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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나락

2014.02.03 02:1402.03

'너 나락이 무엇인지 아느냐? 한없는 심연과 정겨운 아픔과 이젠 돌아봐주지도 않는 잔상만이 남는 것이다. 너는 나락에서 살지 말거라. 너는 행복을 살거라.'

 

그것이 내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나락에서 살다간 여인의 마지막 비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절망, 절망, 그리고 절망이었다. 그녀는 한 때의 미모로 한 때의 젊음으로 잠시 행복도 누렸었다. 그러나 젊음이라는 것은 청춘이라는 것은 한 순간의 꽃 같은 것이다. 희희낙락 즐겁던 꽃은 지고 삶의 무게는 짙어진 채 그녀는 나라의 명운과 함께 했다. 그녀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녀의 나라도 함께 무너져 갔다. 그리고 결국 남은 것은 빛나도록 아름답던 때의 추억과 그녀의 딸 뿐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초라했다. 그 덕인지 그녀의 딸은 남의 손을 가장 적게 빌리고 식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딸은 상주를 하면서 틈틈이 장례식에 찾아와준 몇 안 되는 남자들의 얼굴을 세어보았다. 소녀는 자신의 얼굴과 닮은 이를 찾는다. 그녀는 아비가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 시도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사람이 가고 시간이 흐르던 때에 지금까지 온 조문객 중 가장 젊어보이는 남자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향을 피우고 소녀와 맞절을 하고는 그는 그의 움직임이나 생김새에 비해 호탕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 때를 풍자했던 미녀에게 이렇게 조문객이 없구나. 널 돌봐줄 사람은 있는거냐?"

"없습니다.

"어찌 살아가려 하느냐?"

소녀는 제 자신이 어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해 두지 않은 채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일이기에 무어라 답할 수가 없었다. 어린 소녀에게 한없이 괴리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살아간다는 말도 버텨나가는 것도 이렇게 누군가를 맞이하는 일도 마찬가지 였다. 모든 것이 서툴렀다. 그러나 소녀는 서툴러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당당해 보이고는 싶었으나 좋은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저는……"

 

소녀가 우물쭈물 무언가 말하려는 듯 제대로 답을 못하자 그는 답답해하며 또 제법 큰 목소리로 소녀가 필사적으로 눈 돌렸던 현실을 말해준다.

 

"너도 꽤나 예쁜 얼굴이구나. 네 어미처럼 시대를 평정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 내가 도와주랴?"

 

그는 무례했다. 장례식에서 그것도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랐으나 자존심은 있어 속으로 울고불고 하는 것을 억지로 꾹꾹 누르며 참는 아이에게 할 말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은 참혹한 현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친인척 하나 없는 고아가 남겨진 것이라곤 초가집 하나와 빛나는 어미의 과거와 망국민의 이름표와 어미를 닮은 비참한 미모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소녀는 주먹으로 슬픔을 삭이며 답했다

 

"저만은 나락에서 살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하겠느냐. 나락은 어떤 한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을. 가진 게 없거든 네 명을 부지하려면 네 스스로 나락을 반기며 달려들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나도 내가 저주하던 나락을 매일같이 밟으며 왔느니라. 네 어미도 같다. 찬란하던 과거가 빛나는 명성이 행복할 때도 있었겠지만 결국 네 어미는 그것을 추억이라 하지 않고 나락이라 칭하며 먼 곳으로 갔구나. 그럼 그것이 나락이겠지."

"거침이 없으시네요. 젊은 시절에 어머니는 행복했다 합니다. 그것은 추억이겠지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며 추억도 나락이 될만큼 세상은 가혹했나 봅니다."

"그래. 그렇지. 세상은 그렇단다. 행복하나 가혹한 것이지. 나는 너에게도 추억을 만들어줄 수 있다. 즉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의 순간은 가혹하나 후일 찬란해질 수 있는 것이다. 너는 어찌할테냐?"

 

그는 사뭇 진지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사람들과는 달랐다. 소녀를 이해하고 도우려는 건지 이용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알 수 없는 현실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소녀는 불안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선택을 해야했다. 남은 명을 안달복달 부지하고자 나락을 반기며 그 속에서 얄궂은 행복을 찾던가 남은 명을 아쉬움 없이 끊어버리던가 둘 중 하나였다.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와 같았다. 가난한 자의 가혹한 운명이었다.

 

"저도 자식인데 유언은 지켜야지요. 죄송합니다만 도움을 거절하겠습니다."

"유언이라, 그래. 알겠다. 나락이 아닌 곳에서 살려면 희망하거라. 꿈도 꾸어보거라. 너는 나보다 젊으니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시인같이 외치던 호탕하지만 조심스럽던 남자는 그렇게 홀연히 왔다가 갔다. 소녀는 그의 말로 마음에 없던 수많은 것이 세차게 몰려왔다. 제 분수와 그가 말한 꿈과 높기만 한 이상들이 어울려 놀았다. 그 속에서 헤엄치던 소녀는 마음 속으로 자신만의 나락을 정했다.

첫째 삶을 포기하는 것, 둘째 제 자신을 버리는 행동을 하는 것, 셋째 비웃음에 지는 것, 넷째 소중한 것들을 잊거나 잃는 것이었다. 그렇게 소녀는 마음으로 신념을 정해놓았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나고 소녀에겐 많은 일이 지나간 듯 했다. 그러나 소녀는 후회와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소녀에게 들어온 몇몇 제의는 소녀가 정한 신념에 반하는 것들 투성이였고 소녀가 걸어갈 길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소녀의 돈은 점점 떨어지고 빌어먹기 직전까지 가고 있었다. 소녀는 그녀가 남긴 얼마 안 되는 돈을 쥐고 끅끅거리며 이불 속에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장례식 날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해줄 것이 있어 왔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것아!"

 

그 날처럼 크고 호탕한 목소리였다. 차가운 듯 하던 봄바람은 웬지 따스하게 일렁이고 소녀의 집 근처에 만발하게 흩날리는 복사꽃이 이곳저곳으로 나풀거린다. 그는 어떤 종이를 들고 있었다. 소녀는 눈물을 후다닥 훔치고는 붉어진 얼굴로 어서 튀어나왔다. 그는 어리숙한 소녀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종이를 전해 주었다. 그러면서 비웃듯 조언하듯 한 마디를 던졌다.

 

"너, 네 어미의 발자국을 밟고 싶으냐?"

"아니요."

 

소녀는 그 종이를 받아든 채 확고하게 답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미소를 짓고는 답해주었다.

 

"닮았구나. 그래서 주는 것이다. 그게 네 어미가 밟고 싶어했던 발자국이다. 어찌하고 싶으냐?"

 

그 종이에는 의사에 관한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병을 고치고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떨려왔다. 그렇지만 소녀는 셀레임의 뒷편에 담긴 걱정들을 그에게 토로했다.

 

"저는 가난뱅이입니다. 여자는 의사가 되기 힘듭니다. 저는 이름이 사라진 나라의 국민입니다. 그런 제가 할 수 있습니까?"

"내가 나락에 빠져가며 모은 돈을 네게 투자하마. 그녀가 원했고 너는 그녀와 닮았다. 할 수 있겠느냐?"

"네."

 

소녀는 확고히 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소녀는 꿈을 꾸고자 했다. 어머니의 발자국, 삶의 끈적끈적함과 여러 이름표 딱지들과 함께 소녀는 꿈을 꾼다. 한참을 어쩔 바 몰라하며 소녀는 그를 바라본다. 그는 그녀를 아는 사람이었다. 소녀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본다. 더 어린 시절 보았던 팔자국에 남겨진 칼자국……. 잔상처럼 흩어가는 이상한 기억들 소녀는 그의 품에 안긴다. 어쩔 바 모르며 사람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터뜨려 버린다.

 

"아!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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