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죄인

2013.09.16 16:0109.16

 

죄인

 

 

 

“미친 영감탱이!”

사람들의 격분한 목소리가 차가운 겨울 공기를 타고 법정 안에 울린다.

“조용!”

차분한 목소리의 판사가 낡은 망치를 한 번 내려치고, 좌중은 잠시 침묵에 휩싸인다.

“죄인 이하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판사는 안경을 추겨 세운다. 판사의 날카로운 안광이 피고석에 앉은 이하람의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향한다.

“왜 아내를 죽였습니까?”

이하람은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자식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죽이고…. 나도 죽고 싶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은 아직도 변함없습니다.”

스무 살의 여름은 눈부셨다. 눈부신 청록의 계절 안에서 나는 지연을 처음 만났다.

강의 시간에 늦은 나는 가방을 손에 부여잡고 헐레벌떡 캠퍼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땀이 흘러 온 몸을 축축이 적셨지만,

이번 수업을 늦으면 나는 이번 학기를 날려버릴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한참을 뛰던 나는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저기요-!”

뒤를 돌아보니 한 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뛰어오고 있었다. 여자의 손에는 내 필통이 들려 있었다.

“이거 흘리셨어요.”

여자는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내게 필통을 내밀었다. 여자의 눈은 여름보다 더 눈부셨다.

나는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여자가 내민 필통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아뇨.”

여자가 밝게 웃었다. 나는 여자의 웃음과 이번 학기를 잠시 고민 하고, 곧 여자를 선택했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조그마한 중소기업에 취직하여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 가족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해 미안해 할 때면, 지연은 투정 섞인 웃음을 지으며

내게 안겼다. 가끔 지지고 볶고, 가끔 화해하고, 가끔 행복하고, 가끔 슬픈. 정말 흔하디흔한 인생이었다. 지연이 치매에 걸리기 전 까지는.

지연은 요리를 좋아하는 세세한 여자였다. 아침을 준비하는 지연의 뒷모습을 보며 세월의 흐름은 참 무상하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연의 흰 머리가 안쓰럽기 보다는, 귀여워. 라고도 생각했다.

상을 다 차린 지연이 의자에 앉더니 내게 한 마디를 던졌다.

“지하야. 식사 준비 다 됐다. 아빠 모셔와.”

나는 잠시 동안 공황 상태에 빠졌다. 지하는 작년에 대기업에 취업 한 후로 소식이 없었다.

나는 지연의 눈을 살폈다. 지연의 눈은 또렷했다.

“지하야, 뭐 하니? 빨리 가서 아빠 모셔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하…. 여보. 참 오늘 따라 더 귀여워 보이네.”

지연은 잠시 고개를 갸웃 하더니,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는 내게 외쳤다.

“너 누구야!”

치매는 천천히 지연을 갉아 먹어갔다. 지연은 저항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치매에게 내주었다.

지연은 우리의 찬란하던 스무 살의 여름날을 잊었고, 우리의 거친 두 손으로 모은 돈으로 마련한 우리의 첫 단칸방을 잊었고, 지하가 태어난 날을 잊었고, 나를 잊었다.

지연은 자주 폭력적으로 변했다. 지연이 아꼈던 사기그릇이 점점 개수가 줄고, 집안 벽 여기저기에 내 마음을 닮은 상처가 늘어가면서 우리 둘은 고통에 시달렸다.

“하람씨…. 나 죽고 싶어. 엉엉.”

지연은 제 정신으로 돌아 올 때마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 나는 그런 지연을 안고 달래며 괜찮아 질 거야. 하고 다독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백방으로 치매에 좋다는 것들을 모았다. 병원에서 비싼 약도 먹여 보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약초를 꽤 많은 돈을 주고 사기도 하고, 영험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도 해보았다.

아무런 효과도 없었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내 통장 잔고는 빠르게 줄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쪼그라드는 통장 잔고를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라면 곧 집마저도 넘어갈 처지였다.

나는 결국 지하를 찾아가기로 했다. 지하는 십 년 전 노량진에서 걸어온 전화를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지하는 전화로 내게 조용히 말했다. 지긋지긋한 집구석과도 안녕이라고.

지하의 아파트 단지는 우리의 집과는 달리 깨끗하고 거대했다. 지하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지하의 뒤를 따라 갔다.

새하얀 색의 집 앞에 서서, 나는 똑똑똑-. 하고 철문을 두드렸다. 곧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고, 나는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모니터 앞에 섰다.

모니터에 불이 꺼졌다. 나는 곧 문이 열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문에서 살짝 떨어졌다.

시간이 흘렀다. 몇 분이 흐르고, 몇 시간이 흘렀다. 문은 열리지 않았고, 해는 이미 졌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지연과 나의 집으로 돌아섰다.

그날 밤, 나는 혼자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며 울었다. 내 어깨에 짊어진 짐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결국, 우리의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다. 내게는 산더미같이 쌓인 빚과, 치매에 걸린 지연, 그리고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아주 조그마할 수명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아침 식사로 육개장을 준비했다. 육개장은 지연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음식 냄새를 맡은 지연이 눈을 부릅뜨고 식탁으로 달려들었다.

식사를 마친 지연이 곧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묵묵히 빨간 육개장을 바라보다가 한 번에 들이켰다. 육개장을 몇 사발 들이킨 나는 지연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간절히 바랬다.

다시는 눈을 뜨지 않기를.

나의 유죄를 알리는 판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분노한 청중들의 목소리가 내 늙은 귀를 울린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나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법정을 나섰다.

법정을 나서는 내 눈에 모자를 쓴 지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모자를 깊게 눌러 썼지만 지연을 닮은 입매는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지하가 움찔 하고는 몸을 돌려 내게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미소 지었다.

댓글 2
  • No Profile
    별들의대양 13.10.26 23:16 댓글

    잘 읽었습니다

    어디선가 또는 언젠가는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처럼 느껴져 씁쓸하네요

  • 별들의대양님께
    No Profile
    글쓴이 플루터비 13.11.03 02:11 댓글

    감사합니다.

    리얼리티에 중점을 두고 쓴 습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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