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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가객(歌客)

2012.09.17 10:2809.17

그는 노래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저녁이 되어 공기가 서늘해지고 일을 마친 사람들이 카페 몽(夢)에 모이기 시작하면, 그는 테라스에 앉아 작은 우쿨렐레의 현을 고르기 시작한다. 목소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가 부르는 노래는 모두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30분 정도의 짧은 공연을 마치고 모자를 거꾸로 든 채 테이블을 돌면 사람들은 거기에 동전과 얇은 지폐를 넣거나 혹은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 그는 그 돈으로 한 끼 식사를 때웠다. 수입이 적은 날은 카페의 주인이 무료로 식사를 챙겨주었다.

사람들은 그가 퇴역군인이라고도 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공공연히 밀수와 밀항을 행하는 행성간 화물우주선의 조종사였다고 했다. 혹은 범죄조직에 몸담고 있다가 위험한 입장이 되어 몸을 숨기고 있다고도 했다. 그런 이야기들은 대개는 그의 세어 버린 흰 머리와 수염, 검은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살, 그리고 이마에서 가까스로 눈을 피해 왼쪽 뺨까지 이어진 긴 상처로부터 생겨난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그날도 그는 우쿨렐레를 뜯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카페 몽의 주인은 굳이 번잡스럽게 소개를 하거나 무대를 만들지 않았다. 그저, 그가 조율이 된 악기를 쥐고 자세를 잡고 앉으면 홀의 음악을 끌 뿐이었다. 그러면 그는 현을 뜯으며 그다지 크지도, 또 낮지도 않은 음성으로 노래했다. 마이크나 스피커 같은 것은 없었다.

바람,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보았는가
광장을 메운 새들의 날개 너머
어둠이 내리는 알타이르의 공항에서
푸른 서리처럼 깃발처럼 흔들리며 다가오는
바람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는가
붉은 하늘을 가득 메운 눈 먼 새들,
노래는 들리지 않고
먼 곳 우레 소리만이
이름 있는 모든 것들의 죽음을 탄식하는
어두운 바람의 노래를 들었는가

갑자기 한 여인이 노래를 듣다 말고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노래를 멈추었다. 그제서야 그는 여인을 알아보았다.

“엔젤.”

엔젤이라고 불린 여인은 눈물을 닦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얼마나 이러고 지냈던 거야, 할.”

할, 이라고 불린 사내는 대답하지 않은 채 악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할은 악기 상자를 어깨에 둘러맨 채 모자를 쓰고 카페의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카페의 주인이 막아섰다.

“할, 식사를 하지 않았잖아요.  친구분도 아직 메뉴에 손을 대지 않았어요.”

엔젤이 말했다.

“친구라니요. 당치 않아요. 이 자는 사기꾼에 도둑놈이예요. 이 자로부터 빚을 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행성을 떠돌았는지 몰라요.”

할이 말했다.

“여기는 빚을 받기에 좋은 장소가 아닌데. 나가는 게 어떨까.”

엔젤이 할을 노려보았다.

“너그러운 척 하지 말아. 당신을 찾기 위해 안 가본 행성, 찾아보지 않은 개척지가 없었어. 바로 코 앞에 있는지 모르고. 어떻게, 남도 아닌 당신이, 그 노래를 불러서 먹고 살고 있었다니, 뻔뻔스럽기도..”

할은 말없이 엔젤을 외면하고 있었다.

“자, 자,”

카페 주인이 다시 나섰다.

“그 노래라면 내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할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한 것은 저예요. 그러니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몰라도, 오늘은 오늘의 노동의 댓가를 지불하게 해 주세요.”

할과 엔젤, 카페 주인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사람들은 흥미를 잃고 자신들의 식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런두런 하는 그들끼리의 대화가 다시 담배연기처럼 카페를 채웠다.

“지구에서 가져온 와인이예요. 귀한 거지요. 오늘 할과 친구분께 특별히 대접해 드립니다.”

카페 주인은 동그란 얼굴, 동그란 쇠테 안경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와인 병의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퐁, 하는 소리, 그리고 와인이 글라스에 부어지는 쪼르륵 소리.

“건배.”

카페 주인이 글라스를 들었으나 할도, 엔젤도 움직이지 않았다. 카페 주인은 한 모금 기분 좋게 마신 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두 분은 무슨 사이이신가요? 오랜 친구분? 혹은 헤어졌던 연인?”

엔젤이 움직이려 하지 않자, 할이 와인 글라스를 기울여 입술을 축인 후 말했다.

“그녀는 나를 죽이러 온 거야. 내가 목숨 빚을 좀 졌거든.”

“목숨 빚... 혹시 알타이르의 핵융합로 사고?”

엔젤이 카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시다면 이것이 마지막 만찬이 되겠군요.”

엔젤이 쏘아붙였다.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 자를 이용해 돈을 벌고 있었던 건가?”

“안다고 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카페에 있다 보면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또 할은 매일 저녁 여기서 노래를 불렀어요. 짐작할 만도 하지요.”

“그렇다면 방해하지 말아.”

엔젤이 한쪽 손을 핸드백 안으로 집어넣었다. 핸드백 속에서 찰칵, 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총인가요? 그런 것을 가지고 우주 공항 검색대를 지날 수 없을텐데. 게다가 여기선 팔지도 않고.”

“니트로 글리세린. 개척 행성 어디건 널려 있지.”

납득이 간다는 듯 카페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데 알타이르 건... 핵융합로의 폭주로 개척행성이 자그마한 태양으로 바뀌어버렸고, 덕분에 삼백만 명의 개척민이 일시에 날아가버린.. 그러나 그것은 사고가 아니었나요?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지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엔젤은 카페 주인을 잠시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긴, 이 자가 처형되어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이 조금은 더 있어야겠지. 알타이르 참사의 원인은, 행성을 개척해서 자원을 채굴하기보다, 그것을 태양으로 바꾸어 통상 항로에 가로등을 켜는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한 자들 때문이었어. 그들은 한 명의 하급 기술자를 매수했지.”

엔젤은 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하급 기술자는 고의로 통제장치를 오작동시키고는 달아났고.”

할은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카페 주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결과, 자그마한 인공 항성이 되어버린 알타이르 행성은 지금도 밤하늘에 초라한 빛을 던지고 있지. 여기서도 보일 걸?”

잠시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엔젤은 와인 글라스를 들어 한 모금 삼켰다. 붉은 와인 방울이 엔젤이 입가에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그러니 방해하지 말아줘.”

엔젤은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다가 휘청,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할이 엔젤을 감싸 안아 부축했다.

“중력 적응장애야. 행성간 비행을 오래하면 생기는 일종의 우주 멀미지.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비열한 인간, 당신 따위의 도움은 받지 않아.”

그러나 곧 엔젤은 의식을 잃었다. 할과 카페 주인은 엔젤을 의자에 앉히고 목덜미를 젖혀 숨쉬기 편하게 해 주었다.

“어떻게 할 거죠, 할?”

카페 주인이 물었다. 할은 엔젤을 내려다보았다. 주름살 가득한 표정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알타이르 행성의 일은 순전히 과도한 태양풍으로 인한 사고였어요. 당신도 알고 나도 알아요. 그러나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하네요.”

“그녀도 사고의 희생자일 뿐이야. 방사능의 영향으로 사고가 왜곡되어 망상에 빠져 있어.”

할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력한 태양풍이 개척행성의 자기장과 부딪치며 현란한 오로라를 붉고 푸르게 창 가득 펼치고 있었다.

“전에도 이렇게 만나셨나 보군요.”

할은 정신을 잃은 엔젤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렇더라도 목숨을 늘 위협하는 사람을 뒤에 달고 다니는 게 마음 편할 리 없잖아요. 게다가 정말로 여기서 니트로 글리세린이라도 터뜨리면 제 가게는 어떡하구요. 퇴직금 다 털어 넣어 겨우 마련한 건데.”

농담을 들은 듯, 할이 싱긋 웃었다. 니트로 글리세린과 같은 화학물질은 사용되지 않은지 오래였다.

“그나마 저 지옥 같은 핵융합로 근무로 덕 본 것은 우리 중에 자네밖에 없어.”

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페 주인은 와인 병의 마개를 다시 닫았다.

“경찰을 부르는 게 어때요, 팀장님?”

오래 전의 직함을 들은 할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우쿨렐레 가방을 집어들었다.

“첫째, 아무 해 없는 약간의 여흥이라고 생각하면 자네나 나나 그리 속상할 일이 없고.”

그렇게 말하면서, 할은 엔젤의 핸드백을 우쿨렐레 가방과 함께 왼쪽 어깨에 둘러맸다.

“둘째, 어쨌거나 우리는 생지옥을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같은 팀의 동료이고.”

할은 엔젤의 겨드랑이에 오른 팔을 넣어 부축하며 가볍게 일으켜 안았다.

“셋째, 그래도 내 딸인데 어떻게 하겠나.”

의식을 잃은 딸을 양 팔에 안은 채 카페 몽(夢)의 문을 나서는 할의 뒷모습 위로 오로라는 여전히 꿈틀거리며 난무와도 같은 빛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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