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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칼날

2014.05.29 08:4705.29

칼날

무더움 여름 날 오후 두시. 나는 수업을 마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의대를 가겠다고 마음먹고 나온 나였지만 무작정 부딪히고 보니 수시를 넣기에는 성적이 턱없이 모자랐다. 지방 의대라고 하더라도 의대는 의대인지라 그쪽에서도 모자라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결국 의대에는 가지 못했고 재수를 해 서울에 있는 K대의 간호학과에 지원해 들어온 것이었다. 기숙사 방은 원룸 형식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맞음편에는 창문이 있고 오른쪽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방의 왼쪽에는 공부할 수 있도록 마련된 책상이 두 채 있고 책상 위에는 크고 작은 선반이 두 개 있었다. 방의 오른쪽에는 둘이자기에는 너무 좁고 혼자 자기에는 조금 넓은 침대가 이층으로 있었다. 평소 공부를 하게 되면 나나 룸메이트나 도서관에 가는 터라, 평소 방 안은 대부분 어질러져 있었다. 룸메이트는 의학과에 다니는 녀석이었다. 대학에 바로 들어와서 나보다 한 살 어렸고, 평소 붙임성이 좋아 주변평판도 나쁘지 않은데다가 성적까지 괜찮은 편이었다. 질 나쁜 녀석은 아니었지만 나는 녀석이 썩 맘에 들지 않아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기숙사 방 앞에 도착하자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방문 끝에서부터 새어나오는 역한 비릿내가 내 코를 찔렀다. 더욱 이상한 것은 녀석은 오늘 아침 공강이라고 나에게 말했었던 것이었다. 평소 방에 있으면 문을 열어두고 나가는 녀석의 버릇 때문에 몇 번 화를 낸 적이 있던 터라, 녀석이 오늘 정말로 바쁜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녀석은 기숙사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방문을 열고 나니 더욱 이상했다. 기숙사는 누군가가 와서 치워주거나 하는 여관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명의 학생이 오가며 서로가 관리하고 살고 있는 곳이 기숙사였다. 말했다시피 녀석과 나는 방을 자주 어지르는 편이기 때문에 제대로 치워두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오늘 기숙사 방 안은 마치 호텔방이라도 온 것처럼 깨끗했다. 화장실 문은 닫혀있고, 누렇던 시트는 깨끗이 빨아 정리 되어있었고, 어지럽게 널려 있던 책과 신발들은 가지런히 정리 되어있었다. 방 안쪽으로 들어가자 역한 비릿내가 더욱 심해졌다. 그 냄새가 주변의 공기를 전부 빨아들인 것 같아, 나는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냄새가 메스껍기도 했지만 왠지모르게 익숙한 냄새였다. 나는 방학 때 보조 간호사로 일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익숙한 냄새는 응급실에 실려 온 사람들에게서 났던 죽음의 냄새였다. 나는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어 닫혀있던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자살이었다. 날카로운 것으로 동맥을 단 번에 끊어내는 방식이었다. 바닥에는 녀석의 몸을 감싸고도 남을 만큼의 선혈이 타일에 눌어 붙어있었다. 나는 몇 초 동안이나 제자리에 멈춰 선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침내 내가 상황을 알아차리고 녀석의 맥박을 재러 다가갔을 때, 바닥에는 날카로운 칼날을 빛내는 메스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녀석은 내가 맥박을 재고 난 뒤에도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녀석을 그 일 이후에 본 것은 장례식장에서였다. 학교에서는 좋은 인재가 저렇게 떠나버린 것이 안타깝다며 임시 휴교방침을 내렸다. 교수들은 시간을 내서 녀석의 장례식장에 가잔 이야기를 했고. 나는 방 배정이 바뀌긴 했지만, 기숙사 방 안에 다시 들어가기 꺼림직했기에 식장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검은 색 옷을 입고, 절을 하고 난 뒤에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식탁에 앉아 반 쯤 식은 육개장을 한 입 한 입 씹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식장 중심에 놓여있는 녀석의 영정사진은 웃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옆에는 하얀색 상복을 입은 중년 여성과 20대 쯤 되는 여성이 꽃을 든 채로 오열 하고 있었다. 오른손 약지에 낀 반지와 만삭인 배를 보니 녀석이 말했던 약혼자인 모양이었다. 여자는 두 시간 정도 후에 온 동기들과 술 한 잔을 하는 동안까지도 계속해서 울었다. 그러다가 이내 픽 하고 쓰러지는 것이었다. 아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녀석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여자를 부축하며 말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산, 사람. 죽은, 사람. 나는 귀에서 들은 그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다 식어버린 육개장을 숟가락으로 떠 입에 넣었다. 파와 고춧가루의 쓴 맛이 입 안에서 멤돌았다. 나는 식장을 나온 뒤에 나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녀석과 친해졌다면 나는 녀석이 죽은 이유를 알고 있을까? 대답은 아니오였다. 내가 녀석과 친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설령 같은 방에서 살고 잠을 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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