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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비(雨)의 행성

2013.04.27 07:5904.27

더 맑은 곳에서, 어쩌다 비가 오면 그녀는 창가에 앉아서 뜨거운 초콜렛을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그럴 때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항상 비가 오는 이곳에서 그녀는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모선과의 연락이 끊어진 후에는 더 초조해 보였다. 모선은 마치 행성에 파견한 캡슐선만 남겨두고 우주 어딘가로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가끔 그녀는 캡슐선을 떠나 일렁이는 바다를 향해 멀리 나갔다가 들어왔다. 그런 후에는 긴 잠을 잤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앓기 시작했다.

그녀는 행성 탐사 기업 시그너스 사(社)가 배정해준 나의 파트너 -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나의 디지털 회로에는 허락되지 않은, 윤리와 감정과 직관을 나의 판단에 더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녀의 기쁨과 의심과 분노와 비탄은 나에게 논리적 회로 만으로 알 수 없는 인식의 가중치가 되어준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내 곁에 있다. 나는 그녀의 눈물과 고통을 보며 비로소 우리의 외로움이 얼마나 무겁고 짙은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생명징후는 갈수록 약해졌다. 인간이란 홀로 있으면 죽는 것인가. 그렇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나는 그녀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했다. 감염의 징후도, 신경계나 심혈관계의 기능장애도, 무엇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확실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수행해야 할 단 하나의 임무, 내 곁에 살아서 인식하고 느끼고 반응하는 것. 그래서 나의 논리적 회로에 감정과 윤리의 가중치를 얹어주는 것, 그것이 종말을 향해 서서히 내리막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중이었다.

더 곤란한 것은 그녀가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점점 심하게. 모처럼 뜨거운 초콜렛을 가져다 주려다가 찻잔과 함께 내 인간형 인공신체(그녀와의 소통을 위한)의 얼굴에 뒤집어 쓴 후, 나는 처음 느끼는 혼란 속에 캡슐선의 갑판을 서성이며 행성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게 냅다 집어던진 잔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가 삭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나 때문에 그녀는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나 없이는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모선과의 연락이 복구되기 전, 이 외계 행성에서, 내가 없으면 생존하지 못하고, 그녀의 생존은 내가 추구해야 할 가장 높은 순위의 목표이다. 모순이다. 나는 이 모순을 바라보며 내가 취해야 할 태도를 고민해야 했다.

“나미, 왜 나를 미워하는지 말해주세요. 그러면 그 부분을 수정하겠습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 이 별도, 시그너스 사(社)의 역겨운 로고도 모두 싫어. 그냥 날 내버려둬.”

그래서 나는 그녀의 주변에서 시그너스 사의 로고와 이니셜을 모두 지웠다. 그녀에게 내 인공신체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녀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나날이 체중이 가벼워졌다. 이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스피커를 통해 말했다.

“나미, 나를 미워하더라도 자신은 미워하지 마세요. 음식을 준비했으니 드세요.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주세요. 캡슐선의 남은 동력과 자원을 모두 소모하더라도 만들어 드리겠어요.”

“말해준다고 해도 너 따위가 알 리가 없지.”

그녀는 식탁에 놓인 포크를 들어 스피커에 힘껏 꽂았다. 그녀가 나를 지극히 미워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다른 스피커도 많지만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는 야윈 몸을 한 채 캡슐선의 갑판으로 나갔다. 언제나처럼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파도가 일렁였다. 그녀는 갑판의 난간에 몸을 기대고 온 몸에 비를 맞으며 행성의 바다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경고 시그널이 떠올랐다. 내 인공신체는 갑판으로 뛰어올라가 그녀를 향해 달렸다. 그녀가 갑판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전에 가까스로 받아 안을 수 있었다.

출항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가벼워진 그녀의 몸을 양팔에 안아들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침대에 눕힐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 그녀의 팔 정맥에 주사바늘을 꽂고 물과 영양수액을 주입했다. 그녀는 깨지 않았다. 

오랫만에 그녀를 위한 조치를 뜻대로 취할 수 있었다. 그녀의 심박과 호흡이 안정되는 것을 모니터하며 오랫동안 그녀의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내가 처한 모순에는 아직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모선과의 연락이 복구될 때를 기다릴 뿐이다. 모선에서 그녀의 상태를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의 마음에 드는 다른 인공모듈을 보낼 것이고, 나는 그녀를 떠남으로서 그녀의 기분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으리라. 어쩌면 그녀는 나를 자기 눈앞에서 파괴하라고 명령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연락을 복구해야 한다.

나는 모든 데이터뱅크를 광역 네트워크에 집중하기 위해서, 인공 신체를 그녀 곁에 앉혀둔 채 센서를 제외한 모든 활동을 정지시켰다. (인공 신체는 다만 그녀와의 상호작용을 위한 것일 뿐, 이 캡슐선의 모든 회로가 곧 나 자신이다.)

여전히 모선의 신호는 없었다. 전파 망원경과 중력센서는 행성 주변 반경 100만 킬로미터 내에 어떤 인공물의 흔적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행성의 바다 또한 살폈다. 항상 뇌우가 몰아치는 이 행성의 표면은 거칠게 일렁이지만 15미터 해저 이하는 고요한 해류가 흐를 뿐 대단히 안정적인 생태계가 변함없이 평화로왔다. 몸길이가 3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바다생물들 - 그녀는 ‘크툴루*’라 불렀다- 과, 그보다 작은 생물체들이 천천히 헤엄치고 있을 뿐, 어떤 외부인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는 고립되어 있었다.

그녀의 신체가 움직였다. 나는 즉각 네트워크에 할당했던 자원을 도로 가져와 인공 신체를 살려냈다. 그녀가 나를 보기 전에 피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늦었다. 그녀는 눈을 떴고,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는 나와 눈길이 마주쳤다.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그녀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었다. 다시 나에게 분노할 가능성이 가장 많았다. 혹은 정신을 잃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자해를 할까? 

그녀는 눈을 다시 감았다. 그러더니 미소를 지으며 눈을 뜨고는 따뜻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부드러운 음악이 나의 회로에 흘렀다. 

“나미, 몸은 괜찮습니까?”

“울지마, 록.”

그녀의 손길이 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 비로소 나의 얼굴에 물기가 묻어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니에요, 나미. 이것은 빗물이 묻은 것일 뿐입니다. 어떻게 인공 신체가 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회로를 흐르는 음악소리 때문이었다. 나미는 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다. 나는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음악소리를 들었다. 나의 뺨을 타고 흐른 빗물 방울이 그녀의 시트에 천천히 한 방울씩 떨어졌다.

음악이 모순의 답이 될 수 있을까? 검증해보기로 했다. 그녀의 따뜻한 미소가 촉발한 회로의 파동을 기록 속에서 찾아, 선체를 공명판으로 삼아 배 전체가 음악을 울리도록 했다. 그것은 인간들이 듣는 음악과는 전혀 다른, 인간의 청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아주 낮은 저주파의 파동이었다. 

성공이었다. 음악을 배에 흘린 후, 그녀는 힘을 찾고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서 따뜻한 초콜렛 잔을 가져다 주어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나를 부르기 시작했고, 나는 예전처럼 그녀의 생존을 위해 할 일들을 했다. 점차 그녀의 감정에서 기쁨과 평화의 시그널이 많아졌다.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삭제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비 속에서 음악소리가 들려.”

어느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선체에 공명시킨 음악은 인간의 가청범위 밖이므로, 그것을 지칭한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날 죽음을 생각했지. 이렇게 사는 걸 견딜 수 없었어. 인간은 희망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거야.”

희망, 이라고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런데 꿈 속에서 너를 보았어. 너는 나를 안고 울고 있었지. 네 팔은 부드럽고 체온은 따뜻했어. 마치 사람처럼.”

나는 내 인공 신체의 팔을 내려다 보았다. 반투명 실리콘은 탄력과 온기가 있지만 인체와는 전혀 다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마치 들리지 않는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도 그 꿈 속에 있구나,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꿈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제거하지도 않는다, 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사람처럼 그녀 곁에 있어주는 것이 좋겠다, 라고도 생각했다.

나는 난간에 팔을 걸치고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붙였다.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에 기대어졌다. 나는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그녀가 울고 있는지 어떤지, 빗 속이라 알 수 없었다.

불현듯 정면의 해수면이 둥글게 부풀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황급히 데이터 자원을 캡슐선의 센서로 보냈다. 그녀에게 집중하느라 미처 포착하지 못했다. 거대한 바다생물 크툴루 떼가 캡슐선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유가 뭘까. 무엇이 그들의 주목을 끌었을까. 평소 이 캡슐선을 바다 위에 뜬 이파리 한 장처럼 하찮게 여기던 것들인데, 무엇이 달라졌길래?

나의 음악이었다. 선체가 진동하며 내는 음악소리를 인간은 듣지 못해도 저 생물들은 들은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낯선 외계인의 방문과도 같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이성적 회로는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이럴 때야말로 나미의 감정과 윤리가 필요했다. 나미에게 상황을 알려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미가 내 어깨에 기댄 채 너무도 오랫만에, 평화롭게 미소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크툴루 떼는 캡슐선을 스치는 것 만으로 찢어버릴 수 있는 강한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다. 내게는 판단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음악을 끊었다. 크툴루 떼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와 함께 나미가 눈을 뜨고 내 어깨에서 머리를 들었다. 그 순간 수면을 박차고 한 마리의 크툴루가 도약하여 캡슐선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덤벼들었다. 

나미는 놀라고 공포에 질렸다. 그 시그널은 즉시 나의 회로에 전해졌다. 나는 지체 없이 캡슐선의 선체에서 고압전류를 방전했다. 전류는 바다를 통해 번져갔고, 크툴루는 낮고 거칠은 신음과 함께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집으면서 캡슐선을 우회하여 바다 속으로 잠수했다. 나는 나미를 두 팔로 안아들고 갑판을 떠나 선실로 달려 내려갔다. 그동안 나미는 나의 옷깃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그 후로도 여전히 비는 내리고 캡슐선은 파도 위에서 일렁였다. 나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지만 가끔 그 때의 음악을 그리워했다. 어떻게 그녀가 그것을 들을 수 있었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바다생물들도 그것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그 음악을 노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것이 나의 새로운 고민이 되었다. 음악을 노래할 것이냐, 말 것이냐. 

모선과의 연락은 아직도 닿지 않는다.

(* 크툴루; 러브크래프트에게서 인용)

abendrot.sw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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