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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주와 노예

 

 

 

김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12시간 동안 커피숍에서 서서 매대 일을 보면서 바리스타 노릇을 했지만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이를 먹고 생계 유지비를 쓰다 보면 결국 삶을 깎아 먹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다 이게 노력이 부족한 탓일 게라고 김은 자신을 위로했다.

 

속담처럼 굳어진 말 중에 45락이 있다. 4시간 자면 명문대에 합격하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뜻이다. 김도 내일부터는 4시간만 자겠다고 문득 결심했다. 아직 20대 중반이라 몸이 따라줄 것만 같았다.

 

사장이 와서 돈 계산을 하고 갔다. 사장은 왕씨라서 왕가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김은 자신은 하루 종일 힘들여 일하는데 돈만 걷고 유유히 사라지는 왕가네 사장을 보는 데에 독특한 기분이 들었다. 자괴감에 가까운 기분이 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자본이 곧 왕이다. 그러니 왕가네는 노동을 하지 않고도 저리 돈을 걷어 가는 것일 것이다. 금융계를 보면 알겠지만 돈이 일을 하는 시대다. 구글이 연구 중이라니 조만간 인공지능이 발달할 것이고 그러면 김이 일할 만한 직장들도 많이 사라지게 될 터였다. 왕가네는 돈을 가졌으니 인공지능을 도구로 부리면서 잘 살 터였다.

 

커피숍에서 김은 3교대로 일했다. 오늘은 저녁에 퇴근하는 날이었다. 단칸 월세 방에 돌아와 집 주인에게 폰뱅킹으로 월세를 송금했다.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집 주인도 왕씨였다. 왕가네일 수도 있다고 김은 생각했다.

 

김은 전문대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는데 전공을 살리는 일이 너무나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만두었다. 학자금 대출은 고스란히 남았고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라도 기약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선택의 자유를 운운할지도 모른다. 김은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알콜 중독자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덕분에 학창 시절에 공부를 제대로 쫓아가지를 못 했다. 그래도 나중에 각 잡고 공부를 그나마 해서 들어간 전문대였다. 사회복지사 일을 버틸만한 마음을 가정에서 키우지를 못 해서, 사회복지의 대상이 되는 치매 노인들과 충돌이 잦았다. 마음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정신과에 갈까 말까를 생각하게 되자 사회 복지 일을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선천적인 것이고, 인간의 의식 또한 자유의지는 없고, 외부에서 온 결정되어 있는 데로 움직일 뿐이라는 게 현대 뇌 과학의 통찰이었다. 즉 김은 김 자신의 과거로부터 결코 헤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대로 최저임금을 가까스로 넘는 돈만 받으면 평생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 할 것만 같았고 평생 이래 봤자 짧을 것만 같았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의 연구에 따르면 부자일수록 도둑질 잘 하고 사기 잘 친다던데 그러려면 머리가 사기 치는 쪽으로 잘 돌아가야 한다. 하긴 그런 주변머리가 있으니 부자가 된 것일 터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전체 강력 범죄의 85%를 저지른다는데, 그것은 단지 부자들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행위인 해고, M&A, 사기, 횡령 등이 강력 범죄로 취급되지 않고, 또한 부자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대게 돈으로 은폐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김은 주변머리 놀림에 자신이 소질이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젊고 반반한 여자이니 성을 팔면 돈이 꽤 될 터였다. 남자라면 이런 짓으로 가난에서 탈출할 생각은 하지도 못 하기에 김은 가난한 남자들이 살짝 불쌍하단 감정이 들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김이 노래방 도우미에 나가는 날이었다. 일단 하루에 1번만 나가보고 점차 늘릴 작정이었다. 오늘은 4시간만 자고 커피숍에 출근할 거라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이런 노래방 도우미로는 부업 수준 벌이 밖에 못 할 것이다. 잘 연줄을 타서 텐프로에 가보는 것이 김의 소망이 되었다. 김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계속 줄어들었고 그 중 그나마 돈을 가장 많이 벌 수 있는 것이 그 길이었다. 부자들은 돈 버는 것이면 모든 범죄를 저지르는 법이었으므로 김을 부자들이 도덕적으로 욕할 일은 없지만 힘으로는 업신여길 것이다. 김을 부른 것은 왕가네였다. 김은 왕가네 같은 부자가 왜 이런 허름한 노래방에 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또 몰랐다.

 

왕가네가 말했다.

 

너 내 가게에서 일하는 애 아니냐?”

 

아니에요.”

 

내가 잘 못 봤나?”

 

왕가네는 김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왕가네가 폭탄주를 김에게 먹였다. 왕가네가 말했다.

 

열심히 노력을 해야 나 같은 사람이 네 년을 올려주는 거야.”

 

그런 말은 노예 부리는 노예주가 노예를 해방시켜 줄 수도 있다면서 했을 법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세상은 그런 계약 아래 로마의 질서 아래 놓여 있었다.

 

김이 술에 취해 의자에 가로 놓여 쓰러졌다. 왕가네는 김을 식인하기로 했다. 왕가네는 화교로서 아직 식인 풍습이 사라지지 않은 중국에 국적을 두었다. 식인종이 머슴을 필요로 하면 그게 노예주와 노예다.

 

 

[201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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