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표절방지기

2014.04.23 16:4704.23

작가 P는 오늘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안 나오는 소설을 쓰느라 컴퓨터와 씨름 중이다.

 

  소녀의 피부는 햇빛을 받아 전나무 위에 쌓인 첫눈처럼 반짝였다.

 

피부를 눈에 비유하다니.. 백설공주에 나온 거잖아. 그 이후로도 삼백 년은 써먹었을 비유다. 나도 정말 다 됐군.’

 

  소녀의 피부는 백자 표면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아니야.’

 

  소녀의 피부는 갓 피어난 백합 꽃잎처럼 수줍게 빛났다.

 

이건 괜찮지 않을까. , 하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다. 분명히 누군가는 써먹었을 거야. 어려운 비유는 아니니까. 그래도 일단은 이렇게 두고 넘어가자고. 이렇게 오래 걸려선 다음 장면을 못 쓰겠어.’

 

  ……괴물이 소녀에게 다가와 소녀를 한입에 꿀꺽 삼켜버렸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소녀가 죽은 줄 알겠지만 사실은 살아 있어. 괴물은 산 채로 소녀를 입안에 넣고 어디론가 데려가는 거지. 잠깐, 그런데 이거 어디선가 본 내용인 것 같기도 하고. 어디였더라? 책인가? 아니면 드라마? 아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작가 P는 절규하며 키보드 위에 엎어져버렸다.

 

그때 삐이, 하고 현관벨 소리가 울렸다.

 

? 홈쇼핑으로 충동구매한 M사의 연분홍, 꽃분홍, 그냥분홍 셔츠 3종 세트가 벌써 도착했나?’

 

P는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날듯이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다. 철컥, 하고 문을 열자 양복 입은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에이…….”

안녕하십니까, P선생님!”

? 내가 P이기는 한데, 무슨 일로?”

선생님의 팬 C라고 합니다. 이렇게 직접 만나 뵐 수 있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최근작 <사탕 안에 캐러멜이 들어 있어야 했는데 없다고 해서 내 탓은 아니잖아>는 정말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고충을 느낄 수 있었죠.”

, 그런가! 자네 작품 볼 줄 아는군. 하하. 다들 졸작이라고 하지만 말이야. 그거 내가 진짜…….”

괜찮으시다면 안에서 좀더 들어도 되겠습니까? 시간을 많이 뺏지는 않겠습니다.”

, 나도 마침 쉬려고 하던 참이었어. 들어오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CP의 집안으로 들어와 잠시 두리번거리다 거실 탁자에 놓여 있던 노트북을 발견했다.

 

, 마침 글 쓰시던 중이셨군요.”

, …….”

신작 기대하겠습니다.”

잘 써져야 말이지. 요즘은 전같지 않아서.”

아닙니다. 남들은 뭐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선생님의 작품을 정말 좋아합니다. 선생님에게는 저 같은 조용한, 매니악한 팬들이 많을 겁니다, 아마.”

고맙네. 하지만 정말 작가 해먹기 힘들어. 요즘 사람들은 예민하니까 한 단어 한 단어 쓸 때도 조심스럽다네.”

. 알 것 같습니다. 툭하면 재미없네, 식상하네 하며 말들이 많죠.”

바로 그거야! 내가 고민하는 이유가.”

추리작가 D씨 소식 들으셨습니까? 표절 논란으로 인기가 한풀 꺾였죠.”

한풀 꺾였다 뿐인가. 아주 매장됐지. D씨 말로는 자기도 표절인지 몰랐다고 하던데.”

그걸 무의식적 표절이라고 한다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예전에 봤던 소설을 베끼는 거.”

나도 그게 두려워. 내가 지금까지 읽은 소설이 한두 편인가, 어디. 드라마도, 영화도, 이때까지 너무 많은 것을 봐버렸어. 이제는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이게 내 아이디어인지 다른 사람 아이디어인지 헷갈리고 겁까지 난다고.”

그렇습니까? 선생님 같은 대가도 그런 고민이 있군요. 그러시다면사실 제가 일하는 회사에서 새 프로그램을 하나 개발했는데 말이죠. 괜찮으시면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간단한 검색 사이트라고나 할까요.”

검색?”

, 예를 들어서 어떤 문장을 입력하고 검색버튼을 누르면 그 문장이 어느 소설에 나왔는지 검색이 되죠. 소설뿐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 시나리오에 나왔어도 검색이 됩니다.”

, 그거 아주 좋은 프로그램이군. 그런데 그건 방대한 양의 자료를 갖추고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일 텐데?”

사실 이 프로그램은 이십 년 넘게 준비해서 만들어낸 겁니다. 최근에는 모든 텍스트가 디지털화 되어 있어서 괜찮지만 옛날 자료를 디지털화 하는 데 애 좀 먹었죠. 일단 한번 보시겠습니까?”

 

CP의 컴퓨터 앞에 앉아 주소창에 주소를 쳐 넣고 로그인을 했다.

 

혹시 뭔가 검색해보고 싶으신 것이 있습니까?”

, 잠깐만. 내가 해 보겠네.”

 

P는 검색창에 피부는 백합 꽃잎처럼을 입력했다.

  

  검색 결과가 (98)건 있습니다.

  (1) 그놈의 피부는 백합 꽃잎 같이…… ___우정록, 1994, <인간말종>

  (2) It’s skin was shining like a lily…… ____Ellis Jordan, 1934, <Grrrrr>

  검색 결과를 더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 이렇게나 식상한 표현이었단 말인가. 역시 안되겠군.”

더 놀라운 것은 문장뿐만이 아니라 내용까지도 검색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C는 다른 페이지에 들어가 간편 검색을 클릭하고는 등장 인물란에 미인’, ‘부자를 쳐 넣고 사건란에서 도난, 결말란에서 해피엔딩을 각각 선택하고 엔터 버튼을 눌렀다. 검색 결과가 298개 나왔다.

 

미인과 부자가 등장하고 도난 사건이 발생하는데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298개 있다는 말이죠.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찾아볼 수도 있고, ‘상세 검색페이지에 들어가 더 자세히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 반전 유무, 전개 방식 등을 추가해서 검색할 수도 있죠.”

 

아주 유용한 사이트로군. 나도 쓰고 싶네. 가입비는 얼마 정도인가?”

그게아시겠지만 이 작업은 매우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거쳤거든요…….”

비쌀 거라 예상은 하고 있네. 그러니까 얼마냐고.”

 

C는 조심스레 금액을 이야기했다.

 

과연, 꽤 비싸군……. 하지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 같네그려. 가입하겠네.”

감사합니다.”

 

잠시 후 C가 돌아가고 P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제 표절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P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의문 나는 모든 것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띠리링-

 

여보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저 지난번에 찾아뵈었던 C입니다.”

, 자넨가.”

어떻게프로그램 사용에는 익숙해지셨는지 궁금하네요.”

, 그게 말이지. 사용법은 어렵지 않은데…….”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게뭘 찾아도 다 있다고 나오니 뭘 쓸 수가 있어야지. 더 난감해졌어.”

, 그렇습니까? 소설의 역사가 그만큼 오래되었으니까요. 사실 쓸 만한 소재는 거의 다 썼다고 봐야 할까요.”

그런 거 같네. 다른 은하계의 보도 듣도 못한 돌멩이며 벌레 이야기까지 다 이미 썼다고 나오는군.”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 무슨 뜻이지? 새로운 소재라도 알려 주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사실 새로운 소재로 독자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건 이제 힘들죠. 웬만한 것에는 꿈쩍하지 않으니까요. 잠깐 댁에 찾아가 뵙고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게나.”

 

P의 집을 방문한 C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선생님, 최근에 프로젝트 3’라는 드라마 보신 적 있으십니까?”

, 보진 않았는데. 이야기는 들었어. 그렇게 재미있다고.”

시청률 도둑이죠. 그럼 박가네 사람들은 보셨습니까?”’

그건 봤지. 꽤 재미있던데.”

그 두 드라마, 작가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글쎄, 이 뭐시기라고 했던 것 같은데…….”

 

C는 살짝 미소를 띄며 말했다. 흰 이가 반짝였다.

 

접니다.”

? 뭐라고? 자네 드라마 작가였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무슨 뜻인가.”

제가 마지막 터치를 했으니까 제 작품이라고 해도 되겠지만요.”

, 초고는 새끼작가들이 썼다는 말이군.”

, 그 새끼작가가 지금 여기에 와 있습니다.”

자네갈수록 이상한 이야기만 하는군.”

바로 이겁니다.”

 

C는 자기가 가져온 노트북을 가리켰다.

 

또 저게 될 수도 있죠.”

 

CP의 노트북도 가리켰다.

 

? 설마 컴퓨터가 썼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물론입니다. 저희 회사는 축적된 데이터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많이 읽히고 사랑받는 소설이나 시나리오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등장 인물과 그들의 관계, 스토리의 진행 양상을 선별하여 저장해두었죠. 몇 가지 설정만 해주면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출력이 됩니다.”

, 하긴. 요즘은 컴퓨터 대화 기술이 발달해서 대화문 정도는 자동 완성이 가능하겠군.”

, 잘 아시네요. 바로 그겁니다. 그렇게 해서 출력된 결과물에 어색한 부분이 없는지 검사만 해주면 됩니다. 간단하죠. 게다가 표절 시비에 걸리지 않도록 자동으로 자기검열까지 합니다. 완벽하죠.”

그런데 이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는…….”

 

P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도 안 돼. 작가 체면에…….”

글쎄요. 작가라면 100% 작가 본인이 창작해야 하는 것인가요? 작가가 외부의 영향 없이 혼자서 생각해낸 것이 과연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연구 결과, 2%도 안 된다고 합니다. 과연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서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무언가 많이 듣고 읽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뇌에 집적한 남의 지식을 쓰느냐 컴퓨터에 집적된 남의 지식을 쓰느냐 하는 차이일 뿐입니다. 남의 지식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써낸다는 점에서는 같죠.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뇌가 소설을 출력하진 않으니까 입력을 해야 합니다. 인물을 설정하고, 줄거리를 짜야 하죠. 지금 이 프로그램을 뇌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이 프로그램에 입력을 하는, 그 부분만 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 글쎄…….”

소설과 같은 경우에는 드라마보다 더 깊이 있는 내용을 담을 수 있습니다. 온갖 고전들을 집적해 놓았으니까요. 고전이 고전일 수밖에 없는 이유, 그 성공 이유가 여기에 다 담겨 있습니다.”

 

P는 눈을 내리깔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 고민되시면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셔도 됩니다. 비밀은 보장됩니다.”

남자가 돌아간 후 P는 팔짱을 끼고 집안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했다.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이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얼마 후 P의 신작이 발표되었다. 비평가는 그의 신작은 전작들과는 많이 달라진, 한층 성숙한 느낌이었다. 현대 사회의 노예들에 대해 다룬 그의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깊이감은 어딘지 모르게 <레미제라블>을 떠올리게 했다.’라고 평가했다. P가 과연 프로그램을 썼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C가 오늘도 열심히 영업 중이라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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