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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컴플렉스에 대하여



십년 전 나는 인생이 걸린 선택을 했다. 그때 나는 산 속의 하얀 아파트 촌에 살고 있었다. 촛불도 전지도 아껴 써야 했기 때문에 아파트 촌은 밤에는 완전히 산의 어둠으로 가득 찼고, 수도가 끊긴지도 이십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지하수를 끌어올리고 정화하는 복잡한 시스템 어딘가에서 고장이 났던 것이겠지만 우리가 사는 곳에 이제 그런걸 고칠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물을 받으려면 매일 아침 단지 앞에서 줄을 서야 했다. 엄마는 어디서든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마법 같은 시스템이 없어진걸 오래도록 무척 아쉬워 했다. 그러나 수도도 전기도 다 끊긴 다음에 태어나 그런걸 본 적이 없던 나는 별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인간이 수도와 전기뿐 아니라 아득한 우주 공간까지 정복했던 우주 시대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남아 있었다. 그때 인간은 은하수 같은 메트로폴리스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마 그 문명의 최후의 생존자들이었다. 천 여년전 우주 문명 전체를 삼켜버린 대 전쟁 때문이었다. 우리 별은 중립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폭격을 맞지 않아 이렇게 산골짜기에 아파트 촌들이 살아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자연 환경도 유난히 인간에게 호의적인 축복 받은 환경이었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다른 별의 인류는 벌써 오래 전 전멸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과거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주로 가르치는 과목은 수학과 기계였다.

하지만 나는 사실 바깥 우주에도 사람들이 살아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게는 우주에서 온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학이 이미 많이 퇴화되고 기술 소실된 상태라고 했으며, 옛날에 떨어졌던 폭탄의 잔해가 남아 있어 위험할지 모르므로 주변 산을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얘기 같은 건 그냥 사이비 과학이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행성 간 전쟁에서 그런 폭탄은 쓰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사실 우주 출신일 뿐 아니라 천 년을 넘게 살아 온 늙은이였지만 정체를 숨기고 우리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몇 년 전에 산 속에서 길을 잃어 헤매다 굶어 죽을 뻔 한 끝에 여기로 흘러들어 온 외부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아무도 본 적이 없었고 접촉도 없었지만 우리와 같은 아파트 촌들이 행성 전체에 흩어져 있다는 건 우리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약간의 의심을 샀지만 우리 식의 생활 방식을 완벽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의심은 금방 풀렸다. 그는 나중에 그건 반은 망원경 관찰로 반은 눈치로 알아낸 것이었다고 알려 주었다.

내가 그와 친해진 계기는 엄마가 부탁한 과외 수업이었다. 엄마는 우등생으로 소문 난 그에게 내 전 과목 과외를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도 엄마는 그를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들어했다.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주기도 했고 내 편으로 먹을 걸 싸 주는 일도 있었다. 사실 공부를 잘 한다고 해서 별 의미가 있던 건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의무적으로 학교를 가기는 해도 수업을 열심히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우등 졸업을 해서 반상회에 들어가 도시에 다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랬다. 우리는 생필품을 대부분 옛날 도시의 폐허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상회 사람들은 두 주에 한 번씩 그곳으로 가서 전지와 통조림 등을 가져오고 배급하는 일을 했다. 나머지 보통 사람들은 텃밭을 가꾸거나 나물을 캐러 다니고 건물을 보수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사실 별 성과가 없었다. 옛날에 비해 이상하게 작물이 잘 자라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지만 옛날이 정확히 언제이며 옛날에는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결론이 날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 아빠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긴 낮 내내 그늘에서 낮잠을 자거나 장기를 두었다. 예전에는 술을 마셨지만 이제는 도시 창고의 재고분도 다 떨어져서 마실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통조림과 건전지와 촛불과 가끔은 신기한 물건들을 가져오는 그런 운전사가 되기를 바랬다. 내게는 어떻게 봐도 도시에서 이 산 속까지 낡은 트럭을 몰고 왔다갔다 하는 것이 자유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엄마는 내가 어떻게든 반상회에 들어가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바랬다. 그는 우리가 마치 위대한 고대 문명의 유적을 뒤지며 살아가는 유목민들 같다고 했다.



일 년이 지났을 때쯤 우리는 친해져서 거의 매일 같이 햇빛을 피하는 모자를 쓰고 산 속을 누비고 있었다. 우리 별은 그때는 한창 여름이었고 산도 구름들도 윤곽이 선명한 아름다운 날씨였다. 하늘에는 내장까지 차가워질 것 같은 맑은 하얀 색의 구름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바깥은 빛이 가득한 때에도 그늘은 바깥의 더위는 거짓말처럼 서늘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낮에는 바깥에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소풍을 가고 싶어지는 날씨라고 했다.

산 속에는 의외로 어디를 가도 옛날 사람들이 만든 아스팔트 길이 깔려 있었고 표지판도 있었으므로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동물도 벌레도 없었으므로 위험할 것도 없었다. 태어나서 항상 그런 정적 속에 있었으므로 산 속의 그런 정적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아파트 촌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었는지도 나는 그때 산 아래 세상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 길에 와서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이후 우리가 자주 가게 된 그 언덕에서는 저녁이 되면 들판이 내려다 보였다. 작은 언덕들과 낡은 고속도로와 물길들로 된 푸른 들판의 미로 한가운데는 별자리처럼 빛나는 도시가 있었다. 처음 언덕에 올라가 그 도시를 내려다봤던 날 그는 웃으며 사람들이 떠날 때 불을 끄고 가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라고 했다. 반상회 사람들이 매주 드나드는 그 도시였다. 이 대륙에서는 가장 커다란 도시였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삼년 전 이 별에 도착했을 때 처음 본 것도 그런 비슷한 풍경이었던 모양이었다. 너무 반짝이는 아름다운 모습에 그는 이 별에 될 수 있는대로 오래 머물기로 마음 먹었으며 영원히 정착해 볼 생각까지 있었다고 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후에도 이런 축복받은 환경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기도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꿈 같은 곳은 아니라고 나는 조금 화가 나서 말했다. 나는 별로 천국에 살고 있다고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 년전만 해도 따돌림으로 우리 학년(한 학년에는 한 반이 있었다)의 여자애 한 명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져 자살한 일이 있었다. 전날 쓰레기장 옆에서 남자애들까지 합세해서 늦게까지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애가 죽었던 건 아마 지금 당장 때문이 아니라 아득한 미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전체 인구가 아파트 한 단지 주민 수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때 관계가 그대로 나이 든 다음까지 이어졌다. 한 번 잘못 꼬이기 시작한 사람들의 삶은 눈을 돌리고 싶어질 정도로 두려웠다. 그와 놀러다니면서 한참 잊고 있었지만 나도 언제나 꼬투리 잡힐 실수를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조금 특이한 사람이었고 나도 별로 인기 있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권력 그룹과도 별로 친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밤이 깊기 전 언덕을 따라 돌아오는 길에 그는 혹시 다음에는 도시로 내려가 보지 않을래 라는 제안을 했다. 반상회 사람들도 쉬는 주이므로 밤에 다들 잠들었을 때 살짝 나와서 차를 타고 다녀 오면 아무도 모르게 갔다 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우리 별은 자전 주기가 유난히 길어서 밤도 지구 시간으로 스무 시간이 넘었다. 삼년 전 이 아파트 지구에 들어올 때 숨겨 놓고 온 차가 있다고 했다. "반상회 트럭보다 훨씬 빠를 걸. 정말 좋은 차야." 그는 신이 난 듯 말했다.



차를 타고 가는 길 창 밖으로는 점점 빛나는 것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도시에 들어가는 길 양 옆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고층 건물들이 간격을 두고 늘어 서 있었다. 도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가 도시 전차의 야경을 추천했기 때문에 우리는 도시 바깥 쪽 역 근처에 차를 세우고 거기서부터는 전차로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무인 전동차는 여전히 고가 철도를 따라 밤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밤중의 도시의 번쩍이는 조용함과 조용히 흘러가는 천 개의 눈들 같던 강변의 모습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고 있었다.

금빛 도심은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높은 건물들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4차선 도로도 화려한 인도도 텅 비어 있고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어, 마법에 걸린 이상한 숲 같기도 했다. "반상회 아저씨들이 어디를 놀러 다니는지 우리 한 번 구경해볼까?" 그는 다 똑 같은 겉모습의 미로 같아 보이는 금색 거리들을 자신만만하게 찾아 나섰다. 그러나 몇몇 대형 건물들의 빈 로비와 지하철 역 입구들을 두드리고 살펴보던 그는 곧 당황하는 눈치였다. 몇 시간을 헤맨 끝에 결국 우리가 찾아낸 것은 반 이상 텅 빈 한 대형 마트의 창고뿐이었다. 우리 아파트 사람들이 물건을 가져오는 창고는 그곳일 것이라고 했다.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그는 마법 같이 쉽게 비밀 번호를 해제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처음 보는 창고의 크기나 차가움보다 창고가 마치 다 쓴 것처럼 그렇게 많이 비어 있다는 사실에 우선 놀랐다.

우리는 일단 잠깐 쉬기 위해 하늘까지 닿는 도심 건물들 중 하나를 골라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망가져 있어서 계단을 써야 했기 때문에 원래 생각과는 달리 제일 높은 층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다. 무슨 사무실 건물이었던 것 같았다. 우리가 멈춘 층은 보조등이 몇 개 남아 있을뿐 불도 다 나가 건물 안까지 푸른 어둠이 들어와 있었다. 쉬기에는 딱 좋은 밝기였다. 그는 야경을 보기에도 더 좋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베란다 역시 창살도 없고 반쯤 무너져 해적선의 널판지 위에 선 것처럼 까마득한 높이가 발 밑으로 바로 펼쳐져 있었다. 그는 어쩌면 이 방은 부숴진 것이 아니라 공사 중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발 밑에는 바다처럼 펼쳐진 반짝이는 숨죽인 도시였다. 그 너머 어둠 속에 보일락말락 반짝이는 것은 진짜 바다라고 그가 얘기해 주었다. 나는 전쟁 전에 그가 있던 별도 이런 느낌이었는지 물었다. 우주의 중심부에 있던 도시들은 규모가 너무 천문학적으로 거대하기 때문에 여기와는 비슷하면서 또 전혀 비슷하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있던 도시는 거의 별 전체를 거미줄처럼 덮는 도시였다고 했다.

그 베란다에서 그는, 아까는 사실 반상회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도시의 생존자 거주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재미삼아 그걸 보여주려던 거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상황이 생각보다 조금 좋지 않은지도 모르겠네." 그는 말했다. 그는 여기서 좀 더 쉰 다음 다른 빌딩에 가서 조사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은 층까지 올라갔다. 푸른 홀로그램이 별자리로 가득한 하늘처럼 방을 채웠다. 나는 하나도 읽을 수 없는 엄청난 수의 눈부신 문자들이었다. 그 앞에서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후 우리는 처음 들어갔었던 곳과 비슷한 도시의 다른 몇 군데 창고들에도 들렀다. 전부 자물쇠는 풀려 있고 텅 비어 있었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내일 우리 둘 다 잠이 모자라지 않을 때 제대로 설명해 주겠다고 그는 약속했다.



다음 날 방과 후 그는 나를 다시 불러서 내 인생과 미래를 영원히 바꿔 놓았다. 그는 어제 아마 눈치챘겠지만 우리 별의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다고 했다. 도시에 사실 생존자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반상회 사람들이 도시에 갈 때마다 채소 같은 것들과 물자 일부를 몰래 트럭에 싣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또 그의 계산에 따르면 트럭이 도시에 다녀 오는 데 걸리는 시간도 매번 필요 이상으로 길었다. 그래서 그는 반상회 사람들이 도시의 생존자들와 다른 아파트 단지의 생존자 등 사이를 오가며 우리 몰래 중계 무역 같은 걸 해서 자잘한 이익을 챙기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익?" 술이나 담배 같은 사치품 말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하지만 그런 건 전쟁 후 지나온 다른 별들에서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건 그 들고 나가는 것들은 용도가 따로 있다는 거지. 어제 창고들 봤지? 남은 것들 중에 가치 있는게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 사십 년, 길어도 오십 년에서 육십 년. 그게 이 동네가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야. 반상회 아저씨들도 그걸 알고 몇 년 전부터 조금씩 물건을 빼돌리기 시작한 거겠지. 여기서도 가지고 나가고 도시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조금씩 따로 빼놓고 해서 아마 산 속 어디에 쌓아놓는 중이겠지. 사십 년 뒤든 오십 년 뒤든 여기 사람들을 더 이상 다 먹여 살릴 수 없는 때가 오면 살짝 사라질 준비인 거야." 하나 남은 도시 창고의 방비가 허술했던 것으로 보아 다른 아파트 촌들은 한참 전에 다 멸망했거니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다른 동네에서 왔다는 것도 아마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여태까지 무사했던 게 기적이지." 그는 중얼거렸다.

나는 이 도시의 창고 물건이 다 떨어졌다면 다른 도시는 없는지 물었다. "알고 있겠지만 이쪽 대륙에는 원래 없어. 아주 작은 도시들이라면 몰라도." 알고는 있었다. 높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도 들판에 빛의 덩어리는 우리가 다녀온 그 도시 밖에 없었으며 그 외에는 도시의 꼭지점들 끝에서 뻗어나와 멀어져가는 가로등들의 행렬 뿐이었다. "다른 대륙은? 다른 대륙에도 없는 거야?"

그는 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너 왜 우주가 다 사라졌는데 이 별은 이렇게 멀쩡한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중립이었기 때문이라니 그건 아니야. 중립 같은 건 없었어." 이 별이 혼자 이렇게 평화롭고 안전해 보이는 건 인류가 개발해낸 가장 끔찍한 무기가 쓰였던 곳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당시 움직이는 유기체만을 깨끗하게 말살시킬 수 있는 신종 하얀 무기가 개발됐었다고 했다. 다른 피해는 입히지 않았고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별에 건물도 숲도 다 멀쩡한데 동물이 하나도 없는 거라고 그는 말했다. 그 무기는 전쟁 초기 이 별에 역사상 최대의 대대적인 규모로 쓰인 뒤 충격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적어도 행성 규모의 사용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금지되었다고 했다. "정치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그때 이 별은 끝난 셈이었기 때문에 달리 폭격을 할 필요도 없고 행성 내 전쟁이 일어날 필요도 없었던 거지." 하지만 하얀 무기의 표적은 행성 문명의 중심이던 바다 건너 대륙의 메트로폴리스였기 때문에 이쪽 대륙에는 어떻게 미리 정보를 듣고 산 속으로 피신한 사람들 중심으로 간간히 생존자들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원래대로라면 도시 물건이 떨어진 다음에도 풀이랑 열매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도 있었겠지." 그가 이 곳에 오는 길에 들렀던 수많은 황폐화된 별들 중에는 이미 채집 생활이나 수렵 생활로 후퇴한 별들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 변화는 의외로 빨리 일어난다고 했다. 그렇지만 특별한 무기가 쓰였던 것 때문에 이 별에는 슬슬 한계가 오기 시작한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요 십 년간 아이가 태어난걸 본 적이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전에 밭 일 하는 아저씨들도 요즘 식물이 잘 안 자라는 느낌이라고 했었지." 몇 십년이 지나지 않아 이 별은 나이 든 사람들로만 가득할 것이며 이삼 백년이 지나면 풀도 아무 것도 없는 빈 세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다른 별들은 몇 천 몇 만년이 지나면 문명이 다시 자라나는 실낱 같은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얀 무기의 장기적 부작용 중의 하나라고 했다. "이런 식의 저장해 놓은 걸 조금씩 갉아먹는 식의 삶은 어차피 오래 지속될 수는 없는 거야." 그는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는 때마침 어제 컴퓨터로 남은 대형 창고들을 검색하던 중에 의외의 신호를 발견했다고 했다. 문명이 이미 멸망한 후 도착했던 신호였다. 미지의 수신자를 찾아 무작위로 발사한 신호 같았다고 했다. 발신된 방향은 인류의 오래된 고향 지구 쪽이었으며, 100% 해독할 수는 없었지만 문명을 새로 재건하려는 시도를 하는 조직이 우주에 흩어져 있는 생존자들을 향해 보내는 일종의 소집 요청 같았다고 했다. 메시지의 내용도 형식도 그가 그 동안 우주를 돌아다니면서 보았던 쇠퇴해가는 문명들이나 군사 정권들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으며, 우주를 건너 그런 걸 보낼 능력이 있다는 자체가 과거의 고도 기술을 다른 별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보존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는 전쟁 발발 전 이미 반전 운동은 가망이 없는 것으로 포기하고 전후의 문명 재건 준비를 하는 조직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같이 가보면 어때?" 그는 말했다. 나는 말을 잃었다. 우주가 좋은 곳이거나 편안한 곳이라고 속이려는 건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만나게 될 우주는 숨쉬기 힘든 공기와 좁고 답답한 우주선과 쉘터들과 복잡한 역사의 흔적들로 가득 찬 기분 나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겠지만, 또 이보다 한산한 살기 좋은 곳은 우주 전체를 뒤져도 다시 만나기 어렵겠지만 영원히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이상 같이 가볼 생각은 없는지 그는 물었다. 나는 풀 위에 팔을 베고 누웠다. 머리 위 거대한 하늘에는 먼 별들과 하얀 풀씨들이 같이 떠다니고 있었다. 별들과 비행기와 종이 비행기와 투명한 풍선들이 떠다니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그날 나에게 그 동안 살아왔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래도 이런 스케일이 큰 제안에는 조금은 서로 간의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영생 수술을 받은 건 열여섯 열일곱 살 쯤 됐을 때였어." 나는 전쟁 전에는 누구나 다 그처럼 영원히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그는 전혀 아니며 오히려 그 수술은 우주 시대에도 받은 사람이 백 명 단위를 넘지 않는, 나중에는 일종의 도시 전설처럼 되버린 수술이라고 했다. 수술 효과는 원래 500년만 지속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사실 영원히 살게 해주는 수술도 아니었지만 다들 영생 수술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오백 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정말 영생 수술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튼 여러 가지로 확인되지 않은 것도 많고 문제가 많은 수술이었어. 결국 상용화된지 일 년도 안 되서 폐지됐어. 빈부격차나 유전자 조작 문제 같은 것들 때문에 반대 시위도 심했고 또 그 사이에 중요한 부작용이 하나 발견됐거든. 이 수술은 자세히는 나도 모르지만 세포의 재생 능력을 강화시키는 수술이었는데 사람이 죽어야 할때 죽지 못하는 일이 생겼거든. 마치 껍질이 딱딱한 바퀴벌레가 모기나 날벌레보다 더 잘 안 죽지만 그래서 결국은 훨씬 더 힘들게 죽게 되는 것처럼 이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잘못하면 엄청나게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 거야." 당시 지진으로 매몰 사고가 일어났는데 깔린 사람이 하필 그 수술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온 몸이 심하게 깔려 원래대로라면 즉사했을 상황이었는데, 세포의 강화된 재생 능력 때문에 죽지는 않았지만 삼일 뒤 구출되었을 때는 이미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사건을 계기로 영생 수술은 인간의 존엄성 보호를 이유로 금지되었다고 했다.

그는 몸이 조금씩 마비되어서 죽는 희귀병에 걸렸던 것을 집에서 가산을 털어 수술을 시켜 주었다고 했다. "내 병의 진척을 멈출 방법은 그 수술을 받는 것 밖에 없다고 의사가 그랬거든. 그 수술비로 완전히 집안 뿌리를 뽑아서 결국 집도 지하 도시로 이사했어." 지하는 공기가 답답하고 하늘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영원히 살게 된다고 해서 갑자기 전과는 다른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었어. 나는 집에서 바퀴벌레처럼 살았어. 죽는게 너무 무서웠거든. 한 동안은 누전 사고나 지진이 날까봐 밤에 잠도 오지 않았어." 그는 재택 아르바이트와 홈 쇼핑으로 살았다고 했다. 어차피 영원히 미성년자의 겉모습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었다고 했다. 수술은 노화 뿐만 아니라 성장도 멈추는 수술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영생 수술을 받으면 프라이버시 보호와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 병원과 정부 측의 공동애프터 서비스로 정기적으로 신분을 갱신하는 시스템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폐지 논쟁을 계기로 사람들 반감이 심해진 이후 더더욱 관리가 엄격해졌다고 했다. 그래서 그도 수술을 받은 사람을 만난 적은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단지 뉴스에는 주기적으로 옛날 영생 수술을 받았던 사람들의 끔찍한 죽음이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게 보도됐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더 사람이 무서워져서 집에서 나갈 수가 없었어. 바보 같은 일이지." 신분 보호를 위해 10년마다 한 번씩은 도시의 다른 구역으로 이사를 가야 했는데 그때의 그에게는 그 준비와 이동 과정이 인생 최대의 스트레스였다고 했다. 다행히 도시는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평생 가본 적 없이 죽는 사람이 대부분일 정도로 천문학적으로 넓은 곳이어서, 다른 별이나 다른 도시로 이사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살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몇 백년이 지나 있었고 바깥 도시는 언제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반전 시위로 떠들썩했어. 부모님은 물론 이미 없었지. 우리 도시는 우주의 중심 중의 중심에 있었는데 정치적으로도 복잡하게 나뉘어 있어서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폐허가 될게 뻔한 곳이었어." 그는 그때 쯤에는 정신도 불명확해서 딱히 전쟁에 대해 어떤 생각이 있던건 아니고 반대했던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따라 거리에 나갔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게 이미 눈 앞에 다가온 전쟁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시가전이 시작되고 도시가 불꽃놀이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던 날 거리를 헤매다가 그는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이미 500년 기한이 가까워져 있었으므로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 도시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러므로 그곳이 어떻게 되든 우주가 멸망하든 멸망하지 않든 두려워할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그때 시가전을 틈타 여객선 크기의 대형 우주선을 훔친 뒤 그 다음에는 혼자 우주를 돌아다니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거의 폐허만 남은 몰락해가는 우주에서 무시무시한 광경도 많이 보았고 위험한 적도 많았지만, 그런 식의 삶도 의외로 괜찮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 별의 빛이 내리는 언덕에 도착하기까지 벌써 칠팔백 년을 그는 그런 식으로 살아 온 셈이었다.

"우주선 같은 건 도대체 어떻게 훔쳐서 어떻게 운전한 거야?" 나는 물었다. 오래 살다보면 나름 자잘하게 배우는 것들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의외로 별 것 아니니까 나중에 우주에 나가게 되면 가르쳐줄게." 그는 가볍게 말했다. 물론 우주에서는 그도 모르는 것이 훨씬 많으므로 알려줄 수 없는 것들도 많을 거라고 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그는 내게도 얘기를 좀 해달라고 했다. 나는 아직 몇 년 산게 없어서 할 말이 없다고 말하려다 문득 엄마를 생각했다. 나는, 엄마는 내가 너무 행복해지기를 바래서 나는 도대체 얼마나 행복해져야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반상회에 들어가는 정도로는 안 되고 그보다 훨씬 몇 배는 더 행복한 삶을 살아야만 할 것 같다고 했다.

저녁이 되어가는 하늘에는 벌써 아름다운 푸른 색이 내려와 있었다. 한편으로 나는 요 일년 간 점점 더 많이 얘기를 들어 온 미스터리 가득한 우주의 별들과 멸망한 수많은 세계들, 정체를 숨기고 영원히 사는 사람들과 또 많은 사람들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들은 우주는 하늘에서 불꽃이 떨어지고 사람이 날파리나 바퀴벌레처럼 죽게 되며 알 수 없는 속임수들로 가득 찬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속임수들로 이루어진 잔인한 세계인건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매일 조금씩 음식과 통조림들을 숨겨 왔다는 반상회 아저씨들의 얼굴과 잔인하고 똑똑한 반의 잘 나가는 애들의 얼굴을, 그리고 물자가 부족해지기 시작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지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아버지와 엄마와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했으며, 다른 몇 억 인구와 함께 멸망하지 않고 이 산 속 아파트로 오기 위해 우리 조상들이 어떤 일들을 해야 했을지도 생각했다.

"그게 언제라고 했지?" 나는 물었다. "사십 년에서 육십년 뒤. 그러니까 너희 부모님은 거의 분명히 돌아가신 뒤야." 나는 그게 그가 나를 위해 생각해준 변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밤은 평소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이의 파란 색이었다. 그 별의 어둠은 늘 파란 색이었다. 그가 처음 우주선에서 내렸을 때 그를 놀래키고 사랑에 빠지게 했다던 바로 그 파란 색이었다.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내 앞에 펼쳐진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눈 앞에는 두 종류의 미래가 있었다.

한편에는 처음 사십 년 정도의 그럭저럭한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질 것은 불도 빛도 아무 것도 없이 이 별에 갇혀버리는 미래였다. 그는 지금 전력을 있는 대로 낭비하고 있는 저 언덕 아래 도시의 불도 머지 않아 꺼질 거라고 했었다. 그러므로 이 별에 남는다면 결국은 어둠 속에 조금씩 느리게 죽어가는,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인간이 얼마나 천천히 어렵게 죽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의사도 없고 병원도 없는 그 별에서 나이 든 사람들과 병자들은 때로는 몇 달 몇 년씩 걸려 고통 속에 죽어가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집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또 나는 그가 말했던 대로 점점 아이들 수가 적어지고 있으며 이미 아파트 사람들은 거의 중년의 아저씨와 노인들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십 년이 지났을 때쯤에는 정말 늙은 사람과 죽은 사람들로만 가득한 별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나도 돌이킬 수 없이 늙어 있을 것이었다. 다른 한편의 미래에는 알 수 없는 언어들과 무수한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미지투성이인 우주가 있었다.

그는 대 전쟁이 시작되던 날 폭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때 갑자기 자유라는 걸 깨달았던 얘기를 해주며, 집에 오는 길 헤어지기 직전에는 내게도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었다.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같은 건 잊어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망설였다. 도시의 컴퓨터 방에서 읽을 수 없는 문자들로 가득 찬 홀로그램에 둘러 싸였던 때의 경험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살고 있던 세상은 무한한 별들의 우주 속 작은 변방 구석의 한 점 같은 폐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우주의 광활함에 대해 알아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았다. 그는 우주는 복잡한 곳이어서 처음에는 귀찮은 배울 것들이 많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었다. 나는 그 말이 반쯤만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망설였던건 그날 밤 베란다에서 잠을 못 자고 있던 엄마의 뒷모습을 봤을 때였다. 나는 여태까지 내가 얼마나 이 낡고 안전한 엄마 아빠의 집 뒤에 숨어 있었는지, 또 엄마도 한때는 나처럼 아마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가 빛나는 도시와 우주를 동경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야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중인지 깨달았던 것 같다. 나는 알지도 못하고 믿을 수 없는, 혼자 삶을 살아가는 남자와 돌아올 수 없을만큼 먼 우주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와 나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광활한 우주에서 혼자가 되리란 것도 어쩐지 예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엄마와 우주에 나갈 수는 없었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내 방에 돌아와 역시 이 별에 계속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내가 우주로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시간이 넘게 지나도 푸른 우주의 광활함과 미래에 대한 생각에 마음이 열이 나듯 뜨거워서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불을 끈지 몇 시간이나 지난 뒤였지만 방의 천장과 벽들에는 여전히 온통 식지 않은 열기가 배어 있는 듯했다.

아주 먼 우주나 바다에서 온 것 같은 검은 바람이 옷 속을 통과해 지나가는 밤이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태까지의 한여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바람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우주로 가지 않기로 결정하면 이번 가을은 어떤 느낌이 될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다음에는 긴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벌떡 일어났다. 우주로 가자는 것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초대라는 사실을 나는 그날 밤 결국 스스로에게 인정했다. 나는 행복해지기로 결정했다.

며칠 후에는 하교 길 학교 뒷문 근처에서 어릴 적부터 단짝이던 친구와 마주쳤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학교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우주인을 따라 돌아다니던 사이 그가 따돌림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는 걸 나는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반 애들 간의 관계나 끊이지 않는 말들, 소문들, 교실의 약간 곰팡이 섞인 차가운 분위기 같은 것을 알고 싶지 않았고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행복해지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이 년 뒤 우리가 우주로 떠나는 날은 흔치 않게 흐린 날이었다. 나는 몰래 일찍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와 두 시간 정도 새벽 길을 달려, 아직 날이 완전히 개지 않았을 무렵 회색 해변에 도착했다. 그가 우주선을 숨겨 둔 곳이었다. 그곳까지 가는 길 회색에 잠긴 새벽 하늘은 아주 가까이 내려와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평소보다 더 멀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기나긴 시간이나 역사 같은 잘 알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날씨였다.

그는 그 동안 아파트 촌에서 종적을 감추고 있었다. 우주로 떠나기로 정한 그날 이후 처음 반 년 동안은 모두 전과 다름없이 지냈다. 하지만 반년쯤 지났을 때 그는 동네를 떠났다. 숨겨뒀던 우주선을 청소하고 수리하고 물자를 보급하러 반대쪽 대륙까지 다녀오는 등 준비할 것이 많았다고 했다. 비행기는 생각보다 아주 크고 한적했다. 만약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면 몇 가족 쯤은 더 데리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우주로 모험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날은 마치 옛날 지구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배를 타고 안개 속 미지의 바다로 떠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십 년이 조금 넘게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광활한 푸른 우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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