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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코스모스

2012.10.12 15:2410.12

코스모스

예전 일이다. 나는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해는 무거웠고 무더운 날씨는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늘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 때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난 그 곳에서 먼저 그늘을 즐기고 있는 한 노인을 보게 되었다. 노인은 나의 인기척에 눈을 살짝 떠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곧 눈을 되감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나도 네놈처럼 젊었을 적이 있었지.”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사람은 누구나 젊음을 가지고 태어나죠.”
노인 또한 미소 지었다.
“그래, 하지만 젊음은 계속 가지고 있기에는 꽤 무거운 것이기 때문에 다들 내려놓게 되지. 넌 그게 언제일까?”
“하하, 글쎄요. 꽤 어려운 질문인걸요?”
“추억을 많이 만들어놓으렴.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니. 젊어서는 추억을 만들고 늙어서는 젊었을 때 만든 추억을 즐긴다고 말이야.”
꽤 멋진 말이라 생각했다. 그 말은 종종 나에게 어떤 힘을 불어넣어 줘 어떤 힘든 일이라도 도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내가 교수를 만난 것은 그 후의 이야기이다.
문 창(問 蒼) 교수, 그는 베일에 싸인 인물로서 많은 이들에게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언제나 창백한 얼굴의 그는 강의시간 이외에 사람들 눈에 띄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극히 드물다고 표현한 것은 가끔씩 공원을 맴도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가 화장실에 가거나 밥을 먹는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또한 강조하고 싶다. 그가 학교에 온 지 5~6년이 넘어가는 데 말이다! 그 뿐이었다면 사람들은 그를 그저 세상을 겉도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로 인식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인맥에 있었다.
그는 그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인맥을 자랑했는데 TV에서나 볼 만한 유명 스타나 거대한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거부, 저력 있는 정치인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그를 만나러 학교를 찾아오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지는 말아 달라. 그는 그런 인물들을 만날 만큼의 어떤 탁월한 강의를 펼치는 사람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허허벌판에서 하나의 새싹을 발견하거나 어둠 속에서 하나의 빛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논문을 작성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인맥에 대한 답을 그의 과거에서 찾으려 했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 또한 딱히 그에게 관심 있지 않았다. 나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이를테면 학업이나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에 있었다.
그와 나의 만남은 사소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난 학교신문을 즐겨보는 편이었고 특히 ‘공원에서의 사색’이란 코너를 눈여겨보곤 했다. 코너는 작가 자신이 평상시 궁금하다고 느낀 질문들을 몇 줄 내지로 적어, 다함께 생각하자는 취지의 코너였다. 사실 코너의 위치가 워낙 구석에 있어 눈에 띄지 않았기에 아는 이나 그것을 눈여겨보는 이도 몇 없었지만 난 그 코너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로 언제나 그것을 흥미롭게 읽곤 했다. 기억하는 여러 문구들 중 한 문구를 소개해보면 이런 식이다.
‘현재가 있는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 인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정의할 수 있는 존재인가? 범우주적인 절대적시간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인간의 시간과 절대적시간은 완벽히 같이 흘러가는가?’
후에 나는 그 코너를 작성하는 사람이 그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강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난 내 인생에 영원히 남을 기이하고도 기이한 그러나 아름다운 경험을 하게 된다.
알다시피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그것은 10층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하나의 상처 없이 받아낸 어머니의 일화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바랄 때 그가 죽음에서 돌아온다는 일화를 말한다. 내 경험 또한 그런 것이리라.
강의를 들어온 학생은 꽤 많았다. 그는 오차 없는 정시에 강의실에 들어왔다. 그의 구두소리가 조용히 강의실을 울렸고 창백한 모습의 그는 들어오자마자 칠판에 ‘시간’이라는 두 글자를 썼다. 그리곤 말했다.
“여러분, 오늘 강의의 주제는 시간입니다. 자 여기 코스모스 한 송이가 있습니다.”
그는 아까부터 옆에 있던 검은색 천을 치웠다. 청초하고 아름다운 코스모스 한 송이가 들어있는 유리 상자가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분, 이 코스모스가 보이나요? 철학에서는 ‘존재’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존재하는가?’, ‘너는 존재하는가?’ 등 많은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시간은 존재합니까? 어떤 철학자들은 멍청하게도 그런 질문에 몇 시간을 쏟아 증명하려하지만 저는 보통 시간의 존재를 보여주고자 할 때 제가 열심히 키운 이 꽃을 보여줍니다. “
그는 옆에 있던 작은 물병 하나를 들어 꽃에 물을 주었다.
“그리고 저는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할 때는 꽃에 물을 줍니다.”
그는 물병을 내려놓고 적당한 폭으로 팔을 벌렸다.
“여러분, 보시는 바와 같이 시간은 존재하고 또한 흘러갑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묻겠습니다. 시간은 빠릅니까?”
그는 강단 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니라면 느립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시간은 굉장히 천천히 흐른다고요. 그래서 그들은 종종 자신들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망상일 뿐이며 대단한 착각일 뿐입니다. 나는 말합니다. 시간은 빠릅니다. 그것도 굉장히 빠릅니다. 설마 이 곳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는 없길 바랍니다.”
반박을 허용치 않는 강인한 어조였다.
“저는 이렇게 비유하곤 합니다. 어떤 커다란 강, 유속이 굉장히 빠른 강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강에 살고 있다고 말이죠. 우린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으로 인해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그저 지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후회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시간과 공간에 갇혀 사는 게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소 지었다.
“부끄럽지 않지만 그것은 슬픈 것입니다. 우리는 슬픈 운명에 굴복해야 할까요? 역사로 보면 인간은 시간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라는 세기의 천재가 발표한 ‘특수상대성 이론’은 말합니다. 절대시간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또, 너와 나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학생들에게 보여줬다.
“여러분, 지금은 철학시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여러 부분에서 이용되겠지만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법칙을 이용하면 말이죠. 우리가 빛의 속도로 다른 별로 왕복운동을 하면 지구의 시간은 그대로인 반면 우리의 시간을 짧아집니다. 뭐, 지구에서 약 500광년 떨어진 베텔기우스란 별을 빛의 속도로 왕복했을 때 10년의 우주여행으로 100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많은 게 바뀌어있겠죠. 이것으로써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3차원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옆에 물통을 열어 물을 마셨다. 그는 유쾌하게 말했다.
“아인슈타인이 만든 방법은 미래를 여행하는 방법이죠. 과거를 여행하는 방법은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뭐, 이제 곧 아인슈타인 2호가 나와서 해결해주지 않을까요?”
몇몇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강의실 곳곳에서 새어나왔다. 교수는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갖다 대었다. 다음 문장은 또박또박 강조하는 것이 마치 선언하는 듯 했다.
“여러분 인간은 드디어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학생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대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가능성이 없는 일을 가정하는 것과 가능성이 있는 일을 가정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여행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미래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미래가 디스토피아냐 유토피아냐라는 논쟁은 접어둡시다. 대신 이런 의문을 가져봅시다. 만약 원시인이 우리시대에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원시인은 이 곳에서 살 수 있을까요?”
그는 조용히 웃었다.
“여러분들은 예전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대륙을 처음 발견했을 때를 들어보셨습니까? 그 때 영국인들이 가져온 질병에 면역력을 가지지 못해 많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죽었죠. 그 원시인도 같은 꼴이 나지 않을까요? 어떻게 될까요? 아니면 그 원시인이 5년이든 10년이든 안에 우리의 언어, 생활습관, 사용하는 도구들을 모두 이해해 결국에는 우리와 같은 문명을 누릴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가 과거로 여행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또 어떨까요? 가정해봅시다. 내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현재를 좀 더 미래의 방식으로 편리하게 아름답게 바꾸지 않을까요?”
그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제 생각을 이렇습니다. 그들이 현재로 다시 되돌아 온 것 치고는 우리의 세계는 너무나도 참혹하다고요. 전 아마 과거를 여행하는 기술은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나오지 않을 거라 예상합니다. 빈곤과 기아가 끊임없이 존재하는 현재의 세상, 이것이 내가 과거를 여행하는 기술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근거입니다.”
그는 강의실을 나가기 위해 자신의 서류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미래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고통은 변함없을 것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복역한 죄수가 감옥을 나가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감옥 밖의 세상 또한 행복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저는 과거나 미래에서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고 또한 행복은 오로지 현재에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덧붙였다.
“오늘의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철학의 진정한 묘미는 생각하는 겁니다. 생각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음 강의의 주제는 ‘상대적 시간’입니다. 오늘 강의에 대한 질문은 제 연구실에서 받는 걸로 하죠.”
그러고는 강의실 문을 나갔다. 나는 과거나 미래에서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에 이견을 가졌고 그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냥 그와 조금 더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난 내 생각에 관해 그의 견해를 듣고 싶었고 그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었다. 바로 찾아가고 싶었으나 시간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기에 방문은 결국 늦은 오후로 미뤄졌다.
학교 행정부서에 물어물어 찾은 연구실은 한적한 공원 옆 조그만 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흔하디흔한 풀벌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때, 해는 아직 지지 않아 밝았고 풀과 나무 꽃들이 무성한 정말 이상할 것이 없는 공간이었지만 그 곳은 고요했다. 고요하다 못해 그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느꼈으며 그것들은 날 몸서리치게 했다. 잠시 망설이다 그의 연구실 문에 노크를 했다. 그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누구시죠.”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오늘 강의를 들은 학생입니다. 오늘 강의내용에 대한 제 생각과 교수님의 견해를 듣고자 해서 왔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고 난 다음에야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난 그의 연구실에 들어가자마자 수많은 책들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책들인지 제목을 보려는 순간 난 어떤 인기척을 느꼈고 그의 집안에 그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다란 몸집의 노인이었다. 그의 양복은 한 눈에 매우 값비싼 물건으로 보였다. 난 그의 지팡이에 박혀있는 커다란 보석으로 그가 꽤 이름난 부자일 것과 교수의 인맥 중 하나 일 것이라 쉽게 추측했다. 그는 나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예 관심자체가 없는 듯 했다. 단지, 주머니에서 시가케이스를 꺼내 시가를 입에 물었을 뿐이었다. 교수가 말했다.
“말했다시피, 여긴 금연입니다.”
“아 그랬지, 미안하오.”
그는 시가를 도로 집어넣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박사, 어찌되었던 간에. 난 당신에게 빚을 졌소. 당신은 원하는 게 없으니 내 뭘 줘야 할지 모르겠군. 어쨌든 나중에라도 원하는 게 있으면 얘기하시오. 그게 돈이라면 더더욱 좋겠지 있는 거라곤 돈 뿐이니까……. 나는 빚을 지고 사는 성격도 아니고 내 몸도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수 없으니 그것은 되도록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소.”
그는 모자를 쓰고 문을 나서다말고 교수를 돌아봤다.
“씁쓸하다는 표현을 써야하나.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는 여운을 남기고 떠났다. 난 멍하니 그가 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교수가 그런 내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이민혁이라고 합니다.”
“그래, 민혁군, 앉으세요.”
그는 소파로 나를 인도했다. 잠시 후 그는 홍차 두 잔을 가져와 앉았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오늘 나의 강의는 시간에 관한 것이었죠. 사실 시간에 대한 생각은 나의 가장 깊은 우물들 중 하나입니다. 좋아요. 어떤 부분일까요?”
“교수님은 오늘 많은 부분을 가정했습니다.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은 발명되지 않는다는 부분은 꽤나 신빙성 있는 부분 중 하나였죠. 그러나 과거에서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덧붙였다.
“저는 어떤 노인을 만났습니다. 노인은 저에게 인간은 젊어서 추억을 만들고 늙어서는 그 추억을 즐기는 거라고 했습니다. 추억을 곱씹는 것은 과거에서 행복을 얻는 행위가 아닐까요?”
그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민혁군 생각에 대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과연 그 노인은 그 추억을 돌이켜
보면서 즐기기만 했을까요? 젊었을 때의 자신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보면서 조금은 슬프지 않았을까요? 슬프기만 했을까요? 세월의 무심함을 탓하고 어떤 때는 저주하면서 홀로 심한 좌절감을 맛보지는 않았을까요? “
나는 반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교수님 꼭 노인의 시점에서 추억을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30대 중년의 사내가 20대에 했던 열정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 아련했던 한 때를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교수는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글쎄요. 전 그런 경우라도 반박을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30대 중년의 사내가 어째서 20대의 열정적인 사랑을 생각했을까요? 지금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이젠 할 수 없기에 그런 추억을 떠올린 것이 아닐까요?
다시 물었다.
“다시 떠올리기 싫은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에서 다행이라는 행복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는 또한 쉽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민혁군. 다시 떠올리기 싫은 추억을 떠올렸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추억을 예찬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금 민혁군이 마주친 그 노인은 반태산이라는 L기업의 총수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늙었습니다. 게다가 불치병에 걸렸죠. 곧 세상을 뜰 겁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왔습니다. 난 의사가 아니지만 그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죠. 그가 말했습니다.”
교수는 내 눈을 보며 노인의 차분한 말투를 따라했다. 그러한 행동은 노인이 내게 직접 말하는 듯 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박사, 난 이제 죽는다고 하오. 그래서 찾아온 것이오. 난 젊었던 시절 누구보다 힘이 셌고 누구보다 영리했소.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말이오. 내 온몸에서는 자신감으로 넘쳐흘렀고 난 오만했소. 내 자신의 오만은 나의 기쁨이었지. 그러나 지금 나는 내 자신에게 힘을 느낄 수 없소. 세월은 나에게 치명적인 독을 먹였어. 박사, 난 들었소, 당신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말이오. 나에게 과거의 영광을 제발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누리게 해주시오.”
그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난 그에게 말했습니다. 회장님, 회장님께서 부탁하신다면 전 그 누구에게도 그랬듯이 똑같은 호의를 베풀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그걸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회장님 저는 생각하는 자로써 당신을 관찰하고 간접적 경험을 하고 싶습니다. 회장님 당신은 과거에서 행복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그는 굳은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민혁군, 분명히 그는 나에게 동의했습니다. 과거에서 행복을 찾아오겠다고 말이죠. 젊은 시절 그는 가진 것은 없었지만 뭐든지 할 수 있는 육체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때의 뛰어난 육체와 과거의 영광을 적은 시간이나마 다시 느꼈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뭐냐고요? 허무와 공허, 늙어버린 육체와 그에 따른 좌절감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죽음뿐이죠. 젊은 시절 그는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투쟁으로써 한 움큼의 금을 움켜 집었다고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모래였습니다. 손에 악력이 빠져나가자 모래는 손가락 사이사이를 지나 모두 땅으로 떨어졌고 그의 손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없었습니다.”
그는 나의 눈을 쳐다봤다.
“민혁군도 한 번 가보겠습니까? 과거로 말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말인가요?”
“그런 것은 천천히 알게 될 겁니다. 그 것보다는 당신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가보겠습니까?”
난 궁금했다. 그러나 두려웠다. 그것은 매우 은밀하고 알 수 없어 천사의 축복이 아닌 악마의 속삭임일 것이라고도 생각되었다.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고민하자 그가 말했다.
“민혁군, 오늘 난 강의에서 행복이란 미래나 과거가 아닌 현재에서 얻는 것이라고 말했었죠. 그러나 사실 저도 민혁군과 같은 생각입니다. 아니, 같은 가정을 했었죠. 그러나 저를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주워올 수 없었습니다. 과거에서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전 제 가설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민혁군이 제가 가진 수많은 사례 중에 최초의 반례가 되길 기대해보겠습니다.”
그는 시계를 쳐다봤다.
“저녁 6시군요. 이제 노을이 깔리고 스산한 그림자들이 깔릴 시간입니다. 자정까지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되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있다면 그 때까지 오세요. 반대의 경우에는 오지 않으면 됩니다. 민혁군이 알아야할 세 가지 룰이 있습니다.”
그는 손가락 세 개를 펴서 하나씩 접었다.
“첫째, 과거로 갈 수 있는 건 한 번뿐입니다. 둘째, 타인의 운명에 어떠한 영향이라도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과거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시간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와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미리 말해두지만 이 때 내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생각한 것은 이 일의 당위성이나 교수의 정체보다는 그의 제안에 대한 것임을 밝히는 바이다. 그것 그것들을 모두 논리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기보다는 단지 그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교수는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그의 말을 들은 자로 하여금 그것이 정말로 실현될 것이라 믿게 하는 이상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눈은 감고 기억들을 모조리 드러냈다. 그것은 인생을 통째로 복습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내가 세상을 인지한 첫 기억은 크리스마스 때였다.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고 그것은 공룡모형의 장난감이었다. 난 이불 속에서 장난치기 바빴고 밖에는 하얀 눈이 내렸다. 행복한 기억이었다.
그 후로도 계속 생각해내었다. 수많은 기억들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즐거웠던 기억과 슬펐던 기억, 후회스러웠던 기억과 죄를 지었던 기억, 분노했던 기억과 좌절했던 기억으로 나뉘지 않았다. 즐거운 기억에는 슬픔이 같이했으며 죄를 지었던 기억에는 후회나 노여움이 같이했다.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것들 사이에서 내가 돌아가고 싶은 기억은 어디일까? 그 중 하나는 이랬다.
어릴 적이었다. 나는 들판을 거닐고 있었다. 가끔씩 볼에 스치는 바람이 나를 따스하게 했다. 옆을 봤다. 보라 저 끝없는 황금빛 들판을. 내 고사리 같은 자그마한 손은 황금색 들판 위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아득한 저 들판의 끝은 어디일까.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이번에는 제법 커다란 바람이었다. 들판의 모든 생물들이 서서히 바람을 따라 움직였다. 저 노랫소리가 들리는가? 벌판의 거대한 노랫소리가 들리는가? 난 저 멀리서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다가가고 있는 데 난 영원히 들판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할 것처럼 느껴졌다. 천천히 숨을 크게 들이마셔 아득한 들판을 가슴에 머금었다. 그 곳은 내 영원한 안식처 일 것이다. 만약 이 곳으로 돌아간다면 내 육체와 영혼은 깊은 휴식을 취할 것이고 정화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것은 죄를 용서받거나 후회를 남기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했다. 내 죄……. 호수에 비유한다면 크기는 어지간한 호수만할 것이며 색깔은 검은 색보다 더 진한 검은 색일 것이다. 그가 나에게 조롱박을 준다면 난 호수에 나아가 한 동이의 물을 떠야한다. 그렇다. 오랜 세월에 더럽혀진 내 영혼을 조금이나마 씻는다면 그것이 행복을 얻는 길이 아닐까? 그러나 호수 어디서 물을 뜰 것인가. 가장 더러운 물이 고여 있는 곳은 도대체 어느 곳이란 말인가? 누군가 속삭였다.
“이봐, 넌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잖아.”
마치 검은 물 한 덩이가 수면에 떠오르는 것처럼 내가 잊고 싶어 했고.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곳은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방안이었다. 창문에는 햇살을 막기 위한 얇은 커튼이 쳐져있었고 창에서 비치는 햇살로 인해 솟아오르는 먼지들을 볼 수 있었다. 한 침대도 있었다.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침대 그 위에는 내 누이가 누워있었다. 누이의 얼굴에 맺힌 송골송골 땀방울들은 하나의 줄기가 되어 내 가슴을 찢어냈고 누이의 창백한 얼굴은 차가운 손아귀가 되어 내 심장을 옥죄였다. 어지러웠다.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이는 나에게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지만 가지 못했다. 주저앉았다. 나를 부르는 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빠, 울지 마.”
그 말에 나의 가슴은 찢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울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위로를 해주란 말인가? 괜찮다고 말을 하란 말인가? 태연하게 인사를 하란 말인가? 그래 태연하게 인사하자. 아픈 고통을 태연한 얼굴로 숨기고 찢어진 가슴을 아무렇지 않은 인사말로 숨기자. 꼭꼭 숨기자. 누이가 찾지 못하게. 나는 누이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안 울어. 걱정 마. 내가 옆에 있잖아.”
그러나 지독한 지옥의 악마는 누이의 목숨을 앗아가려 했다. 신이시어, 내 죄를 사하소서. 누이를 구하소서. 나를 구하소서……. 신에게 기도했고 간절히 소망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뿐이었다. 그러나 의사가 말했다.
“이런 말을 전하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모두 이별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좌절과 슬픔에서 심신을 통제하기가 힘들었지만 난 모두들 누이에게 한 마디씩 건네기 시작했던 그 때를 기억한다. 그 것은 ‘사랑한다.’와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로 정리되었다. 모두들 앵무새처럼 보였다. 어이없고 화가 났다. 누이에게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자들
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 내 누이를 사랑하는지 말이다.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정말로 진심을 담은 몇 명뿐이어야 했다. 나는 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로써 내 ‘사랑한다’는 말이 앵무새의 말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참지 못했다. 결국 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난 누이를 침묵으로써 떠나보냈다. 단지, 누이도 나를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하면서. 관이 내려갈 때에도 흙이 관을 덮을 때에도 난 침묵했다. 그리곤 홀로 쓸쓸히 집에 돌아와서 어둠 속에 파묻혔다.
난 소망했다. 어느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느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에서 다시 돌아오기를. 누이가 죽음 속에서 부활하기를. 시간은 그렇게 흘러 어느새 어둠이 걷히고 아침이 밝았지만 누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나의 실수를 나의 죄들을. 누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난 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죄들을 지었기 때문이다.
난 누이를 구하지 못했고 누이 곁에 더 오래 있어주지 못했다. 누이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했고 누이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지를 미리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가장 크나큰 죄는 누이의 임종의 순간에 누이에게 사랑한다고, 나는 너를 사랑했다고,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고 가슴 깊이 말하지 못한 것이다. 죄는 손톱이 되어 심장을 피나도록 긁어댔다. 아아! 내 좁다랗고 옹졸한 소심한 마음이여! 무엇이 부끄러웠는가? 무엇이 너를 막게 했는가? 도대체 누이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게 대체 뭐란 말이냐? 알량한 자존심이냐? 미천한 품위인 것이냐? 너는 후회할 것이다. 지금 당장도 후회할 것이며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죽기 전에도 후회할 것이다. 그것도 모자란다. 지옥에서도 후회할 것이며 다음 생에서도 후회할 것이다. 영원히 후회할 것이다.
그렇다. 나에게 과거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그 곳으로 가야했다. 용서받지 않아도 좋다. 누이에게 다시 한 번 진심을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렇게 된다면 난 그 곳으로 가겠다. 누이를 만난다면 그 자체로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눈을 떴다.
자정이 되기 전 집을 나서 그의 연구실을 향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나를 휘감아 걸음을 방해했지만 어둠을 해져나갔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분명했다.
그는 한참동안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 가장 구석진 방으로 데려갔다. 방문을 연 그는 나에게 말했다.
“민혁군, 행운을 빕니다. 방 안으로 들어가세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방이었다.
스위치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뒤에서 문이 닫혔다. 필시 그가 닫은 것이다. 당황한 나는 뒤를 돌아 빛을 찾아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나는 다른 세상에 있었다. 화창한 날씨였다. 해는 머리 위에 있었고 푸른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난 이 곳이 어딘지 알았다. 이 곳은 나의 예전 집 주변의 풍경이다.
집을 향해 달렸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 누이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집에는 누이가 없었다. 어디에 있는 거지? 주변을 한참 뒤졌으나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였다. 나는 종종 누이기 언덕에 오르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곤 했다. 집 뒤에 있는 언덕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없이 오른 언덕 끝에는 누이가 서 있었다. 앉아서 동네를 내려다보던 누이는 무심코 나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어, 오빠가 여긴 웬일이야?”
오랜만에 보는 누이의 얼굴이다. 꿈속에서나 만나보던 내 누이. 누이는 아픈 기색 하나 없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난 반가움에 왈칵 눈물을 쏟으려했지만 극도의 인내심으로 참아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너를... 만나러... 왔어.......”
“뭐라고? 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순간 고민했다. 누이가 다시 말했다.
“뭔데 그래? 근데 여기서 오빠랑 만날 줄이야. 오빠가 좀이나 바빠야지 말이야.”
이 말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감춰져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난 이 장소에서 우연히 누이를 만난 기억이 있다. 당시의 난 누이와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네게 할 말이 있어.”
결국 난 몇 방울의 눈물을 느끼게 되었다.
“오빠?”
“민주야. 난... 난... 악몽을 꿨어. 너무 생생해서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는 듯 한 무서운 악목이었어. 너무 무섭고 슬픈 꿈이라 아직도 슬픔이 가시질 않아. 꿈속의 너는 아팠어. 몹시 아파서 죽음을 앞두게 되었지. 그런 널 앞에서 그저 지켜보는 나는 너무나도 슬펐어. 너를 잃는다니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다시는 너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영원히 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지금 다시 만나게 되니 너무 반가워. 너무 반가워서 그래.”
누이는 과장해서 웃었다.
“에이, 뭐 그런 꿈 가지고 그래. 울지 마. 헛꿈이야. 왜 꿈은 현실과 반대라는 말이 있잖아.”
“가장 슬펐던 건, 네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조차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거야.”
“그렇겠지. 오빠는 원래 좀 수줍음을 잘 타서 그런 말 잘 못하잖아. 그런데 그건 좀 너무했다.”
누이는 비시시 웃었다.
“그래서 지금 말할게. 이 때까지 너에게 표현을 잘하지 못했지만. 동생아, 난 널 사랑해. 무슨 일이 생기던지 두려워마. 넌 혼자가 아니니까. 그래도 민주야, 난 두려워. 너를 잃는 것도 두렵지만 혹여나 그런 일이 생겼을 때 내가 너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못할까봐 두려워. 그 때, 오늘을 기억해주겠다고 약속해 줄래?”
“응 알았어. 약속할게. 근데 오빠한테 갑자기 그런 말 들으니까. 이상하네. 어쨌든 알았어.”
누이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울지 좀 마. 오빠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꿈 때문에 울다니 내 오빠가 오늘따라 좀 이상한테? 안되겠다. 일루 좀 와바.”
누이는 내 손을 잡고 나를 이끌었다. 길이 없는 곳으로 이루어진 길이었다. 길게 자란 수풀들이 발걸음을 방해했지만 나와 누이는 목적지에 다다랐고 난 코스모스 화원을 볼 수 있었다. 그 것은 매우 청초하고 아름다워서 마치 세상의 아름다운 비밀 한 가지를 품고 있는 듯 했다.
“아름다운 곳이네.”
누이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치? 헤헤 영광으로 생각해. 나 말고 이 비밀장소에 온 건 오빠가 처음이니까. 오빠가 오늘따라 왠지 우울한 것 같아 데려왔어. 나도 종종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여기로 오거든.”
나와 누이는 근처의 커다란 바위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코스모스들을 바라보았다.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말없이 흔들거렸다. 마치, 나를 위로하는 듯이. 누이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다 나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오빠, 있잖아.”
“어?”
난 아직도 궁금하다. 누이는 자신에게 닥칠 일을 미리 예견했던 걸까? 아니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가?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종종 이 곳에 와줘. 이 곳은 내 소중한 공간이거든. 난 우울할 때도 기쁠 때도 이 곳에 계속 왔으니까 말이야. 왜 그런 말이 있잖아. 소중한 사람과 함께 했던 장소에는 그 사람의 향수가 묻어있다고 말이야. 이 곳에 와서 나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는 거야. 생각해 봐. 즐거운 일 많잖아.”
누이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종종 싸웠던 일들도 나중에 떠올리면 꽤 우스꽝스러울 거야. 그지? 뭣 땜에 싸웠더라. 음.....”
누이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세상에! 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기억나? 오빠가 선물 받은 사탕들을 내 키가 안 닿는 곳에 놓는 바람에 내가 하나도 못 먹은 거?”
나는 반박했다.
“하! 그러는 너는 내 일기장 훔쳐보다가 나한테 걸린 건 기억 안나?”
“그래, 기억나, 그러게 누가 그걸 펼쳐놓고 나가래?”
우린 서로 바라보곤 깔깔대며 웃었다. 조금 뒤 난 이 추억을 내려놓고 교수의 그 방으로 돌아간다. 그 곳에는 누이가 없을 것이다. 난 지금 행복하다. 나는 이 행복을 그 곳까지 가져갈 수 있을까?
누이가 일어나서 엉덩이를 탁탁 털고는 내 손을 잡았다.
“오빠, 내려가자. 이제 내려갈 시간이야.”
누이의 손을 잡고 걸었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 뒤에서 누군가 내 팔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교수였다. 동시에 나는 두 명으로 나뉘어졌다. 그에게 잡힌 나와 누이의 손을 꼭 잡은 채 집으로 내려가고 있는 나로 말이다. 이제 누이에게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누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함께 웃었는데 한 순간의 꿈이었던 것처럼 갑자기 누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힘껏 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누이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누이가 한 번만 다시 나를 돌아봐준다면. 그러나 누이는 그대로 산을 내려갔다. 그가 말했다.
“민혁군, 이렇게 그 쪽 세상은 다시 톱니바퀴가 돌아가게 됩니다. 예정했던 데로 누이는 죽게 되고요. 당신은 누이를 잃게 되죠. 당신에겐 이제 뭐가 남았죠? 당신에게도 모래만이 남았나요?”
그런가? 이제 나에게는 허무와 공허와 좌절만이 남았을 뿐인가? 나는 후회라는
지옥 속에서 영원히 헤쳐 나오지 못하는 것인가? 결국 구원받지 못한 것인가? 그러나 나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코스모스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불 끓는 지옥이라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 구원이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행복을 현재까지 가져올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나와 내 누이는 이 곳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다. 난 이 추억을 그 곳까지 가져갈 수 있다. 물론, 내가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세월은 그걸 허락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가 대화를 나눴던 사실은, 우리가 여기서 함께 했다는 사실만은 영원하니까. 난 그에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니요. 저에겐 코스모스 한 송이가 남아있습니다.”
얼마 후, 오랜만에 옛 집을 찾았다. 그리곤 누이와 함께 했던 동산에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누이의 흔적을 찾아 걸었다. 동산의 끝에 도달해서는 조용히 마을을 내려다본 뒤 누이의 비밀 장소로 이동했다. 마침 가을이어서 코스모스는 활짝 핀 상태였다. 수줍은 미풍이 불었다. 난 누이의 향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코스모스들은 그 때와 같이 홀로 남겨진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내 육체의 시간은 흘러간다. 하지만 내 의식은 시간을 거슬러갔다. 누이와의 추억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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