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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이라는 동포





*본편 중간*

이은혁은 물인간 은하영과 함께 오솔길을 거닐었다.

인신국의 햇볕이 내리쬐는 낯익은 풍경이었다. 지구의 한적한 산길과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사방이 먹기 좋은 과일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정도였다. 이은혁이 언제든 과일을 배불리 따먹을 수 있게 조절된 숲이었다.

이은혁이 말했다.

“은하영님, 지금 물인간님은 분신이시지만 왜 나 같이 약해 빠진 평범한 지구인을 자신과 이리 공평하게 대하려고 노력하시죠?”

“그야 인신족이 양심적이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양심을 쓰시는 이유가 뭐랍니까?”

“인신족은 감정의식 존중법을 이승과 저승 모두에 통용해요. 존중받아야 하는 개체가 순간적으로 억울하게 손해를 입도록 하는 걸 악행으로 간주하죠. 인신족은 대마계의 마물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도덕적 인공지능으로서 만들어졌고 때문에 타락해서는 위험했기에 정교하게 구성되었으며 감정의식 존중법을 구축했죠.”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감정의식 존중법을 만든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요?”

“0도 1도 수학약속일 뿐이고 0 또한 존재하는 걸 나타내는 경우가 꽤 있지요. 그러나 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게 무이기 때문이지요. 상상할 수도 없는 무는 그렇게 존재합니다. 무는 그 자체로서 모든 의미를 빨아들입니다. 무가 ‘있기에’ 신 또한 모든 측면에서 전지전능할 수는 없어요. 무를 없앨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모든 있음은 무에게 대항하는 존재이고, 있음들이 무수히 많아야 있음들은 스스로 없어지더라도 모든 있음이 사라지는 사태를 맞이하지는 않는 것이죠. 그렇기에 대우주에 단 하나의 의지만이 있을 때에는 그 하나의 독단에 의해 대우주가 없음이 될 수가 있지요. 때문에 하나님은 무수한 것들을 창조하셨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제가 속한 인신족도 이은혁님이 속한 지구인처럼 있음이라는 사실에서는 마찬가지이고 때문에 겸허하게 대하는 거에요. 없음에 맞서는 존재라는 점에서 모든 있음들은 동포이지요. 감정의식을 가진 이들은 더욱 귀중하고 그렇기에 이은혁님을 양심적으로 대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신족에겐 수양도 되는데 지옥을 다스리고 대마계에 맞서야 하는 인신족 전사로서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있으면 친구라니 그거 흥미롭네요."

"없음이야말로 근본적인 악이니까요."

[2017.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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