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자살방조를 거부하기

2005.12.20 17:0912.20


"어제도 물고기를 먹었잖아?"

"생선까스와 어묵과 북어국이었죠, 정확하게 말하면. 한솥 새댁도시락에 들어 있는 반쪽짜리 생선까스하고 어묵하고 300원짜리 북어국에 들어 있는 북어의 파편이요."

"생선까스와 어묵과 북어는 물고기가 아닌가?"

"물고기죠."

"그런데 왜 안 먹겠다는 거야?"

인어는 꼬리지느러미로 물 표면을 철썩 내리치면서 말했다.

"물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물고기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안 먹겠다는 거야? 다시 말하지만 난 이제 더 살기가 싫고, 죽는 김에 마지막으로 좋은 일이나 하고 죽자는 뜻으로 당신한테 먹히겠다는 거야. 보아하니 빼빼 말랐는데, 그 손목 가지고는 낚싯줄 하나 제대로 못 당기게 생겼군? 영양보충이 필요하지 않아? 싱싱한 단백질 공급원인데? 날로 먹든 구워 먹든 튀겨 먹든 국을 끓여 먹든 좋은 대로 먹을 월척 하나를 주겠다는데 왜 싫다는 거야? 내가 맛없어 보여?"

"아뇨, 당신은 아주 토실토실 잘 살쪘네요."

"그런데 왜?"

인어는 또 꼬리로 물 표면을 내리쳤다. 나는 애꿎게 물벼락을 맞은 옷자락을 털어내면서 인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오해하지는 말아요. 난 지금 당신한테 죽지 말고 살아라, 세상은 아름다워 등등의 설교를 하려는 건 아니예요. 단지 당신을 먹고 싶은 생각이 지금은 물론이고 아마 앞으로도 없다는 것뿐이에요."

"잘나신 채식주의자도 아니면서? 채식주의자도 물고기는 먹잖아."

"그래요, 난 소고기도 먹고 돼지고기도 먹고 닭고기도 먹고 오리고기 토끼고기 염소고기 다 먹어요. 개고기는 집안에서 못 먹게 하니까 그것만 빼고요. 달걀도 먹고 물고기도 물론 참치 고등어 갈치 오징어 낙지 조개 안 가리고 다 먹어요."

"오징어 낙지 조개를 누가 어류에 포함시키나, 이 멍청한 양반아."

"아무튼 간에, 내가 고기를 못 먹어서든 안 먹어서든 채식주의자가 아닌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닥치는 대로 먹는 건 또한 아니죠. 통닭을 먹고 싶다고 해서 비둘기를 잡아 털을 뜯지는 않아요. 물고기가 먹고 싶으면 어물전에 가서 사다 먹지, 공원 연못에서 낚시질을 하지는 않는다고요."

"시끄러워, 바다에서 잡혔든 연못에서 잡혔든 어물전 좌판에 놓여 있으면 먹는다는 얘기잖아."

".... 그렇죠."

"그럼 똑같은데 뭘 그래?"

"여기는 어물전이 아니고, 당신은 아직 안 죽었잖아요."

"회는 먹으면서?"

"난 아직 산 물고기를 직접 회치는 경지에는 이르지 않았어요. 산낙지나 빙어도 아직 먹어본 적 없다고요."

"만사가 다 경험이야, 겪을 수 있을 때 겪어 봐."

인어는 눈까지 지그시 감고 내 입에 손을 들이댔다.

"똑같이 먹는 닭이고 소고 돼지고 물고기인데 직접 죽이는 건 싫고 남이 죽인 건 먹겠다? 거 참 자상도 하셔라. 너무 고마워서 눈에서 땀이 다 나네. 에라이 위선자야. 입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 거야. 잔소리 말고 어서 꽉 깨물어."

"싫어요, 자살방조하면 형법 제.... 몇 조더라? 어쨌든 형법상 자살방조죄에 걸려서 살인죄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어쨌든 처벌받는다고요."

한때 자살사이트가 사회적으로 떠들썩할 때 기억해둔 바에 의하면 그렇다. 그 사이에 형법이 개정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직은 그 기억이 유효하겠지. 자살하겠다는 사람에게 극약을 주어도 자살방조죄에 해당되는데, 죽고 싶다는 사람, 아니, 인어를 죽여 주는 것은 당연히 자살방조죄다. 아니, 살인죄일지도 모른다. 죽여서 먹기까지 한다면 난 아마 자살방조죄 또는 살인죄+시체훼손죄로 최소한 징역 십 몇 년이 아니면 정신병원에 가야 할 것이다.

"내가 먹히고 싶어서 먹어 달라는데 뭐가 안 돼?"

"법이 그래서 안 돼요. 악법도 법이라고요."

"에라이, 소크라테스가 그런 데 써먹으라고 그 말을 했니?"

인어는 손으로 물을 떠서 내게 끼얹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물러서서 피했다.

"어쭈구리, 피해? 야, 너 일루 안 와?"

"당신이 죽고 싶어하든 먹히고 싶어하든, 그래서 죽든 먹히든 간에 그건 나하고 상관없어요. 하지만 당신 죽는 또는 먹히는 도구로 날 끌어들이지는 말라구요."

인어는 한껏 경멸하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더니 휙 몸을 돌려서 도로 물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꼬리지느러미를 휘둘러 물을 한껏 튀기면서. 덕분에 나는 또 물을 뒤집어썼다.

저 인어가 나중에 또 다른 사람을 붙잡아서 자살시도를 할지 안 할지는 내가 모르는 일이지만, 당분간 이쪽 길은 피해서 다녀야겠다.

적어도 나는 아직 인어 고기를 먹고 영생불로불사할 만한 배짱은 갖추지 못했으니까.



(*2005. 12. 20. 화.)
황당무계
댓글 1
  • No Profile
    ^^ 06.01.22 03:06 댓글 수정 삭제
    마지막 영생불로불사에서 조금 빗나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죽이는 건 싫다고 하면서 그 고기는 먹는 행태를 풍자한 걸로 생각했거든요. '위선자' 라는 낱말도 있었구요. 초반에 "오징어 낙지 조개를 누가 어류에 포함시키나, 이 멍청한 양반아." 요 대사 땜에 웃었습니다.
    무척 잘 쓰십니다. 아니, 그것보다는 글에 대한 감각이 있는 분이신 것 같습니다. 건필하시길.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796 단편 [심사제외]일진의 승리2 니그라토 2013.09.04 0
2795 단편 비, 내리다.2 초이 2013.08.20 0
2794 단편 아포토시스 포 세이스6 빈테르만 2013.08.15 0
2793 단편 발톱2 2013.08.15 0
2792 단편 개인적 기록 티슬 2013.08.15 0
2791 단편 호모 아르텍스의 기원 닐룽 2013.08.15 0
2790 단편 검은 구름2 강민수 2013.08.07 0
2789 단편 세계대전:바퀴1 마그토 2013.08.13 0
2788 단편 [기린] 임재영 2013.07.23 0
2787 단편 모래 기도서2 먼지비 2013.07.19 0
2786 단편 불면1 금원정 2013.07.15 0
2785 단편 사과와 나비의 여름3 빈테르만 2013.07.15 0
2784 단편 의수(義手)3 김효 2013.07.14 0
2783 단편 바퀴3 티슬 2013.07.15 0
2782 단편 나는 좀비를 이렇게 만들었다 비나인 2019.09.17 0
2781 단편 전자강아지 돌로레스클레이븐 2019.02.11 0
2780 단편 부자의 나라 니그라토 2013.07.04 0
2779 단편 산타 강민수 2013.07.08 0
2778 단편 나와 아버지와 그의 관리자 이그드라실 2013.06.30 0
2777 단편 안식일 갈고리달 2013.06.15 0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