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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별똥별

2012.01.30 18:4101.30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이것들아!”
서울의 어느 한산한 거리에 죽 늘어선 포장마차들. 그것들 중 하나에서 조금 두꺼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울에 이젠 몇 남지 않은 옥탑방에 월 90만원씩 내며 생활하고 있는 35세, 처럼 보이는 40세 김동아. 키는 180cm, 라고 주장. 체중은 75kg. 요리를 하려면 앞머리가 거추장스럽기 때문에 포니테일을 하고 있고 그런 주제에 수염은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다. 동아(동네아저씨) 주제에 얼굴이 반반하기 씩이나 하다. 좋아하는 과자는 초콜릿이 묻어 있는 막대과자 빼로로.





갓 불혹의 나이를 넘긴 그의 목소리는 저번해보다 눈에 띄게 작아져버렸다.
“어이, 난 아직 쌩쌩해! 왜 내레이션 따위가 있는 거야? 이봐, 작가. 시시콜콜한 작품 하나하나에 애니메이션화의 야망을 심지 말라고! 이딴 걸 누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주겠냐!”





뭐, 각설하고. 철없는데 힘까지 없어진 불혹의 동아는 손님은 왕이라는 포장마차의 규칙을 깨고 안주 투정하는 손님들에게 화를 내고 있다. 그렇지만 손님들은 나가진 않는다. 그의 포장마차의 안주 값이 다른 곳보다 1/2정도 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포장마차의 손님들은 대개 단골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지금 그와 말다툼하고 있는 사람들도 3년 째 단골들이다.





몇 번의 말다툼과 웃음이 이어지며 몇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다. 손님들은 모두 나가고 주인만 남았다. 주인이 빼로로를 입에 물고서 가게를 정리하려는데 문이 펄럭이며 여자 손님이 들어왔다. 그것도 왠지 낯이 익는 얼굴이.





“아 죄송해요. 정리할 시간이었나요?”
자세히 보니 요새 여자 농구에서 활약하고 있는 왕빛나 선수였다. 170cm라는 농구선수치고 크지 않은 키를 가지고 있으나 특유의 3점 슛으로 매 경기마다 점수의 반을 득점하는 스타선수. 동아는 그런 그녀의 아름다운 3점 슛 폼에 한눈에 반해 팬이 된 상태였다. 랄까 왕빛나 선수는 얼굴 역시 스타급이기에 동아의 변명은 꼴사납기까지 하다. 게다가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 그냥 불혹에 미혼이라는 처절한 상황에서 기어 올라온 흑심이라고 밖에.
“노골적으로 나를 까고 있어, 이 망할 내레이터!”





“솔직히 닫을 요량이었지만 왕빛나 선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퇴근시간을 미루죠.”
“와 진짜 감사해요. 국수 되나요?”
“예? 탄수화물이랑 물 둘 다 운동에 영향 주지 않나요?”
“네. 그렇지만 내일부터 휴식기간이거든요, 3일간.”
그러니까 괜찮아요. 하고 덧붙이는 그녀. 동아는 의아해 했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뭐 별수 있나 라며 국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늦은 시간에 국수가 될 리가 만무하지만 흑심이 김동아를 무리하게 만든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왕빛나 선수는 온도도 확인 하지 않고 시식을 서둘렀다. 하지만 나이를 헛먹지 않은 듯 동아는 미리 국수를 뜨겁지만 혀가 대이진 않을 정도로 온도를 맞혀 두었다. 그런 자신이 대견스럽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아였다.
“어이, 어이! 뭐야 그 표현은! 내가 나이를 헛먹어 보인단 거냐?”
양심은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린 듯.





“우와, 되게 맛있어요! 왜 여태까지 이런 가게를 몰랐지?”
“훈련이 이 시간에 끝난 거예요?”
다른 단골들에게 하는 립서비스와는 사뭇 다른 말투로 김동아는 왕빛나 선수에게 흑심, 아니 사심을 들어냈다.
“똑같은 말로 수정하지 마!”





“네. 아, 그 훈련시간 때문에 부탁이 있는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그녀의 질문에 마치 간이라도 내줄 것처럼 동아는 무슨 부탁인지 물어봤다.





“매달 이 날에는 좀 더 늦게까지 가게를 열어두시면 안될까요? 부탁이에요. 드릴 건 없지만 뭔가 올 때 사오라든가 하는 심부름이라도 해드릴게요. 게다가 손님은 왕이라고들 하잖아요. 아저씨 국수가 너무 맛있어서 그래요.”





그녀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동아는 흔쾌히 승낙했다. 왕빛나 선수의 팬인 동아에게 이 부탁은 오히려 자신이 하고 싶을만한 것이었기 때문인데다 젊은 여자, 그것도 미인에게 부탁을 받는데 면역성이 제로인 동아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왕빛나 선수는 소녀처럼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동아는 보이지도 않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돈은 줄 테니 빼로로를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그 뒤로 빛나는 매달 그 산뜻한 미소를 띄우며 빼로로를 들고서 동아의 포장마차에 들렀고 때때로 2주 만에 갑작스런 휴식기간이 생겼다며 정리하기 전에 서둘러 달려왔다면서 국수를 먹고 가기도 했다. 정기 단골이 된 빛나는 동아에게 경어 사용 중지와 이름으로 불러 줄 것을 부탁했고 역시 동아에게 큰 이익이었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승낙, 실행했다. 속물.
“이젠 딴죽 걸기도 지쳤어!”





둘은 점점 친해져서
“아저씨. 결혼 안 했어요?”
“그래, 미혼이야. 그러니까 아저씨 말고 오빠라고 부르는 건 어때?”
“전 세계의 오빠들은 포장마차 주인을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포장마차의 주인을 하는 순간부터 아저씬 오빠가 될 수 없다구요. 게다가 오빠들은 빼로로를 그렇게 담배 물고 있듯 물고 있지 않아요.”
“하하하, 뭐야 그건.”
같은 대화도 오갔다.





하루는 그녀가 눈꺼풀을 적신 채 가게로 들어왔다. 나이를 뒷구멍으로 먹지 않은 김동아는 잠자코 국수를 낼 뿐이었다.
“제대로 된 곳으로 나이 먹게 해줘!”
“소주도 부탁해요, 아저씨.”





동아는 놀랬다. 젖어있는 음성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놀랐지만 그녀가 술을 달라고 했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운동선수에게 술을 내주는 게 가당키나 하겠느냐마는 동아는 팬이지 코치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그는 포장마차집 주인이었다.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소주잔을 그녀 앞에 내놓았다. 빛나 선수는 그대로 소주 몇 잔을 꺾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코치한테 까였어요. 내가 요새 잘나간다고 연습을 대충했다면서요. 근데요! 저 진짜 그런 거 신경 안 쓰거든요? 그냥, 그냥 농구가 하고 싶어서 농구하는 거뿐인데. 진짠데. 혼나는 건 익숙하니까 괜찮은데. 흑, 그 말은 도저히... 못 참겠더라구요.”





빛나 선수는 그대로 몇 분간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동아는 그저 그런 빛나 선수를 울음이 그칠 때까지 지켜봐주었다.
“아저씨. 있잖아요. 나, 농구가 너무, 너무 너무 좋아요. 히.”
“그러냐.”
농구가 너무 너무 좋다는 빛나 선수를 보며 동아는 살며시 웃어주었다.





다음 해, 올림픽이 있었다. 올림픽에서도 빛나 선수는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선보였고 시상식 때 외국의 올림픽 경기장에 애국가를 울렸다.





그 날, 바로 왕빛나 선수의 인터뷰 기사가 떴다. 금메달을 딴 심정은 어떤지, 지금의 인기를 실감하고 있는지 등 여러 가지 문답이 있었지만 유독 동아의 눈길을 끈 것은 그녀가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그 계기는 빛나 선수처럼 귀여웠다.





“수업시간에 농구 자유투를 넣는 시험이 있었는데 잘하고 싶어서 혼자서 열심히 연습을 했어요. 시험은 당연히 우수한 성적을 거뒀죠. 그러다가 농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다른 기술을 연마도 하고 경기도 하게 됐는데, 아, 이 경기가 지금의 3점 슛을 낳았어요. 농구를 좋아하는 또래 여자애들은 없었고 그래서 남자애들과 경기를 해야 했는데 리바운드 싸움에서 도저히 힘으로 이길 수 없더라구요. 그래서 3점 슛만 죽어라 연습했죠. 그 때부터 실력을 쌓아서 지금의 3점 슛을 갖게 된 거에요.”





동아는 이 기사를 보며 왠지 감상에 젖어 들었다.





그녀의 입국 당일. 동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에이, 우리 사이에 마중도 못 나와요?”
“남자 친구가 가면 기자들이 더 죽어라 달려들 거 아냐.”
“하하, 말은 잘해요. 내일 가게로 갈게요.”
“기다릴게.”





귀국하고 하루가 지나도 질려할 줄 모르는 기자들에게 혹사당해서 인지 그녀는 새벽 2시가 돼서야 가게로 왔다. 스타선수이긴 하지만 빛나는 젊었다. 자신의 활약상을 양껏 자랑하고 싶어 했지만, 매스컴은 그 상대가 되기엔 조금 뭐했다. 그런 사실을 어째선지 알고 있는 동아는 국수를 내놓고 밤새도록 그녀의 자랑을 들어줬다.





그녀는 그만한 실력에 외모까지 뛰어났음에도 여느 선수들과 달리 광고를 하나도 찍지 않았다. 동아가 그 이유를 물어보자
“나는 농구선수지 연예인이 아니니까요.”
라며 가슴을 피며 답했다. 동아는 살며시 웃어주었다.
“에헤헤, 좀 재수 없었나요?”
가슴을 피며 당당하게 말해 놓곤 끝내 눈치를 슬쩍 보는 빛나. 동아는 그녀에게 멋있다고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저씬 다른 포장마차 주인들하고 좀 다른 것 같아요. 뭐랄까. 음, 그래. 물이랑 탄수화물이 운동에 지장 가는 걸 안다거나 내 자랑 들어 줄때 받아 주는 게 이상하리만치 너무 자연스러워요. 꼭 운동선수 같다니까요. 흠, 그러고 보니 몸도 탄탄한 것 같아요.”
“내 몸이 탄탄한 걸 이제야 알았단 말야?”
동아는 어울리지 않게 눈을 내리 깔고 슬픈 눈을 하더니 펜싱을 했었다고 고백했다. 빛나 선수가 반가워하며 대단하다고 하자
“대단할 건 없어. 별로 잘하지도 못했으니까.”
라고 말하며 젖은 미소를 보냈다. 그녀가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동아는 다시 활기를 띄고 웃으며 속으로 이 빛나는 선수는 더욱 더 빛나길 빌었다.





그녀는 더 바빠져서 포장마차에 들르지 못하게 돼버렸지만 그의 소망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빛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된 것은 잠시 뿐. 스타 선수는 어느 때를 기점으로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질 기미를 보였다. 그녀가 갑자기 선수 활동을 잠시 쉬겠다고 공표했다.





올림픽이 끝난 지 반년이 되어갈 때에 떨어지는 빛이 포장마차를 들어섰다. 더 이상 빛의 얼굴에는 웃음이 띄어 있지 않았다. 그저 힘없이 여느 때처럼 국수를 주문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동아는 우울해졌지만 그는 그렇게 된 경위를 물을 자격이 없었기에 여느 때처럼 국수를 내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일전에 코치에게 까였던 때처럼 소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왠지 매일 만지는 소주병이 갑자기 얼음이라도 잡은 듯 너무 차가움을 느끼는 동아였다.





그녀는 국수는 내버려두고 묵묵히 소주만을 목뒤로 넘겼다. 그리고 눈으로는 마신 것을 곧바로 쏟아내었다. 얼마 안 있어 입이 열리며 젖어 있는 걸 넘어서 질척한 것들을 내놓았다.
“아버지가 암에 걸리셨어요. 안 그래도 당뇨에 고혈압까지 있으셔서 약값이 꽤 되었는데 암까지 걸리시니까 연금으로는 감당이 안되더라구요. 게다가 하나 있는 남동생이 대학에 다니고 있거든요. 원래 있던 빚에 고액의 병원비까지. 운동할 땐 돈 걱정은 말라며 활짝 웃어주시던 엄마였는데. 그 엄마가... 살려 달래더라구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팔로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자기 팔을 피가 나도록 꽉 쥐고는 조용히 흐느꼈다. 동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지켜봐 줄뿐.
“아저씨. 나 농구가 너무, 너무 좋아요.”
“그러냐.”
동아는 농구가 너무 좋다는 그녀를 보며 슬프게 웃어주었다. 그날따라, 밤이 너무 긴 동아였다.





다음 날, 동아는 펜싱선수시절 지인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해서 요즈음 그녀의 소식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매스컴에서는 연습 중 부상을 당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얘기했지만 어제 그녀를 봤을 때 도저히 부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기에 그는 부탁한 자료를 받고도 스멀스멀 뇌에 펴오르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현실이라는 잔혹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악질 스폰서가 붙었다.





그녀에게 악질 스폰서가 붙음을 알아 낸지 몇 달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포장마차를 하고 있고 그녀는 여전히 부상을 치료한다는 명목 하에 선수 생활을 쉬고 있었다. 변한 게 있다면 그녀가 더 이상 포장마차를 찾지 않는 다는 것 정도. 동아는 그녀가 오지 않아도 다른 단골들에겐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단지 포장마차를 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역시 프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울적한 마음을 없앨 길은 없었기에 매일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는 것이 일상이 됐다.





그런 멈춰버린 날들의 연속이 깨어진 날이 왔다. 포장마차의 문이 흔들리며 그녀가 들어온 것이다. 다만 그녀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고는 망가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빼로로를 상자채로 사들고 와 국수만을 시키고 조용히 식사를 했다. 동아는 그런 그녀를 보곤 뭔가 뚝하고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우와, 맛있어요. 역시 스테이크 보다 아저씨 국수가 훨씬 낫다니까. 하하”
동아의 국수는 언제나 그대로였다. 동아의 포장마차 역시 그대로였고 동아가 좋아하는 과자가 초콜릿 묻힌 막대과자란 것도 그대로였다. 변한 건 그녀뿐.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동아의 포장마차와는 달리 그녀는 모든 게 변해버렸다.





“아저씨. 나 농구가 너무, 좋아요.”
“그러냐.”
동아는 농구가 좋다는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마지막엔 그도 변해버린 것이다.





며칠 뒤, 왕빛나 선수가 투병중인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급격하게 우울해져 충동적으로 한 빌딩 옥상에서 투신자살했다는 뉴스가 났다. 5천만 가까이 되는 사람들은 그녀가 충동적으로 자살했다는 걸 알게 됐고 50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만이 그녀가 드디어 자살했다는 걸 알게 됐다.





동아는 그녀의 장례식장에 찾아가 그녀와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의 아버지를 향해 이배를 올렸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를 떠나 장례식장 밖으로 서둘러 빠져 나왔다. 장례식장 밖에는 원 네 개가 꿰어진 문양을 하고 있는 검은 차 세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 대의 차중 가운데 차의 문이 열리더니 평범한 50대 샐러리맨 같이 생긴 사람이 넥타이를 고쳐 매며 차에서 내렸다. 그는 잠시 동아와 눈을 마주치더니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사실 내릴 때부터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불쾌한 것은 동아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동아를 더 화가 나게 했다. 그 모습으로 추정해보면 분명 그가 바로 빛나에게 붙은 악질 스폰서.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조르고 싶은 동아였지만 지금은 경호원이 너무 많아 포기하고 이만 뿌득 뿌득 갈며 자신의 옥탑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그녀의 동생이 처절하게 우는 것이 눈에 밟혔다. 망가져버린 그녀의 표정과 순진하게 웃고 있는 영정 사진 속의 그녀도 눈앞에 아른 거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동아를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은 불쾌한 표정으로 장례식장에 들르던 악질 스폰서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옥탑방에 돌아온 그는 뭔가 결심한 듯 면도를 하고 이불사이에 숨겨둔 가늘고 기다란 상자를 꺼내었다.





그가 상자를 열자, 그 안을 지키고 있던 펜싱 검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펜싱 검을 꺼내서 끝에 달린 둥그런 부분을 칼로 잘라내고 끝을 갈았다. 상대방 옷에 달린 센서를 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피부를 뚫기 위해서.





조사는 마쳤다. 그녀의 스폰서를 자처했던 모 그룹 회장의 별장 주소. 그 회장이 주기적으로 그 별장을 들리는 날짜. 그리고 그 별장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의 수까지.





우연히 그녀의 장례식 마지막 날과 회장이 별장에 들리는 날은 같았다.





“최고의 타이밍이다.”
그는 외국의 고 저택 같은 별장에 들어서기 전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른쪽 주머니엔 막대과자 한 갑을 왼쪽 주머니엔 수면제 두 통을 달고서 별장의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위에 인터폰에 선글라스 낀 남자의 얼굴이 나오며 누구냐고 물어왔다. 동아는 그대로 주먹으로 그 화면을 부셔버리고 대문을 기어올라 넘었다.





“그 사람을 죽여줄래요?”





그는 대문을 향하며 마지막으로 빛나 선수가 찾아왔을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저씨,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말해봐.”
“나한테 농구를 뺏어간 사람. 그 사람을 죽여줄래요? 부탁드려요.”
“그래.”





그 때는 사실 무심히 한 말이었는데 지금은 그 사람의 별장에 와 있는 자신을 생각하자 동아는 저절로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초대받은 손님은 아니기에 그는 대문에 도착해서도 창문을 발로 깨트리며 들어왔다. 쨍그랑 하는 소리에 달려오던 덩치 큰 경호원 셋이 그를 발견하고 덤벼들자 그는 옥탑방에서부터 들고 온 펜싱 검으로 제일 앞의 거구의 이마를 꿰뚫었다. 얇고 날카로운 날은 거구의 이마를 소리 없이 방문하며 빨간 것을 뒤집어쓰고 총을 꺼내는 다음 경호원의 관자놀이를 마저 방문했다.





그는 이미 이마에 바람구멍이 난 경호원을 남은 경호원에게 집어 던졌다. 집어 던져진 경호원은 총을 꺼내고 있는 동료에게 날아가 그를 쓰러뜨렸고 펜싱 검의 머리는 다시 한 번 이미 방문했던 곳을 방문했다. 단, 깊숙이 들어가 남은 경호원의 명치까지 공격했다.





순식간에 방바닥은 빨갛게 물들었다.





색칠 공부를 끝낸 그는 처음 들어간 방에서 나와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는 방이 여럿 있었는데 계단을 발견하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살며시 열어 뒀다. 회장이 어디에 있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제기랄, 한 놈 살려놨어야 하는 건데.”





잠시 후, 정찰하러 한 명의 경호원이 계단을 내려왔다. 동아는 일부러 방에 있는 화분을 떨어뜨려 소리를 내곤 문 뒤로 숨었다. 역시 잘 훈련된 경호원이라 그런지 즉각 반응해서 자세를 낮추고 천천히 동아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총구만 살며시 방문을 통과 시키려는데 그것이 실수였다.





동아는 곧바로 총구보다 더 바깥쪽으로 펜싱 검을 찔러 넣고는 경호원이 소리 지를 틈도 없이 목에 송곳을 꽂았다 뺐다. 흔히 후두암 환자들이 호흡을 위해 구멍을 내는 부위였다. 동아는 손을 쉬지 않고 볼에 펜싱 검을 뇌를 향해 살짝 꽂아 넣은 후 서서히 집어넣었다.





검 끝이 입천장에 닿을 때쯤
“목으로 숨 쉬는 거 적응 안 되지? 그러니까 빨리 끝내자구. 회장님은 2층에 계시나? 맞으면 눈을 깜빡이고 틀리면 그냥 감아라.”
갑작스러운 위협에 경호원은 미친 듯이 눈을 깜빡였다. 순간적으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동아는 그대로 펜싱 검을 끝까지 쑤셔 넣었다.





경호원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다. 동아는 회장님을 뵙기 위해 경호원들이 입고 있던 정장중 하나를 빌려 입고는 계단을 올랐다. 역시 위층에 한명이 더 대기하고 있었는지 총을 거두는 소리가 났다. 정장을 본 것일 것이다.





총을 거두는 소리를 신호로 동아는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계단을 두 걸음에 6칸 정도 오르고 뛰어서 계단 난간에 대기하고 있는 경호원의 명치 펜싱 검으로 찌르면서 난간을 잡았다.





동아는 경호원의 시체가 난간에 걸칠 수 있도록 펜싱 검을 천천히 빼면서 위층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위층으로 기어올랐다. 2층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이제 문 앞에 회장님이 계시는 것이다.





조사했을 때 경호원의 수는 모두 7명. 그러니까 저 문 넘어 에는 2명의 경호원이 있다는 얘기다. 그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입고 있는 정장에 젤형 왁스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곧바로 펜싱 검은 문 뒤에 숨기곤 왁스로 난간에 걸쳐 죽어 있는 경호원의 머리를 따라 하고 선글라스를 뺏어 착용한 뒤에 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드러난 방은 침대 주변을 제외하고는 어두웠다. 침입자가 있음에도 이렇게 있다는 것은 상당히 경호원들을 믿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모두 죽어가고 있지만. 두 명의 경호원이 총을 겨누고 있고 50대처럼 보이는 사내가 파자마를 입고침대에 거만하게 걸터앉아선 왠지 낯설지 않은 여자 한 명을 옆에 앉히곤 그 여자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여자의 표정은 마지막으로 봤던 빛나의 표정과 똑같았다.





“이상 무입니다.”
경호원들이 헤어스타일과 선글라스 그리고 정장에 안심하고 총을 거두었다. 회장님은 이제 여자의 엉덩이로 손은 가져가며 경호원들에게 이상 없으면 어서 다들 꺼지라고 명령했다. 동아와 경호원들은 고개를 숙인 다음 방문을 나섰다.





동아는 문을 나서는 직후에 문 뒤에 있는 펜싱 검을 집어 들어 숨겼다. 그리고 마지막 경호원이 문을 닫는 순간 관자놀이를 관통시키고 주머니의 송곳을 꺼내 나머지 한 명의 목을 뚫어버렸다. 즉사할 부상은 아니기 때문에 동아는 연이어 펜싱 검으로 목을 부여잡고 있는 손을 관통해서 목을 다시 뚫었다.





푸쉬하는 소리를 내며 경호원은 벽에 빨간 것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동아는 개의치 않고 문 앞에 쓰러져 있는 경호원을 옆으로 치운 뒤에 문고리를 잡았다.





회장은 나갈 때처럼 여자의 가슴과 엉덩이를 주무르며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동아가 문을 조용히 열었기에 회장은 그가 들어온 지도 모르고 그 짓을 계속하다가 그가 문을 잠그는 소리를 듣고서야 혀 놀리기를 멈췄다.





“무슨 일이야, 노크도 없이. 합당하지 않은 이유라면 죽을 줄 알아.”
“마음에 드실 겁니다. 널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거든.”
“무슨 개소리야. 너, 미쳤어?”
“땡. 틀렸습니다. 미친 건 너다, 이 돼지 새끼야. 아, 네 경호원은 먼저 떠나보냈어. 이건 죽어 있는 사람 걸 벗겨 온 거야.”
동아는 정장을 쥐고는 말했다.





회장은 드디어 상황을 눈치 챘는지 눈알을 돌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총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총은 자신의 입을 동아에게 겨누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동아가 먼저 펜싱 검으로 손등에 구멍을 낸 것이다. 시끄러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별장의 위치는 꽤나 외곽지역이라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동아는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더니 펜싱 검으로 회장의 머리를 때렸다. 검 끝은 살을 뚫을 수 있고 검의 몸은 맞으면 굉장히 아픈 구조였다. 얇은 데다 빠르게 때렸다 빠지는 펜싱 검의 몸은 마치 채찍으로 때리는 것 같은 효과를 냈다. 악 소리가 나며 비명소리가 멈췄다.





“아직 죽기는 일러. 벌써 죽이기엔 왠지 억울해 할 거 같거든. 의뢰인이.”
“씨발, 그게 누군데!”
“왕빛나 선수.”
“그년이 나를 죽여 달라고 그러든? 얼마를 주면서 그러든? 그거 내 돈일거야. 내가 더 줄게. 그냥 가라, 제발.”
“헛소리 작작해라. 지금 안 죽일 테니까. 그런 얘긴 천천히 나누자고.”





그렇게 말하면서 동아는 오른쪽 주머니에서 빼로로를 꺼내서 회장에게 개봉하라며 던졌다. 회장이 손을 떨며 개봉하자 하나를 빼서 받은 다음, 다시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온 빼로로 딱 한 개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상자를 꺼내어 빼로로 한 개를 상자에 넣었다. 그리곤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회장과 여자에게 빼로로를 같이 먹을 것을 권유했다. 동아도 빼로로를 하나 받아먹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왜 빛나 선수가 너를 죽여 달라고 했을까?”
“아마 내가 그 년 꿈을 부숴버려서겠지. 크큭. 고상한척하더니 결국엔 살인청부를 했군.”
“뭘 넘겨짚고 그러냐. 의뢰는 했지만 돈은 안 줬어. 뭐, 됐다. 그건 그렇고 왜 빛나 선수의 꿈을 부쉈는데?”
“질투가 났을 뿐이야. 난 이렇게 돈이 많아도 찾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시간을 많이 들여도 찾을 수 없었는데. 그 년은 겨우 학교에서 내신에도 안 들어가는 시험 잘 치러보려고 연습하다 찾았다니 너무 억울하잖아? 아마 배알 꼴려한 건 나만이 아닐걸? 히히. 그래서 부셔버렸을 뿐이야. 게다가 그 년 꿈을 부수기 전에도 그런 년들의 꿈들을 부숴왔었고. 불공평하잖아. 불공평하니까 공평하게 맞춘 거지.”





“빛나 선수가 너 죽이고 싶어 질만 하네.”





"그년이 이기 적인거야! 너도 뉴스는 보겠지? 나는 우리나라에서 고아원을 가장 많이 세운 사람이라고. 겨우 지 꿈 하나 깨졌다고 나 같은 착한 사람을 죽여 달라고 의뢰하다니, 그년이 진짜 나쁜 년이잖아?"
“이봐, 나쁜 년이니 착한 사람이니 나이도 많이 먹은 녀석이 왜 이래? 동네 얼라들같이. 난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다고 한적 없어. 단지 널 죽이러 왔을 뿐이지. 네가 고아원을 세운 이야기라던가 네가 빛나 선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의 꿈도 부숴왔다는 가는 관심 없어. 난 빛나 선수의 부탁을 받았고 너의 목숨과 그녀와의 약속, 두 개들 가지고 저울질 해봤을 때





그녀와의 약속 쪽이 더 무거웠을 뿐이지.”





“겨우 그거뿐이라고? 말도 안 돼. 아님 네가 그년의 뭐라도 되냐?”
“뭐라고 됐다고 할까, 빛나 선수는 내 포장마차 단골이었거든.”
“포장 뭐? 포장마차? 너 포장마차 하냐? 포장마차 주인이 왜...”
“아, 몰라 몰라 귀찮아. 빼로로도 떨어졌네. 이제 시작하자.”





동아는 회장의 말을 끊어 먹고는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펜싱 검의 몸으로 회장의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회장은 뭐하는 짓이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손으로 머리를 감싸다가도 손가락을 맞고는 치웠다가 다시 감쌌다 가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도망치려고 시도했지만 맞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붕붕 짝짝. 분명 피가 튀기기 시작하는 잔인한 장면인데도 경쾌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회장은 문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했지만 동아가 뒤따라가 손가락을 찌르고 볼을 때리자 고통을 못 이기고 비명을 지르며 다른 곳으로 도망쳐 버린다.





붕붕 짝짝. 회장은 이번엔 의자를 잡고 던지며 동아에게 달려드는 시도를 했다. 동아는 침착하게 회장의 손가락을 찌르고 날아오는 의자를 왼손으로 튕겨 내고는 회장의 배를 걷어 차버렸다. 그리곤 다시 매질을 재개했다.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놈한테는 매질이 최고지.”
“아아악! 어째서 이렇게 까지 하는 거야! 너도 꿈꾸는 동지냐?”
“땡, 나도 너처럼 꿈같은 거 없어. 그냥 포장마차 하다가 단골이 생기면 단골과 이런 저런 얘기나 나누는 포장마차 주인이지. 그래도 나는 좋았다, 그런 생활이. 네가 죽는 이유 네가 내 단골의 마음에 안 들었다는 것뿐이야. 그리고 나도 네가 마음에 안 든다.”





그렇게 몇 시간을 도망치고 추격하고 때리고 맞고 하자 회장은 지쳐버렸다. 동아는 힘드냐고 안부를 묻고는 볼을 때리기 시작했다. 회장은 머리 맞을 때처럼 손으로 막으려고 손을 들었지만 그 손에는 이제 피부라 부를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죽여줘.”
소리를 너무 질러 쉬어버린 목소리로 회장이 부탁했다. 동아도 이제 때릴 만큼 때렸다는 듯이 회장에게 수면제 한 통을 던져줬다. 그러는 와중에도 때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이게 뭐야. 이제 할 만큼 했잖아. 그냥 편하게 해줘. 그 펜싱 검으로 찌르라고.”
“언제부터 내가 네 명령대로 행동했지? 그거 먹으면 30분 뒤엔 정신 잃어. 참고로 말하자면






그걸 먹지 않아도 30분은 흐른다.”






회장은 수면제 통을 쳐다보기만 하다가, 곧 개봉해서 입안에 털털 집어넣고 으득으득 씹어 삼켰다. 동아는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며 하던 일을 마저 했다. 회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을 덜 느끼는 듯하더니 30분이 지나자 축 늘어져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동아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벽에 기대어 왼 주머니에서 남은 수면제 한 통을 꺼내어 입안에 한꺼번에 많은 양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빼로로 하나를 넣어 뒀던 상자를 꺼내들고
“아 써. 역시 빼로로를 남겨두기 잘했네. 뭐





지루하지 않은 인생이었다. 아마도.”
하고는 상자를 열어 빼로로를 입에 물고는 눈이 감기길 기다렸다.





다음 날, 기사가 났다.
“과거 펜싱에서 은메달을 딴 김 모씨가 모 그룹 회장을 살해하고는 자신은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습니다.





살인의 동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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