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창밖의 한바탕 쏟아지던 비는 언제 쏟아 내렸냐는 듯 멎어있었다. 더 이상 비는 쏟아질리 없을 것이기에 놈을 잡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고 바로 자신 앞에 서 있는 문을 응시하고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이제 자신이 잡을 녀석을 떠올리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잡아야 할 녀석은 악명 높은 대도였다. 신출귀몰하게 여기저기 나타나서 값비싼 보물들을 훔치는 도둑. 물론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잔재주가 능해 그렇게 불리는 좀도둑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잡으려고 할 때마다 잔재주로 번번이 수사망을 뚫고 도망쳐 버려 그의 자존심을 매번 건드렸다.

 

“이제 마지막이다.”


 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고 닫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꽤 고급스러운 방이 나타났고, 그 중 가장 큰 창문 앞 흔들의자에 허리구부정한 힘 빠진 머리 다 빠진 노인이 앉아 비 그친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경감 이제 오는 건가? 그런데 일을 이따위로 하고 이제야 기어 들어오는가? 나는 자네의 그 버러지 같은 상사들과 조직에 어마어마한 돈을 쑤셔 박았는데, 내게 보여주는 신뢰는 고작 쥐새끼 한 마리가 내 집을 돌아다니게 한 건가?”


 그러면서 노인은 아무렇게나 뜯긴 편지봉투를 그의 앞에 던졌다. 그는 노인이 던진 편지봉투를 손에 들어 보았다. 녀석이 보낸 것이었다. 이곳에 방문하겠다는 사전 예고장. 이 때문에 그는 이곳에 와서 한물간 늙은 마피아에게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그는 편지봉투를 들고 있던 손에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힘으로 봉투를 꾸기면서 올라오는 화를 참으며 말했다.


“그 쥐새끼는 신출귀몰 한 녀석입니다. 저희 경찰들도 그 녀석을 잡는 데 애를 먹고 있어 검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을 알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노인은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으며 그에게 다가가 지팡이로 그의 가슴팍에 가져다 대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그러길 바라네, 경감. 난 경찰조직에 그리 큰 신뢰는 하지 않아. 아니, 신뢰 따윈 자네가 들고 있는 그걸로 끝났다네. 난 참을성 따윈 없어. 날 암살하고파 하던 조직의 경쟁자들 조차 내 저택에는 침입하지도 못했다고. 알아듣겠나? 차라리 내 사설경비원들을 쓰지. 하지만, 그동안 조직에 그들은 내 돈을 한껏 마셔보고 싶어 하지. 굶주린 사육된 짐승들처럼 말이지. 알아들었나?”


“네! 알겠습니다."


 그는 노인의 말에 몸을 곧게 세우고 자신의 상관들에게나 하는 경례자세로 노인에게 인사하고는 방을 나갔다.

 방을 나오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편지봉투를 구겨 버렸다. 저런 놈에게까지 경례를 해야 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가 수치스러웠다. 어떻게 해서든 저 녀석을 잡아 늙은 마피아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다시금 비가 그친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숨을 고른 뒤 구두소리를 내며 복도를 걸어갔다.


 한편, 노인과 그의 이야기를 멀리서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 잘 눈에 띄지 않을 갈색의 망토를 걸치고 갈색의 빵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저택 가까이의 나무들 사이에서 저택 안에서의 경감과 저택의 주인 간의 대화를 엿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둘의 대화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입모양을 통해 대충의 내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움직여야 할 때가 왔다는 신호였다. 그는 언제든지 바람과 함께 움직였다. 바람이 자신을 쫓는, 잡으려는 이들에게서부터 지켜줬기 때문에, 바람과 함께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무사할 것이었다.

 이제 문제라면 어떻게 노인의 방까지 가는 것이었다. 도둑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숨어있던 나무에서 내려와 경비를 서는 경비원과 경찰들의 눈을 피해 있는 위치에서 일단 저택의 오른쪽으로 향했다.

 저택의 오른쪽으로 향하다 보니 그의 눈에 빨래들이 널려있는 것이 들어왔다. 도둑은 재빨리 그 중 자신에게 맞을 만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자신의 옷은 아무도 못 찾을 만한 곳에 가지런히 놔두고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듯 유유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은 역시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안에서 보니 훨씬 더 크게 다가왔다. 무수히 많은 방에다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그는 잠시 넋을 놓고 그런 광경을 바라보았다. 역시 집주인이 한 때 도시를 주름잡던 마피아여서 달라도 뭔가가 달랐다.

 그때 그를 향해 누군가가 다가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거기! 지금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일하지 못해? 보아하니 처음 보는 집사인 것 같은데, 가뜩이나 경찰들이 저택 안을 쑤시고 다녀서 귀찮은데 너까지 거기서 빈둥거리고 있으면 내 머리가 터져서 흩어 질 것 같으니까 말이야.”


 도둑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꽤 나이가 있는 메이드였다. 게다가 자신을 보고 집사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자신은 이 저택의 집사 옷으로 갈아입은 거였다. 그는 그 말에 살짝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통보를 받고 오늘 막 일을 시작했는데, 집사장님이 주인어른의 방에 가서 오늘 저녁을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물으시라고 하시면서 겸사겸사 인사도 드려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주인어른의 방이 어딘지 몰라 멍하니 있었지 뭐에요. 하하”


 그러자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메이드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한동안 도둑을 노려보다 이내 어디선가 들린 쨍그랑 하는 소리에 시선을 도둑에게서 거두었다.


“그렇단 말이지? 뭐, 하긴 나도 여기서 처음 일했을 때는 그랬으니까. 정말이지, 여긴 쓸 때 없이 방만 많다니까. 그래서 쓰지도 않는 방의 쌓인 먼지들을 우리가 다 해야 한다니까. 그나저나 주인어른 댁은 2층으로 가서 왼쪽으로 쭉 가면 있으니 농땡이 치지 말고 집사장님께서 시킨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도둑은 그의 말에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 도둑은 저택주인의 방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는 문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한 세월을 주름잡았던 마피아였기에 그런지 문 주변에는 값비싼 골동품과 미술품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도둑은 문에다 노크를 하며 말했다.


“저, 주인님! 신참 집사입니다. 집사장님이 인사드리고 저녁은 어떻게 하실 건지 물어보라 그러셨습니다. 죄송하지만 들어가도 될까요?”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집사장이라고? 난 그런 얘기 들은 적 없는데?”

“아, 그리고 집사장님께서 그 거에 대해서는 미처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도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렇다면야 들어오게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도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창가를 바라보며 흔들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도둑은 곧장 노인에게로 다가가 노인의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로 이곳에서 일하게 된 신입 집사입니다. 아직 수습이라 주인님과 이 저택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무쪼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인은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도둑을 유심히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군. 반갑네. 그래, 오늘 내 저녁을 어떻게 할 거냐고 말이지?”

“네, 집사장님께서 물어보….”

“하지만, 내 기억으론 자네 같은 신입 집사를 뽑은 적이 없다네. 알다시피 난 모든 직원들을 내가 직접 뽑으니 말일세.”


 도둑은 그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얘기는 빠르겠군요. 본론부터 얘기하자면 당신이 데려간 제 친구를 돌려받았으면 싶습니다.”

“친구? 고작 친구 때문에 여기 들어온 건가? 그것도 내가 있는 이곳에? 이봐, 젊은 친구. 알겠지만, 난 버튼 하나만으로도 자네를 이곳에서 끝장낼 수도 있어. 조심하게. 그리고 아쉽게도 그 친구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곳에는 없는 것 같군. 번지수를 잘못 찾았단 말이네.”


 노인은 도둑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친구라니, 그런 것을 이곳에서 찾는다니, 한심한 도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둑의 입에서 나온 말은 노인을 놀라게 했다.


“아뇨, 그 친구는 이곳에 있습니다. 바로 이 방에 말이죠.”

 

 노인은 눈을 찡그리면서 도둑이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생각했다. 여러 가지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그것들은 그가 친구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노인은 눈을 굴려 방안을 살폈다. 방을 살펴보던 중 하나가 그의 눈을 멈추게 했다. 노인은 손을 들어 도둑의 친구를 가리키며 웃었다.


 경감은 도둑이 어디로 침입을 할지 고심하며 정원을 걷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원에 설치한 도둑을 잡기 위해 준비한 덫들을 고장난데가 없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문제는 놈이 언제 어떻게 저택에 숨어들어 오는 가인데, 그걸 알 길이 없었다. 녀석은 언제나 신출귀몰했기 때문에. 

 그때 한 늙은 메이드가 경감을 찾았다. 경감은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며 메이드에게로 다가갔다. 메이드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경감님. 이상한 신입집사가 주인님 방으로 향했습니다. 집사장님을 우연히 만나 그런 신입집사가 들어왔는지 물어보았는데, 신입을 들인 적이 없다고 그러더군요.”


 경감은 메이드의 그 말에 혹시나 싶었다. 그는 메이드에게 알겠다면서 짧게 답하고는 저택주인의 방으로 급히 향해 노크도 없이 주인의 방을 급습했다.

 그런데 급습한 결과, 저택주인의 방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또 도둑에 의해 어질러지기는커녕 도둑은 보이질 않고 저택의 주인도 무사했다. 저택의 주인인 노인이 흔들의자에 앉아서 자신을 혼낼 때처럼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노인에게 다가가 조심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이 저택의 메이드 하나가 제게 이상한 신참 집사 얘기를 하던데….”


 경감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구먼, 경감. 내가 일 처리는 제대로 하라고 그리 누누이 얘기 했을 텐데 말이야. 이렇게 쥐새끼 하나가 내 방까지 오다니… 자네 제대로 일은 하고 있는 건가? 벌써 놈은 여기에 들렸다가 용무를 마치고 도망쳤네.”

“용무요?”

“그래, 자기 오래된 친구를 데리러 왔다고 그러더군. 경감, 그 도둑을 잡고 싶다 그러지 않던가? 아마 그 도둑은 그리 멀리 도망치지 못했을 거야.”


 그 말을 들은 그는 곧장 방을 나가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저택주변을 샅샅이 뒤져 도둑을 찾게 했다.

 경찰들이 저택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쯤, 도둑은 벌써 원래 옷으로 갈아입고 몸을 숨긴 뒤였다. 도둑은 아무도 볼 수 없을 만한 장소에 숨어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그의 친구도 함께 말이다.

 도둑은 저택주인의 방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저택주인이었던 노인이 자신의 친구를 보고는 크게 웃으며 말했었다.


“저 개가? 네 친구라고? 크하하. 정말이지. 저 늙어빠진 앙상한 개가? 우리 집에서도 애물단지인 저게? 하, 이거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군.”

“여기서는 애물단지더라도 제게는 정말 소중했던 친구입니다. 당신이 제게서 앗아가지만 않았더라도, 그때, 어릴 적에 당신이 제가 살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값나가는 보물들을 들고 갔던 날부터 전 저 녀석을 잊지 않았습니다.”

 

 도둑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며 말했다.


“좋아, 그럼 저 개 다시 네게 돌려주마. 뭐, 내게는 필요 없는 거니까 말이지.”


 도둑은 힘없이 바닥에서 자고 있는 개에게로 다가가가 온 몸으로 들고 일어나 창가로 가 노인을 잠시 돌아보았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수월하게 목적을 이룰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아직 수월하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었지만.

 상황을 보던 도둑은 행동을 개시했다. 민첩하게, 하지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그는 저택 주변을 이동해야만 했다. 가뜩이나 친구였던 개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들킬 수 있었다. 그는 머리를 굴려 도망칠 방안을 떠올렸지만,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저택 주변에는 경찰들이 경찰조명으로 자신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걸 뚫으려면 하늘로 가야했지만, 자신은 하늘을 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를 보며 어쩌면 자신의 친구가 작은 길을 알 수도 있지도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 목소리로 친구에게 속삭였다.


“내 얘기가 들린다면 비밀통로를 알려주지 않을래?”


 바로 그 순간 환한 빛이 자신을 덮쳤다. 주위로 경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도둑은 재빨리 경찰들이 적은 곳으로 친구를 데리고 달렸다. 그런데 앞에 철조망이 빠르게 올라와 진로를 방해해 경찰들에 포위당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굴리며 주위를 빠르게 살폈다. 여기저기 경찰들이 꽉 차 있었다. 도둑은 결단을 내려야했다. 다 늙은 친구를 데리고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했다. 그는 무모하지만 포위한 경찰들을 뚫고 지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폈는데, 철조망은 한 곳에만 쳐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확인하곤 곧장 친구를 데리고 달렸다.

 경찰들은 그런 도둑의 모습에 당황했다. 우왕좌왕하며 도둑을 막으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경찰은 정면으로 기습적이게 달려오는 도둑을 막을 수 없었다. 잡았다 하더라도 도둑은 자신을 붙잡는 경찰들을 힘으로 뿌리치며 달아났다.

 그렇게 간신히 경찰들의 포위를 뚫고 달아난 도둑은 다시 보이지 않는 나무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늙은 친구를 내려놓았다. 그의 늙은 친구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주위로 도망친 자신을 잡기 위해 경찰들이 더욱 저택 주변을 수색하고 있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분명 이곳에 조금 더 숨어있다간 쉽게 잡히기 십상일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늙은 친구를 쓰다듬은 뒤 두 팔로 안았다.

 하지만 늙은 친구는 그런 도둑의 품을 뿌리치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친구의 걸음을 보고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물었지만,  늙은 친구는 말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도둑은 설마 경찰들에게 들키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어쩌면 자신의 얘기를 듣고 비밀통로로 데려다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자신의 친구의 뒤를 따라간 곳에는 아무도 없는, 경찰들의 수색소리도 들리지 않고 저택에서도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저택의 담장 앞이었다. 담장에는 성인 한명 정도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도둑의 늙은 친구는 그 앞에서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도둑을 보았다.


“여기란 말이지? 참, 장한 녀석이야. 히히, 하지만 일단 날 찾는 저 사람들에게는 인사를 해야 할 테니, 이건 놓고 가야겠어.”


 도둑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짓고는 주머니에서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 잔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구멍을 통해 그의 늙은 친구와 함께 빠져나갔다.


 경감은 노인의 방에 노크했다. 안에서 아무런 답도 없자 그는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노인은 음악을 틀어놓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경감이 들어오자 그의 기척을 알아차렸는지 음악을 끄고 경감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게 무슨 보고를 하려고 왔는가.”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정원을 수색하다 담장 근처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담장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더군요.”

“그래서? 그게 어땠다는 건가? 거기로 그 좀도둑 자식이 도망쳤다는 건가? 어차피 도망치게 놔둔 거니까. 어쩌겠나. 어차피 목적이 그 늙은 개였다지 않는가. 내게 그 개는 이제 필요 없으니까. 물론 자네는 좀 뼈아프겠지만 말이야. 그 녀석을 기필코 잡고 싶었는데 말이지.”

노인은 담담히 말하며 봉투를 옆에 두고는 다시 음악을 켜려고 했다. 그런데 경감의 다음 말에 그의 행동을 멈췄다.

“그게 아니라, 제가 건넨 봉투를 뜯어 읽어보십시오. 정말 놀랄 것입니다.”

 

 그 말에 경감이 건넨 봉투를 뜯었다. 봉투에서는 한 장의 종이가 들어있었다. 노인은 종이를 꺼내 읽었다. 이내 노인의 표정은 크게 일그러졌다. 노인은 경감을 쳐다보더니 크게 소리 쳤다.

 

“이게 지금 내게 보고하는 건가? 놈을 잡았어야지. 그래야 하지 않나? 내가 말했지 않나. 내가 자네 상부에 쳐 넣는 뇌물이 엄청나다고 말이야!”

 

 그리고 도둑은 그런 노인을 상상하며 미소 지었다. 도둑이 놓아두고 간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 이 편지를 읽을 저택의 주인은 무척이나 속이 탈 것 같군요. 사실, 제가 데려간 늙은 개는 제 개가 아닙니다. 오래전 당신에게 빼앗긴 어떤 사람의 소중한 가족이었죠. 저는 그 사람을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제가 경감이 쫓고 있는 도둑이라는 걸 알더니 제게 개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었고, 저는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 그 사연을 이용하기로 했고, 겸사겸사 그의 부탁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마 이 편지를 보고 있다면, 저는 무사히 저택을 빠져나갔다는 것일 것인데, 그 개의 원래 주인을 찾아 저를 잡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는 지금 경감이 찾을 수 없는 곳에 있을 테니까요.

 뭐, 결론적으로 경감님과 저택의 주인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경감님과 저는 다시 볼 거고, 저택의 주인께는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으니 그 중 일부를 제가 들고 간다고 해도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겠죠. 어쨌든 두 분께 죄송하고 몸 건강히 잘 계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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