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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사유하는 철갑

2013.04.23 16:3004.23

사유하는 철갑


철갑인간 야르마도는 이동하기 위해 허공에 떠 있었다.
수 만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육체였고 그에 어울리는 질량을 가졌지만, 파라탐(Paratam)으로 지탱되어 인간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야르마도 주변엔 물이 기둥을 이루면서 휘돌며 그를 깨끗하게 해주고 있었다. 철갑인간 야르마도는 인간(因間)이었지만, 굳이 인간(人間)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그 호칭을 버리지는 않는, 인신족(忍辰族)에 속해 있었다. 야르마도는 그 점이 정치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인신족은 아무리 미천한 지성과 의식을 가졌다 해도, 인간의 경지에 이른 이들에게는 자신들을 그저 인간으로 소개하고 대했다.
야르마도는 인신족이었지만, 인신족 특유의 귀 위에 날카롭게 솟은 우윳빛 소를 닮은 뿔이 없었다. 혼신족(混辰族)으로 변신해 있어, 인신족 본래의 아름다운 외모가 아닌, 거칠고 사납고 못 생긴 우락부락한 사내의 겉모습을 띄었다. 가끔 야르마도는 자신이 혼신족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혼신족의 옥황상제 자이간토르의 영혼 스캐너를 속이기 위해 야르마도는 마음 깊은 속까지 혼신족으로 위장해야 했다. 아니 그것은 위장이긴 한 것인가. 혼신족의 파괴적이고 야만적인 의지가 스물 스물 올라오는 지금이야말로 고향에 돌아갈 때였다.
야르마도의 몸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순간 광대무변한 인신족의 초시공이 야르마도 앞에 펼쳐졌다. 야르마도의 정신 속에 아로새겨진 패턴이 그를 이곳에 보낸 것이다. 혼신족일 때 숨기느라 힘겨워해야 하는 패턴. 아니 끊임없이 지워지고 되살아나는 패턴. 때마다 되새기지 않으면 사라지는 패턴. 야르마도가 몸을 앞으로 내밀 때마다 혼신족의 흉폭한 정신과 육체는 사라지고, 늠름한 남자 인신족의 산뜻한 움직임만이 남았다. 야르마도는 인신족의 하늘을 가로질러 과학인간 벨리카미가 정무를 보는 인신족 총정보국에 들어섰다.
총정보국은 거의 완벽한 구체였고 투명한 막에 싸여 휘돌고 있었다. 야르마도가 물에 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면서 막을 통과하자 정갈하고 넓은 로비가 쇄도하듯 닥쳐왔다. 그곳 한복판에 벨리카미가 서있었다.
다른 인신족 여자들이 다들 그렇듯이 개성적이면서도 대단한 미모를 가진 벨리카미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적갈색 살결을 가진 벨리카미는, 다른 인신족들처럼 불로불사였기에 젊어 보이는, 인신족의 참모총장이었다. 벨리카미는 불로불사를 이뤄내고, 빛 보다 빠르게 내달리며, 초시공을 지배하는데다, 괴우주에 깃든 ‘모든 것의 이론’을 밝혀낸 인신족의 과학을 자신이 상징하고 있다는 데에 깊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반가워요, 야르마도님.”
“벨리카미님, 혼신족의 장군 아가이레스는 예상대로 혼신족 답지 않은 자였습니다. 아가이레스는 보통의 혼신족이 식인종의 가치관을 가진 것과는 달리 문명인의 그것을 가지고 있고 이를 지키고자 합니다. 납치와 감금과 성폭행을 통해서만이 종족을 유지할 수 있는, 남자 밖에 없는 혼신족의 운명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수고하셨어요, 야르마도님. 그럼 안녕히.”
“잠시만요, 벨리카미님.”
야르마도가 정신을 집중하자 주변에 연결된 장치들이 화답했다. 탁자와 의자가 솟아올라 만들어졌다. 야르마도가 의자에 앉자 벨리카미도 맞은편에 앉았다.
“더 이상 첩자 일을 수행하기 힘듭니다.”
인신족과 혼신족의 모습을 시시때때로 오가면서 야르마도가 빛으로 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철갑인간 야르마도인지, 혼신족의 장군 신쥬이인지 점점 확신할 수가 없어요. 이미 나를 이루는 모든 물질들은 처음으로 이곳을 떠나던 때에서 너무나 변해 있습니다. 내가 태어날 때의 물질들 기준으로라면 내 몸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영혼의 윤회가 있으니 안심하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영혼 보다는 자아를 소중히 생각하고, 되도록 영원히 인신족이고자 하는 인신족이면서 윤회를 언급하는 것은 정체성 훼손에 가깝습니다. 데몬 술탄 아자토스가 존재하는 이상 영혼이 영원히 미치거나 파괴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지요. 내가 인신족일 수 있는 근거를 대주세요. 이미 혼신족의 윤간과 학살의 잔치 속에 나를 맡긴 적이 너무나 많아 헤아릴 수 없는 죄를 지어 내 인간성은 파괴된 지 오래입니다.”
“보장된 건 없어요. 인신족과 혼신족을 지금처럼 오가다가 이기는 쪽에 소속되세요. 농담하는 것도 조롱하는 것도 아니에요. 나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사회 체제가 어떻게 나를 바라보느냐 이니까요.”
“그것으로는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조건을 뛰어 넘어 어떤 상황이 올지라도 그대를 온전히 보장해줄 수 있는 하느님이 닿을 수 없는 세계 너머에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으세요.”
“야훼를 믿으라는 것입니까?”
“그래요, 믿으세요. 나도 믿어요. 마음 깊이 믿지는 않지만, 믿어요. 농담이 아니에요. 하지만 굳이 터를 세우고 모여서 믿을 필요는 없겠지요.”
철갑인간 야르마도는 인간(因間)이었지만, 굳이 인간(人間)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그 호칭을 버리지는 않는, 인신족에 속해 있었다. 야르마도는 그 점이 종교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인신족 또한 소멸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이상 종교를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Fin]

2013.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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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첫 완결 장편 ‘괴우주야사’에서 설정을 따와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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