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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세계

2013.01.12 08:0701.12





어느 순간 발을 디뎌버린 푸른빛 세상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날카로운 바람과 온기없는 땅이 온 몸을 휘감아, 어깨가 떨려왔다.
이곳은 이름도 없는, 단 한 사람의 나라. 누구도 없이 제 자신만 우뚝 서있는 아름다운 지옥이었다.
흔적조차 없이 떠나며 사라진 이들의 잔상이 기억 속을 맴돌았다. 가지 말라 손 내밀며 붙잡으려 해도 옷깃조차 내주지 않은 이들의 그림자가 저 너머 붉은 세계에 걸려 있었다.
소년은 쓴웃음 드리운 얼굴을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그에게 버거운 그림자가 땅바닥을 물들이며 눈물 지었다. 발목을 휘감으며 얼어붙은 거미줄이 그와 붉은 세계를 단절시키며 푸른 태양 아래 묶어놓았다.
외로움에 베여 핏방울이 흐르는 심장이 끝없이 아파왔다.
멈추어 있는 자신을 두고 홀로 저만치 멀어진 시계추가 자꾸만 흔들렸다. 왜, 어째서 자신의 세계 밖 존재들은 저리도 고고히 흐를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왜 그 혼자 정체된 행로에 발이 묶여 성장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이대로도 좋다.
어린 모습, 어린 생각 그대로 남아 벽을 세운 채여도, 무섭기만한 밖의 세계를 마주하지 않을 수 있다면.
소년은 젖은 시선으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태양은 언제나 떠있던 그 자리에 있었다. 하얀 입김이 피어오르도록 싸늘한 그 색채가 오히려 푸근했다. 그를 떠나버린 붉은 세계 속 사람들보다도.


#

자는듯 눈 감은 얼굴이 유독 창백했다. 하얀 천자락과 대조적인 푸르스름함이 서글퍼보였다.
여자는 죄스러움에 차마 내밀지 못한 손을 떨며 오열했다. 비명처럼 내뱉은 절규가 싸늘히 식은 고막을 두드렸으나, 그 주인은 끝내 눈을 뜨지 않고서 침묵했다.
마침내 그 여린 육신을 덮은 천자락이 차가운 냉기를 뿜어냈다. 아아, 어째서...
여자의 입술이 잘게 떨리며, 억눌린 소리를 흘렸다. 두 눈 가득 자리잡은 절망은 깊디깊게 번들거리며 고통에 물든 피를 쏟아내었다.
조금만 신경 쓸 것을.
여린 손으로 청하는 도움, 외면하지 말 것을.

무심했던 그녀 자신이 결국, 소년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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