을 놔? 이 새끼가.”, “, 고만들하고. 정말 그런 곳 없냐. 아주 그냥 돈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열리는. , 돈이나 실컷 만져봤으면 좋겠다.” 노름꾼이 양 손바닥을 멍하니 들여다보며 말했다. “시나리오 쓰고 있네. 열매에 돈 열리면 어따 쓰게. 또 노름판 가서 손모가지 좀 날려봐야 정신 차릴래?”, “난 죽으러 갈래.” 우울증 환자가 그 와중에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 이 새낀 또 왜 이래? 에휴, 쓰바. 남은 오뎅 니가 다 쳐 먹어라.” 우울증 환자가 말없이 국물을 떠먹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장면은 조금씩 형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하는 소리가 그 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폭우다. 여태껏 한 방울도 안 오더니. 창문 밖을 내다보니 이미 웃어넘길 상황이 아니었다. 간헐적인 천둥소리와 세찬 빗줄기. 그 때와 똑같았다. 비틀리던 작은 배, 그리고 혼란. 그런 것들을 견뎌내기에 우리는 좀 더 현실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지만 그것을 구태여 곱씹을 필요는 없었기에, 길지는 급하게 객실에서 나와 조타실로 향했다. 입었던 옷 그대로 잠들어 굳이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다. 선상에 쏟아지는 비 때문에 말랐던 옷은 금방 다시 젖었다. 조타실 문을 열자, C는 럼을 마시고 있었다. 마지막 잔이었다. 배가 여전히 자동운행인 것 같았기에 길지는 화가 났다.

미쳤어요? 폭우, 폭우라고요! 어서 키를 잡아요, 어서!”

잊었나? 난 요리사야! 운전할 줄 모른다고.”

천둥과 빗소리에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길지와 C 모두 목청껏 외쳤다.

배는 어느 쪽으로 가고 있습니까.”

, 북쪽이라고.”

길지는 C의 몸에 가까이 붙었다. 이미 폭풍우에 한번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다. 배를 운전해야한다.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이대로 두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섬을 앞에 두고 죽을 수는 없다. 배가 파도에 들썩였다.

제가 운전할게요.”

잠깐, 잠깐만!”

C가 흥분하며 길지의 팔을 제지했다.

왜 이래요!”

길지는 소리치며 C의 팔을 뿌리쳤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는데 뭔가 이상했다.

이게 뭐죠?”

길지가 손으로 조종판을 가리켰다.

동쪽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야.”

C가 체념한 어조로 대답했다. 길지는 머리가 아파왔다.

동쪽이라구요?”

처음부터 동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숨겨서 미안하네.”

하하.”

길지는 웃음을 흘렸다. 실소에 가까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길지는 분노했다. 그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동쪽이라구요?”

길지가 되물었다. C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남쪽, 북쪽 했던 건 그냥 거짓말이었습니까?”

그때그때 잠깐씩 돌렸던 건 사실이야. 물론 곧 다시 방향을 바꿨지만.”

동쪽으로 가는 이유가 뭡니까? 북쪽도 아니고, 남쪽도 아니고 동쪽으로 가는 이유가 대체 뭐냐구요!”

조타실의 열린 문 안으로 비가 들이쳤지만 길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쪽과 북쪽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 망망대해라고! 너희들이 찾고 있었던 건 그냥 실체가 없는 것들이야. 섬은 없어. 그것들은 그냥 머릿속 낙원일 뿐이야.”

C의 얼굴 역시 불그스름해졌고, 그 사이에 천둥은 세 번이나 더 내리쳤다.

내가 너희들을 바다에서 왜 구했는지 모르겠나?”

모르겠어, 모르겠다구요.”

너흰 너무 어려. 치기만 가득하지. 우린 돌아가야 돼.”

길지는 순간 주변이 너무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빗소리, 천둥소리. 거기에 누군가는 계속 동쪽을 외치고 있다. 무언가에 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길지는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해적 나이프로 C를 힘껏 찔렀다. C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금이라도 방향을 틀면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다. 버튼 몇 개만 누르면 될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길지는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기절해버렸다. C는 깨진 럼 병을 한 손에 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번쩍, 하고 사방이 순간 환해졌다. 천둥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눈을 뜨자 머리가 지끈했다. 길지는 머리를 매만졌다. 쓰리다. 굼벵이처럼 몸을 이리저리 천천히 돌려봤다. 머리가 아픈 것 빼고는 멀쩡하다. 비는 어느새 그쳐있었다. 조타실의 열린 문으로 새어 들어왔던 비 때문에 옷이 젖어 축축했다. 감기에 걸렸는지 목은 좀 칼칼한 기분이었고, 길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조타실 기판을 바라봤다. 동쪽. 그는 입을 앙다문 채, 양손으로 기판을 세게 내리쳤다. 그 옆에는 C가 의자에 앉은 채로 축 늘어져있었다. 그의 옆구리에 꽂혀있던 칼을 빼내자 주륵, 하고 고여 있던 피가 조금 흘러 떨어진다. 조타실을 나와 피에 절어 있는 칼을 바다에 던졌다. 해적은 가라앉는다. 길지는 어떡하면 좋을지 몰라 일단 객실로 들어가 누웠다. 축축한 기분 때문에 불쾌하다. 젠장. 식량 여분도 거의 남지 않았다. 혼자 하루에 한 끼씩 먹어도 이제 섬으로는 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요리사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C는 저주의 이니셜을 뜻하는 게 분명하다. 이 빌어먹을 새끼.

말하자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반전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해적을 죽인 이유는 그럼 뭐란 말인가? 그리고 더 웃긴 건 방구석 폐인이 보름도 되지 않아 사람을 벌써 둘씩이나 아무렇지 않게 죽였다는 것이다.

 

한참 죽은 C 욕을 하고 있는데 순간 쿵, 하는 충격음과 함께 배가 흔들렸다. 그리고 배가 섰다. 길지는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뱃머리가 선착장에 박혀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몇몇 사람이 놀란 듯 서 있었다. 약간 멍한 채로 길지는 갑판 맨 앞으로 갔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생각났다. 작은 배에 함께 올랐던, 이 미친 항해의 다섯 번째 친구. 네가 남은 구명 튜브를 챙겼구나.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길지는 잠깐 웃음이 났다. 크게 소리 내어 몇 번이고 계속 웃었다.

괜찮으세요?”

선착장 주변에서 근무하던 구급요원 두 명이 뱃머리를 타고 길지에게 다가간 다음, 안색을 살폈다. 그는 웃음을 간신히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사람이 죽었어요.”

길지가 손가락으로 뒤편을 가리키자 요원들이 조타실로 들어가 C의 시체를 실어 날랐다.

혹시, 더 없습니까? 죽었다거나, 다쳤다거나.”

있어요, 네 명.”

길지는 C가 실려 나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아니, 열네 명 정도.”

그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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