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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 1

2023.04.05 13:1504.05

"그런데 팀장님, 이거 누구 계좌에서 빠지는 거예요?"

"쉿, 몰라. 그냥 마셔."

우리는 막 들여온 캡슐커피를 작당모의하는 악당 마냥 몰래몰래 홀짝홀짝 마셨다. 초라한 탕비실에 엊그제 갑자기 새 캡슐 커피 기계가 생겼다. 기계 옆에는 신용카드 결제기가 달려 있는데 어느 순간 누가 깨달았다. 이것 좀 들어보세요. 신용카드를 가져다 대지 않고도 결제가 된다네요. 정말요? 그럼 공짠가? 헐! 대박!... 그 누군가는 같이 잘 살자는 애민정신으로 주변인에게 이 소식을 널리 퍼트리기 시작했고, 직원 수 약 200명의 <후영 엘리베이터>에서 그 소문은 불붙듯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으음. 이게 바로 고급 커퓌. 아로마가, 죽여줘요."

"아이구, 맨날 누런 맥심만 먹다 보니까 고급 커피에 눈이 뒤집혔네."

최 실장님이 킥킥거리자 오 팀장님은 눈살을 찌푸렸다.

"실, 짱, 님!"

서른 중반 사회인의 사회생활 노하우가 가득 담긴, 액센트가 묻어나는, 정말이지 미워할 수 없는 찡얼거림이었다.

"조심해, 오 팀장.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오 팀장님이 고개를 흔들자 뽀글한 파마머리도 함께 북실 거렸다.

"나 참 속고만 살은 사람이 바로 여깄네. 만사 부정적인 사람!"

"아니 진짜라니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밀턴 프리드먼."

"실짱님! 저번에 주식 마이너스 이백퍼 찍고도 계속하시는 거예요?"

"아니 밀턴 프리드먼은 주식쟁이 아니야 경제학자야!"

실장님의 거뭇거뭇한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을 꺼냈다.

"누구 주머니에서 나가냐니, 아, 분명 사장님 주머니에서 나가는 거겠죠? 아마도? 이건 우리 노고에 감사해서 분명 사장님께서 무료로 주신 걸 거예요. 피로 풀라고. 아마…도?"

"아니 우리가 뭐가 이쁘다고 사 주냐. 안 그래도 돈 없다고 뭐라고 하드만."

"네?"

팀장님은 고개를 싹 들어서 꺽다리 실장님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팀장님 키가 작으니까 어쩔 수 없는데, 실장님의 콧구멍만 커다랗게 보일 테니 좀 우습다. 실장님은 목소리를 낮추었고 나와 오 팀장님도 밀사의 조직원처럼 고개를 숙였다.

"아니 이번에 몇몇 팀은 보너스 안 준다고 사장이 그래서 우리 인사팀이 그거 항의 받느라 머리 빠지겠다고."

"아 이번에 추석이라고 들어온 백삼십오만 원 말하는 거죠? 아니 근데 왜 몇몇 팀은 안 주나?"

"헤에, 짱 치사해."

"계약서에 따르면 할 말 없다나 본데."

"근데 치사한 건 치사한 거잖아요."

"그치. 같이 똑같은 회사 다니는 입장에선 빡칠 만 할듯."

"헐 그래서 대신 얻어낸 거 아니에요 저 커피 머신? 설마 저게 혹시 복진가? 어맛 깜짝이야!"

예티와 송강호를 섞은 거 같이 생긴 한 부장이 소리도 없이 지나갔다. 팀장님은 가슴을 꾹 누르고 원망 섞인 눈길로 한 부장을 바라보았다. 세븐일레븐에서 맥주 사는 광경을 흔히 본 거 같은 동네 아저씨지만 송충이 눈썹이 축 처져서 어쩐지 우수에 찬 거 같은 데서 송강호. 엉거주춤하게 발을 질질 끄는 데다 몸집도 큰 데서 예티.

한 부장은 사십 줄이지만 오십으로 보인다. 전혀 피부 관리를 하지 않아 피부가 얽어 있는 채로 방치된 데다가 귀밑머리에 새치가 잔뜩 난 탓이다. 아, 그리고 그는 이혼남이다. 그닥 알고 싶은 가십은 아니었는데 하필이면 내가 입사한 3년 전이 그가 이혼을 하게 된 날과 같았었다. 그날 구두 뒤축을 구겨 신은 한 부장은 15분 지각했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나는 그와 복도에서 눈을 마주쳤고, 잔뜩 겁을 집어먹곤 구십 도로 인사했다. 그는 부은 눈으로 목례했다. 한 부장은 그날 이후로는 다시는 지각하지 않았다.

나는 한 부장이 보너스 못 받은 몇몇 팀 중 한 팀인 시설 관리팀 사람임을 알았다. 또 지난주 목요일 저녁 6시, 사장실에서 정면으로 대들었는데 문틈 새로 사장님의 괴성이 들려서 한 부장이 잔뜩 깨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비록 그는 패잔병이었지만 시설 관리팀은 베테랑 대우를 해 주고 있다. 한 부장은 커피 머신에 잠깐 눈길을 주곤 그 앞에 선 세명을 보더니 휙 스쳐 지나갔다. 난 한 부장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어, 이거 줄 선 거 아닌데요!"

"냅둬. 한 부장 지금 혼자 있고 싶을 듯."

"왜요? 사장님이랑 싸웠대요?"

우리는 모두 끼끼끼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한 부장과 사장님이 썸을 타고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맨날 건물 곳곳을 싸돌아다니는 한 부장이 안쓰러워서 하는 흰소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때였다. 한 부장이 우리를 돌아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걸 아시는 분들이 그러십니까?"

"예? 어, 설마..."

"그거 입막음 맞습니다. 커피 머신이요."

"아..."

한 부장은 준비한 대사를 말하듯이 따따따 쏘아붙였다.

"뭐 하나 탕비실에 놔 줄 테니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는 거지요. 저는 치사해서 안 씁니다. 여러분도 안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이미 늦은 것 같지만."

그는 커피가 든 텀블러를 쥔 팀장님을 티 나게 흘낏 쳐다보더니 다시 뚜벅뚜벅 자리로 걸어갔다. 팀장님은 주눅 들기는커녕 그가 지나가자마자 다시 숙덕거렸다.

"헉ㅡ 역시 한 부장 혼났나 보다."

"아, 사장님! 애인을 혼내키는 마음은 어떨까. 찌이잊어지겠다."

나는 의견을 제시했다.

"헤어진 거 아닐까요?"

"헐... 회사에서 맨날 구 애인을 봐야 한다니. 나라면 퇴직한다."

"안돼요. 팀장님 가면 일은 누가 해요."

팀장님은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다가 검지를 척 쳐들었다.

"유, 너님."

"이잉!"

"지금 이 커피 기계 써요?"

"아, 표 인턴님!"

까까머리 표 인턴이 구두를 질질 끌며 다가왔다. 허름해 보이고 품이 큰 쥐색 양복을 입은 표 인턴은 회사에 MZ의 정수로 비치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런 이름표가 억울했을 거 같은데 본인은 별다른 액션을 취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입뾰족이 강 사원이 아니 쟤는 어떻게 헤드폰을 쓰고 일하냐고 잘 들리도록 이죽거려도 아무 일도 없는 척 넘기는 것을 두 번이나 봤다. 나보다 몇 살 어리지 않은데 별로 나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것 같은 얼굴로 모니터를 뚱하니 쳐다보다가 가끔 뭔가 입력하는 게 일과다. 솔직히 좀 이해하기 어렵달까. 나는 사수이기는 하지만, 내 업무는 너무 간단해서 사흘 후에는 더 가르치고 말고 할 것도 없었고, 그 이후로 따로 교류한 적은 없었다.

그 후로 2개월이 흘렀다. 첫 1개월 때 쪼금 일찍 출근했던 날이 있는데 어랍쇼, 표 인턴이 출근해 있었다. 서로 깜짝 놀랐던 게, 그가 팔을 휘두르며 틱톡을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블바디 멕썸 틱톡! 그는 후닥닥 삼각대를 접어 가방에 집어넣었고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했으며 바로 팀장님이 오셔서 그에게 인사했다. 스무스하게 넘긴 셈이다.

“으아악!”

단말마와 함께 표 인턴이 갑자기 사라졌다. 나는 올라가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띵 하는 소리가 나며 삼다수 물병을 쌓아 둔 위에 쓰러진 표 인턴이 문 사이로 드러났다. 그는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왜 엘리베이터가 여기 있어요?”

“황당하지? 탕비실 통해야 사장실 갈 수 있는 건 안 황당하구?”

팀장님은 쿡쿡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켰다.

“표 인턴님, 여기선 의문을 가지면 안 돼. 그런가 보다 해.”

“이거 위아래로 움직이진 않아서 창고로 써요.”

표 인턴은 씩씩거리며 회색으로 페인트칠 된 엘리베이터 문과 버튼을 쓸어 보았다. 페인트칠이 가리지 못한 부분이 살짝 빛나고 있다는 것 외에는 버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렵게 생겼다.

 

표 인턴은 콧김을 뿜더니 곧장 캡슐커피 머신 쪽으로 점프했다. 달그락 소리가 네 번 났고 사람들의 시선이 표 인턴의 주먹으로 모였다. 그는 표창을 끼듯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서로 다른 네 개의 캡슐을 끼고 있었다.

"에? 표 인턴 이거 다 먹어?"

표 인턴은 끄덕이곤 말했다.

"제 돈도 아닌데요 뭐."

그는 차례로 네 개의 캡슐을 다 머신에 집어넣고 추출하더니, (위-잉, 위-잉, 위-잉, 위-잉) 커피 맛을 봤다. 그는 만족스럽게 입술을 핥더니 혼잣말로 물었다.

"음. 무슨 커피지."

"애-일 커피."

나는 캡슐커피 기계 옆에 씐 브랜드를 띄엄띄엄 읽었다. 애와 일 사이에 길게 작대기가 그어져 있었다.

"듣보인데, 하여튼 괜찮네요."

그는 어깨에 걸친 아이폰 헤드셋을 다시 귀 위로 올리고 비척비척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오 팀장님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포 샷이라니."

"어리니까 저거 감당하지 저거 저거, 곧 심장 터진다."

나는 심장 위에 손바닥을 가만히 올려 보았다. 파팟, 파팟. 내 심장은 오늘 커피를 하나 먹은 치만큼 뛰고 있었다. 무리인 듯 아닌 듯 살짝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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