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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시선이 머무는 곳

2014.09.23 10:1609.23

 

* 나의 짧았던 사랑의 기록 *

 

 나의 20대 초반은 특별할 것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적성' 이란 허울 좋은 명분을 좇아 남들보다 늦게 들어간 대학에서 스무살의 푸릇함을 가진 동기들과 함께 자유를 누리기에 나는 이미 많이 지쳐있었다. 그래서 나는 꽤 긴 시간을 혼자 보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정해준 수업을 듣고 시험을 보며, 종종 책을 읽기도 하고 여행을 다니면서. 그렇게 계절이 여러번 바뀌어 난 군대에 가게 되었고 2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돌아온 학교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신경도 쓰지 않던 등록금 고지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세상은 내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나를 복학과 동시에 등 떠밀리듯 자격증 준비를 시작하게 만들었고 수업을 듣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탁한 갈색빛 도서관 칸막이에 나를 가두고 책과 씨름하며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해하던 그때,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학교 시험 기간이 2주 정도 남았을때부터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곤 했었다. 조금만 고개를 들면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큰 눈과 싱그러운 웃음이 좋았다. 행여나 구두 소리가 들릴까봐 발 뒤꿈치를 세우고 종종걸음을 걷던 그녀의 걸음걸이가 좋았다. 비어있던 옆자리에 사람이 앉을때마다 책을 치워 자신의 자리를 좁혀주던 그녀의 마음씨가 좋았고, 또 좋았다. 그렇게 내 시선은 그녀에게 머무르게 되었고, 스물 다섯의 나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말을 걸 용기는 없었다. 그녀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길고 긴 수험 생활의 소소한 행복으로 남겨 놓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자격증 시험이 가까워오자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지 않게 되었으며 그녀 역시 자연스럽게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2013년 3월 28일. 학교를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던 날이었다. 겨우내 입었던 무거운 코트를 벗고, 얇은 외투를 걸친채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학교로 가던 길이 어제 처럼 생생히 기억 난다. 평상시처럼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시끌벅적한 점심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 들어간 오후 수업,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수업 자료, 강의실을 나와 걸었던 4층 컴퓨터실 앞 텅 빈 계단, 아무 생각 없이 컴퓨터실 뒷문을 열었을때 마주했던 그녀의 모습에 갑자기 떨려오던 마음까지,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내 머리속에 사진처럼 선명히 남아있다. 평소에는 없던 용기가 거짓말처럼 나는 날이 있다. 아마도 그 날이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말을 걸기까지 꽤나 긴 시간을 망설였다. 용기를 내서 들어갔다가 눈이 마주친 뒤 그녀를 피해 지나가기도 했었고 문에 나 있는 작은 창으로 그녀를 계속 쳐다보며 안절부절 하기도 했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얼굴과 옷 매무새를 몇번이고 확인하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아 안절부절 했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1시간 가량을 보낸 뒤, 이대로 그녀를 보낸다면 다시는 볼 수 없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모든 용기를 끌어내어 그녀에게로 향했고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 저기요, 잠깐 이야기좀 할 수 있을까요? "

 

 내가 그녀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큰 눈을 깜빡이며 나를 따라나온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도 긴장했던 탓이었으리라. 긴장이 되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바보처럼 눈을 계속 꿈뻑였던 기억이 난다. ' 바보처럼 보일텐데 '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점점 위축이 되었던것도 같다. 스물 다섯에 마주하고 스물 여덞이 되기까지 긴 긴 시간 바라만 보았던 그녀를 마주하니 머리가 멍해지고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었다. 번호를 줄 수 있냐는 내 말에 그녀는 조심스레 남자친구가 있다는 대답을 했었다. 긴장을 해서일까, 그 말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그저 알고라도 지내고 싶다는 말과 함께 번호를 적어주기 쉽게 미리 찍어놓은 010이 입력된 핸드폰을 건넸다. 그렇게 나는 꽤 오랜 시간 바라만 보았던 사람의 연락처를 3년만에 받을 수 있었다.

 

 쉽지 않은 시작이었다. 1000일을 넘게 만난 사람이 있는 그녀였기에 커피를 마시자는 작은 약속을 잡기에도 혹여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었다. 운이 좋게도 그녀가 내게 내어줬던 시간은 수업이 모두 끝난 저녁시간이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저녁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4월 3일. 많이 따스해진 공기에 걷기 좋던 봄의 저녁, 노을이 지던 시청역 4번출구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 배 많이 고프죠? 우리 맛있는거 먹으러 가요 " 떨지 않으려고 몇백번이나 되뇌었던 말과 함께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학교 밖에서 본 그녀는 더욱 더 아름다웠고 상냥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에 따뜻하게 웃어주었고 작은 배려에도 유난히 고마워했었던 기억이 난다. 생어거스틴 모퉁이 자리에서 시간이 가는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었다. 자리를 옮겨 갔던 커피숍에서도 11시를 넘긴 폐장 시간까지 손을 뻗으면 닿을듯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길고 긴 이야기를 했었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서 따뜻한 품성과 배려심이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커다란 눈으로 내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는 그녀의 모습이 참 사랑스러웠다.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그저 짧게만 느껴졌던 시간이 흐르고 아쉬운 작별 인사를 건넨 뒤 그녀가 멀어지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거의 없던 한적한 수요일 밤의 지하철 플랫폼에서, 그렇게 나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서로 공강 시간을 맞춰 봄 햇살을 받으며 학관 앞 벤치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셨던 두번째 만남, 함께 남산 중턱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며 서로의 가치관과 생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4월5일 생일의 기억. 세번의 꿈같은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그녀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겠다는 말과 함께 내게 작별을 고했다. 어느정도 예상되었던 결론이었고 그녀의 결정을 존중할 수 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인연에 기대어 그녀와의 재회를 기다리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고 긴 기다림을 시작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인연은 언제나 우연처럼 다가온다. 몇일 후,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들어간 서점에서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만나던 사람과 이별을 한 뒤 심경의 정리를 위해 서점을 찾았다는 사실을 후에 들을 수 있었다. 계산대 앞에서 마주한채 시간이 멈춘 것 처럼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인연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처음 몇달은 너무나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어렵게 얻은 사랑이기에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무던히도 했던 것 같다. 그녀와 나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같은 곳을 향해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서로 다른점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한발 한발 보폭을 맞춰가는 시간이 행복하고 즐거웠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도, 그녀도 취업을 준비하면서 둘 사이에 점차 서운함이 쌓이기 시작했다. 취업을 준비하며 유난히 힘들어하고 불안해했던 나와 그런 내 곁에서 항상 마음 졸이던 그녀. 우리의 사이는 점차 안정감을 잃어갔고 몇번의 내 이기적인 행동이 그녀로 하여금 이별을 말하게 만들었다. 그녀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항상 그녀를 붙잡았었고 처음에는 말하기 힘들었던 이별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때가 되었을 무렵, 우리는 진짜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특별하지 않은 날이었다. 몇일 전부터 예매해 놓았던 영화를 보기로 했던 날이었고 봄부터 여름 내내 그녀를 바쁘게 했던 인턴 생활이 끝난 뒤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그녀의 집에 찾아가 꽃 한다발을 건네며 실로 오랜만인 여유있는 휴일을 함께 보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의 집으로 향하던 중 짧은 연락을 받게 되었다. 일이 생겨서 약속 장소로 바로 가겠다는, 전화는 못받을 것 같다는 간단하고 무미건조한 문자. 직감적으로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을 말한다면 이제 그녀를 놓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지만 이대로 관계를 유지하는건 이별을 잠시 뒤로 미루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긴 시간을 두고 차분히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1시간 정도 먼저 도착한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리다 문득 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근처 서점으로 가서 편지를 사서 그녀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의외로 편지는 쉽게 써졌다. 한장을 넘기지 않는 분량으로 담백하고 정갈하게 내 마음을 적어내려갔다. 그렇게 편지를 쓰고 굳은 얼굴로 약속 장소에 나온 그녀와 영화를 봤다. 변신 로봇이 지구를 지키는 영화였는데 이렇게 함께하는 시간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바보처럼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래서 상영 중간에 화장실에 가서 많이도 울었던 것 같다. 짧게만 느껴진 영화가 끝나고 작은 술자리를 가진 뒤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녀는 이별을 말했다. 미리 써 놓은 편지를 건네고 밤새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래다주는 길 모퉁이에서 그녀가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초여름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일요일 오후에,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다음날 나는 평소와 같이 이른 출근을 했다. 아침 안부를 묻던 그녀의 연락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넘칠듯한 슬픔을 겨우 눌러담고 정신 없이 일을 했다. 6시 반쯤 퇴근을 하고 회사 정문을 나섰다. 저 멀리 날 기다리는 그녀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뒷모습, 수줍은 미소, 나를 향해 달려오는 종종걸음, 손에 느껴지는 작은 손의 촉감, 날 올려다보는 그녀의 큰 눈, 보고싶었다고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 그 모든것이 너무나 생생해 울컥 눈물이 났다. 영동대로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아이처럼 한참을 울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이별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로부터 꽤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내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머물러 있다. 이별 후 그녀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듯 걸었던 무수한 길도 실은 그녀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그녀에게로 다시 향하는 길이 얼마나 긴 에움길인지는 모르지만, 내 시선은 아직도 그 먼 길을 향하고 있다. 

 

 내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thyun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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