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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탄생] en-human 2

2012.02.20 21:0802.20

file 4. PW : 조작된 우연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에게는 당신을 당혹스러움으로 내몬 어떤 결정적 계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저희의 의견은 어떤 위기도 단 한 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당사자는 어떤 특정한 일 때문에 자신이 파멸로 내몰리고 있다는 감정을 갖게 됩니다.
다시 이치현 씨의 경우로 되돌아가 볼까요?
앞에서 말한 설인(雪人) 목격담은 이치현 씨의 가장 최근의 징후에 속합니다.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자면 우리는 아마도 이치현 씨의 태내(胎內) 경험까지 들추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명석한 저널리스트인 이치현 씨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단순한 현실적 어려움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으로 심화시켰습니다. 그의 무의식은 실패에조차 바로크적 장식을 하고 싶었던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뛰어나게 은유를 만드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가 처한 상황은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성공한 사람과 그 주위의 시기심 많은 사람들, 함정……, 그런 것들이죠.
  그는 가출청소년에 대한 리포트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제작국장은 소재가 지나치게 평범하다고 우려를 했습니다만 이치현 씨는 맡겨두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는 온 나라가 떠들썩해질만한 것을 보여주겠다고 약속을 했죠. 이젠 식상해진 것 같은 소재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제작국장을 설득했습니다. 가출 청소년 문제를 평범한 것들과는 다르게 만들어 보이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방송사와의 약속 날짜가 다가올수록 이치현 씨는 조금씩 초조해졌습니다. 썩 좋은 기획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할지 감을 잡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그는 서울역 주변에서 열 다섯 살 짜리 아이 두 명을 만났습니다. 본드를 불고 있던 아이들은 남산에 올라갈 작정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을 찍던 이치현 씨는 여자아이가 웬만한 광고 모델보다 예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진영이었고, 그 옆에 있던 남자아이는 두찬이었습니다. 두 아이는 함께 산다고 했습니다. 그는 두 아이에게 영화를 찍자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특히 진영이에게는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충동질을 했죠. 요즘 아이라면 누구나 혹할만한 조건 아닙니까? 그러나 이치현 씨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한 명의 스타가 태어나는 토양으로 센세이셔널리즘과 육체적 매력, 연민 이상 좋은 것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본드에 취해 있던 아이들은 그 솔깃한 말에도 여전히 욕설을 퍼부으며 마구 웃더랍니다. 다큐멘터리에 짧게 삽입된 아이들의 과거가 나타내듯, 두 아이 모두 끝간 데까지 경험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진영이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가출이라는 ‘평범한 불행’에 의해 보육 시설에 들어갔습니다. 두찬이는 부산의 지하철에서 앵벌이를 하다가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고 하더군요. 이치현 씨는 제대로 물었다는 생각에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댔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아이들은 집을 나왔다 하더라도 처신의 범위를 한정할 줄 압니다. 이치현 씨는 혼란기 아이들이 경험하는 잠깐의 탈선 정도로 안전하게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진영이와 두찬이의 앳된 목소리로 욕설을 들어가며 그는 다큐멘터리의 성공을 이미 예감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정신을 차린 후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은 헤로인을 해 보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돈이 없어 해보지 못했다고 투덜거렸다고 하더군요. 이치현 씨는 성공하면 다른 것을 해보고 싶을 것이라 설득하고 얼마간의 돈을 주기로 했답니다.
당신도 그 다큐멘터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해도 뉴스 시간마다 나오던 그 요란한 비명 소리와 두찬이의 인터뷰 장면은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성공한, 아주 성공한 다큐멘터리였죠. 사회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면 이미 짐작하셨을 줄 믿습니다. 이치현 씨의 이름은 가명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고객들은 살아가는데 이름이 하나 이상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당신의 취향을 존중합니다. 다만 새로운 이름을 선택하실 경우 당신에게 잘 맞도록 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므로 약간의 비용이 추가됨을 밝혀드립니다. )

잘 알려진 대로 다큐멘터리 <문 밖의 아이들>의 제작 방법은 아이들의 몸과 소지품에 소형카메라를 몰래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물의 생태를 보여주기 위해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죠. 사납고 게으른 사자 같은 짐승에게는 적절한 방법이 아닙니다.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죠. 두찬이는 그것이 카메라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최신형 씨디피(cd player)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이죠. 진영이의 경우 벨트와 시계 그리고 역시 씨디피에 달린 소형 카메라와 녹음기를 지니고 다녔습니다. 이치현 씨는 그 사실을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부자연스러워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치현 씨가 가지고 다닌 캠코더는 단지 주변 스케치와 의도적인 숏을 찍을 때에만 썼을 뿐입니다. 실제로 다큐멘터리를 보면 진영이와 두찬이가 카메라를 향해 배우나 된 듯 손짓하고 웃는 장면이 나옵니다. 천진한 모습이죠. 하지만 이치현 씨가 진짜 애지중지 했던 장비는 두 아이의 위치를 확인하게 해주는 추적장치였습니다. 아이들은 자주 이치현 씨의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카메라가 귀찮다고 생각할 때도 그랬지만 그의 다큐멘터리를 도와주려 폭주족이나 폭력단들에게 접근했다가 예상치 않은 상황에 휘말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린 가난한 애들하곤 안 놀아!”
이치현 씨와의 인터뷰에서 진영이가 한 말입니다. 다큐멘터리가 진행되며 밝혀진 것이지만 진영이가 말한 가난한 애들이란 사실은 잘 사는 집 아이들이었습니다. 집을 나와서도 잘 사는 집 아이들은 자신들이 결국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일을 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원래 가난한 집 아이들이었습니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은 나와서 돈이 떨어지면 며칠 헤매다가 돌아가는 식이었죠. 다큐멘터리에서도 그런 아이들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화면 처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진영이와 두찬이는 가난이 지긋지긋한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대로 살아가려면 돈을 모으는 동안에도, 돈을 모은 후에도 가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버는 만큼 즐기겠다고 결심했죠.    
바로 그런 점이 이치현 씨의 다큐멘터리를 흥미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생생한 사실을 잡아낼 수 있었던 때문입니다. 폭주족만 하더라도 오토바이의 속도감은 어떤 영화보다도 아찔했고 사람들은 그들이 왜 소음기를 떼어버리는지 이해하겠다고 했죠.
2회 때 나온 폭주족 단속 장면 때문에 경찰은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진영의 옆을 달리던 폭주족이 가드레일에 부딪쳐 길에 나뒹굴고 놀라서 돌아보는 진영이의 시선으로 앳된 피투성이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리고 미처 멈추지 못하고 그 위를 쓸고 지나가 버리는 순찰차…….  하나의 소실점이 되어 가는 붉은 영상 위로 끝없이 이어지던 진영의 비명이 아직도 생생하군요.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으로 <문 밖의 아이들>은 매주 한 회 씩 방영되었습니다. 그만큼 광고가 많이 붙은 프로그램이었죠. 2, 3부작에서는 시청률이 30%를 넘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찍은 것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무엇보다 이치현 씨의 영화적 감수성이 다큐멘터리를 하나의 극처럼 보이게 했던 것입니다.
그 2주 동안 이치현 씨는 천국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모두들 가출 청소년의 현실과 그들을 방치하는 교육당국을 성토하기 시작했고, 갖가지 움직임이 사회 전체에 퍼져나갔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시발점인 이치현 씨는 수많은 인터뷰를 해야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는 한국 출신의 자랑스러운 저널리스트라는 주제로 자신의 이력을 다룬 잡지사의 인터뷰를 가장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막 기자가 되었다는 여기자가 같은 저널리스트로서 존경한다고 말했을 때에는 색다른 기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2주의 시간은 이미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던 그에게도 흥분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자신의 영상이 사람들을 흥분시킨다는 데에 짜릿함을 느꼈다고 이치현 씨는 고백합니다. 하지만 3부가 나간 후 그의 천국은 끝이 났습니다. 다큐멘터리의 성공을 시기하던 다른 방송사에서 잠깐 내비친 불만이 사회단체와 언론계로 확산 되어나갔던 것이죠.
저희는 그 이유를 너무 예쁘고 천진해 보이던 주인공 진영이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치현 씨는 마지막에 욕심을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진영이는 이치현 씨에게 돈 없이 하루 동안 노는 방법을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두찬이는 그럴 경우 진영이가 밤을 새는 경우가 많다며 불만스러워했다고 하죠. 하지만 진영이는 두찬이와 다투고서 오기라도 부리듯 자가용을 몰고 나온 일단의 청년들에게 접근을 했습니다. 하지만 카메라를 본 남자 하나가 진영이를 때리더니 이치현 씨가 다가가기도 전에 진영을 싣고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화면을 통해서 이미 봤지요. 허둥대며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가던 두찬이의 모습과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화면을 가린 채 보여지던 진영이의 윤간 장면과 살해 장면입니다.  텔레비전은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사실이 진영이의 죽음이었다고 해도 방송에 내보내지 않았다면 진영이는 여전히 거리에 널린 비행청소년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서울역에 이태원 거리에 차고 넘치는 그 아이들 중에 하나가 없다고 해서, 혹은 있다고 해서 누가 관심이나 가졌겠습니까? 보여주지 않았다면 진영이의 죽음은 경찰 조서 하나로 끝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두찬이는 진영이 죽은 후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청년들에게 얻어맞다가 극적으로 구출되었죠.

                             (암호의 효용시간이 끝나갑니다. 암호를 확인하십시오.
                                                                암호는 ‘합리적 사고’입니다.)  

file 5. PW: 합리적 사고
저희의 서비스를 받은 후, 이치현 씨는 자신의 분열이 내부로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진영이 추적 장치에 점멸하는 붉은 램프를 보며 흘려보낸 시간이 무한히 확장되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10분이었다가 곧 1시간, 3시간, 10시간...... 사람들이 비난하듯 진영이가 죽도록 만들기 위해 시간을 무한히 늘려버린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죠.
사람들은 너무나 충격적인 화면을 본 다음 날부터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조작이라고 말이죠. 제작국장은 조작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이치현 씨는 내키지 않았지만 방송사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두찬이를 찾아냈죠. 경찰의 증언과 두찬이의 인터뷰로 조작이 아니라는 것은 밝혀졌습니다.
두찬이는 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지만 진영의 죽음을 말할 때만은 울먹거렸습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사회자는 출연료를 어디에 썼냐고 물었습니다. 생방송이었는데, 두찬이는 마약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실컷 해보았다고 말입니다.
사태는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자 여러 번 시도했지만,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치현 씨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외국으로 나갈 수도 있었지만, 이 사건은 그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후 2년 간 그는 가족과도 연락을 하지 않은 채 철저하게 고립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그 사건을 잊었는데도 말입니다.
  이치현 씨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그 사실을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마약을 미끼로 아이들에게 다큐멘터리를 찍게 하고, 진영을 죽음 속에 내몬 것은 아닙니다. 이치현 씨는 진영이가 납치되었을 때, 그런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그렇듯이 금세 빠져 나오리라 생각했고 진실이 생명인 다큐멘터리는 편집자가 개입을 하는 순간 엉망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만의 시간으로 얼마나 생생한 현장이 잡히는지는 이미 알고 있던 터였죠.
우리는 괴로워하는 그에게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당신이 진영을 구하기 위해 바로 경찰을 불렀다면 다큐멘터리가 완성될 수 있었을까? 실제로 그렇게 죽은 아이들이 진영만은 아닌데 왜 이 일이 갑자기 문제시되는 것인가? 당신이 사람들을 환기시키지 않았다면 이 사회의 어느 누가 그 아이들에 대해 단 한 마디라도 말을 했겠는가?
하지만 그의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괴로워한 것은 사람들의 비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하자면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윤리의식에 대해 회의를 느꼈던 것입니다. 아이가 위험하게 사라진 순간 그는 뭔가 그림이 될만한 것이 잡혔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합니다. 아이의 위치를 찾는 동안 단 한 번도 진영이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사건을 거듭 생각할수록 그는 그러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성공을 위해서는 아이들이 좀더 파괴적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치현 씨는 두려움 없이 극단까지 달려드는 면 때문에 두 아이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다큐멘터리의 목표지점은 당연히 청소년 보호라는 도덕이었지만 그것을 포장할 것은 좀더 화려하고 자극적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치현 씨는 ‘구할 수도 있었는데......’ 라는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그가 우리의 회원이 되었을 때, 우리는 이치현 씨가 이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은 불행에 대해서도 고집을 피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회복을 바라지 않는 듯 불행 속에서 단 한 발도 걸어나오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고집스러운 분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 회복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고 계신지요? 그러나 그것 또한 기우에 불과합니다. 불행에 침몰할 분이라면 우리의 회원이 되실 리도 없지요. 몰락과 파멸은 조용한 것입니다.
모든 비난이 사라진 2년 뒤, 그는 잡지사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를 자랑스러운 저널리스트로 조명했던 잡지사를 택했습니다. 그 잡지사는 저널리스트의 윤리성에 대한 특집기사를 싣기도 했었죠. 그는 자신을 두 번이나 인터뷰했던 여기자를 찾아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그때 새내기였던 여기자는 어느덧 관록이 묻어있는 말솜씨로 이치현 씨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치현 씨는 자신을 바로 기억해내지 못하는 여기자에게 자신이 참회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자신이 느낀 저널리스트로서의 자세와 윤리성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 싶다고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기자는 한동안 듣더니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인터뷰는 거절했습니다. 시의성이 없다고 말하며 같은 저널리스트로서 이해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이치현 씨가 위기감이라는 암호를 찾은 것은 그 직후였습니다. 우리가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 이치현 씨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고, 말을 시작하려면 오래 머뭇거려야 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오랜 칩거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면밀히 분석하여 그의 좌절이 사람들의 비난 때문이 아님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만약 연민을 연기하는 듯한 진영과 두찬이 아니었다면 이 다큐멘터리는 그렇게까지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둘은 확실히 사람의 시선을 끄는 묘한 면이 있었고 필름은 지나칠 정도로 극적이었습니다. 이치현 씨도 그것을 인정하며 반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이치현 씨의 의식 깊숙한 곳을 스쳐지나가던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 대한 자학적 분노를 완전히 분석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잊고자 하는 것을 드러냈을 때 나타나는 사람들의 극렬한 반응과 분노에 대해 상기하라고 이치현 씨를 설득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크로마뇽인은 악랄한 학살의 충격에 원죄의식을 갖게 되었고 신화와 제의로 애써 그것을 잊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크로마뇽인의 우수한 두뇌는 은유에 뛰어났으므로,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불평등과 약자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볼 때마다 네안데르탈인의 절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죠. 바로 진영의 비명과 상처에서 말입니다. <문 밖의 아이들>은 구멍을 내지 않고 쥐를 쫓는 격이었습니다. 화면을 지켜본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격렬한 양심의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이치현 씨의 은유를 대입하자면 자신들이 학살자의 자손이라는 수치심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손쉬운 방법을 마련했죠. 고대부터 해왔던 희생양의 의식, 한 사람을 파렴치한으로 만들어 단죄를 하고 나면 그들은 죄를 짓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삶을 다시금 계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파렴치한은 당연히 죽어 가는 아이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이치현 씨였습니다. 낙인이 찍히는 순간 이치현 씨는 인간이라는 집단에서 동떨어져 나와 하나의 온전한 개체가 된 것입니다. 온갖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 쓴 도려내야 할 개체 말입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이치현 씨의 회복을 위해 행한 작업의 일부를 공개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치현 씨가 우리의 서비스를 계속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고 생각하시면 일곱 번 째 파일로 바로 가십시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여섯 번 째 파일을 보신 뒤 처음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본격적인 서비스에 대한 시료를 보여드립니다.
                                                         여섯 번째 암호는 ‘처방1’입니다.
                                                        일곱 번째 암호는 ‘처방2’입니다.)  

file 6. PW : 처방 1
  이치현 씨는 결국 위기감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집단에서 떨어져 나올 때의 위험은 혼자가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돌아가려 하면 할수록 그 형벌은 더욱 효력을 발휘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의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돌아갈 곳은 추방된 그곳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안 보기로 결심한 까마득한 어둠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인간으로서, 한 어리고 가냘픈,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저린 여자아이가 비참하게 죽는 것을 그는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10대 소녀를 죽인 범죄자들은 그에 응하는 벌을 받고 격리되었지만, 법의 효력이 미치지 못할 만큼의 죄를 지은 이치현 씨는 그보다 더욱 가혹하게 격리되었습니다. 몰랐다는 항변은 자신의 마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치현 씨는 가혹한 판관이었던 것입니다.
  몇 개월이 흐르자, 원죄의 상처에 다시 든든한 딱지를 붙인 사람들은 그 사건을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치현 씨 자신만은 2년이 지나도 인간으로서 자신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당신도 아는 사실처럼 그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신문의 구석진 부분까지 읽는 분이고 또 그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셨다면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당신은 이치현 씨의 의문이 불필요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고 생각하면 일곱 번째 파일을, 그렇지 않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십시오.
(본격적인 서비스에 대한 시료를 보여드립니다. 암호는 ‘처방2’입니다)  

file 7. PW : 처방 2
              (본격적인 서비스를 원하시면 en-human 메뉴로 바로 가셔도 됩니다.)
이치현 씨는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서비스를 포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와 면담을 시도했습니다. 이치현 씨는 지쳐있었으나 차분히 우리의 마지막 서비스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치현 씨, 그 광고의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워터로드 프롬 구시엔(Water Road from GuXian)’에 있었던 광고 말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의 죽음에 대한 소설 말입니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완전히 맞는 기억은 아닙니다. 그것은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
“우리는 그 동안 그 소설의 원본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여태까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유도 원본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그것을 입수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체 내용은 벌써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좀더 정확한 정보를 드리기 위해 원본을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전, … 피곤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소설은 네안데르탈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설의 제목은 ”다스 엑스페리멘트(Das Experiment), 우리말로는 실험 정도가 되겠군요. 마리 솅케라는 독일작가의 단편인데, 유명한 작가는 아닌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치현 씨께서 보았던 부분은 이 단편의 마지막 부분이었습니다.“
“무슨 얘기였죠?”
“부제가 ‘최후의 살인’인데, 실험이라는 제목이 왜 따로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강의 줄거리를 보면 최후의 살인이라는 것으로 충분해 보이던데……. 어쨌든 좀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배경부터가 말이 생기기 이전인 50만년 전의 이야기라니까요.”
“네안데르탈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아, 예. 그렇습니다. 50만 년 전에 어떤 종류의 인간이 살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인간이 원숭이에 가까웠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그“입니다. 이치현 씨께서 읽었던 부분을 보면 마지막에 죽는 인물이지요. ”그“는 원래 몸이 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냥도 갈 수 없고 늘 동굴에서 소일을 했죠. 그는 매일 동굴에 그려진 말이나 고래의 그림을 보면서 약한 자신을 부끄러워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 사이에 그는 다른 사람보다 빨리 죽을 운명이라고 인식되었던 것이지요. 어쨌든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관대한 이웃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뒤엉켜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있었죠. 어느 날, 그의 머리 속에 갑자기 뭔가가 떠오릅니다. 그때 그는 동굴 벽에 그려진 말 그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리고 싶었지만 손재주가 없어 그릴 수는 없었습니다. 실망한 그가 말 그림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서 뭔가가 떠오릅니다.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는 번개가 칠 때처럼 놀랍고 두려워 몸을 납작 엎드렸죠. 그런데 그 소리가 그의 마음에서부터 온 몸을 한 바퀴 휘돌더니 입 밖으로 나가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북받치는 감정을 느끼며 입을 엽니다. 그러자 그의 존재를 뒤흔들었던 그것이 소리로 형태를 이루며 동굴의 공기 속으로 빨려 나옵니다. 그는 놀라운 눈으로 그 소리를 봅니다. 그가 본 것은 적황색 말이 틀림없었습니다. 그가 조금 전까지 그리려했던 잘 생긴 말이 빛나는 갈기를 휘날리며 동굴의 공기 속으로 거침없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의 마지막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숨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말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 번 그 놀라운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이번에는 동굴 속에 남아있었던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그 소리를 듣습니다. 비명이나 감탄이 아닌 그의 목소리에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에게 다가갑니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가리킵니다. 그는 다시금 그 아름답고 튼튼한 말을 본 것입니다. 이번에는 말의 숨소리까지 들려왔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놀라움도 그 못지 않게 큰 것이었죠. 그들은 동굴에 그려진 말이 살아있는 듯 윤기가 흐른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로서는 이해가 안되지만, 작가는 그것이 ”말“이라는 의미의 최초의 단어였다고 설명합니다. 작가 자신도 그 말을 모르지만, 독일어로 번역하면 ”말“이라는 의미라고 했다는군요. 어쨌든 그는 이렇게 입으로 사물을 그리는 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동굴 속의 사람들이 전부 그의 말을 따라합니다. 그가 입을 열어 소리를 내면 그 사물은 좀더 생기에 넘칩니다. 예를 들어 사과는 좀더 달콤해지고 꿀은 더 향기롭지요. 눈 깜짝할 사이에 동굴 안은 말로 가득합니다. 사냥에서 돌아온 친구들도 그의 말에 놀라움을 느낍니다. 그는 이제 사물 뿐 아니라 그 친구들에게도 이름을 붙여줍니다. 친구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하며 소리를 내면 그것이 그의 이름이 되는 것이지요. 그에게서 말을 받은 친구들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듭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 친구들은 여태까지 다른 사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좀더 생생해진 모습으로 일어납니다. 그들은 왠지 몸집이 작아진 듯 보이지만 좀더 활력 있고 눈도 더 반짝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놀라운 것들을 만들어 사냥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직 말을 받지 못한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서 말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우두머리를 맡아달라고 말합니다. 마음 착한 그는 동굴 안의 모든 사람에게 말을 줍니다. 모든 사람이 말을 얻게 된 후, 그들이 사는 동굴 주위에서 퍼져 나온 말들은 온 산에 메아리칩니다. 하지만 우두머리인 그는 이상한 것을 느낍니다. 그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골똘히 생각한 그는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만이 말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지요. 여태까지 말을 준 사람은 그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도 말을 주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표현하는 아주 긴, 거의 자신의 키만한 길이로 말을 만들어 자신에게 줍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는 자신의 맞은편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놀란 그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합니다. 그것은 어제 그가 길게 읊었던 자신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혼란스러워집니다. 그와 똑같이 생긴 긴 이름을 가진 그가 그에게 이름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어제 그가 스스로에게 준 말은 이미 다른 것의 이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새로운 그는 고개를 젓습니다. 그는 친구들을 부릅니다. 친구들은 놀라지도 않고 두 사람의 우두머리를 봅니다. 새로운 그가 물어봅니다. ‘누가 너희의 우두머리지?’ 친구들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이름을 준 그 존재.’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그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새로운 그가 다시 묻습니다. ‘우두머리의 이름을 말해보라.’ 한 친구가 그가 알려준 바 없는 그의 이름을 하나 말합니다. ‘산들거리는 바람 같은’ 새로운 그가 말합니다. ‘그것은 나의 것이다.’ 다른 친구가 말합니다. ‘순처럼 약한’ ‘그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역시 새로운 그가 말합니다. 해가 질 때까지 종족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은 전부 새로운 그의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이 읊어지는 모든 이름이 자신의 것임을 선언하는 동안, 그는 침묵합니다. ……. 그 다음부터는 이치현 씨께서 읽은 그대로입니다. ”
이치현 씨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처방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원본을 제공하였다면 더 완벽했겠지만, 우리는 이치현 씨의 치료의지에 희망을 걸었던 것이지요.
  저희의 첫 번째 처방이 실패했던 것은 이치현 씨가 자신의 윤리라는 것에 대해 심한 회의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왜 나인가?’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고, 억울함을 느낀다는 것에 다시 한 번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자신을 실패한 인간이라고 규정하고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를 괴롭혔던 윤리라는 것 자체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싶었습니다. 이치현 씨 스스로 느끼고 있는 존재의 위기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치현 씨는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정리를 하더군요. 자신은 타인의 말로 집을 짓다가 들킨 도둑 같은 신세였다고 했습니다.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집을 순식간에 허물어뜨렸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잃고 빈터에 앉아 죽음으로 치닫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절박함이 우리를 찾게 한 것입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다행히 그는 온전한 자신의 것인 주춧돌까지 내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회복이 되었지요.      
                (자세한 치료 절차를 알고 싶으신 분은 method를 클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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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함께 하기로 결론을 내리신 당신께 축하의 마음을 전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과정은 죽음입니다. 지금까지의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사망하게 됩니다. (상황에 가장 걸맞은 그럴듯한 죽음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이전의 주민등록번호는 말소되며 가족과의 관계도 단절이 됩니다. 그것이 이 서비스의 가장 취약한 부분임을 알려드립니다. 하지만 원하시면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당신의 가족이나 연인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새로운 당신으로서 말입니다. 당신이 여태까지 쌓아온 사회적 경력과 재정 상태는 올바른 평가를 거쳐 비슷한 가치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성형수술이 필수적이지만 그것을 꺼리실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료진보다도 유능한 의료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타인의 외모 속에 감춰진 스스로에게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정일 뿐 다른 부작용은 없습니다. 원하시면 새로운 성(性)을 선택하실 수도 있으나 이 서비스를 받는 분은 거의 없다는 것을 참고로 알려드립니다.
이치현 씨의 예를 들자면 그는 자신의 출생 년도를 3년 앞으로 설정한 뒤 주민등록증과 호적증명, 병적증명원, 운전면허증, 그리고 새로운 여권을 발급 받았습니다. 본인의 희망에 따라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본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사람입니다. 그의 자살 이후-이치현 씨의 경우 독극물에 의한 사망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정된 시간에 그를 병원으로 옮겼고, 우리 기관과 연계된 의사에 의해 사망증명서가 발급되었습니다. 이치현 씨의 혈액형은 원래 B형이었지만 본인의 희망으로 O형으로 혈액형을 바꾸었고, 각종 증명을 위해 다른 사체(死體)에서 추출한 지문을 이식과 홍채 성형을 시술 받았습니다.(앞으로 정맥 인중과 목소리 감별 시스템이 상용화되면 신기술 도입이 불가피하므로 서비스 비용이 좀 더 상승될 것입니다. 그 전에 서비스를 받으시는 편이 당신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하지만 서비스를 받은 뒤 우리는 그에게 해외 취업을 권했습니다.
이곳에서 유유히 살아가도 괜찮지만 달라진 모습에 자기 자신이 적응하는, 다시 말하면 새로운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자궁(子宮)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그의 포트폴리오는 우수하며 외국어 능력도 뛰어나지요. 지금 그는 이전의 연인이었던 모 배우와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광고사진을 찍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큰 부작용이라면 바로 그 연인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치현 씨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치현 씨가 그녀와 결합한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만, 그는 또한 그녀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기도 합니다. 이전의 그가 자살한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이치현 씨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것에 대한 질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리 치료사가 이전의 그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의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될 수 있다면 이전의 관계들을 청산하실 것을 당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이제 우리의 회원 서비스 메뉴 중 오리엔테이션이 끝났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상담 전입니다만, 다시 한 번 당신을 괴롭히는 위기감으로부터 결별하기를 권합니다. 당신이 성인이 되고자 하지 않는 한 당신의 위기감은 불필요합니다. 또 당신이 순교한다 해도 아무도 그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갈 곳은 결국 인간들 사이이며, 대다수의 인간은 자신들이 존재에 관해 고민할 만큼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당신의 고민을 보상해주지 않습니다. 좀더 대중적이 되십시오. 계속 살아가기 위한 ‘사람됨’은 간단하게 증명될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지문과 사진, 주민등록번호와 학력과 경력, 그리고 소득세 납입증 정도입니다. 전생(前生)은 사망확인서와 호적상의 붉은 사인펜 줄로 간단히 지워집니다. 믿으십시오. 당신은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무수히 많은 인간 종(種)의 한 개체일 뿐인 당신이 느끼는 위기감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다시 ‘사람’ 속으로 돌아가 웃고 떠들고 잊고 즐기십시오.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비용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ENTER

채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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