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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불면

2013.07.15 23:2507.15


  불면



  마법사는 의식에 필요한 마지막 도구를 설명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눈그늘이 짙게 여린 눈동자는 차갑게 빛을 내고 있었다. 마법사는 침실 중앙에 준비된 마법진을 오가며 마지막 도구, 크리스탈에 대해 묘사했다. 마법진 외곽에 놓인 촛불의 빛을 촛대에 달린 반원의 은거울들이 마법진 중앙으로 모으고, 중앙의 사파이어를 투과한 빛을 다시 크리스탈이 마법진과 침실의 곳곳에 비춘다. 마법사가 원하는 곳에 정확히 빛이 닿기 위해선 크리스탈을 복잡하고 정교하게 가공해야 했다. 마법사는 크리스탈의 모양을, 특히 각 가공면의 각도를 반복해서 강조했다. 그럴 때마다 마법사는 보석공이 양피지에 받아 적는 내용을 확인했다.

  침실을 이리저리 오가는 마법사와 보석공을 보며, 중년의 귀부인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초로의 하녀장이 침실의 커튼을 열었다. 커튼이 움직이는 소리가 마법사의 목소리를 흩었고, 귀부인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눈이 부셔 창밖이 보이지 않았다. 귀부인의 잿빛 벨벳 드레스는 창백하게 윤기를 냈다.

  “의식은 나흘 후 그믐날에 행할 것입니다. 절대 늦어선 안됩니다.”

  마법사는 보석공을 채근하며 크리스탈에 대한 설명을 끝냈다. 그러자 보석공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방이 얼마나 보석을 잘 다루는지, 길드에서도 얼마나 신뢰받고 있는지를 자랑스럽게 떠들 기세였다. 하녀장은 성큼 보석공에게 다가가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보석공은 주머니 속의 금화를 확인하고 귀부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보석공이 떠나자 침실은 다시 묘실처럼 침묵했다. 마법사는 기척도 없이 움직이며 마법진을 점검했다. 마법진을 그린 도료의 상태와 마법진 위에 놓인 도구의 구석까지 반복해서 살폈다. 보석공의 방문이 꿈결같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 마법사는 마법진을 나왔다. 침실의 창가엔 귀부인과 하녀장이 동상처럼 서 있었다.

  “이제 나흘만 더 기다리시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마법사는 귀부인에게 목례하며 텅 빈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님도 그때까지 쉬시는 게 좋겠군요. 이곳에 오신 뒤로 하루도 주무시지 않았다고 하녀들에게 들었습니다.”

  귀부인의 말에 마법사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든 위대한 마법에는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지요. 제가 젊었을 때 행한 마법의 대가로 저는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작은 착오로 인한 의도치 않은 결과였지만......”

  마법사는 자신이 ‘착오’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귀부인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 잠을 자지 않는 삶은 제게 또 다른 시각과 영감을 주었지요. 아드님은 잠의 세계에서 돌아오는 문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깨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저는 그 문을 열 수 없지만 누구보다 분명하게 보고 있습니다. 나흘 후 의식으로 제가 눈이 되고 아드님이 손이 되어 함께 문을 열 것입니다. 그렇게 이어진 통로로 아드님은 돌아오고, 저는 드디어 잠의 세계로 갈 수 있겠지요.”

  마법사는 그답지 않게 흥분된 어조로, 그러나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귀부인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마법사는 그런 귀부인에게 목례를 남기고 자신의 방 으로 돌아갔다.

  침실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히고 마법사의 발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하녀장이 입을 열었다.

  “이런 의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주실 수 없을까요.”

  귀부인은 힘없이 창틀에 기대어 섰다. 하녀장은 다시 말했다.

  “하다못해 마법사가 가져온 추천장의 진위를 확인하고 나서 결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귀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저 마법사를 신뢰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마법사 길드에 보냈던 사람은 이미 지난주에 돌아왔어야 해요. 마법사는 이번 그믐날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해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요.”

  “저도 주인님과 함께 수년 동안 도련님이 깨어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도련님을 깨우지 못했고, 도련님이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내지도 못했습니다. 저 마법사라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저 마법사가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귀부인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커튼을 닫았다. 어두워진 침실에서 귀부인은 하녀장을 등지고 말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지 상관없어요. 이유가 불치병이던 저주던 상관없어요. 아들을 깨우고 말겠어요.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깨우겠어요. 그것이 전부에요. 무슨 말인진 알겠어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끝났어요.”

  귀부인의 단언에 하녀장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하녀장의 굳게 닫힌 입술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주인님이 그동안 잃은 금화보다 더 소중한 것을 잃을까봐 두렵습니다.”

  하녀장은 귀부인의 뒷모습을 조용히 떠났다.

  혼자 남겨진 귀부인은 무거운 걸음을 옮겨 침대로 다가갔다. 머뭇거리는 손으로 침대의 커튼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작은 소년이 침대에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단정하게 빗질된 단발머리와 창백한 피부의 소년, 침대 밖으로 드러난 두 팔은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귀부인은 소년의 얼굴에 귀를 가져갔다.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귀부인은 안도하며, 소년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여자 아이가 흐느끼는 소리에, 소년은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력이 조금씩 돌아왔다. 커튼에 둘린 침대 속 공간이 칠흑 속에서 떠올랐다. 한밤중에 누가 이렇게 울고 있을까.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침대 커튼 한 면이 푸르스름하게 비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 여자 아이의 그림자가 보였다. 아이는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소년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렇지......”

  소년은 바싹 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벌써 몇 년째 깨어나지도 못하고 침대에 계속 누워만 있어서 그래.”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소년은 낯선 여자 아이의 목소리에, 그리고 낯선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고 말았다. 아이는 대답하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소년은 기억도 나지 않는 수년의 시간이 자신을 불구로 만들고 증발해 버렸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힘들게 침을 삼켰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된 거야?”

  아이의 그림자가 고개를 들어 소년을 보았다.

  “그건 나도 몰라. 난 밴시야. 이제 곧 죽게 되는 너를 위해 울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구나.”

  소년은 어릴 적에 들은 밴시의 전설을 떠올렸다. 밴시의 예언은 틀리지 않는다. 소년은 두려웠다. 그러나 밴시의 울음소리를 듣다보니, 놀라서 뛰던 심장 고동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소년은 자신이 죽는다는 예언보다, 밴시가 저렇게 슬프게 우는 것이 더 마음에 걸렸다. 소년은 밴시의 울음을 그치게 하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죽는지 너는 알고 있어?”

  밴시는 훌쩍이며 대답했다.

  “어리석은 마법사가 푸카를 불러버렸어. 푸카는 나쁜 요정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있는 이곳에 부른 것이 잘못이야.”

  밴시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다시 울려고 하자, 소년은 급하게 질문을 이었다.

  “그럼 그 푸카라는 괴물이 나를 잡아먹는 거야?”

  “푸카는 그런 괴물이 아니야. 장난을 좀 심하게 치는 요정일 뿐이야.”

  밴시의 그림자는 벌떡 일어나 침대 커튼 쪽으로 다가왔다.

  “푸카는 밤에 깨어있는 사람을 태우고 달릴 뿐이야.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아무리 어두운 숲이라도, 아무리 깊은 강이라도.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밴시는 질문에 답하면서 울지는 않았다. 소년은 그걸로 만족했다.

  “...... 그냥 그곳에다 사람을 버려두고 가 버리지만.”

  “푸카가 가 본 곳을 너도 알아?”

  “물론이지.”

  밴시는 소년이 상상도 못할 장소들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초원을, 새들도 이르지 못하는 높은 빙산을, 짐승들도 길을 잃는 복잡한 미궁을, 빛조차 닿지 못하는 깊은 바다를 이야기해 주었다. 소년은 계속 질문하며 그곳을 상상했다. 소년은 믿을 수 없는 풍경을 전해 들으며,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꿈은 아니라고 느꼈다. 소년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곳을 볼 수 있다면 괜찮을 거 같아. 이곳에 누워서 평생을 사는 것보단 어디라도 괜찮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 죽게 되어도 말이야. 이제 울지 않아도 돼.”

  “어리석은 인간! 죽은 사람을 위해 울어줄 수밖에 없는 난 질투가 날 정도구나!”

  밴시가 화를 냈다. 소년은 끝내 밴시가 화를 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밴시는 갑자기 숨을 죽이고 침실 문 쪽을 바라봤다. 밴시의 그림자는 작은 비명과 함께 흔들리며 사라졌다. 침실 밖 멀리서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차갑게 울리는 발굽 소리 사이사이로 영원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푸르스름한 커튼 위로 푸카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푸카의 숨결에 커튼이 잔잔히 물결쳤다. 소년은 두렵지 않았다. 밴시가 들려준 푸카를 만나고 싶었다. 소년은 앙상한 팔을 들어 커튼을 열었다. 몸이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다. 푸카는 눈부신 푸른 빛 속에 서 있었다. 칠흑의 털을 가진 커다란 말의 모습이었다. 서쪽으로 영원한 밤을 달려온 흑진주 같은 발굽을 울리며, 푸카는 소년에게 다가왔다. 생명으로 가득 찬 뜨거운 숨결이 소년을 덮쳐 왔다. 푸카는 밤하늘 같은 눈동자로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푸카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머니의 입맞춤과 같은 촉감이다, 소년은 생각했다.


  은그릇이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침실에 울렸다. 차갑게 식은 새벽 공기 중으로 그릇에 담긴 물이 튀었다. 소년을 씻기려고 들어온 하녀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녀는 눈앞의 광경에 놀라 뒷걸음으로 침실을 빠져나갔다.

  열린 침실 문 밖으로 둔한 술렁임이 일었다. 하녀장이 황급히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침실은 모든 계절의 나뭇잎과 온갖 풍토의 진흙으로 어지럽혀 있었다. 바닥을 깨고 선명하게 찍힌 말발굽 자국은 침실의 창문으로 향했고, 창문과 근처의 벽은 무너져 있었다.

  혼자서 의식을 행하던 마법사는 잔해만 남은 마법진 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하녀장은 엎드린 마법사의 어깨를 들었다. 마법사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든 듯이 죽어있었다. 하녀장은 더 이상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녀장이 고개를 들자, 침실 문에 서 있는 귀부인이 보였다.

  귀부인은 커튼이 모두 떨어진 침대를 보고 있었다. 무너진 벽으로 이른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침대 위에는 소년이 미소 지으며 누워있었다. 깜빡이지 않는 눈동자 깊이 빛나는 먼지가 떨어지고 있었다.





- 지난 6/16에 올렸던 글을 수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 totimag@dreamwiz.com


댓글 1
  • No Profile
    Dominique 13.07.17 20:26 댓글 수정 삭제

     다시는 죽게되어 돌아오지 못한다는 소년의 말은 이제 더 이상 잠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등가교환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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