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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아젠트

2012.10.14 14:2810.14

고전적인 느낌이 강한 카페 내부는 그에 어울리지 않는 댄스음악소리가 요란했다. 어깨와 턱 사이에 핸드폰을 낀 채로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안나는 눈동자만 굴려서 빠르게 빈자리를 찾았다. 이미 모든 자리마다 젊은 남녀가 마주앉아있거나, 홀로 앉아서 서류 위에 펜을 휘갈기는 사람 등으로 공간은 분주했다. 지나칠 정도로 활력이 넘치는 카페는 음악과 사람들이 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다양한 소음을 쏟아냈다.
안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세 잔 주문하고 때마침 자리가 난 창가 흡연석에 흡족한 마음으로 앉았다. 안나가 담배를 꺼내 앞니로 한 개비를 뽑아 물때쯤 재숙과 은진이 들어섰다. 두리번거리는 두 사람을 향해서 안나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가락사이에 끼운 채 손을 흔들었다. “주문해놨어?” “그럼!” “징그럽게도 덥네.”
카운터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은 재숙이 들고 온 커피에 세 사람은 앞 다퉈 시럽을 부었다. “이상하게 단 게 좋아졌어.” “나도 그래 지지배야.” “그럼 그렇지.”
수다를 시작하며 각자 꺼내놓은 하얀 담뱃갑을 은진은 무심결에 벽돌을 쌓듯이 세 겹으로 쌓았다.
은진은 회사에 남아있는 답답한 관료주의적 성향이 자신의 창의성을 가로막는다고 투덜댔다. 다른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재숙은 의상디자인과 관련한 자신만의 새로운 발상을 꺼내어 두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소음 속에서 용케도 재숙의 이야기를 귀담은 두 사람은 그것이 놀라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미술, 음악에서만큼은 겁 없이 덤벼들 수 있지만 자신은 문학적 감성이 취약하다는 안나의 말 또한 두 사람의 공감을 쉽게 얻어냈다.
이젠 이러한 세 사람의 공통점 찾기가 진부해졌다. 아주 자잘한 잔가지 같은 것 빼고는 세 사람의 취향이나 특기, 심지어는 남자를 고르는 이상형 까지도 세 사람은 같은 맥락을 보였다. 쌍둥이처럼 똑같은 외모와 목소리를 내며 함께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웃음가득 푸근한 인상의 뿔테안경을 걸친 남자. 게다가 날렵해 보이는 몸과 수염 한 가닥 남김없이 깨끗하게 면도한 남자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세 사람은 일제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쫓다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는 일이 잦았었다.
같은 지역구의 서로 다른 회사에 몸담고 있지만 세 사람은 같은 직종에 종사했다. 직장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점심시간이면, 세 사람의 수다시간이 이어지는 것은 일상의 소소한 일부였다.
재숙은 지난 주말에 다녀온 점집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같은 부서 친한 언니와 함께 갔었는데 약간 낯설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안나와 은진 두 사람은 역시나 가볍게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안나도 바로 그날에 다른 점집을 다녀왔었고 바로 지난 주 일요일엔 은진 또한 근교 점집을 다녀온 것이다.
단순히 점집을 다녀왔었다는 사실만으론 전혀 호기심을 갖지 못한 두 사람은 그래도 혹시나 하고 재숙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재숙은 손금과 관상 등을 보았지만 은진은 평생사주, 그리고 안나는 들어가자마자 눈매가 범상치 않은 무속인이 콩자루 터진 것처럼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는 것만이 달랐다.
  “쑥스럽게 말이야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만 말없이 손금을 샅샅이 살피는 거야.” “사람 많은데 가지 말라하지?” “화기……그리고 물 수자 조심하라 했어 그치?” “지지배들…… 그냥 니들이 점집차려라.”
이미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두 친구는 재숙의 머릿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듣지도 않은 내용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말이야…… 뭐 너희도 이미 알겠지만 그거…… 있잖아?” “얘 괴상한 영어 단어 말하나본데?” “아~그거?”
재숙이 말하려 하는 그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어단어가 맞았다. 그 미스터리한 영단어는 사주를 본 은진에게도, 기묘한 무속인을 만난 안나에게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안나를 보자마자 물을 조심해라, 사람이 많은 곳은 위험하다, 불도 경계하라고 말했던 무속인은 잠시 턱을 당겨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별안간 A, Z, E, N, T라고 말했다. 안나는 조심스럽게 그게 뭐냐고 물었지만 무속인은 답해주기 어렵다고 했다.
사주를 봤던 은진 또한 재숙과 안나처럼 몇 가지 사항을 알려주고는 ‘대체 아젠트가 뭔지 도통 모르겠구나’하고 역술인이 의아해 했다고 한다.
안나가 물고 있던 빨대를 놓으며 말을 하자 올라가던 커피가 또르르 흘러 내려왔다. “있잖아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일 경우엔, 물론 점괘가 많이 맞아 떨어지긴 하겠지만 점괘 결과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잖아?” “바넘? 맞아, 이건 내 얘기야 하는 거?”
재숙이 거들었다. 이미 오래전서부터 행해지던 혈액형 성격테스트처럼 사람 성격을 딱 네 가지로 매몰차게 분류하던 웃겨죽을 사회상. 혈액형마저 똑같이 A형인 세 사람은 각자 자신이 소심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강박관념을 느꼈다. 은진은 두 사람의 눈을 번갈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적어도 우리는 그런 케케묵은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잖아.”
다시 안나가 이어받았다. “일반적일 수 없는 우리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그건 대체 뭐지? 그 영어단어는 무슨 뜻인 거야?”
재숙이 핸드백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어 문제의 단어를 적어보았다. 세 사람의 머리가 테이블 한가운데로 모였다.
  “AZENT? 정말 이게 뭐야?” “찾아봤는데 아무 뜻도 없어.” “헌데, 우리 세 명 점괘마다 이게 나왔는데 아무도 모른다?”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생각의 가지를 여러 갈래로 뻗어보았으나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점심시간은 거의 끝나가고 수다는 이어지지 않았다. 모두 전전긍긍 엎어져 팔에 얼굴을 묻거나 긴 머리를 풀어 밴드를 다시 묶었다. 재숙은 펜 끝으로 메모지 위의 단어를 콕콕 찌르다가 문득 뭔가가 뇌리를 스치는 것을 찾아냈다.
  “이거…… 어쩌면 말이야.” “모야모야, 뭐 나왔어?” “빨랑 말해봐! 재숙은 펜으로 AZENT에서 N과 T를 제외하고 A Z E에 밑줄을 그었다. 안나와 은진은 아직 재숙이 말하려는 것이 뭔지 알아채지 못했다. 재숙은 글자 사이마다 다시 빗금을 쳤다. 두 명은 답답함에 지쳐갔다.
  “봐, 에이 제트 이. 에이는 안나야. 그리고 제트는 재숙, 마지막 이는 은진. 어때 말 되지 않아?”
안나와 은진은 재숙의 설명을 들으며 글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은진의 반박이 이어졌다.
  “지지배야.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넌 제이 쓰는 거 아니었어?” “제이나 제트나 뭐.”
안나는 어차피 뜻도 없는 단어에, 이것이 한국에 온 이상 한국식 규정을 따르는 게 도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안나의 주장이 미약하지만 나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은 약간 억지스런 감이 남긴 했지만 N과 T를 제외한 AZE의 비밀은 푼 것으로 결정지었다. 점심시간은 끝나고 셋은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

인터넷 뉴스가 무장탈영군인 소식으로 들끓었다. 탈영군인은 부대를 이탈하면서 추격해오는 부대원들에게 실탄을 난사하며 여러 차례 교전을 치렀다. 무자비한 총탄세례에 부대원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두 명이 총상을 입어 위독한 상태라 한다. 탈영군인은 때마침 부대 앞에서 정차 중이던 버스를 탈취해 달아났다.
대략 두 시간 후, 타 지역 또 다른 해군부대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탈영사건이 이어지면서 전군은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이것은 그저 단순한 탈영사건이 아닌 까닭이었다.
탈영한 병사 둘의 신상이 TV뉴스속보와 각종 포털사이트 메인화면을 도배하다시피 오르내렸다.
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두 탈영병의 신변에 대한 최종적인 보고를 받은 국방부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심심찮은 우려의 목소리로만 치부하던 일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퇴근 후에 함께 모여 저녁을 먹던 세 사람은 다른 사람들처럼 탈영병 사건을 도마에 올렸다. “미친 것들…… 둘 다 변심한 애인 때문이라면서?” “불안해, 저런 나약한 사내들한테 나라의 안전을 맡긴다는 건.” “어디 걔들뿐이겠어? 어? 혹시 니들 탈영병 얼굴 알아?”
탈영병에 관한 뉴스는 발생시점이나 부대 명, 소지한 무기와 탈영사유 등을 대대적으로 내보냈으나 세 사람은 탈영사건이 자신들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태도로써 너무나 쉽게 생각했으므로 탈영병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지는 않았었다. 그렇지만 정황상 뭔가 의심이 드는 것이 있었다. 셋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을 뒤지며 탈영병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 그랬네. 얘들도 복제였어.” “그렇다면 큰일이잖아?” “그러니까 군이 저 난리지. 다음뉴스 봐봐. 야! 하나 또 탈영했대.”
군은 탈영병들과 같은 날에 태어난 복제인간 군인들의 목록을 찾아 일제히 처형시키기 위해 이미 혈안이 되어있었다. 두 명이 탈영한 뒤에 빠른 절차를 통해 나온 결정이었고 이로 인한 색출작업은, 살기 위해 도주하는 또 다른 복제인간 군인들의 목을 조여 왔다.
  “난 이해간다 뭐. 형제들 잘 둔덕에 그냥 얌전히 있어도 죽게 생겼는데 도망이라도 치다 죽어야지 안 그래?”
탈영관련 소식이 급속하게 업데이트되는 인터넷뉴스를 보며 재숙이 말했다. “그래, 적어도 우린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잖아.” “그나저나 다들 어디로 숨어든 거지? 무슨 람보도 아니고…… 포위망 삼엄할 텐데 말이야.”
뉴스마다 앞 다퉈 탈영병 소식을 전해왔다. 처음에 탈영한 두 명중 하나는 곧바로 인근 야산으로 숨어들었고, 하나는 인근 농가로 숨은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색출작전 후에 탈영한 군인은 민간인 승용차를 탈취해서 도심으로 도주하던 중 빗발치는 총알세례를 영화처럼 뚫으며 바리게이트 두 곳을 통과해버렸다고 했다. 만신창이가 된 채 도로를 달리는 탈영병의 승용차는 길 한 복판에서 버려졌고 인근 부대에서 출격한 무장헬기가 탈영병과 승용차를 아예 날려버릴 심산으로 다가오기 전, 탈영병은 마침 주변을 지나는 중국집 배달원의 오토바이를 강제로 세워 배달원을 인질로 삼았다.
군과 경찰력은 보란 듯이 모습을 드러내며 도주하는 탈영병을 사살할 기회를 넘봤으나 궁지에 몰린 쥐가 되어버린 탈영병은 배달원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며 포위망을 뚫었다.
탈영병들의 뉴스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동시에 미처 도주에 실패한 상당수 군인들의 처형 소식도 속속 등장했다. 소식을 접한 해외 주요 언론들은 국방부의 비인도적인 처사에 일제히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으며 복보협(복제인간보호협회)을 중심으로 각 인권단체들은 복제인간 군인들의 처형을 결사반대한다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어느새 어둠이 깔렸다.
대규모 주차장이 들어설 공사장부지의 땅만 다져놓은 곳 덤프트럭 안에서 대기 중이던 김모씨와 잠시 건너온 또 다른 트럭기사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상황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쁜 놈들 같으니 그렇다고 멀쩡한 사람을 그렇게 죽여? 생김새하고 행동이 거의 빤하다고 해도 엄연한 다른 사람인데.” “맞아. 더 말해 뭣해? 유전자에 이미 범죄코드가 꿈틀거린다고 해도 아직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죽이면 너무 성질나잖아? 막말로 뭐 걔들도 우리처럼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핸드폰이 울리자 김모씨는 자신과 외모가 똑같지만 옷만 다르게 입은 동료의 입에 손가락을 들어 막는 시늉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잘 알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맡을 테니 인근 형제들을 더 모아주세요. 그럼요. 당근 빳따지. 결사항전 합니다.”
덤프의 헤드라이트에 불이 들어오고 김모씨는 경적을 길게 울렸다. 그 뒤로 겹겹이 늘어서있던 검은 형체들이 김모씨의 덤프처럼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밝혔다. 흡사 거대한 괴물들이 동굴 속에서 눈을 부릅뜨는 것 같았다. 관광버스와 화물트럭 그리고 굴삭기, 지게차 등 여러 크고 작은 차량들이 요란하게 시동을 걸어댔다. 차량들은 마치 그 옛날 월드컵 거리응원 때처럼 경적소리로 리듬을 타면서 얼마동안 단결력을 모아 사기를 끌어올렸다. 덤프 옆으로 다가온 택시에서 고개를 내민 기사 또한 김모씨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수염이 덥수룩한 김모씨와 달리 말끔하게 면도한 얼굴이었다. 택시기사는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덤프 창문이 열리고 붉은색 확성기가 차창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아-아- 비록 우리하고 다른 모체로 탄생했지만 복제인간으로서 받는 불이익을 생각한다면 우린 어차피 다 같이 한 배를 탄 형제요. 자! 형제를 구출하러 갑시다!”
여기저기서 부릉대는 소음과 경적소리로 소란이 극에 달했다. 헤드라이트의 빛을 받은 먼지들이 구름처럼 피어올랐지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택시 안 TV에서는 도로 상공에서 배달 오토바이에게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탈영병을 추격하는 현재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 되지 않아서 오토바이는 과열되거나 연료가 바닥날 것이다. 아니면 인질과 탈영병이 먼저 지쳐버릴 가능성도 컸다.
같은 채널을 시청중인 또 다른 곳. 하루 일과가 끝나고 다리도 펼 겸 화장실이라도 다녀올 참으로 일어섰던 무속인의 발길이 거실에서 멈췄다. 눈이 침침해서 몇 발 뒤로 물러나려 할 때 한쪽 무릎에서 뚝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여기도 끝났어. 응 봤어. 어쩌겠어? 팔자가 그러한 것을…… 응? 그야 당연한 거잖아? 우리 입장에 남일 같으면 이상하게? 군인한테 마음이 많이 기우네.”
무속인은 통화를 하며 어둠이 내린 툇마루 앞에서 두툼한 슬리퍼에 발을 끼웠다. 그리고 눈앞을 가로지르는 삭아버린 빨랫줄에 얼굴이 걸리지 않도록 숙였다. 바둑이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으나 슬리퍼로 휘저으며 쫓았다. 바둑이는 앞발을 가지런히 바닥에 붙이다가 몸을 탄력적으로 뒤로 빼며 한 번 깡 짖고서 툇마루 밑으로 들어갔다가 무속인의 남은 손이 손잡이 기다란 플라스틱 바가지에 사료를 담아 개밥그릇에 붓자 다시 꼬리를 흔들며 나왔다.
  “그런데 알겠어? 그 아이들, 그 영어단어 말이야. 나도 보이긴 했는데 더 이상은…… 그리고 있잖아? 앞으로 어찌해야 하지? 정작…… 우리 앞날이 제대로 읽히지가 않네. 아우 우스워라.”

도로 바로 옆 미로 같은 논길과 잡초가 무성한 경사진 곳에 탈영병은 오토바이를 눕힌 채 주위를 경계했다. 달려오는 내내 성가시던 헬기의 여전한 소음은 멀어졌다가 이내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지쳐 곤죽이 되어버린 배달원은 탈영병이 언제까지 이성적일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에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최대 한계점까지 식고 불어버린 자장면을 게걸스럽게 먹던 탈영병은 철가방 안에 아직 뜯지 않은 군만두를 꺼내어 배달원에게 건넸다. 말없이 탈영병의 눈치만 살피던 배달원이 먹지 않겠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비닐 까달라고 새끼야.”
역시나 차가운 군만두를 입에 막 넣으려는 찰나, 정신 못 차리게 밝은 빛을 뿜는 서치라이트가 두 사람을 정면으로 비췄다. 동시에 굉음을 내며 달려오던 여러 대 군용트럭이 순식간에 도로를 점거했고, 쏟아져 나온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사격자세를 취한 채 명령을 기다렸다. 탈영병은 빛 때문에 주변 분간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인질을 놓고 투항하라는 확성기 소리가 지축을 흔드는 헬기소음에 더해지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탈영병은 쥐고 있던 군만두를 엉겁결에 배달원의 목에 대었다가 정신을 차리고서 발 옆에 두었던 총을 집어 배달원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투항하라! 너는 완전히 포위됐다!”
돌파구를 찾지 못한 탈영병의 귀에 또 다른 소음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갑작스런 총성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총성 사이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뛰어!”
덤프트럭들을 중심으로 한 육중한 차량들이 군용트럭들을 가로막은 채 버티고 있었다. 탈영병은 우악스런 힘으로 배달원을 잡아끌며 덤프트럭들 틈으로 몸을 숨겼다. 속도가 다소 떨어지지만 나름 최대 속도를 내며 뒤따라온 굴삭기와 지게차들이 위협적으로 돌격하며 빗발치는 총탄 속을 밀고 들어갔다. 군인들의 목표물은 삽시간에 탈영병에서 중장비들로 바뀌었다. 탈영병 구출에 성공한 덤프트럭들이 널따란 교차로의 이점을 살려 서로를 겹겹이 에워싸며 달아날 동작을 취하는 동안 공격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중장비기사들은 군인들을 향해서 불나방처럼 덤벼들다가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탈영병은 처음엔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기꺼이 피를 흘리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동승한 덤프기사 김모씨와의 분노어린 대화를 몇 마디 주고받은 후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헌데 자신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여러 사람을 희생해야 하는 미련한 구출작전을 펴는 이 사람들은 대체 누구이기에…… “우리도 자네 같은 복제인간들이야. 이건 단순히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한 테러가 아니라 복제인간들의 마땅한 인권을 얻어내고자 하는 성전이라 보면 돼.”
탈영병의 눈 아래로 수많은 군인들이 덤프트럭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김모씨는 자신들을 에워싸는 군인들의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정면으로 돌파했다. 마치 이날을 위해 액션영화 속 스턴트맨들의 동작을 충실히 익혀온 듯 노련한 몸동작으로 탈영병의 뒷덜미를 잡아 끌어내림과 동시에 자신 또한 커다란 핸들 밑으로 몸을 숨겼다. 배달원은 별다른 지시가 없어도 알아서 몸을 구부려 숨기고서 이후로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콩이라도 볶는 것처럼 총소리가 요란했고 파열음과 함께 두 사람의 뒤통수로 유리가루가 쏟아졌다. 덤프트럭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현장을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그 뒤로 여러 대가 뒤를 따랐다. 덤프트럭들은 하나같이 독기를 가득품고 경적과 헤드라이트 그리고 속도로써 군인들을 위협하며 달렸다. 탈영병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대담무쌍함의 최고 정점에 있었다. “곧바로 터미널로 직행한다!” 유리가 너덜거리고 바람이 들이치는 휑한 창문 탓에 눈을 있는 대로 찡그린 김모씨가 동료들에게 무전을 날렸다. 뒤따르는 차량들 중 몇 명이서 의기양양함이 묻어있는 응답을 보내왔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였지만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죄다 비슷한 음색들을 가지고 이었다.
대체 어느 곳을 달리고 있는지 당최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덤프트럭들은 기세등등하게 달리며 먼지를 피웠다. 무질서함의 극치를 보이는 그들에겐 차선도 무의미했다. 중앙 분리선을 넘나들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댔다. 현재의 긴급한 상황을 호들갑 떨며 전하는 뉴스를 전혀 접하지 못한 것인지, 맞은편에서 상향등을 번쩍거리며 달려오던 차량 한 대가 차선을 온통 점거한 채 밀고 달려오는 덤프트럭들의 기세에 밀려 논두렁으로 처박혔다. 오랜 시간 고집스럽게 탈영병을 쫓던 헬기는 당연히 선두에 선 덤프트럭의 상단부분을 비췄다. 어느 순간부터 헬기는 한 대가 아니었다.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굉음을 내는 헬기와 그 헬기 주변을 맴돌며 전체 상황을 주시하는 방송국 헬기가 탈영병과 김모씨의 눈에 보였다. “라디오 틀어봐!” 탈영병은 라디오버튼을 누르려 했지만 라디오는 이미 켜져 있었다. 산만함의 극치를 이루는 주변 상황 덕분에 여태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탈영병의 손이 볼륨을 최대한 올리자 격앙된 기자의 목소리가 숨도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김모씨는 뉴스를 들으면서 달리니까 이제야 상황의 심각함과 매력을 실감한다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현재 탈영병일당은 군의 정지명령에 불응하며 도로를 점거한 채 폭주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알 수 없으며 선두차량엔 아직 인질이 타고 있지만 생사는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군은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비상경계체제를 유지하며 길목마다…… 말씀드리는 순간 탈영병일행이 또 한 번, 군의 바리게이트를 뚫고 도주하고 있습니다. 군의 실탄사격으로 사상자가 적잖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선두차량에선 연기가 치솟고 있습니다. 하지만 속도는 조금도 늦출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현재 이곳을 지나는 운전자분들은 절대로 우회하시기 바랍니다.”

시내 중심가 식당에서 저녁밥과 차를 마시면서 두서없는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세 사람은 찻집을 나서자마자, 도심이 여느 때와 같은 활력을 잃었고 그 자리에 불안한 분위기로 가득 차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까닭을 모를 리 없는 세 사람은 또다시 탈영군인들에 대한 수다를 이었다. “걔들 지금 어디에 숨어있는 거야?” “하나는 총 맞았다고 했잖아 아마 죽지 않았겠어?” “그럼 둘은? 먼저 탈영한 애들 말이야.” “모르지 뭐…… 그깟 애인이 뭔데 저리들 목숨 내걸고 뛰쳐나오는 건지.”
재숙의 말을 은진이 가로막으며 말했다. “얘, 아닐 수도 있잖아 언론에서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안나가 거들었다. “하긴 뭐 오래전부터 없는 간첩도 만들어내고, 대통령도 만들고, 또 패션트렌드까지 얼마든지 만들어내는 게 언론인데…… 나도 언제부턴 뉴스보도를 좀 걸러서 보게 되더라고.”
세 사람은 평상시와는 달리 삭막한 느낌이 강한 도심을 걸으며,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심드렁한 시선으로 보았다.
안나가 눈을 반짝이며 두 친구를 보며 말했다. “있잖아. N하고 T가 뭔지 너희들 아직 모르겠지?”  
은진과 재숙은 서로의 눈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안나를 보았다. “잘 봐. A, Z, E는 우리들 이름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탈영군인들 봐봐. 해군! NAVY야.” “피이- 순 억지다.  그럼 T는?” “글쎄……트랜스포머? 탈영병들을 트랜스포머가 다 잡아가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빌딩 유리창을 죄다 깰 기세로 시커먼 군용헬기가 저공비행을 하며 날아들었다. 시내는 온통 비명소리와 갑자기 잠에서 깬 것 같은 자동차 경보기소리 그리고 헬기소리로 순식간에 난리 통이 되어버렸다. 헬기는 점차 고도를 높이며 알아듣기 힘든 방송을 했다.
  “현재 무장 탈영병들이 탄 차량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교전이 불가피하오니 시민 여러분은 동요하지 말고 가까운 대피소나 역과 터미널로 피신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현재……”
온갖 먼지를 일으키며 도심 상공을 맴도는 헬기 탓에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라는 안내방송을 잊고, 눈을 찌푸린 채 모자를 붙들거나 우는 아이들을 달래업고 우왕좌왕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수많은 군인들이 몰려와 호루라기를 불면서 경광봉으로 시민들을 유도했다. 시민들은 빠르게 평정심을 잃고서 군인들의 지시를 따르느라 먼지구덩이 속을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은진일당도 마찬가지로 주변에 속속 등장하는 군인들의 고압적인 지시에 따라 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터미널 내부로 들어선 세 사람은 이미 발을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차 붐비는 사람들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거실에서 울리는 고집스런 벨소리에 참다못한 무속인은 엉덩이를 끌다시피 이동했다. 이놈의 점쟁이년은 왜 잠을 안자고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대는 걸까? “응 왜 안자고?” “난지 어떻게 알았어?” “점쟁이가 그걸 몰라? 근데 왜?” “그럼 맞춰봐- 농담이고, 혹시 터미널 보이지 않아? 그치? 보이지? 군인들도…… 나 택시타고 지금 갈게!”
대략 이십 여분 지나자 허름한 주택가 좁은 골목길을 택시 한 대가 꼬물꼬물 올라왔다. 무속인은 집을 비우는 동안 바둑이 목줄을 채워두려 했지만 바둑이는 무속인의 손을 깨물다가, 머리를 방정맞게 틀어 짖다가 하며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일루와 욘석아.” 무속인은 툇마루 밑을 뒤지다가 가까스로 붙잡은 바둑이 앞다리를 잡아끌어 줄에 묶었다. 작은 방울소리가 울리고 바둑이는 앞다리를 들고 깡충거리며 짖었다. “뭐해! 빨랑 나오잖구”
택시 뒷자리에 앉은 무속인 두 사람은 목적지에 거의 도착하기 전까지 서로 말을 아끼다가 한 사람이 가까스로 입을 열자 물꼬 트이듯이 대화가 이어졌다. “뭘 감추려 들어…… 너랑 나랑 이미 머릿속 훤히 들여다보는 것을.” “어찌한다? 뭐 그게 팔자라면…… 아, 박복한 내 삶이여.”

난데없이 수용인원들 속에 섞인 세 사람. 화장실을 참지 못하겠다고 재숙은 결국 발을 동동 굴렀다. 은진과 안나는 조금만 참아보라고 말리기를 반복하다가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가장 가까운 군인에게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간청을 해야 했다. 입을 야무지게 다문 군인은 처음엔 터미널 내부를 수색 중이므로 보내드릴 수 없다고 하다가 워낙에 재숙이 힘들어하자 셋을 직원용 작은 화장실로 함께 보내며 무전을 통해 어딘가로 내용을 전달했다. 안나와 은진은 재숙을 부축하듯이 받들고서 화장실로 향했다.
차마 여자화장실 내부까지 따라붙지 못한 다른 군인이 화장실 복도에서 멋쩍게 서성이며 세 사람이 빨리 나오기를 기다렸다. 일단 가장 급했던 재숙이 볼일을 보고 남은 두 사람은 밖에서 망을 봐주었다. “아~ 빨리 나가고 싶어. 우리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몰라서 그런 소리 해? 여기가 안전해. 이 지지배야! 홍수난다 빨리 좀 나와!”
두 사람은 기왕 따라온 김에 재숙이 나오면 자기들도 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재숙이 화장실 안에서 물었다. “둘 다 밖에 있는 거야? 바로 앞에?” “응, 빨리나 나오셔.”
재숙은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자신이 비록 사색이 되어 화장실로 끌려왔을지라도 분명히 화장실의 두 칸 중 남은 하나는 ‘사용금지’를 백지에 굵은 매직으로 써 붙여 놓은 것을 또렷이 기억했다. 헌데 그 옆 칸에서 얕은 기침소리를 들은 것이다. “얘들아, 니들도 눌 거지? 나 괜찮으니까 옆 칸으로 들어가.” “야, 거긴 청소도구 잔뜩 들어있을 거거든?”
말을 내뱉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나는 굳게 닫힌 문 위로 비죽이 솟은 대걸레의 플라스틱 손잡이를 확인했다. “못 들어가 너나 빨리 나……”
안나는 눈을 의심했다. 대걸레가 마치 낚시찌에 붕어가 입질하듯이 살짝 움직인 것을 본 것이다. 안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은진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은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문은 안쪽에서 잠겨있었고 안나가 지켜보던 대걸레는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벽에 쿵 소리를 내며 누웠다. 그 소리에 놀란 재숙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안나 또한 지르고, 놀란 은진이 문에서 손을 뗀 순간 누군가가 발로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잠시 후 안나 일행은 직원화장실과 복도로 통하는 중간지점에서 양손을 머리위로 올린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군인들과 탈영병은 셋을 사이에 두고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이 되었다. 탈영병은 험상궂은 얼굴을 풀지 않고, 벽과 인질들을 은폐물로 이용하며 몸을 숨긴 채 군인들을 향해 온갖 고함을 질러댔다.
터미널 유리 바깥으로 군용 트럭들이 속속 도착하며 무장 군인들을 쏟아내는 것이 세 사람의 눈에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탈영병과 대치하는 군인들의 수가 곱절로 늘어났다. 탈영병은 어찌할 방도가 없자 인질 중에 가장 가까이 있던 은진을 잡아 일으켜 팔로 목을 끌어안았다. 터미널 천장 아래, 자세를 낮추고 좁은 통로를 지나는 저격수들이 탈영병의 눈에 들어왔다. 메가폰이 준비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실내에서 너무 가까이 대치한 점 때문인지 누군가가 탈영병을 향해 완전 포위되었으니 순순히 투항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탈영병은 총구를 은진의 목에 누르고서 얼굴은 굳어있었지만 눈만은 주변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차를 대기시켜라! 조금이라도 허튼짓 하면 여자는 목이 달아난다!”
안나와 재숙은 겁에 질린 은진을 올려보았으나 달리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은진 또한 엉켜버린 머릿결 사이로 친구들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군인들 중에 몇이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조금 전까지 투항을 권유하던 군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터미널 바깥에서 귀를 찢는 총성이 터져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터미널 내의 모든 시선이 유리를 깨고 돌진해 들어오는 덤프트럭들로 향했다. 대치중이던 군인들의 총구가 일제히 덤프트럭들에게로 향했다.
굴러온 것이 희한할 정도로 사납게 부서진 김모씨의 덤프트럭 주변으로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오며 군인들을 덮친 다른 덤프트럭 기사들이 차문을 열고 내리다가 무차별적인 총상을 입고 고꾸라졌다. 구석에 몰려있던 시민들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면서 소란은 극에 달했다. 김모씨는 긴급한 와중에도 동승한 탈영병과 배달원을 잡아끌어 내리고, 은진을 인질로 잡은 탈영병에게 양손을 들어 보이며 쏘지 말라고 소리쳤다. 두 탈영병은 별다른 대화가 필요하지 않은 듯 바닥에서 총을 주워 인질극을 이어갔다. 배달원은 재숙과 안나 사이에 틈을 만들고 메추리처럼 파고들더니 양팔을 올려 여인들의 어깨를 감쌌다. 김모씨가 배달원의 어깨를 움켜쥐어 일으키더니 탈영병에게 인계했다. 은진과 마찬가지로 배달원도 탈영병의 확실한 방패막이가 되었다. 탈영병들은 시선을 움직이지 않은 채 김모씨에게 물었다. “작전은 있는 겁니까?” “혹시 외신기자들이 오길 기다린다면 꿈 깨십시오. 그쪽도 이미 우리 편이 아닙니다.”
군인들은 재빠르게 전열을 재정비하고 피투성이가 된 전사자들을 끌어갔다. 진압작전을 지휘하던 목소리가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을 것이라고, 시민의 희생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누군가에게 읊조리듯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무질서하게 자리를 메운 덤프트럭 사이로 이성을 잃고 울어대는 시민들과 통제하기 버거워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연이어 펼쳐졌다. 버스 승강장에 추가로 출동한 군용 트럭들이 또 한 차례 비집고 들어왔다. 그 옆에는 전경의 닭장차가 자리를 터주느라 앞뒤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옆엔 뜬금없이 회색 택시가 꿈틀거리며 멈췄다.
군인과 전경들이 몰려들며 겹으로 포위해 들어오자 탈영병들은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택시에서 내린 무속인 둘은 평소 자주 이용한 탓에 터미널 내부 지리가 어둡지 않았음에도, 쑤셔놓은 벌집과도 같은 터미널에서 얼른 방향을 잡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인질들은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포위망을 좁힌 군인들이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김과 함께 때를 맞춰 수류탄 하나가 또르르 굴러 탈영병 일당 앞에 떨어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수류탄이 절묘하게 똑같은 지점을 교차하더니 조금 더 가까이 굴러오다가 멈췄다.
긴박한 상황 앞에, 탈영병들과 김모씨와 배달원 그리고 은진일당은 엿이 폭염에 녹아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리는 것처럼 시간이 멋대로 늘어져가는 것을 경험했다. 인질을 포함한 자신들과, 먼발치에서 각자 몸을 사리는 군인들과, 겁에 질린 시민들과, 목숨 걸고 덤벼드는 방송기자들이 늘어지는 시간 속에서 힘겨워했다. 그 와중에 재숙이 일어나 바닥의 수류탄을 발로 차려 했지만 빗맞은 수류탄은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면서 컬링경기처럼 다른 하나를 건드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답답하게 늘어진 시간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무속인 둘이 재숙을 밀쳐내며 알을 품는 모습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그중 한 무속인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안나와 눈을 마주치고 이가 드러나도록 웃어보였다.
영화감독이 큐 사인을 주기라도 한 것처럼 늘어졌던 시간이 활력을 찾고, 갑작스런 굉음이 터지면서 건물 잔해가 머리마다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아수라장 먼지구덩이로 변해버린 인질극 현장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택시기사가 밖으로 밀쳐졌다. 택시는 급하게 후진을 하다가 닭장차를 한 번 들이받고 엑셀을 연신 밟아대 바리게이트를 치어 보닛에 얹고는 큰길로 재빨리 빠져나갔다.
재숙과 안나는 은진을 부축하며 잡화점 귀퉁이로 몸을 피했다. 셋은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진열장에 놓인 휴대용 화장지를 뜯어 입을 틀어막았다. 셋은 기침을 하면서도 서로 무사한가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건물 밖에서는 노란 바구니를 매단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 여러 대가 속속 도착하며, 전봇대와 공중전화부스마다 오토바이를 제멋대로 기대고는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들은 사태를 수습하는 군인들을 발견하자 우선 양 팔을 들어 올렸지만 주변살피기를 계속했다. “콜록! 콜록! 나 여기 있어. 콜록!……”
긴 의자 밑에서 기어 나오던 배달원은 양팔로 몸을 지탱하려다가 다시 푹 고꾸라졌다. 배달원들은 자신들과 똑같이 생겼지만 머리색깔이 노랗지 않은 배달원의 늘어진 어깨를 잡아 끌어냈다, “놔봐! 아…… 어깨 놔봐! 괜찮아~ 괜찮아. 기분은 엿 같아…….”
헬기소리가 멀어지고 잠시 후 군인과 전경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빠르게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여기저기서 생존자들이 내는 괴로운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승강장에 대기 중이던 군용 트럭과 닭장차들이 굉음을 내며 빠져나가고 그 자리엔 소방차와 구급차등이 엇박자로 사이렌을 울리며 들어서 채웠다. 한 시민은 뉴스인터뷰를 위해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카메라 앞에 섰다. 남은 군인들은 경광봉을 흔들며 인질극이 있기 전 상황처럼 시민들을 유도했다.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바짝 붙이기를 성공한 구급차에선 똑같은 얼굴을 한 간호사들이 간이 들것과 의료 기구를 들고서 환자들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재숙은 냉장고를 옆으로 열어젖혀 작은 생수병을 꺼내어 하나씩 돌렸다. 둘에 비해 체력이 많이 바닥난 은진은 물을 똑바로 마시지 못하고 볼에 주르륵 흘려버렸다.
안나가 물을 삼키며 말했다. “T는 끅- 터미널이었어.” 둘은 거기에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은진이 애써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어쨌든……그럼 끝난 거네? 아우 목이야…… 다 나왔네. 그치?”

xeress@naver.com
노 새

과식하는 좋은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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