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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수축과 소멸과 증명

2013.09.14 02:0709.14

 

 파란 종잇장이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못 본지가 오래 된 사이라 반가워야 할 텐데, 막상 만나고 보니 반갑지가 않았다. 빵조각 몇 개와 커피 한 잔과 생수 한 병으로 하루를 버텨내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 오히려 제대로 된 밥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했고, 결국 급체를 해서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게워낼 때도 있다. 가난이 나를 먹어든 후부터 내 몸은 일말의 사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육교에 혼자 서서 담배를 피울 때는 문득 눈물이 났었다. 중학교 때부터 그 육교를 좋아했다. 육교 가운데 서서 도로를 내다보면 쭉 뻗은 16차선 도로가 시야를 채웠다. 아니, 시야를 비웠다. 내게 중요한건 도로가 텅 빈 순간의 공기였다. 학교에서는 항상 괴롭힘을 당했고, 심한 괴롭힘을 당한 날은 꼭 그 육교를 건넜다. 육교 위에서 도로를 내려다보면서도 그때의 나는 당장 뛰어내릴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육교 위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나는 뛰어내릴 생각을 했다. 담배 끝 깜빡이는 열점에서부터 한 올 한 올 연기가 풀려 나왔다. 그 중 한 가닥이 눈을 스쳤지만 그다지 따갑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근처 분식집에서 혼자 먹었던 돈까쓰가 내 연약한 식도를 긁어대고 있었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돈이 없으면 꿈을 잃어버린대, 하고 말해주었던 것은 오빠였다. 나는 드물게 그 사람의 말에 공감을 표시했다. 나는 이미 꿈을 잃어버린 후였다. 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미 조금 움츠러들어 있었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을지언정 세상은 내게 뭐든지 시켜주지는 않았다. 그걸 깨닫고 난 후부터, 내 몸은 수축하기 시작했다. 몸의 정 가운데, 그 어딘가 한 점으로,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내 온 몸이 당겨진다. 근육도 피부도 심지어 뼈도 당겨진다. 내 몸은 한 점으로 뭉쳐지려 하고 있었다. 나는 돈이 없었다. 몸이 수축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나는 이제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세상천지가 이다지도 넓은데 내 몸 하나 놓아둘 자리가 없어 나는 헤매었다. 내 몸은 수축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가만히 놓아두기에는 컸다.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공원과, 편의점과, 길가의 벤치와, 놀이터의 낮은 그네와, 또 어딘가. 그 어디에도 내가 있을 곳은 없었기에 나는 계속 움직여야 했다. 그러다 결국 몸이 지쳐 움직임을 거부할 때는 카페에 몸을 숨겼다. 금방이라도 말라비틀어지려는 몸을 카페인과 니코틴으로 채우며 달래고 있으면, 으레 잠이 왔다. 깜빡 깜빡 눈꺼풀이 맞닿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해야 나는 내가 졸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내가 아프다는 사실도 잘 알지 못했으니까. 온종일 바깥을 쏘다닌 몸은 볕이 뜨거운 날에도 바람 한줄기에 감기를 업곤 했다.

 새벽에는 항상 눈을 뜨고 있었다. 까만 듯 파란 공기가 도무지 안정되지를 않아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그러다 결국 쓰러지듯 잠이 들어도 마음 놓고 꿈을 꿀 수 없었던 것은 잔상 때문이었다. 눈을 감으면 항상 눈동자를 덮은 암막에 무언가가 비쳤다. 그것은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따뜻했지만 눈을 뜨면 사라지리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꿈을 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눈을 뜨면, 하얗게 밝아오는 빛을 받아 천장이 붉게 떠올랐다. 그렇게 나는 수십 번의 일출을 내 허름한 천장에서 보았다. 그리고 매정한 해가 떠오르면 내 몸은 빠르게 말라갔다. 바스스 소리가 날 정도로 퍼석거리는 피부에서는 하얀 조각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파란 종잇장을 두고 간 것은 어머니였다. 안쓰러운 눈빛으로 내게 그것을 건네주는 손끝이 떨렸다. 물론 그 종잇장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나를 안쓰러워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이것을 건네주어야 하는 제 손끝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눈빛을 하는 어머니가 안쓰러웠다. 조금만 더 내버려두면 이대로 수축을 계속해서 결국 점 하나로 남게 될 나 때문에 어머니는 자신의 손 끝을 안쓰러워해야만 했다. 어머니의 눈빛에는 나의 수축보다 어머니 자신의 수축을 걱정하는 마음과 그것에 대한 죄책감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런 눈빛을 해야 하는 어머니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간 후에 나는 그것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근육이 또 한 번, 점을 향해 당겨졌다.

 가방을 뒤적여 담배를 찾는데 빈 갑이 떨어졌다. 다른 가방을 뒤져 보아도 가스가 떨어진 라이터만이 몇 개 굴러 나올 뿐이었다. 목구멍이 막혀왔다. 그대로 숨이 막혀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온 몸이 조금 조여드는 것을 느끼면서 파란 종이를 한 장 집어 들었다. 어머니의 눈빛이 떠올랐다. 담배를 사러 나가기 위해 문을 여는 순간, 내 몸은 완전히 쪼그라들어 점이 되었다. 더 이상 그것을 잡아두는 손이 없는 탓에 파란 종잇장이 팔랑 팔랑 바닥으로 떨어져 놓였다. 그리고 그 종잇장이 놓인 바로 옆에 팔랑 팔랑 점 하나가 떨어져 찰싹 달라붙었다. 이제 내 몸은 아주 작은 점 하나일 뿐이어서, 놓아둘 자리는 그곳으로도 충분했다.

 

 

alice_c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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