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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어느 새벽에

2014.07.06 03:0107.06

새벽 1시 반, 문득 별이 생각나서 밖을 나섰다. 바깥에 나서 온몸에 시원하게 달라붙는 공기를 코로 들이마신 뒤 한껏 고개를 젖히고 내뱉었다. 


고개를 들며 자연히 하늘로 올라간 눈동자엔 밤하늘을 닮은 짙은 남색만이 자리잡았다. 별빛도 달빛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은 그저 무덤덤할 뿐이었다.


사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냥 집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 어딘가로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나왔던것 뿐이다.


술집 가게들의 불빛을 뒤로하며 얼마간 걷자 편의점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목이 칼칼해 무언가에 홀린듯 무작정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 안에는 손님 한두명과 당연하게도, 밤을 새는 알바생 한명이 있었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그 목적은 신기하게도 제각각이었다.


아무 목적없는 나와는 다르게 각자 목적에 따라, 돈을 위해서 혹은 유흥이나 기타 무엇인가를 위해서 밖에 나온 사람들이다.


왜 나는 그들과 다를까. 왜 아무 목적없이 나왔을까.


잠깐 자괴감에 빠져있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그들과 다르지 않다고 증명이라도 하듯 맥주 한캔과 과자 두봉지를 집어 계산했다. 


"3천 3백원입니다."


알바생의 말에 흠칫 했다. 내가 지갑을 가지고 나왔던가. 그렇다면 충분한 돈은 가지고 있는가. 안가지고 왔으면 쪽팔려서 어떻하지 하는 생각들이 순간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손은 생각보다 빨랐고 어느새 지갑에서 돈을 꺼내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지갑을 챙겨 나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빈털털이로 다시 집으로 돌아설 뻔 했다.


증명의 전리품을 들고 왔던길을 되돌아가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주황색 전등이 나를 반겼다. 의욕없는 나를 반기는건 이녀석밖에 없는가보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2시 반. 보통의, 정상적인 리듬의 사람들이라면 꿈나라에 빠져들었을 시간이지만 집에 들어온 나는 습관적으로 노트북과 TV를 켰다.


따로 이유가 없었다. 왠지 허전했을 뿐.


TV에서는 벨기에와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축구경기가 한창이었다. 노트북은 괜히 켰던것 같이 느껴져 전원을 끄려는 순간 쌔한 느낌이 목 뒤를 쑤셔왔다.


뒤를 돌아보자 하얀 벽 한켠에 돈벌레라고 불리는, 그리마가 자신의 수많은 다리를 뽐내며 붙어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디서 들어왔을까, 들어올 구멍이 없을텐데. 혹시 내가 이 시간에 나가서 잠깐 열렸던 문 사이로 들어왔을까. 그 짧은 시간에 들어올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이었으니 그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지만,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허비했지만 그순간에도 그리마는 그자리를 고수했다.


정신을 차리고 휴지를 찾았지만 오늘 낮에 다싸버린 휴지심만이 나를 반겼다. 세상에, 엎친데 덥친 격이었다.


이 일련의 사태를 결국 종이컵으로 그리마를 가둬놓음으로써 끝마쳤다. 그 후 우여곡절로 봉지에 넣어 묶어버렸다. 당장 봉지를 버려야 겠지만 또 다른 벌레가 들어올까 무서워 결국, 나가질 못했다.


현재시간 2시 반, 그리마를 삼킨 검은 봉지는 제 입을 닫고 방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있었고, 아까 켜둔 TV속 축구 경기는 저들끼리 혼신의 힘을 다해 후반전에 임했다.


생방송 해설의 그 단어 그 사이사이로 검은 봉지가 영 갑갑하다는 듯 그리마가 봉지 안을 움직이며 스스슥 소리를 냈다..


스스슥거리는 그 소리가, 너무 거슬렸다. 


너무 거슬리면서도, 내 처지가 내가 가둬둔 그리마와 비슷한 것 같아 왠지 착잡했다. 단지 다른게 있다면, 자의로 나가지 못하는가 타의로 나가지 못하는가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온 맥주는 이미 미지근해졌고, 축구 경기는 어느덧 끝나있었고 나는 내일을 준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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