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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숭배자들

2014.05.25 23:2405.25




숭배자들




 그렉은 젊은 조각가였다. 그는 오늘 밤만큼 조각가로서 남들보다 정확하고 강한 팔 힘에 감사한 적이 없었다. 그동안 하잘 것 없는 주문 제작으로 버텨온 그지만, 곧 전도유망한 예술가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로 오늘 밤부터. 몇 달 동안 대작을 구상하듯 집중한 작품이 막바지에 달았다. 이번 재료는 차가운 돌이나 단단한 나무가 아니다. 처음으로 다루는 예민한 재료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바지에 축축한 손바닥을 문지른 후 망치를 고쳐 쥐었다. 그의 발치에는 중년의 남자가 자신의 얼마 남지 시간을 쪼개며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걱정 마, 곧 끝날 테니까.”

 쓰러져 있는 남자는 항변하듯 입을 달싹거렸지만 진득한 피와 쉰 숨소리만 나왔다. 턱을 망치로 맞아 입 안에 깨진 치아들과 살덩어리, 피가 처참하게 엉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렉은 그녀가 갇혀 지내던 거대한 집을 돌아보았다. 천장부터 바닥의 카펫까지 보이는 모든 것이 호사스러웠다. 남자가 걸친 것 역시 매우 고가였다. 몇 년 전부터 성공한 주식투자자로 혜성처럼 나타난 남자는 벌어들인 돈을 모조리 집과 자신을 가꾸는데 사용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눈부신 왕궁 속에 온기란 없었다. 하나하나에서 음울한 집착과 강박이 느껴졌다. 예술가인 그렉의 눈에는 욕심을 위해 영감 없이 만든 모조품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쏟아 붓지 않으면 그녀를 잡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나보지? 이 최고급 감옥에 가둬두면 그녀가 평생 만족할 줄 알았나보지? 이 더러운 변태 자식아.”

 남자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모욕을 당한 듯 얼마 남지 않은 힘을 그러모아 그렉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그렉의 발이 인정사정없이 그의 갈비뼈를 걷어찼다. 중년 남자는 그렉이 몰래 들어와 자고 있던 그의 턱을 부셔버린 순간부터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한 채 또 다시 바닥을 굴렀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신음소리와 눈물이 남자에게서 흘러나왔다.

개자식.” 

 그렉은 원래 잔인한 성격의 남자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끝없이 잔인해질 수 있었다. 자신의 뮤즈, 행운의 여신, 그녀를 향한 헌신적인 사랑을 위해.

 

 그녀를 만난 것은 1년 전 어느 호화로운 후원파티에서였다. 그렉은 명성도 돈도 없었지만 지인 덕분에 운이 좋게 그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파티에서 겉돌았고 곧 처음 마셔본 고급 와인에 취해 빈 방에 들어가 쉬고 싶어졌다. 그리고 우연히 찾은 구석방에서 갑작스런 방문자에 놀란 그녀를 만났다. 그 날 이후로 그렉은 그녀의 충실한 숭배자이자 헌신적인 연인이 되었다. 떨리는 음성으로 이름을 묻는 그렉에게 그녀는 자신에게는 진짜 이름이 없다는 아주 인상적인 답변을 전했고 예민한 예술가 그렉의 마음에 꺼트릴 수 없는 불을 질렀다. 그렉은 조각가답게 그녀를 갈라테이아, 나의 갈라라 부르며 찬양했다. 갈라는 아름다움을 넘어 고혹의 화신이었다. 소녀 같으면서도 때로는 속과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인, 심지어 정체조차 불분명한 명화 속의 여신 같았다. 그녀와 있으면 행운도 함께 했다. 주문이 늘고 영감이 사랑과 함께 솟아올랐다. 이제는 특별히 그렉을 기억하고 만나러 오는 고객도 있다. 아아, 그녀는 환상처럼 치명적이었다. 그렉은 그녀를 놓칠 수 없었고 결국 자신의 발아래 떨고 있는 남자를 죽이기 위해 몇 달 전부터 고민하게 되었다. 갈라는 이 남자의 연인이었다. 정확히는 집요한 의처증 환자의 희생양이었다. 부와 집착, 힘에 억눌려 약탈되고 속박되어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병적으로 의심했고 교외의 거대한 저택에 가두다시피 했다. 때문에 그들의 밀회는 언제나 봄날의 이슬처럼 찰나와 같았다. 갈라의 열렬한 연인인 그렉에게 오늘 밤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렉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 갈라는 알리바이를 마무리한 후 마지막이 될 이 집을 향하는 중일 것이다. 남자를 처리하면 집채로 전부 불태워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멀리 떠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어디서든 성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그를 대담하게 만들었다. 문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가는 남자를 다리로 눌러 고정시킨다. 숨을 멈추고 망치를 드는 순간, 방문이 터지듯 열리며 창백한 얼굴의 낯선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두 손이 단단히 총을 쥐고 있었다. 경찰? 그렉과 남자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다. 낯선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망치가 그렉의 손을 떠나 땅바닥에 떨어졌다. 총알이 웃고 있는 중년 남자의 머리를 관통했다. 놀란 그렉이 넘어지자 낯선 남자는 다시 총을 고쳐 쥐었다.

 “미친 변태 자식들.”

 그렉이 항변하기도 전에 두 번째 총알이 왼쪽 뺨을 흉하게 지나갔다. 치아가 터지고 피가 떨어진다. 낯선 남자는 혀를 차며 세 번째 발포를 준비한다. 그 때, 낯선 남자 뒤에서 갈라가 나타났다. , 남자가 그녀를 껴안으며 말한다.

 “내 사랑. 벨라, 이제 끝났어.”

 연인처럼 그의 팔을 붙드는 갈라. 말을 할 수 없는 그렉이 갈라를 보고 망치로 맞은 것처럼 떨더니 다가가려 했다. 낯선 남자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갈라이자 벨라인 여인과 그렉 사이를 가로막는다. 저 남자의 눈빛. 헌신적인 사랑에 빠진 숭배자의 눈빛.

 여인은 중년 남자를 보던 표정으로 그렉을 바라본다. 두려움과 경멸, 지나간 것에 대한 일말의 안타까움. 차가운 권태. 그녀는 몸서리치며 그렉에게 그랬듯 낯선 이의 품에 파고든다. 남자는 한손으로 여인을 그러안고 남은 한 손으로 그렉을 조준한다. 마치 그녀를 위해서라면 한없이 잔인해질 수 있다는 듯이. 그렉의 눈에서 연민을 불러 일으킬만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세 번째 총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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