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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안 알려 줌

2014.02.25 11:1202.25

안 알려 줌



 

 

written by Tom Ashy, 2014




 

3교시 수학 시간이 끝났다. 태미는 필통에서 스티커 종이를 꺼냈다. 작고 동그란 스티커 하나를 떼어내 오른쪽 눈 밑에 붙였다. 원래 이름은 아이 포인트 스티커이지만 줄여서 아포스라 불렀다. 태미는 가방에서 게임기를 꺼냈다. 그리고 온라인 게임 리버스 월드에 접속했다.

태미가 게임에서 키우는 캐릭터는 운석 갑옷으로 무장한 흑기사였다. 닉네임은 우치치우. 고전 영화에 나오는 슈퍼 히어로 전우치의 이름에 중국 신화 속 전쟁의 신 치우를 합친 말이었다. 태미는 이 이름을 지으려고 일주일 동안 인터넷과 도서관을 뒤졌다. 물론 이런 속뜻을 물어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강아지 이름이냐며 우쮸쮸하고 놀려 대는 바보들만 득실거렸다. 태미는 자기를 놀린 사람들 닉네임을 적어 두었다가 반드시 복수했다. 복수에 성공하려면 흑기사의 능력이 뛰어나야 했다. 쉬는 시간을 쪼개 단 5분이라도 더 게임을 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아직도 리버스 월드 하니?”

갑자기 태미 눈앞에서 게임기가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수빈이와 몇몇 친구들이 서 있었다. 태미는 갑자기 성질이 났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수빈이지만 참을 수 없었다.

이리 내놔!”

태미가 벌떡 일어나 수빈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수빈이 뒤에 있던 친구들이 태미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태미는 눈 밑에 붙은 아포스를 떼 냈다.

너희들 미쳤어? 다 이를 거야!”

태미 목소리가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

얘들아, 그러지 마. 나 태미랑 친해.”

수빈이가 웃으면서 게임기를 태미에게 내밀었다. 그러더니 태미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미안해, 태미야. 사실 나 뭐 좀 부탁하러 왔는데…….”

수빈이는 주머니에서 새 아포스 하나를 꺼내 태미 눈 밑에 붙여 주었다.

 

수업이 모두 끝났다. 태미는 운동장 벤치에 앉아 옥토전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빠 엄마가 퇴근하려면 10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눈 밑에 아포스가 잘 붙어 있는지 톡톡 건드려 본 뒤, 태미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수빈이가 보낸 메일은 아이돌 그룹 리틀빅의 멤버 소개와 사진,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는 주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리틀빅 팬 카페 주소가 적혀 있었다.

태미는 리틀빅의 방송 출연 사진과 공연 사진을 보았다. 잘생긴 소년들이 멋진 헤어스타일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춤을 추는 사진들이었다. 아빠가 올 시간이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뮤직비디오를 안 볼 수 없었다. 태미는 2주 전에 발표된 신곡 빅토리뮤직비디오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일곱 명의 멤버들이 모두 신비롭고 매력적이었다. 한 명 한 명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루퍼스가 누구인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루퍼스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성준이었다.

태미야, 집에 가야지?”

아빠와 엄마가 탄 자동차가 태미 앞에 멈춰섰다. 태미는 황급히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아포스를 떼 내면서 차에 올라탔다.

그래, 오늘 학교에서 즐거웠니?”

아빠가 물었다. 태미는 건성으로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대답했다.

태미 너 오늘도 학교에서 게임한 거야?”

엄마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이제 게임 안 해요. 지겨워요.”

태미는 게임기를 엄마에게 내밀었다. 엄마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태미는 여섯 살 때부터 손에서 게임기를 놓은 적이 없었다. 공부할 때도 게임기를 옆에 켜 두고 했다. 태미는 게임을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텔레비전을 볼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양치질을 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게임기가 필요했다. 태미가 현실에서 뭔가 하는 동안, 게임 속 캐릭터도 뭔가 해 놓아야 했다. 태미는 그래야만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태미 머릿속에서 게임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리틀빅 때문이었다. 태미는 다른 멤버들보다도 루퍼스, 성준이가 좋았다. 나이 많은 다른 멤버들에 비해 춤도 잘 못 추고 노래하는 파트가 딱 두 부분밖에 없지만 그래도 태미는 성준이에게 끌렸다. 생소한 다른 멤버들보다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학교 친구에게 눈길이 가는 게 당연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태미는 컴퓨터를 켜고 팬 카페 빅스타에 가입했다. 닉네임은 우치치우. 원래 정회원이 되려면 가입인사 글과 리틀빅 팬 인증 글에 댓글 열 개까지 올려야 했다. 하지만 특별회원인 수빈이가 초대장을 보내 준 덕분에 태미는 바로 정회원이 될 수 있었다. 198846번째 회원이었다.

팬 카페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이었다. 방문자와 준회원들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게시판이 있는가 하면, 등급이 정회원 이상이어야 들어갈 수 있는 게시판도 있었다. 태미는 일단 수빈이가 부탁한 대로 공지사항을 찾아 투표를 했다. 학년별 팬클럽 회장을 뽑는 투표였다. 그리고 리틀빅의 앨범을 듣고 또 들으며 정회원 게시판의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얼마나 깊게 집중했는지, 아빠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아빠는 전자공학 박사, 엄마는 재료공학 박사인데 대체 넌 왜 그러니?”

저녁 식사 시간에 아빠가 생활 통신 이야기를 꺼냈다. 생활 통신은 지난 한 달 간 태미의 학교생활에 대한 30분짜리 영상 보고서이다. 지난달에도 태미는 6등급인 서비스로 평가 받았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2등급 연구직이나 3등급 개발직은 꿈도 못 꿀 게 분명했다.

진짜 감옥에 가고 싶은 거냐? 경찰서로는 모자라니?”

아빠가 말했다.

여보! 언제까지 그 얘기 할 거예요!”

엄마가 말했다. 태미는 감옥이라는 말을 듣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꾹 참았다.

잘 먹었습니다.”

태미는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빠와 엄마 모두 깜짝 놀랐다. 평소 같으면 아빠는 태미의 게임기를 압수하는 벌을 내렸을 터였다. 게임기는 소파 위에 그대로였다.

작년 이맘때, 태미는 게임 서버를 해킹했다가 경찰 사이버 수사대의 조사를 받았다. 태미의 게임머니와 아이템을 모두 빼앗은 뒤 우치치우 캐릭터를 초기화시켜 버린 사기꾼 때문이었다. 마침 아빠가 지방으로 출장 간 틈을 타 태미는 아빠 컴퓨터로 리버스 월드의 서버를 해킹해 일주일 만에 사기꾼을 잡았다.

해킹은 분명 잘못이었으나 사기꾼을 잡은 덕에 게임 회사에서는 없던 일로 해 주었다. 태미가 회사 대표에게 최신형 게임기를 선물로 받은 건 아빠에게 비밀이었다. 하지만 뉴스에는 온라인 게임이 아홉 살 소녀를 망쳐 놓았다는 내용으로 아주 안 좋게 나왔다. 사기꾼 잡은 이야기는 쏙 빠트리고 태미가 경찰서에 들어가는 모습만 보여 주었다.

전설 속의 불사조처럼……

태미는 재작년에 나온 노래 ‘B 제너레이션을 따라 불렀다. 리틀빅 사진을 보고 리틀빅 멤버들에 관한 글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기분이 조금씩 나아졌다. 문득 2년 전 생일날이 떠올랐다. 성준이가 태미에게 선물을 내밀며 생일 파티에 초대해 달라고 말했다. 태미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는 성준이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 다음해, 성준이가 리틀빅 막내 멤버로 텔레비전에 나왔을 때, 태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코흘리개가 1년 사이에 키도 훌쩍 자라고 엄청 멋있어졌다. 친구들은 모두 성준이에게 푹 빠졌다. 하지만 태미는 자존심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게임에 더 빠진 건지도 몰랐다.

 

다음날, 태미는 졸린 눈을 부비며 교실로 들어왔다. 밤새 루퍼스 성준이 사진과 동영상을 보느라 두 시간도 채 못 잤다. 태미는 어제 저녁부터 기분이 아주 묘했다. 심장이 가슴에서만 뛰는 게 아니라, 뺨과 귀와 목에서도 뛰고 손가락과 종아리에서도 콩닥콩닥 뛰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아도 성준이 얼굴이 보였다. 태미는 성준이의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성준이도 태미의 첫사랑이 되었다.

성준이의 닉네임이 루퍼스인 이유는 멤버들의 이름을 별자리에서 따 왔기 때문이다. 리틀빅은 총 일곱 명이었다. 레오, 리브, 스콜, 토러스, 델피, 닉스, 그리고 루퍼스. 사자자리, 천칭자리, 전갈자리, 황소자리, 돌고래자리, 불사조자리, 이리자리였다. 리틀빅은 무대에 등장할 때 눈 밑에 각자의 별자리 문신 스티커를 붙이고 나왔다. 이들은 모두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 말 그대로 스타였다.

4교시 수업 시작 10분 전, 교실 문이 열리고 수빈이가 들어왔다.

우치치우!”

수빈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 됐어! 3학년 회장!”

수빈이는 깡충깡충 뛰며 소리쳤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몰려와 태미와 수빈이를 둘러쌌다. 아이들은 수빈이가 걸그룹 멤버라도 된 것처럼 축하해 주었다. 학년 회장들만 갈 수 있는 모임에 따라가도 되냐고 묻는 아이도 있었다.

수빈아, 나 특별회원으로 올려 주면 안 돼?”

태미가 수빈이에게 물었다. 수빈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뭐 내 마음대로 되나?”

학년 회장은 자기 친구 열 명까지 특별회원으로 올려 줄 수 있다고 돼 있던데?”

태미가 말했다.

게시판 다 뒤져 봤구나?”

수빈이가 찡그리며 되물었다. 태미는 조용히 끄덕거렸다. 갑자기 수빈이는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하루 만에 푹 빠진 거야? 너 진짜 대단하다!”

태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수빈이가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특별회원은 아무나 되는 줄 알아? 꿈도 크셔!”

난 그냥 성준이 데뷔 전이 궁금해서 그런 거야. 그냥 얘기라도 좀 해 줘. 투표 했잖아.”

태미가 말했다.

! 안 알려 줌!”

수빈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기껏 부탁 들어 줬더니 돌아오는 건 찬바람뿐이었다.

루퍼스다!”

창가에 있던 인우가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와아아 소리를 지르며 창가로 달려갔다. 태미도 질세라 달려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얀 자동차에서 성준이가 내렸다. 매니저가 성준이 뒤를 따랐다. 오전에 공연을 하고 온 건지, 눈 밑에 별자리 문신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아이들은 성준이를 향해 손을 흔들고 소리를 치느라 난리가 났다. 태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성준이와 같은 반인 수빈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갑자기 복도가 시끄러워졌다. 성준이 옆에 수빈이가 착 달라붙은 채 교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컴퓨터 과학 수업이 시작됐다. 태미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수빈이에게 앙갚음 하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도 성준이에게 가까워지고 싶었다. 수빈이보다 더 친해지고 싶었다. 태미는 성준이와 1학년 때 한 번 같은 반이었다. 수빈이는 벌써 3년 연속 같은 반이다. 게다가 수빈이는 빅스타 3학년 회장이다. 태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태미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비밀 카페에 접속했다. 해커들만 가입할 수 있는 곳인데, 작년 리버스 월드 해킹 사건 이후로 태미도 그 카페에 초대 받았다.

오늘도 우치치우랑 놀고 있니?”

컴퓨터 과학 선생님이 태미 뒤에서 말했다. 태미는 화들짝 놀라며 인터넷 창을 닫았다.

아니에요. 저 문제 풀고 있었어요.”

태미가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30초 만에 풀 수 있는 컴퓨터 언어 문제가 떠 있었다. 태미는 선생님이 어깨를 으쓱하고 앞으로 걸어가자마자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지태미 정답. 1등입니다.

스크린에 1등 정답자로 태미 이름이 떴다. 선생님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태미는 다시 해커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에는 아이 포인트를 해킹하려는 해커들이 아주 많았다. 심지어 자기들끼리 상금을 건 대회까지 열었다. 태미는 마음속으로 이거다!’ 하고 외쳤다. 팬 카페를 해킹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지만, 수빈이가 알아차리면 두고두고 놀릴 게 뻔했다. 성준이의 아이 포인트를 해킹할 수만 있다면, 세상 그 누구보다 성준이와 가까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태미는 선생님이 문제를 낼 때마다 30초 만에 풀어 버렸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아이 포인트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이 포인트는 오전 여덟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전국 옥토 초등학교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일상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 기록물을 고용노동부와 각 지역 교육청에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시스템이다.

카페에 올라온 여러 글 중에 북극곰이라는 해커가 올린 아포 음모론이라는 제목의 글이 눈에 띄었다. 거창한 제목에 비해 내용은 간단했다.

- 교육부와 고용노동부는 허수아비에 불과함. 아포의 주인은 옥토 주식회사임.

태미는 북극곰의 아이디를 선택한 뒤 쪽지를 보냈다. 그러자 곧바로 대화 신청이 들어왔다. 확인 버튼을 누르자 대화창이 열렸다.

- 옥토가 주인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야?

태미가 물었다.

- 너 우치치우로구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한테는 말해 줄 수 있지.

- 빨리 말해 봐.

- 혹시 교육부 서버를 해킹하려는 거야? 걸리면 퇴학 감인데.

- 아 진짜, 최고 말 많아.

- 내가 며칠 전에 고용노동부 서버를 좀 파고 있었거든. 도대체 나의 진로는 어떻게 되는 건가, 궁금해서 말야. 그런데 고용노동부 자료가 자꾸 해외 서버로 복사되고 있는 거야.

- 해외로?

- 처음에는 해킹 당한 줄 알았지. 이제 전쟁이다! 다 죽었어! 하면서 그 해외 서버를 털었는데, 글쎄 그게 옥토 해외지사였지 뭐야.

- 옥토에서 왜 우리들 자료를 복사하는 거지?

- 벌써부터 직원 관리하는 건가? 회사 들어가려면 10년도 넘게 남았는데.

수업 시간이 끝났다. 아이들이 식당으로 몰려갔다. 부모님과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회사 건물로 향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태미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였다. 태미는 식당으로 가다 말고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태미는 중앙 광장을 가로질러 옥토전자 건물로 뛰어갔다. 정장 차림의 옥토 직원들이 건물에서 쏟아져 나왔다. 혹시 직원들 사이에 아빠 엄마가 있을까 봐, 태미는 기둥 뒤로 숨었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였다.

태미야, 아빠다. 지금 어디니?”

지금…… 밥 먹는 중이죠.”

태미가 대답했다. 로비 쪽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태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쭈그려 앉았다. 아빠는 상담사와 식사하기로 했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기둥 옆으로 아빠와 엄마가 스쳐 지나갔다. 태미는 밥을 반쯤 먹어서 못 간다고 전화를 얼버무린 뒤, 회사 건물로 들어갔다.

로비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얼굴 인식기를 통과해야 했다. 혼자서는 절대 그냥 통과할 수 없었다. 태미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언젠가 주말에 엄마와 함께 회사에 왔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지하 7층 주차장에는 얼굴 인식기가 없는 대신 구형 인터폰이 있었다. 태미는 인터폰을 눌렀다. 경비원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태미는 깡총깡총 뛰어서 경비원에게 얼굴을 보여 주었다.

얘야, 어떤 분을 찾아온 거니?”

경비원이 물었다. 태미는 스마트폰에 아빠와 엄마의 명함을 띄워 인터폰 카메라에 갖다 댔다. 잠시 뒤, 문이 열렸다. 속으로 나이스! 하고 외치며 태미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렸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아빠 사무실이 있는 36층을 눌렀다. B7, B6, B5, B4…… 엘리베이터가 속도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태미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엘리베이터가 제발 1층에서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1층입니다.

안내 음성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직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한 여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들여 놓으려다가 멈칫했다.

이거 올라가는 거니?”

여직원이 물었다.

, 올라가요.”

태미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러자 여직원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태미는 닫힘 버튼을 꾹 눌렀다.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엘리베이터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36층은 조용했다. 모두들 식사하러 나간 모양이었다. 그래도 태미는 조심조심 걸었다. 다른 직원과 마주쳤을 때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속으로 준비해 뒀다. 태미는 5분 만에 아빠의 자리를 찾아냈다. 바퀴 달린 서랍장 옆에 노트북 가방이 기대어 있었다.

태미는 재빨리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길어야 한 시간, 짧으면 삼사십 분 만에 혼자서 해 내기란 불가능했다. 태미는 해커 북극곰에게 쪽지를 보냈다. 북극곰은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며 기꺼이 도와 주겠다고 했다.

- 우치치우, 정확히 원하는 게 뭔데?

- 루퍼스 성준이의 아이 포인트.

- 아이디만 구하면 10분 만에 뚫을 수 있는데.

- 나한테 있어. 옥토전자 직원 아이디.

- 오케이! 술술 풀리는군.

텅 빈 사무실에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느새 시침과 분침은 124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 …… 그런 거였군.

북극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무슨 말이야?

- 이제 알겠다고, 옥토 주식회사로 자료가 복사되는 이유.

- 그야 우리가 다니는 학교가 옥토 초등학교니까.

- 이것 좀 봐.

북극곰이 메시지 창을 하나 띄웠다. 벌써 1245분이었다. 태미는 짜증이 났다. 성준이 아이 포인트 전송 주소의 암호만 풀면 되는데 북극곰이 자꾸 딴짓을 했다. 태미가 메시지 창을 확인하지 않자 북극곰이 계속 메시지를 보냈다.

태미는 메시지 창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성준이에 관한 보고서였다. 태미는 창을 확대한 뒤 자세히 살펴보았다.

- 어때? 충격적이지?

북극곰이 메시지를 보냈다. 성준이의 보고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른쪽 눈 밑에 아이 포인트가 있는 전국 모든 옥토 초등학교 아이들의 보고서가 있었다.

- 이대로라면 너희들은 모두 옥토의 노예가 되는 거야. 이거, 다 지워 버리자.

- 그럴 수 없어. 우리 아빠 회사란 말이야.

- 우리는 후세에 길이길이 영웅으로 기억되는 거지. 으하하!

- 영웅은 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야!

태미는 북극곰과 연결된 대화창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북극곰과 함께 해킹한 흔적을 모두 지웠다. 북극곰이 나중에라도 옥토 서버에 침입할 수 없도록 차단해 놓았다. 마지막으로 성준이의 보고서와 아이 포인트 전송 주소를 스마트폰에 복사했다.

 

두 달 뒤, 태미는 성준이로부터 사귀자는 고백을 받았다. 태미는 먼저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아빠와 엄마는 성준이 덕분에 태미가 게임을 끊었다고 생각했기에, 사귀는 걸 허락해 주었다. 태미와 성준이가 사귄다는 소문은 금세 학교에 퍼졌다. 이제 수빈이도 태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태미의 팬 카페 우치치우가 따로 생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태미는 아빠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아빠에게 해커 북극곰과 있었던 일을 솔직히 말한 뒤, 해커들이 회사 서버를 공격을 할지도 모른다고 알려 주었다. 아빠는 해커들의 공격을 막아낸 공로를 인정받아 회사에서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

요즘도 수빈이는 툭하면 태미를 찾아와 귀찮게 한다.

태미야, 도대체 성준이랑 어떻게 사귀게 된 거니?”

안 알려 줌!”

그럴 때마다 태미는 빙긋 웃으며 말한다. 아빠 엄마가 물어 봐도 말할 수 없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알려 줄 수 없다. 성준이 보고서와 아이 포인트 주소는 태미의 첫 번째 보물이자 마지막 비밀이니까.



fin.

Tom_As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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