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심사제외]신이 있다면

2013.12.05 10:5712.05

신이 있다면



“사부님들? 또 만났네요. 반가워요.”

분명 이은혁은 잠을 자고 있다가 깨어났을 뿐이었다.

자신의 작은 방이 있어야 할 곳 대신에 있는 것은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푸른 바다와 그 바다와 똑 같은 빛깔로 빛나는 하늘이었다. 이은혁은 허공에 떠있었지만, 방바닥에 앉아 있을 때와 아무런 위화감이 없었다. 이은혁의 현실감은 현실과 꿈을 구분할 수 있었고, 아직 가상현실 기술은 없는 시대였다.

익숙한 하늘과 바다였다. 족히 느끼기로 몇 백 년 동안 봐 온 풍경이었다. 거대한 하늘 고기들과 하늘 거북이들이 구름보다도 높이 떠서 날아다녔다. 그랬다. 괴우주(怪宇宙)에 있었던 옛날에, 불로불사했었던 그때에 실컷 경험했었다. 이제 또 다시 그들이 이은혁 자신을 불러낸 것이다. 어떤 모험이 놓여 있을까. 저번에 그들은 데바(Deva) 신족(神族)이 펼치는 영혼 분리 공격에 대한 방패 역할을 자신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불러냈었다. 이번에도 다를 바는 없을 것이라고 이은혁은 보았다.

이은혁은 자신의 눈앞에 오만하게 서 있는 두 엄청난 미녀를 바라보았다. 실질적으로도 여신과도 같은 힘을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인신족(忍辰族)의 두 여신선, 청발 벽안에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하게 위로도 아래로도 뻗친 스타일인 물인간(水因間) 은하영(銀河永)과, 적발 홍안인 과학인간(科學因間)이자 속도인간(速度因間)인 벨리카미였다. 인신족 답게 두 여성 모두 귀 위에 날카로운 한 쌍의 우유 빛 뿔을 달고 있었다. 두 여자 인신족 모두 적응이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은하영이 말했다.

“이은혁님, 오랜만이에요. 내가 보고 싶어서 불렀어요.”

“이곳에서 계속 살 수는 없는 건가요? 죽으면 끝인 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그게 궁금했군요.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불렀어요. 마음에 걸려서 살 수가 있어야지요!”

은하영과 벨리카미가 다가와 이은혁을 가운데로 하고 앉았다.

“우리는 이은혁 님이 돌아간 뒤 나흘 후의 시점에서 불러낸 것이지만, 실상 우리에게 있어 이은혁 님의 우주 상황이란 건 모든 시간과 공간이 다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우리에게 있어 이은혁 님의 우주는 피조 우주 중 하나이니까요. 단 시간이라는 건 변화의 척도일 뿐이므로 이은혁 님을 이번에 부른 현상으로 인해 미래는 바뀌게 될 겁니다. 미래는 변화시킬 수 있는 거에요.”

이은혁은 지구로 귀환한 뒤 괴우주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번역 일을 하고 있었다. 여러 언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익혀둔지라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신족들이 자신을 지구로 강제로 되돌려 보낸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슬펐다. 인신족들에 따르면 지구가 있는 우주엔 영혼이 없었다.

은하영이 말을 이었다.

“난 이은혁 님이 죽으면 그대로 사라진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난 우리 괴우주의 여러 신선들을 만나서 논의했지요. 자, 벨리카미 님, 말씀해봐요.”

벨리카미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이은혁 님의 우주는 빅 뱅 때 일어난 양자역학적 파동의 영향으로 인해 수많은 비슷한 우주들과 중첩되어 존재하고 있어요. 이를 난 연구해보았지요. 그랬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어요.”

벨리카미가 손을 휘젓자 허공에 스크린이 떠올랐다.

스크린엔 여러 개의 구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이은혁의 3차원 영상이 작게 떠올랐다. 벨리카미가 말을 이었다.

“이 구들 하나하나가 독립 된 우주라 치자고요. 이은혁 님이 죽기 직전에 다른 우주의 초문명에서 이은혁 님을 이루던 모든 물질을 끌어 당겨 바꿔치기를 하더군요. 그러면 이은혁 님은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초문명의 기술을 바탕으로 영원히 살게 되지요. 우주들끼리는 다른 우주를 객관화시켜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고 영향을 미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은혁 님이 계신 우주의 초문명도 다른 우주에서 감정 의식이 있는 생물이 죽으면 같은 일을 하고요. 그렇게 상부상조하는 것이죠. 그때마다 간섭이 생기면서 각 우주의 미래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는 점도 초문명들은 즐기고 있어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 초문명들은 미리 사후세계가 있다고 알리지를 않는 건가요?”

“초문명들은 사후세계의 존재를 의심하고, 우주의 엄혹한 현실을 깨닫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려는 과정 끝에서만이, 지성들의 최종 문명의 형태로서 진화되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때문에 초문명들은 사후세계를 알려서 지성들의 성장 의지를 꺾는 짓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초문명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뒤돌아보고 지성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사후세계를 주고 있는 것이지요.”

“어차피 사람 몸은 물질들이 끊임없이 바뀌는 과정 속에 있는 거 아니던가요?”

“초문명들은 최대한 물질들의 순환을 억압함으로서 영원성을 누리게 해줍니다. 우리 괴우주의 영혼이란 시스템도 물질계의 이면에 존재하면서 마지막에 물질들을 영혼계로 끌어당기고 똑 같은 성질의 물질을 조합해서 물질계로 보내서 주검을 남기는 방식이니 사실상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지요.”

“역시 죽는 건 아무래도 똑 같은 거 같아요. 매순간마다 물질은 교체되는 거잖아요. 인생은 자신의 흔적을 나중에 얼마나 남기느냐를 두고 다투는 게임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사표 삼아 살고 있었지만, 벨리카미 님의 그런 말씀을 들으니 힘이 나는 건 사실이네요.”

“즉 결론은 이은혁 님이 있는 우주는 이미 나름의 방식으로 영혼 불멸을 획득한 우주였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으니 이은혁 님 또한 세상에 이바지하고자 노력하도록 하세요. 그건 초문명을 진화시키지 못 한 우주는, 다른 우주의 초문명들과 사후세계라는 거래를 할 수가 없어서 지성들에게 사후세계를 제공해주지 못 한다는 점입니다. 초문명을 진화시킬 수 있는 길이 지구인에게도 있으니 그 길을 걸어 나아가야지요. 자, 이은혁 님, 혹시 술주정으로라도 우리 괴우주에 관해 말했나요?”

“그걸 누가 믿어요. 그리고 술주정으로라도 했다가 사이비 종교가라도 만나면 골치 아파지잖아요.”

“그럼 이은혁 님, 돌아가세요. 이 말씀 드리려고 불렀던 거예요. 이은혁 님이 괴우주에 계시는 동안엔 님과 관계망을 맺은 모든 우주들이 에너지 보존 법칙을 어기지 않기 위해 멈춰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민폐 그만 끼치시고 안심하시고 돌아가세요.”

“네, 사부님들, 안녕히!”


[2013.12.05.]
-------
제 첫 완결 장편 '괴우주야사'에서 설정 따와 썼습니다... '괴우주야사'는 현재로선 제가 완결한 유일한 장편이고, 거울 독자 중/장편란에 전문이 올라있습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837 단편 나락 박효선 2014.02.03 0
2836 단편 살인자 지망생1 니그라토 2014.02.04 0
2835 단편 way to mother2 유이립 2014.02.05 0
2834 단편 아버지의 시간 견마지로 2014.02.02 0
2833 단편 맹렬한 호랑이보다 맹렬하게 먼지비 2014.02.01 0
2832 단편 인육교실(人肉敎室) 니그라토 2014.01.20 0
2831 단편 [심사제외]가스통 할배2 니그라토 2014.01.24 0
2830 단편 산타 할아버지의 밤2 Mr.Nerd 2014.01.26 0
2829 단편 모든 것이 폭로되었다. 룽게 2014.01.19 0
2828 단편 착각, 온실속의 화초1 몰도비아 2014.01.18 0
2827 단편 정신강탈자 엄길윤 2014.01.14 0
2826 단편 추모+집착= D 2014.01.14 0
2825 단편 고양이의 보은 별까마귀 2013.12.27 0
2824 단편 외투를 입은 사나이 미역의춤 2013.12.25 0
2823 단편 쿠소게 마니아 [본문 삭제] 위래 2013.12.07 0
2822 단편 악몽 beily 2013.12.19 0
단편 [심사제외]신이 있다면 니그라토 2013.12.05 0
2820 단편 태풍 속에서 백철 2013.11.29 0
2819 단편 이상향2 깨진유리잔 2013.11.23 0
2818 단편 악녀와 요술사 니그라토 2013.11.16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