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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봉화

2014.06.23 19:2106.23

봉화



자박자박 발소리가 울렸다. 마른 풀잎이 발에 밟혀서 바스러진다. 나는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착각에 계속 멈칫거렸다. 손에 쥔 고삐에서 나귀가 서두르는 기색이 느껴진다.

푸른 빛을 자랑하던 여름이 가고 풀들이 빛을 잃으며 이제 겨울이 오고 있다. 해가 구름 위에서 약한 빛을 내며 빛난다. 언덕길에는 광택이라곤 없이 온통 칙칙한 색깔투성이다. 긴 시간 걸어온 탓에 목이 탔다.

봉화까지 남은 거리는 2시간가량, 나귀의 짐통에서 총을 꺼내 스코프를 통해 보자 약간 높은 언덕에 놓인 봉화의 불길이 눈에 들어왔다. 식량과 휴식을 기다릴 불지기 누님을 생각하며 다리에 힘을 넣었다. 다시 바스락 소리가 울렸다.


“누님! 상후가 왔습니다!”

봉화는 덥다. 돌로 만들어진 원기둥 모양의 봉화는 언제나 불에 그슬려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다. 불지기가 사는 곳이자 봉화의 연료를 위한 창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두막의 뒤편에는 오두막보다도 봉화보다도 커다란 인형이 놓여 있다. 흐려진 날씨에 봉화의 빛을 받아 인형이 더욱 무섭게 보였다.

“오, 그래 왔냐.”

남자 같은 말투로 대답하며 오두막 문을 열고 불지기 누님이 나왔다. 불에 그슬려 검은 피부에 그보다도 더 진한 다크서클, 하지만 눈 만은 밝게 빛난다. 저 눈빛이 없었다면 나는 봉화에 식량과 일용품을 전달하는 임무를 계속하지 못 했을 것이다.

키가 나와 비슷한 누님이 문제 삐딱하게 서며 기지개를 켰다. 긴 머리가 가볍게 살랑거렸다.

“귀신들이 점점 더 넘쳐나는 것 같네요.”

나는 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덕 너머 서쪽에는 석양이 지며 붉은빛이 빛나는 가운데 온통 검은 덩어리가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녀석들이야 언제나 그렇지 않냐. 이젠 더 늘어나는 건지 어떤지도 모르겠어.”

누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긴 누님이야 매일 보는 일상이니까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그래. 일단 짐정리부터 하고 마을 얘기나 들려다오.”


오두막 안에 난 창에서는 세 가지가 보인다.

서쪽으로는 언덕 아래 멀리까지 가득 찬 귀신의 무리가, 북쪽으로는 뜨겁게 불타는 봉화의 불꽃이, 그리고 동쪽으로는 거대한 인형의 다리 두 짝이. 언제나 봉화의 불꽃이 집을 비추고 있기 때문에 남향의 창문 따위는 필요 없다.

나는 방금 싣고 온 짐의 정리를 마쳤다. 누님은 모처럼 수면방에 들어가 자고 있다. 긴 시간 걸어온 참이라 나도 조금 피곤했지만 불이 타는 소리를 들으며 참기로 했다. 불이 타는 소리보다도 누님의 코 고는 소리가 더 크긴 했지만.


“뭐야, 나 몇 시간이나 잔 거냐?”

수면방의 문이 열리며 누님이 내게 물어왔다.

“글쎄요? 두 시간 정도 됐을 겁니다.”

나는 불에서 고개를 돌려 누님에게 대답했다.

“쯧, 괜히 나 신경 쓸 필요 없다니까. 정말 매번 말도 안 듣는구나.”

누님이 내게 다가와 쪼그려 앉으며 볼을 잡아당겼다.

“므에에오 므와이와오(매번 말하지만) 저으와오 기와오(저는 괜찮습니다).”

“너, 이거 말을 제대로 할 의지가 없는 거지?”

누님이 볼에서 손을 떼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누님의 눈매가 풀리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암튼 매번 고맙다. 덕분에 푹 쉬었어.”

불지기의 임무, 봉화의 불을 지키는 것. 누님은 벌써 2년 이상 혼자서 이 봉화의 불을 지키고 있다. 사람의 눈길을 받지 못 하면 사그라지는 봉화의 불을 지키기 위해, 나라도 오지 않으면 단 한숨도 잘 수가 없다.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 누님이 혼자 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걸까.

“누님 덕에 마을에서 편히 자는 사람들이 몇인데요. 이 정도는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푸흡, 입에 발린 소리 하기는. 마을 따위 질색인 주제에.”

누님이 내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래. 요즘 마을에선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신랄하게 말해보라고.”

누님이 눈을 빛내며 활짝 웃었다.


“요즘엔 빵집 브래드 영감이랑 꽃집 데이지 아줌마가 아주 가관입니다. 데이지 아줌마네 개가 산책을 하면서 브래드 영감네 빵집에 오줌을 갈겨 놓는 바람에 브래드 영감이 빵에서 오줌 냄새가 나서 장사가 안된다면서 데이지 아줌마한테 덤비는데, 아줌마는 한술 더 떠서 그 빵에서는 원래부터 똥 냄새가 난다면서….”

내 얘기는 한 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누님은 시종일관 들으며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후우. 네 얘기는 언제 들어도 재밌다니까. 나중에 할 거 없으면 이야기꾼이라도 되지그래? 어렸을 때 마을에서 이야기꾼을 본 적이 있는데 돈을 꽤 버는 것 같더라고.”

“누님이 어렸을 때라니 저와는 세대가 달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하자 누님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야 귀신이 나타나기 전이니 세대가 다른 것도 사실이지만…. 겨우 5년 차이 주제에!”

누님은 나이와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매번 진심으로 분해한다. 어차피 모두와 떨어져 거울도 없는 곳에서 봉화의 불 만을 마주하며 살아가면서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니 5년이면 평지도 언덕 정도로는 변하지 않겠어요.”

웃으며 대꾸하면서 나도 모르게 누님의 가슴께로 시선이 갔다. 처음 봉화에 왔을 때는 그리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던 것이 지금은 꽤 눈에 띈다. 이것이 세대 차이인가. 나도 빨리 커야 하는데.

“정말 말은 잘한단 말야.”

그렇게 말하고 누님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서쪽으로, 검은 덩어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런 것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훨씬 즐거웠을 텐데 말이야.”

누님은 뚫어져라 꿈틀거리는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봉화의 불빛이 비치는 그 옆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시간이야.”

누님이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누님의 눈에서 빛이 사라진 것 같았다.

“이번에 돌아갈 때는 전언이 있어.”


발밑에서 자박자박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내 발이 걸을 때마다 자꾸만 바닥으로 꺼져 내려가서 나는 계속 비틀거렸다. 나귀는 흔들리는 고삐에 불안한 듯 고개를 저었다.

누님의 전언을 전해야 한다.

“왜!”

나는 바닥을 발로 찼다. 메마른 풀들이 내 발에 스치며 부서졌다. 나귀가 깜짝 놀란 듯 비틀거리는 것이 고삐로 느껴졌다.

나귀에게 화를 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잠시 멈춰서 나귀를 달래주었다.

한심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나는 이 길을 그대로 걸어가서 귀족 녀석에게 누님의 전언을 전할 것이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누님을 그 봉화에서 한시라도 빨리 떼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 했다. 그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냥 알겠다는 대답 밖에 하지 못 했다.

말없이 바닥을 찼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별빛만 비추고 있는 한밤중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나귀는 아니다. 조용히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다. 기척은 좀 더 멀리서 들려오고 있다.

봉화에서 마을까지는 3일 정도가 걸린다. 서둘러도 2일은 걸리니 나는 노숙을 해야만 한다. 봉화에서 마을 사이의 딱 중간 지점에서 노숙을 한 참이었다. 평소대로라면 한밤의 기척에는 들짐승의 습격을 조심해야겠지만 지금 것은 뭔가 달랐다.

단번에 느끼기에도 너무 요란하다. 지난 2년간 봉화와 마을을 왕래하면서 들짐승에게 습격당했던 적도 몇 번 있다. 그때 나는 그것들이 코앞까지 와서야 그 기척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초반에는 나귀를 희생해서 겨우 살아남은 적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꽤 거리가 떨어져 있는 데도 단번에 그 기척이, 살기가 전해져 왔다.

나귀에게서 내 가슴까지 오는 길이의 총을 가져왔다. 총신이 길게 뻗은 사냥용 총이다. 스코프가 달려서 꽤 먼 거리까지 조준할 수 있고 정확도도 높다. 이것에 익숙해진 뒤로는 왕래 길에 특별히 큰 위험은 없었다. 적어도 뭔가에 습격당할 일은 확실히 없애주었다.

나는 전해져 오는 기척에 맞춰 몸을 낮췄다. 뭔지는 몰라도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다만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내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방향만은 확실히 알겠다. 점점 가까워지는 것도 알겠다. 허나 거리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밤의 장막이 두껍다지만 모닥불도 피워둔 상태에서 이 정도까지 보이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

하지만 이대로 가까워지게 둘 수도 없다.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보다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소리로 방향을 맞춰 총을 조준하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었다.

맞아라.

손가락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한 번의 총소리가 크게 울리고 나귀가 그제서야 깨어나서 요란하게 울어댔다. 그리고 그것은 사라졌다.


조용히 숨을 삼켰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을 이해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한밤의 소동이 있은 뒤 날이 밝기만 기다린 내 눈에 보인 것은 검은 덩어리였다. 사람과 같이 머리와 팔다리가 달린 검은 덩어리가 가슴께에 구멍이 뚫린 채로 쓰러져 있었다.

틀림없는 귀신이다. 멀리 서쪽의 덩어리로만 보았던 그 귀신.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도 봉화에서 떨어진 곳에서 본 것도 처음이다.

2년간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봉화 때문에 접근조차 못 해야 할 귀신이 이런 곳에서 보이다니….

귀족에게 빨리 이 상태를 알리고 해결책을 들어야 한다. 마을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봉화를 지키는 불지기는 뜨거운 열에 인해 촉감을 잃는다. 불에서 나오는 검댕으로 후각을 잃는다. 메마른 입은 미각을 잃는다. 타오르는 불꽃의 강한 빛에 인해 시각을 잃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불지기의 청각은 불꽃과 함께 꺼지고 만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불지기는 그 임무를 모두 완수한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다만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생각보다 임무가 끝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분명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을 텐데도 미련이 조금씩 돌아올 만큼 오랜 시간이.

하지만 봉화의 눈물은 눈물 같은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찮은 나의 감정까지도 불꽃은 모두 집어삼켜 주었다. 그래. 나는 불꽃만 보고 있으면 된다. 저 불꽃만 느끼고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 불꽃이 꺼지면 나는 무엇을 보면 되는 걸까.

바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동그랗게 빛나는 구가 둥실둥실 떠있다. 그 외의 것은 모두 캄캄하다. 손을 들어올려 뻗어 보았다. 아니, 뻗었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남아있던 시각이 사그라져 간다. 동그란 구가 점점 흐려진다.


“자기님! 자기님, 계십니까!”

빛이 바란 나무문을 마구 두드렸다. 이 마을에서 가장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된 문이다.

“무슨 일이냐!”

큰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귀족, 이름은 자기다. 누님에게 불지기의 역할을 맡기고 내게는 불지기의 전령이자 심부름꾼의 역할을 맡긴 이다.

귀족이 커다란 얼룩덜룩한 천을 두른 채로 날 바라보았다. 평소에 언제나 쓰고 다니던 모자도 쓰지 않고 단발을 마구 헝클어트린 채다.

“상후 아니냐? 어쩐 일로 이렇게 빨리 돌아왔지? 평소대로라면 내일쯤 와야—.”

“꼭 전해드려야 할 얘기가 있습니다.”


한참을 구를 바라보고 있는데 뭔가 기척이 느껴졌다. 이미 모든 감각이 흐려졌으니 그저 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뭔가가 크게 울리는 감각이 느껴진다. 낸 온몸을 울려대는 뭔가가 느껴진다.

상후일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더라.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상후 외에 이곳을 찾아올 사람은 없으니 그렇겠지. 아, 아니다. 이번에는 특별한 전언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건 누굴까? 잘 모르겠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니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최대한 자신만만한 태도를 취해 본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으니 그저 시늉을 한다고 할까. 허리를 펴고 가슴도 펴고 그렇게 당당한 자세를 취한 척하며 미지의 무언가를 맞으려 한다.

감각이 없어도 2년간 살아온 오두막 정도는 걸어갈 수 있다. 시야 한켠에 동그란 구를 기준으로 몸을 움직인다. 손을 휘저어 문손잡이를 찾았다. 문을 열며 말한다, 최대한 태연하게.

“오, 그래 왔냐.”


“불지기가 드디어 시각을 잃었다고 거기다 마을 쪽에서 귀신이 나타나기까지….”

귀족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나는 그저 초조하게 기다릴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드디어 때가 왔나.”

그렇게 말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나 싶더니 얼룩덜룩한 천을 그대로 걸친 채 모자만 쓰고 밖으로 나온다.

“총은 있겠지? 따라오거라.”

귀족은 묻는 둥 마는 둥 하고 바삐 걷기 시작한다. 나는 네라는 말을 겨우 하고 따라가기 바빴다.


문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야 한켠에 보이던 불도 사라졌다. 아직 바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시각을 모두 잃은 모양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불지기의 임무가 다하는 때.

“아, 그렇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뭐 보이는 게 없긴 하지만 어차피 너희는 그냥 까마니까 상관없지. 봉화까지 온 걸 환영해.”

기왕이면 상후가 와줬으면 좋을 텐데.

뭔가가 달려들고, 뭔가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에서부터 순식간에 온몸으로, 그리고 희미하게 남아 있던 모든 감각이,

끊어졌다.


“저건….”

귀족이 내온 말을 타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마을에서 정말 귀한 일이 있을 때 써야 한다며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말이었다. 내민 말고삐에 머뭇거리는 내게 귀족은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다그쳤다.

말을 타고 정신없이 달리니 3일이나 달리던 길도 하루면 충분했다. 그리고 봉화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서 그것이 보였다.

“그래, 귀신이다. 벌써 저만큼이나 모였구나.”

귀신, 귀족의 말이 맞다. 언제나 언덕 아래에서 우글거리는 것만 봤었는데 지금은 희미해진 봉화의 불빛과 함께 춤추고 있다. 덩실덩실. 거대한 팔과 다리가 위태롭게 흔들거린다.

“저건…. 인형입니까? 귀신들이 인형에 달라붙어 춤을 추고 있어요.”

“처음부터 그러기 위함이다. 봉화는 귀신을 모아둘 시간을 끌기 위한 것. 인형은 귀신의 시선을 끌고 모이게 만들 미끼. 이제 네가 마지막 임무를 행할 차례구나.”

“임무라구요?”

“그래. 너의 임무, 저 인형을 쏘아 맞혀야 한다.”

귀족의 시선이 내가 소중히 품고 있던 총으로 떨어졌다.

“인형을? 어째서?”

“저 인형은 도화선이다. 인형을 불태움으로써 봉화가 품고 있던 에너지가 폭발하고 귀신을 일거에 처리할 수 있게 된다.”

귀족이 내 품에서 총을 꺼내 내게 쥐여준다.

“하지만 그럼 누님은?”

내 질문에 귀족은 표정을 찡그렸다.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불지기가 시각을 잃었다고. 그렇다면 드디어 불지기가 모든 감각을 잃었다는 의미 아니냐? 이제 불지기의 임무는 끝났다. 너도 임무를 다하도록 해라.”

드디어? 누님이 다른 감각들도 잃었다고? 지금까지 나와 그렇게 평범하게 얘기를 나눠왔는데? 나는 그런 일은 전혀 알지 못했다. 언제나 내가 얘기하면 웃으며 들어주셨는데, 언제나 똑같이, 정말 언제나 똑같이.

“임무를 다하라는 건. 누님을 죽게 내버려 두란 말입니까?”

귀족은 그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저 꼴을 봐! 불지기는 이미 죽었어! 나는 마을을, 아니 세계를 지키라고 하는 거다!”

뭐가 다르지? 여기 멀찍이서 누님을 놔둔 채로 세계만 구해내라니. 그게 누님을 죽이는 것과 뭐가 다르지?

“이런, 이렇게 중요한 일은 처음부터 이런 어린애한테 맡겨서는 안 되는 거였어. 괜히 사격술만 따져서는….”

총소리가 나고 귀족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초조함에 잠시 고개를 돌린 틈을 노렸기 때문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하긴 있었어도 상관없다. 저런 늙은이에게 당하진 않으니까. 누님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나는 봉화를 향해 말을 달렸다.


까맣다. 온통 까맣다.

봉화까지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귀신들은 모두 말로 짓밟아 버렸다. 봉화에 도착하여 말을 멈추고 총을 휘두르며 내렸다. 그렇게나 짓밟았지만 여전히 귀신 투성이다.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흔적이 전혀 남지 않았다. 온통 검은 덩어리가 깔려있다.

말이 순식간에 덩어리에 침식된다. 말의 입과 코로 꾸역꾸역 들어가는 덩어리가 보였다. 말 머리를 총으로 날려서 말에게 안식을 주었다.

오두막까지 달린다. 머리 위에는 거대한 인형이 춤을 춘다. 나를 밟으려는 걸지도 모른다. 인형의 다리 사이를 통과하고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보인 것은 누님이다. 검은 피부에 진한 다크서클, 삐딱한 자세에 긴 머리. 틀림없는 누님이다.

누님의 입이 살짝 열렸다.

“그르르르륵?”


“귀신들은 모두 동쪽으로 가버렸어요. 이제는 거대한 인형도 보이지 않아요.”

웃으며 말한다. 누님과 있으니까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이제 심부름꾼이랍시고 마을과 봉화를 왕복할 필요도 없다. 그냥 여기서 누님과 함께 있으면 된다.

“누님. 이제 세상이 온통 하얘졌어요. 전 눈을 처음 봐요.”

서쪽 창가를 보며 말했다.

“누님은 혹시 눈을 보신 적 있으세요? 아, 역시. 누님과는 세대가 다르다니까요.”

누님이 항상 발끈하던 농담이지만 이젠 익숙해졌는지 별 반응도 없다. 하긴 고작 5년 정도의 차이야 무한히 긴 시간이 메워주겠지.

“누님도 오랜만에 눈을 보니 예쁘죠? 하얀 세상이라니 상상도 못 해봤어요.”

볼이 약간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 분위기를 더 견딜 수가 없다. 잠시 나갔다 올까. 이제 누님도 내가 있어야만 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편한 마음으로 나갈 수 있다. 봉화의 불은 이제 완전히 꺼졌다.

“바람도 쐴 겸 잠시 산책 다녀올까 봐요.”

내가 일어나자 누님의 시선이 나를 따라 움직였다. 아쉽지만 누님은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누님의 입이 열렸다.

“그르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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