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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림보의 프랭클린

2024.04.15 01:1804.15

때는 1778년 4월이다. 볼테르는 이십팔년 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두 달 전 고향 파리에 금의환향하였다. 긴 세월 그의 보금자리가 되어 준 도시 페르네를 떠나 파리로 돌아오는 동안 그가 지나는 길마다 그를 환영하는 인파가 환호와 박수로 그를 맞이했다. 페르네의 주민들은 볼테르의 귀향을 축하하면서도 볼테르와 작별하기를 못내 아쉬워하였다. 그는 페르네의 주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마을의 커다란 자랑거리였을 뿐 아니라 애초 이렇다 할 것 없던 작은 마을 페르네를 찾아와 공장을 짓고 이렇게 번듯한 마을로 육성한 장본인이 볼테르였던 까닭이다. 볼테르가 페르네를 떠나는 날 마을의 주민들은, 응당 그들 가운데 여럿은 볼테르가 운영하는 공장의 노동자들인데, 마을 밖까지 무리 지어 나와 오래도록 볼테르를 환송하였다.

어느덧 84세의 고령이 된 볼테르는 파리로 돌아온지 몇 주가 흘렀으나 아직 여독에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긴 세월 볼테르는 귀족의 권력을 조롱하고 평민의 무지를 비아냥대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가 세상과 다투는 동안 피로는 조금씩 그의 신체를 보이지 않게 침식해 왔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좀처럼 지치지 않았으므로 비록 그의 육신은 어느 때보다도 노쇠해 있었으나 그의 투지와 총기만은 과거와 다름이 없었다. 이제 프랑스 최고의 유명인사가 된 그는 단지 프랑스인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프랑스인 모두의 상징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과학아카데미 회의에 참석하려고 길을 나선 참이다. 오늘 저녁 파리에서 특별한 만남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볼테르 선생이 오십니다!”

볼테르가 탑승한 마차가 도착하기 전부터 아카데미 홀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홀에 모인 사람들은 제각각 화려한 옷을 차려 입고 군데군데 모여 활기차게 대화를 주고받는다. 아카데미 홀에 볼테르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일순간 대화를 멈추었다. 볼테르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홀 안으로 들어섰다. 낮은 속삭임 속에서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가 걸어오는 경로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이 볼테르에게 길을 양보하며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이윽고 볼테르가 나아가는 길 앞으로 인파가 좌우로 길게 갈라졌다. 갈라진 인파 끝에 한 인물이 두 팔을 벌려 볼테르를 맞이하며 천천히 걸어온다.

“어서 오십시오. 볼테르 선생.”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이다. 볼테르보다 열두 살 아래이지만 그 역시 72세의 노인이었다. 프랭클린은 2년 전 한달 간의 항해를 거쳐 프랑스에 도착했다. 신장결석을 앓는 그에게는 더 없이 지루하고 고단한 항해였다. 프랭클린은 그해 7월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공공연히 브리튼의 반역자가 되었고 곧바로 프랑스에 대사로 부임하여 이제껏 군사 협력을 구하려 애쓰고 있다. 얼마 전 필라델피아에 있는 프랭클린의 집에 브리튼군이 침입하여 그의 초상화를 탈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행히 그의 가족은 미리 피난하여 집은 비어 있었다. 전쟁을 끝내려면 아메리카는 프랑스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프랑스의 정계는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사람마다 다른 주장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브리튼은 프랑스의 적국입니다. 브리튼의 식민지인 아메리카의 독립을 돕는 것이 프랑스가 브리튼에 타격을 주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귀하의 말씀은 일견 옳습니다만 사태를 지나치게 도식화한 발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도 아메리카를 지원하자는 대의에는 동의합니다. 허나 지금 프랑스는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아메리카를 도울 여력이 없습니다.”

프랭클린은 외교관으로서 프랑스 시민들의 지지와 호감을 끌어내는 데에 자신의 개인적 명성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프랑스인들이 프랭클린의 안경 쓴 모습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프랭클린은 항상 안경을 착용하고 외출했다. 그는 친근하고 편안한 인상으로 프랑스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것이 프랭클린의 본모습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심지어 프랭클린 본인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비록 내가 퀘이커가 아닐지라도 이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면 굳이 그걸 깨트리려 애쓸 필요는 없겠지. 더구나 그 믿음이 서로에게 유익하다면 말이야.”

프랑스인들은 프랭클린이 쓰고 온 털모자를 아메리카인의 담대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겼다. 프랭클린이 프랑스 시민을 끌어당기는 매력은 그의 신대륙 사람다운 소탈함과 분방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기 실험의 명성 덕이었다. 프랭클린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았으므로 프랑스인의 기대를 깨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제 털모자를 쓰고 밖에 나가보니 프랑스인 속에서 시선을 끌기가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네. 비싸고 멋진 가발을 쓴 사람은 파리에 흔하니까.”

프랑스에서 프랭클린은 발명가이자 작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볼테르의 다재다능처럼 프랭클린의 다재다능은 프랑스에서 명성이 높았고, 어디서나 찬사를 받았다. 프랑스에 볼테르가 있다면 아메리카에는 프랭클린이 있다고 말해도 손색이 없었다. 어떤 때는 오히려 볼테르보다도 더 많은 존경과 애정을 받는 듯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아메리카인이었다.

이렇게 당대의 노숙한 두 위인이 공개 장소에서 만나는 순간은 다시없을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아카데미 홀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 귀중한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대감에 찬 시선으로 두 위인의 옆모습을 따라가고 있다. 인파 가운데 두 사람의 걸음이 멈추고 드디어 프랭클린과 볼테르가 마주하여 손을 잡자 늙은 두 현자를 둘러싼 사람들의 목청이 높아졌다.

“포옹을 하세요! 프랑스식으로요!”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키려면 그들의 소원을 성취하도록 돕는 길 밖에 없었다. 두 노인은 서로를 끌어안고 볼을 맞대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크게 환호했다.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이 장면을 본 목격자들은 자신이 본 모습을 자랑스럽게 주변에 전달했다. 머지않아 두 늙은 현자의 감동적인 포옹 장면을 묘사하는 소식이 프랑스 곳곳에 퍼질 것이다.

잠시 사람들의 흥분이 가라앉은 사이에 볼테르와 프랭클린은 주변의 소란을 뒤로 하고 둘만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두 달 전에 제가 선생을 뵈러 댁을 방문하지 않았습니까?”

볼테르는 금세 기억을 떠올리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미소로 화답했다. 지난 2월 프랭클린은 이제 막 귀국한 볼테르에게 축하인사를 하려고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날 프랭클린은 볼테르에게 경의를 드러내려고 평소보다 격식 있는 복장을 갖추어 입었다. 볼테르와 그의 제자 십여 명이 프랭클린 일행을 맞아 주었다.

“이런 누옥을 찾아와 주시니 감사하오이다. 프랭클린 대사.”

볼테르의 겸사일 뿐 누옥일 리 없는 사택이다. 다만 가식을 싫어하는 그의 성품을 따라 책장에는 책이 가득할 뿐이고 벽에는 만세사표 콘푸시우스의 초상만이 단출히 걸려 있다. 안내를 받는 동안 프랭클린의 옆에는 8살 소년이 예절 바르게 따르고 있었다. 프랭클린은 볼테르에게 외손자를 소개하며 소년의 장래를 축복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볼테르는 흔쾌히 부탁을 수락했다. 볼테르는 젊은 시절 수년간 브리튼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익숙해진 영어로 “신과 자유가 함께 하기를”이라 말하며 소년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을 베풀었다. 프랭클린은 그 일을 두고 볼테르에게 다시 감사를 전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사가 발명한 피뢰침은 이제 프랑스 어디서나 높은 첨탑마다 볼 수 있소이다.”

“저도 보았습니다. 제가 발명한 물건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한 보상을 받은 기분이 듭니다.”

“대사는 피뢰침 발명으로 천공에서 벼락을 빼앗은 셈이군요.”

“과찬이십니다. 볼테르 선생.”

“그리고 지금은 브리튼의 손아귀에서 채찍을 빼앗으려 애쓰는군요……”

“저와 저의 후손이 자유로운 땅에서 살기 위한 노력이죠. 저의 노력이 보람을 얻기를 항상 기원합니다.”

그때 볼테르가 잠시 말을 멈추고 가볍게 재채기를 하였다. 프랭클린은 볼테르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신께서 선생을 축복하시기를!” 하고 말을 건네었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박수를 쳤다. 볼테르의 건강을 염려하는 프랭클린의 마음이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진 모양이다.

떠들썩한 아카데미 홀 안의 공기는 평소보다 갑절 화기애애하였으나 홀 바깥의 공기는 모두 그렇지는 않았다. 일각에서는 두 사람의 만남을 폄하하고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다.

“반역자와 신성모독자가 만나는 일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볼테르는 일생에 걸쳐 줄기차게 교회의 부덕과 신자들의 광신을 비난하여 셀 수 없는 적을 만들었으며 그 자신도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세상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볼테르는 스스로 무신론자라 여긴 적이 없었다. 다만 대지진 같은 자연재해를 두고 신의 징벌 운운하는 자들이나 그 부조리한 언설에 권위를 부여하여 멋대로 휘두르는 파렴치를 강경히 혐오했을 뿐이라 자부하였다. 생의 황혼에 접어든 볼테르는 이제까지 자처해온 역할을 끝내 완수할 작성이었다.

한편 브리튼 편에 서서 프랭클린의 외교적 노력을 무산시키려는 밀정들은 프랭클린에 관하여 악의적 소문과 은밀한 소식을 뒤섞어 퍼트리고 있었다. 프랭클린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풍문, 즉 프랭클린이 뒷구멍으로 브리튼에 협력하는 이중 첩자라는 풍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본디 외교란 사실과 허위의 경계가 모호하기 마련이라는 투로 넘길 뿐이었다.

“냉소는 내 삶의 태도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그렇지만 불변의 친구는 절대 없다고 생각한다네. 오직 ‘친구다운 행동’으로 우정을 증명할 뿐이지. 나는 브리튼과 아메리카가 공존평화하기를 긴 세월 고대하고 단결된 우정을 쌓으려 노력했지만 내 노력은 결실이 되지 않았지.”

프랭클린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이어서 말한다.

“내가 윌리엄을 총독으로 임명 받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는가? 그런데 지금 결과를 보게. 나는 브리튼의 반역자가 되고 윌리엄은 아메리카의 반역자가 되지 않았나?”

아버지 프랭클린의 전설적인 연날리기 실험을 함께했던 아들 윌리엄이다.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 일찌감치 프랭클린은 브리튼을 향한 그의 충성심이 응답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은 그의 아버지와는 다른 삶의 길을 선택했다.

“한동안 나는 아메리카의 권익과 브리튼의 통치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기대를 붙잡고 있었어. 윌리엄이 총독으로 임명된다면 우리 가문의 충성심을 인정받을 기회이자 가문의 큰 명예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윌리엄을 뉴저지 총독으로 천거했다네.”

아버지 음덕에 힘입어 윌리엄은 무탈히 총독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조지 3세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후 임지인 뉴저지로 떠났다. 그곳에서 윌리엄은 총독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의 본분을 지켰다. 그렇게 스스로 국왕의 충성스러운 신하임을 입증한 아들을 프랭클린은 자랑으로 여겼다.

윌리엄이 국왕의 신하로 본분을 다하는 동안 프랭클린 역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1765년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대표로 선출된 프랭클린은 런던으로 건너가 인지세법 철회를 주장하였고 다음 해 결국 철회를 받아내었다. 이 일로 프랭클린은 식민지의 대변자로 명성을 얻었다. 필라델피아의 어느 술집에서나 프랭클린의 이름을 외치며 건배를 하는 주당을 볼 수 있었다. 부당한 과세를 반대하는 주장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표어에 함축되었다.

1773년 보스턴 항구에서는 홍차 상자 342개가 바다에 빠지는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바다 일대는 한동안 옅은 갈색으로 물들었다. 보스턴에서 일어난 손괴 사건을 처벌하려고 브리튼은 일단의 강력한 처벌법을 제정했다. 이 법률에 식민지는 강하게 반발했다. 그것은 이른바 ‘참을 수 없는 법’이었다.

“나는 식민지와 본토가 동등한 참정권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확신했다네. 우리가 진정으로 브리튼의 백성이라면 응당 우리의 권익을 대표하는 자가 브리튼 의회에 참여해야 하겠지. 하지만 내 주장은 모욕 받았고 우리는 억압을 감수하기를 요구받았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차별이었지.”

프랭클린이 제퍼슨을 도와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있을 때 윌리엄은 10년 넘게 총독으로 재임 중이었다. 프랭클린은 뉴저지에 있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편에 서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뉴저지 의회가 독립선언에 참여하기로 결의했을 때 윌리엄은 국왕의 신하로 남기로 결심했다.

“윌리엄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윌리엄은 내게 정치 일선에서 은퇴하고 집에서 편안히 휴식하라고 하더군. 참견하지 말하는 뜻이 아니겠나? 그 뒤로 나와 아들 사이는 브리튼과 아메리카 사이처럼 멀어져 버렸다네.”

뉴저지 의회는 총독을 자유의 적으로 간주하여 가택연금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프랭클린 가문의 아들임을 배려한 조치였다. 윌리엄은 위법적인 의회의 결정이라며 항의하였다. 가택연금 중 윌리엄은 브리튼에 충성하는 다른 아메리카인 동지를 은밀히 규합하여 독립 반대 투쟁에 앞장섰다. 그 일로 윌리엄은 수개월 독방에 갇혀야 했다. 그리고 2년째 감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에 내가 저지른 과오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더군. 내가 젊었을 때 욕정을 견디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쾌락을 탐닉하다가 뜻하지 않게 얻은 아이일세. 그렇게 태어난 건 내 잘못이지 윌리엄 잘못이 있겠나? 친모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랐으니 나에게 원망이 있겠지. 그러니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방해하는 충신 아들을 둔 것은 내가 받는 형벌이라고 여기는 수 밖에는 없다네.”

아카데미 회의는 성황리에 끝나고 폐회하였다. 며칠 뒤 프랭클린은 볼테르의 집에 다시 방문했다. 볼테르는 지난번보다 한결 반갑게 프랭클린을 환영했다. 프랭클린은 오후 긴 시간을 볼테르의 집에 머물렀다. 프랭클린은 종종 문법이 틀리기는 해도 불어를 구사할 수 있고, 볼테르는 영어를 능숙하게 말할 수 있으므로, 두 노인은 영어와 불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런던에 계실 때 일을 듣고 싶습니다. 볼테르 선생께서는 런던에 계실 적에 뉴턴 선생의 장례식에 참석하셨지요.”

“그렇소이다. 내가 일생 존경한 뉴턴 선생이 타계하셨다니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뉴턴 선생의 관을 서로 운구하겠다고 귀족과 대법관이 다투는 모습을 보고 무척 놀랐소이다. 국장으로 학자를 예우하는 브리튼의 풍속이 부러웠다오.”

“제가 비록 브리튼의 모든 풍속을 아끼지는 않습니다만 간혹 그리움이 있습니다. 저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 전까지 브리튼에 충성을 바쳤고 17년 간 런던을 활보했습니다. 아직도 템즈강과 런던 거리가 눈에 선합니다.”

“그게 바로 대사가 브리튼의 편이라 의심받는 이유 아니겠소이까. 나 또한 브리튼의 풍속을 비호하고 프랑스의 풍속을 비난한다는 의심을 빈번히 받았소이다. 내가 쓴 편지가 화근이 되었다는 건 아마 아실 게요.”

“어떤 사람들은 진실의 모든 측면을 동시에 보려고 하지 않는 듯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정체를 말로 증명하려 말고 행동으로 조성하여 보이는 길 밖에 없소이다.”

볼테르는 프랭클린을 몇 차례 만난 뒤 그에게 무척 호의를 느꼈던 모양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볼테르는 프랭클린의 안내를 따라 파리에 근거지를 둔 메이슨 롯지 ‘구자매(Nine Sisters)’를 방문하였고 곧이어 입회하였다.

“오직 자유의 정신을 옹호한다는 일념으로 입회하고자 합니다.”

“메이슨 형제가 된 우리 볼테르 선생을 위하여 건배합시다!”

안타깝게도 볼테르는 프리메이슨이 되고 불과 한 달 만에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프랭클린은 볼테르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선생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당신께서 젊었더라면 과감히 신대륙으로 이주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라 말하며 애석함을 나타냈다.

볼테르의 사망 후 프랭클린은 몸소 구자매 롯지의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 1781년까지 삼 년 간 롯지를 이끌었다. 프랭클린이 롯지를 이끄는 동안 프랭클린의 친손자 윌리엄 템플을 비롯해 여러 아메리카인이 연달아 입회했다. 전쟁 기간 동안 구자매 롯지의 활동 목표는 하나로 집중되었다.

“프랑스가 아메리카의 자유를 지지하도록 구자매 형제들의 힘을 모아야 합니다.”

구자매 롯지는 프랑스 시민 사이에 아메리카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을 촉진하고 유리한 정책 환경을 조성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프랭클린은 프랑스의 동맹을 얻어내려고 안팎에서 애를 썼지만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재정난을 겪는 중에 브리튼과 재차 대립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프랑스가 아메리카를 지원하여 얻게 되는 실리는 커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왕권에 도전하는 브리튼의 식민지를 무분별하게 지원했다가는 다음 차례에는 프랑스 내부에서 왕권에 도전하는 움직임이 생길 우려가 있었다. 루이 16세가 차일피일 결단을 미루는 동안 전쟁은 한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아메리카군이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으면 프랑스는 동맹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야.”

프랑스가 아메리카를 지원해야 하는 어떤 이성적 사유보다도 중대한 감정적 사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적대감이다. 프랑스는 브리튼의 패배를 열망하고 있으며 프랭클린은 그 점을 강조하고 자극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군이 승리의 가능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럴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프랭클린은 승전보가 전해져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사라토가에서 아메리카군이 대승을 거두고 브리튼군 장군을 포로로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첫 대승이었다. 전세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전면적인 우세는 아니지만 프랭클린은 이 승리를 지렛대 삼아 아메리카의 최종 승리가 가능하다는 주장에 무게를 실을 수 있었다. 실로 그 길 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나는 만일 아메리카군이 프랑스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승리해서 아메리카와 브리튼이 직접 평화조약을 맺는다면 장래 프랑스는 두배의 위협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다는 태도를 내비쳤다네.”

프랑스는 브리튼에 뼈아픈 패배를 안겨줄 기회를 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루이 16세는 아메리카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778년 2월 프랑스와 아메리카 사이에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메리카는 프랑스의 군사 지원을 약속 받았다. 이제 프랭클린은 이 기회를 지렛대 삼아 브리튼을 압박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전쟁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동맹 조약이 2월에 체결되고 3월에는 프랑스군이 참전을 시작했다. 볼테르는 4월에 프랭클린을 만나고 5월에 세상을 떠났다. 윌리엄은 9월에 포로교환으로 풀려 났다. 뉴욕은 아직 브리튼군이 점령한 지역이었고 브리튼 충성파의 중심지였다. 석방 후 윌리엄은 뉴욕으로 가서 충성파 모임의 회장이 되었다. 윌리엄은 첩자 조직과 게릴라 부대를 결성해서 독립 반대 투쟁에 나섰다. 윌리엄은 아버지와 같은 편에 서고 싶지 않았다.

*****

프랭클린이 파리에서 오직 프랑스와의 외교와 동맹 체결만을 목표로 분주했다고 믿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구자매 롯지를 이끌기 훨씬 이전부터 프랭클린은 메이슨 조직에 관여했다. 기실 프랭클린과 프리메이슨의 인연은 약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 ‘펜실베이니아 그랜드 롯지’는 1727년 필라델피아에 설립된 아메리카 최초의 프리메이슨 그랜드 롯지이자 세계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그랜드 롯지이다. 그리고 1729년 당시 24세의 청년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의 인쇄업자이자 신문 발행인으로서 프리메이슨 집회에 초청받으려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었다.

“당시 필라델피아의 영향력 있는 사업가와 법률가 가운데 다수가 프리메이슨이었어. 나는 프리메이슨 입회가 사회적 성공을 달성하는 데에 좋은 기회가 되리라 여겼지.”

프랭클린은 보스턴의 가난한 가정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도 막내아들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도 막내아들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누구보다도 자기 삶을 개척하며 살아갈 운명이었다. 프랭클린은 근면과 검소를 중히 여겼으며 자신의 노력으로 사회적 신분 상승을 달성하려 하였다. 요컨대 그는 자수성가를 하고자 하였다. 그는 스스로 정직하려 노력하는 만큼 동시에 자신의 정직을 사람들이 인정해 주기를 소망했다.

“열두 살까지 아버지 가게에서 양초를 만들었지. 나는 그 일이 너무 따분했어. 다행히 아버지는 나에게 양초를 계속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지. 그러고 나서 천직을 찾은 거야. 인쇄업이었지.”

프랭클린은 이복 형 제임스가 운영하는 인쇄소에 도제로 들어갔다. 그가 열두 살 때였다. 프랭클린은 그곳에서 많은 책을 빌려 읽었다. 저녁에 빌린 책은 다음 날 돌려 놓아야 했다. 비록 학교는 일 년 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호기심과 지식욕이 많았던 탓에 프랭클린은 많은 책을 읽었고 읽은 책의 문장을 따라 쓰며 글쓰기를 스스로 연습했다. 수년 후 프랭클린은 형이 발행하는 신문에 가명으로 기사를 써서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런 프랭클린을 제임스는 함부로 대하고 가끔 매질을 할 때도 있었다.

“형은 내가 똑똑한 척한다고 느낀 걸까? 형은 나를 눌러 이기려 들었어. 게다가 나도 지려고 하지 않았지. 내가 더 똑똑하다고 생각했거든.”

프랭클린이 도제에서 풀려나는 계기는 이를테면 필화 사건이었다. 형 제임스가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에 실은 기사가 문제가 되어 지방 당국에게 신문 발행 금지 명령을 받았다. 제임스는 신문 발행인 이름을 벤자민 프랭클린으로 변경하는 방식으로 당국의 명령을 회피하고 나름의 언론 자유를 지켰다고 생각했다.

“벤자민! 인쇄소가 살아야 너도 일을 계속할 수 있어! 네가 머뭇거릴수록 경쟁 인쇄소가 우리를 추격하게 된다고! 이대로 신문이 폐간되는 걸 보고 싶지는 않겠지? 어서 여기에 서명해!”

제임스는 발행인 자리를 넘겨주면서 공식 계약서에는 도제 관계를 종료한다고 적었지만, 이면 계약서에는 도제 관계가 계속된다고 적었다. 이 일로 프랭클린은 도제를 스스로 그만두리라 결심했다.

“어차피 형의 신문은 회생하기 어려워 보였어. 나에게 책임을 넘기는 것도 못마땅했고 말이야. 결국 열일곱 살 때 인쇄소를 도망 나왔지. 내가 인쇄소를 나온 뒤에도 계속 내 이름을 발행인으로 신문이 나왔다는 사실은 나도 몰랐네.”

프랭클린이 향한 곳은 보스턴 다음의 도시 필라델피아였다. 그는 필라델피아에 일 년 넘게 머물면서 인쇄 사업을 시작하려는 포부를 키웠다. 때마침 펜실베이니아 총독이 프랭클린의 글솜씨를 칭찬하며 투자금을 대겠다고 제안하자 프랭클린은 비로소 행운이 찾아왔다고 믿었다. 당시 아메리카는 활자를 제조할 기술조차 없어서 전부 런던에서 수입하는 실정이었다. 프랭클린은 개업에 쓸 인쇄 장비를 고르려는 생각으로 런던행 배에 올랐다.

한 달을 항해하여 도착한 런던은 고향 보스턴보다 수십배나 큰 도시였다. 프랭클린의 원대한 사업 계획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무산되었다. 허풍선이 총독이 약속한 추천서와 신용장은 기다려도 도착하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성공하는 줄 알았단 말이야. 런던으로 출발하기 전에 새 양복을 빼입고 고향 마을에 찾아갔어. 가출한 아들이 성공해서 돌아왔습니다 하고 성급하게 자랑하려는 마음이었지. 그렇게 큰소리 치고 런던에 왔는데, 빈 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아?”

프랭클린은 빠르게 지난 계획을 잊고 현재 상황에 적응했다. 런던에서 이름있는 인쇄소에 일자리를 구하고 식자공으로 일했다. 런던에 머무는 동안 선진 인쇄업을 체험한 경력은 두고두고 도움이 되었다. 런던에 자리를 잡은 뒤 프랭클린은 화려한 도시의 풍물에 빠져 들었다.

“런던은 재미난 도시였어. 매일 어디서나 공연이 펼쳐졌고 볼거리가 많았지. 혈기 많은 젊은이가 방탕해지기 좋은 도시였어. 실컷 즐기며 지냈지. 음주에 돈을 낭비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집에 돌아올 즈음에는 꼭 성공하리라 마음을 다잡고 배에 올랐어.”

런던에서 일년 넘게 인쇄술을 경험하고 돌아온 프랭클린은 동업자를 구해 인쇄소를 차렸다. 동업자가 금세 사업을 포기하는 바람에 인쇄소를 인수하게 된 프랭클린은 주야로 부지런히 일했을 뿐 아니라 주변에 부지런하게 보이려 애썼다.

“일이 없는 날에는 아무 두루마리든 들고 나가서 길거리를 돌아다녔다네. 눈속임이었냐고? 그건 홍보라고 하는 걸세. 내가 바쁘게 일한다는 사실을 먼저 보여줄 뿐이야. 내가 맡은 일을 성실히 완수하지 않았다면 그제서야 거짓이라 말할 수 있겠지.”

머지않아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의 공식 인쇄업자로 지정될 만큼 인정받는 인쇄업자가 되었다. 그리고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라는 망해가는 신문을 인수해서 짧은 기간에 영향력 있는 신문으로 키워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런 다음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을 이용해 프리메이슨에게 우호적인 메시지를 발신했다.

“그때 나는 이미 준토(JUNTO)라는 이름으로 비밀결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메이슨 같은 비밀결사의 속사정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지. 그러니까 내가 쓴 기사는 메이슨의 입장을 절묘히 대변한 셈이야.”

프랭클린은 프리메이슨을 옹호하는 기사를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에 수차례 실었고 그 시도는 효력이 있었다. 기사는 마치 프리메이슨의 비밀을 폭로할 듯이 독자를 감질나게 하고는 진상을 알아보니 헛소문이었다는 투로 어이없게 안심시키는 기사였다. 아무튼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몇 주 후 그는 프리메이슨 집회에 초청되었고 1731년 마침내 프리메이슨 입회에 성공했다. 그리고 삼 년이 되지 않아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 이 년 간 봉직했다.

실로 프랭클린의 대외활동은 다방면에 걸쳐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준토처럼 활동을 지원해줄 조직이 필요했다. 프리메이슨에 입회하여 확보한 인맥은 프랭클린의 대외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프랭클린은 화재가 빈번했던 필라델피아에 최초의 소방기관을 창설하는가 하면 도서를 대출해 주는 공공도서관을 건립하고 1740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설립하여 초대 총장으로 재임하는 등 분주하게 활동했다.

“우리 롯지에는 은세공품을 제작하는 ‘필립 싱’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나하고 여러 일을 함께 했다네. 내가 만든 모임 준토의 회원이기도 했으니까. 이 친구가 은으로 된 잉크 스탠드를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에 납품했는데 나중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때 그걸 사용했지.”

1748년 프랭클린은 인쇄업과 출판업의 운영이 매우 안정되었다고 판단하고 아예 경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다른 경영자에게 회사 운영을 맡기고, 자신은 투자자로서 충분한 배당을 받으며 다른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은퇴 후 프랭클린이 가장 열성적으로 몰두한 분야는 전기 연구였다.

“내 인쇄소는 운영이 잘 됐어. 나는 솜씨 좋은 몇몇 직원을 독립시켜서 인쇄소를 차리게 했지. 그 친구들은 자금이 부족하니까 내가 투자를 하고 수익금에서 배당을 받기로 계약을 했지. 그 덕에 나는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어. 응? 내가 그 친구들 몫을 탐낸 건 아니야. 그 친구들도 직원으로 일할 때보다 벌이가 좋아져서 이익이었지.”

당시에는 전기 실험이 세간에 유행하고 있었다. 전기는 그때까지 미지의 현상이었고, 전기 실험은 과학과 오락의 중간지대에 있었다. 전기 불꽃을 보여주거나 전기 충격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볼거리가 유행했다.

프랭클린은 전기 실험 쇼를 관람한 다음 금세 흥미를 느끼고 전기 실험 도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실험실을 차려 놓고 여러 실험을 계속했다. 그 중에는 칠면조를 전기 충격으로 구워 먹는 파티도 있었다. 사업을 은퇴한 그에게는 절호의 장난감이 생긴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기 실험을 단지 유흥으로 끝마칠 인물이 아니었다.

“한번은 칠면조를 전기로 구우려다가 실수로 감전이 된 적이 있는데 다음 날까지 엉덩이가 얼얼하더라고. 칠면조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지.”

1749년 프랭클린은 라이덴병의 어디에 전기가 축적되는지를 밝혀낸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라이덴병에 담긴 물에 전기가 축적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프랭클린의 라이덴병 실험은 전기가 병 속의 물이 아닌 유리병 자체에 축적됨을 보여준다.

그는 라이덴병을 여럿 연결하는 실험으로 충전 용량을 늘릴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프랭클린은 라이덴병 4개를 한 묶음으로 연결하고는 그것을 ‘포병 부대’라는 뜻의 군사용어 ‘배터리’라 칭했다. 이 호칭은 오늘날에도 충전지를 가리키는 어휘로 널리 사용된다.

“신기하지 않나? 나 같은 무학자가 그 사실을 발견할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게 말이야. 나는 실험이 무척 즐거웠어. 많은 지식이 없어도 경험으로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이 세상에 많이 있다는 것이 반가웠거든.”

프랭클린의 전기 연구는 1753년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 그는 번개가 전기 현상이라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했을 뿐 아니라 번개가 전기 현상이라는 사실로부터 피뢰침을 발명하여 실용 면에서도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피뢰침을 자신의 집에 먼저 설치함으로써 피뢰침의 실용성을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였다.

“나는 피뢰침이 번개를 땅으로 흘려보낼 뿐 아니라 구름 속의 전기를 천천히 빨아들여서 번개를 방지할 수 있다고 예상했거든. 피뢰침이 그렇게 동작하려면 첨탑이 구름에 닿을 만큼 높아야 한다는 것은 몰랐지.”

머지않아 피뢰침은 대서양을 건너 브리튼과 프랑스에도 널리 퍼졌다. 프랭클린은 피뢰침의 발명에 아무런 권리도 주장하지 않았다. 누구나 피뢰침을 개량하거나 제작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독립전쟁 동안 브리튼에서는 프랭클린이 제안하고 권장한 뾰족한 피뢰침을 반역자의 발명이라는 이유로 뭉툭한 피뢰침으로 교체하는 소동이 있었다. 또한 프랑스에서도 피뢰침이 널리 사용되자 피뢰침에 얽힌 기이한 소송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생토메르 지방의 한 주민이 자신의 집 지붕에 피뢰침을 설치했다. 그는 당시 유행하는 첨단 기술 제품을 과감히 사용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거주하는 마을의 주민들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마을 주민들은 피뢰침이 번개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번개를 지붕에 끌어당긴다고 우려했고 게다가 피뢰침이 신이 내리는 천벌을 훼방하는 신성모독의 표시라 주장하는 이들까지 합세하여 피뢰침의 철거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주민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피뢰침의 철거를 명령했다. 피뢰침을 설치한 주민은 철거 명령에 반발하여 젊은 변호사를 고용해 항소했는데, 변호사의 이름은 로베스피에르였다.

“아! 그 양반은 혁명에 미친 자였어. 혁명에 방해가 된다며 오랜 친구조차 단두대로 보냈지. 이름이… 그래. 데물랭이었지. 나도 잘 알아. 데물랭도 우리 구자매 롯지의 형제였으니까. 로베스피에르도 오래 못 가서 단두대에 올랐으니 자업자득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겠지. 응? 로베스피에르는 메이슨이 아니었어. 물론 그는 프리메이슨마저 정상으로 보일 만큼 기이하고 극단적인 사내였지만 말이야. 그는 자기 권력에 심취해서 ‘최고 존재의 제전’이라는 신흥 종교를 세우려고 했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나?”

한편 피뢰침 철거를 주장하는 주민들 측에서는 과학자이자 의사인 장폴 마라에게 피뢰침의 위험성을 논증할 증거를 의뢰했다. 마라는 1774년 런던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시기에 프리메이슨에 입회한 바 있었다. 다소 반골 기질이 있는 과학자였던 마라는 일찍이 전기 연구를 해왔던 데다가 이 소송이 세간에 큰 화제가 될 것을 알았기에 무척 열성적으로 이 의뢰에 임했다. 앞서 마라는 자신의 전기 연구 논문에서 끝이 뾰족한 피뢰침이 뭉툭한 피뢰침보다 번개를 끌어들이기 쉽다는 주장을 남긴 바 있었다. 그에게는 과학자로서 명예가 달린 소송이었다.

“마라는 내게 그의 과학 실험에 참석해 달라고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다네. 나는 결석 통증 때문에 초청에 응하지 못하다가 어렵사리 참석했어. 마라가 과학 실험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는 데에는 나를 비롯해 모든 참석자들이 동의했네. 하지만 마라는 학계의 권위를 반대하기로 자신의 연구 방향을 정해 놓고 그 결론을 향해 실험을 강행하는 듯이 보였어. 마라는 나의 피뢰침을 공격한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뉴턴 선생의 광학 이론을 반박하려 연구를 계속했다네.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인품이 돋보이도록 사용했다면 더 장수했을지 몰라.”

피뢰침 소송은 1783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법정에서 로베스피에르는 군중의 과학적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심과 몰이해를 지적하며 피뢰침을 설치할 권리와 과학의 발전을 옹호했다. 결과는 로베스피에르의 승리였다. 이 승리로 로베스피에르는 큰 명성을 얻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 승리가 자랑스러웠던 나머지 자신의 변론 내용을 책자로 만들어 감사의 편지와 함께 프랭클린에게 보냈다. 당시 마라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낙심이 컸을 거야. 마라의 주장에도 과학적으로 일리는 있었거든. 그렇지만 당시 사회 풍조는 과학의 진보를 열심히 추종하고 있었지. 사람들은 이성의 빛이 자유를 밝힌다고 믿었어. 그리고 당시는 이미 피뢰침이 번개의 피해를 줄여준다는 물증이 많았어. 가끔은 동작 원리가 불분명하지만 제대로 동작하는 물건이 있기 마련이야. 불분명한 이론보다 확실한 물증에 큰 설득력이 있지.”

물론 현대인은 뾰족한 피뢰침이든 뭉툭한 피뢰침이든 번개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뾰족한 피뢰침이든 뭉툭한 피뢰침이든 성능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뾰족한 피뢰침과 뭉툭한 피뢰침의 대결은 정치적 주도권을 놓고 고집스럽게 경쟁심을 발휘한 사건이지 과학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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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타운에서 벌어진 맹렬한 전투는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요크타운에 집결한 브리튼군은 아메리카군의 대규모 포위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다.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브리튼 해군은 프랑스 해군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고립된 브리튼군은 분전하였으나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다. 이 전투의 패배로 브리튼군은 막대한 전력 손실을 입었다. 브리튼은 더 이상 손실을 감당하며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 전쟁의 피로감과 회의감은 브리튼이 종전을 희망하도록 만들었다.

종전 협상은 길고 지루했으며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였다. 처리해야 하는 많은 안건이 쌓여 있었다. 전쟁 중에 브리튼과 아메리카는 상대의 재산과 생명을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그리고 이제는 양측이 입은 물적 손실과 인적 손실을 어떻게 누가 책임지고 배상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 와중에 윌리엄의 독립 반대 투쟁은 종전 협상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그때 나는 브리튼을 상대로 종전 협상을 진행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네. 윌리엄이 벌여 놓은 사건 탓에 골치가 지끈거리더군. 그놈은 학살 범죄자 존 베이컨에게 활동을 지시하고 방임했지. 게다가 애스길 대위 사건에 그놈이 책임자로 연루되는 바람에 내 처지가 아주 곤란했어. 종전 협상이 당장 엎어질 판이었지. 정말 악몽 같았다네. 내가 협상단 대표인데 대표의 아들이 협상 테이블을 흔드는 꼴이라니……”

애스길 대위 사건은 종전 협상을 파국의 위기로 끌고 갔다. 뉴저지에서 윌리엄의 명령을 받는 충성파 게릴라가 아메리카 민병대 허디 대위를 처형하자 뉴저지의 아메리카인들은 분개하여 조지 워싱턴에게 공식적인 보복을 청원했다. 워싱턴이 하지 않는다면 주민들 스스로 결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주민 간의 유혈 충돌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워싱턴은 브리튼군 포로 중에서 제비뽑기로 교수형에 처할 장교를 선발하라고 명령했다. 워싱턴은 그것이 부도덕한 명령임을 알았지만 벌떼처럼 보복을 청원하는 아메리카인들의 분노를 잠재우는 데에 지난한 시간이 필요함을 예견했는지 모른다.

워싱턴의 명령에 따라 제비뽑기로 선발된 인물이 애스길 대위였다. 곧이어 애스길 대위가 교수형에 처해진다는 뉴스가 브리튼에 전해졌다. 애스길 대위의 어머니는 프랑스 출신이었는데, 그녀는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아들의 목숨을 중재해 주기를 탄원했고 곧 국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성공했다. 프랑스 국왕의 요청에 힘입어 애스길 대위는 무사히 브리튼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조지 워싱턴은 도덕성에 흠집을 남겼으며, 종전 협상 중인 브리튼과 아메리카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워싱턴 장군은 흙탕을 밟지 않고 이 난관을 건널 수 없다고 생각했을 테지. 그래서 자기 몫의 악역을 맡기로 감수한 것이네. 애스길 대위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위협한 결과로 우리는 브리튼이 충성파를 경원시하도록 유도한 셈이야.”

종전 협상이 지연되자 브리튼은 윌리엄의 게릴라 활동을 협상의 장애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때까지 윌리엄은 브리튼에 충성을 인정받으려 애썼으나 이제 그는 자신이 어느 쪽에도 환대받지 못하는, 완전한 아메리카인도 아니고 완전한 브리튼인도 아닌 그 무엇임을 알았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허디 대위를 처형하라고 명령한 충성파 지도자가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건 윌리엄이었다. 브리튼과 아메리카 어느 쪽도 윌리엄이 아메리카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윌리엄은 쫓기듯 런던으로 도피했다. 추방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이 모두에게 적당한 만족을 주는 타협안이었다.

종전 협상은 힘들게 재개되었다. 여러가지 보상과 책임의 문제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끝까지 가장 대립이 치열한 안건은 충성파 소유의 아메리카 내 토지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보상 문제였다. 프랭클린은 이 문제를 두고 특히 양보없이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충성파에게는 한 치의 토지도 보상이 불필요하며 용납할 여지가 없습니다. 충성파는 아메리카를 적대하기로 결단한 순간에 이미 아메리카 내의 토지에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메리카를 이탈한 충성파의 토지는 아메리카에 귀속해야 합니다.”

충성파를 향한 프랭클린의 비타협적 태도는 완고했다. 프랭클린이 아들을 고려해 충성파를 두둔하지 않을까 의심하던 사람들이 만류할 정도였다. 브리튼은 마지못해 프랭클린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협상을 마무리 짓고 신속하게 조약이 체결되었다. 브리튼이 아메리카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한다는 조약이다. 조약은 즉시 발효되었으며 비로소 프랭클린은 가장 힘든 고비를 넘었다고 느꼈다.

프랭클린은 파리에서 그의 임무를 완수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변에 눈을 돌릴 여유를 얻었다. 평소 프랭클린은 신기한 장치에 호기심을 느끼더라도 장치의 동작 원리에는 깊은 관심이 없었다. 자세한 동작 원리를 몰라도 쓸모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낙천적 실용주의는, 물론 프랭클린의 특징이었지만 그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그처럼 학술적 기반이 부족하지만 모험심을 가진 사업가라면 누구나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했다. 몽골피에 형제도 그러한 사람이었다.

피뢰침 소송이 진행 중이던 그해 6월 몽골피에 형제는 수천의 구경꾼이 몰려든 공개 실험에서 무인 열기구를 공중에 띄운 역사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몽골피에 형제가 무인 열기구 실험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업가 레베용은 형제를 찾아가 공동 작업을 제안했다. 레베용은 고급 벽지를 제작 판매하는 인물이었는데 앙투아네트 왕비의 거처에 벽지를 납품했던 연줄을 이용해 루이 16세와 왕비가 참관하는 유인 열기구 실험 기회를 얻어냈다.

“몽골피에 형제는 우리 구자매 롯지의 회원이었다네. 그들은 리옹 근처에서 제지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지. 나는 인쇄업자의 버릇으로 품질 좋은 종이에 흥미가 많았는데 몽골피에 형제는 아주 좋은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어. 당시 나는 그랜드 마스터 자리를 다른 이에게 넘겨준 다음이었지만 여전히 구자매의 회원이었지.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며 그 형제가 찾아왔어. 놀라운 과학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더군.”

한편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 성공 소식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의 과학자 쟈크 샤를 교수는 수소 가스를 채운 기구를 개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뜨거운 공기보다 수소가 부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기구에 응용하려 하였다. 오늘날 샤를 교수는 그의 이름을 따라 지어진 ‘샤를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법칙이 담긴 논문은 십여 년 후에 쓰이게 된다. 당시는 수소 가스를 생산하는 데에 비용이 많이 들어서 샤를 교수는 모금을 진행하며 실험을 홍보했는데 프랭클린도 그곳에 자금을 보탰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수소 기구 쪽에 더 마음이 끌렸다네. 아직 열기구 위에서 안전하게 불을 피울 방법이 마련되지 않아서 화재에 취약했거든. 수소 기구는 가열 없이 오래 떠 있을 수 있었지. 수소 기구 실험도 열기구 실험처럼 아주 흥행했어. 나도 관심을 가지고 구경했고. 하지만 샤를 교수는 매번 몽골피에 형제에게 최초 기록을 양보했지. 기구 비행은 경쟁이 치열했어. 국왕의 관심을 끌 기회였으니까. 몽골피에 형제는 루이 16세가 참관하는 실험을 훌륭하게 성공시켰지. 그 덕에 귀족이 되었고 말이야.”

몽골피에 형제가 실행한 열기구 실험의 하이라이트는 열기구에 사람이 탑승하고 줄 없이 자유 비행하는 실험이었다. 11월 파리 서쪽 볼로뉴 숲 외곽에 자리한 뮈에트 성 주변에 귀족과 시민 수만 명이 모였다. 열기구 표면을 장식한 화려한 벽지는 물론 레베용이 제작한 벽지였다. 어찌 보면 열기구 실험 전체가 벽지 제품의 홍보 무대를 겸하고 있었다.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 왕비가 참관한 가운데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열기구의 유인 자유 비행은 성공리에 끝났다. 몽골피에 형제는 지상에 남아 비행을 감독했다. 프랭클린은 비행 실험을 관람한 후 몽골피에 형제를 만나 성공을 축하했다.

“형제 여러분. 경이로운 실험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인류의 활동 영역을 창공으로 확대하는 공적을 세우셨습니다. 인류는 수백 년 이내에 더 높은 하늘까지 도달할 것이고 역사는 여러분이 그 첫걸음이었다고 기록할 것입니다.”

몽골피에 형제의 실험 10일 후 12월 1일 샤를 교수는 수소 기구에 본인이 탑승하여 유인 자유 비행에 성공했다. 비행은 2시간 넘게 이어졌다. 몽골피에 형제의 비행이 30분이 되지 않은 것과 비교하면 대단한 체공 시간이었다. 프랭클린은 몽골피에 형제의 지난 실험에 이어 이번 사를 교수의 실험에도 참석하여 그의 어린 외손자와 함께 초대석에 앉아 비행을 지켜보았다.

“몽골피에 형제는 물리학에 관해서는 잘 몰랐어. 뜨거운 공기가 떠오르는 원리를 모르고 뜨거운 ‘연기’가 떠오른다고만 생각했지. 그래서 열기구 실험을 할 때마다 양털이나 축축한 지푸라기를 태워 연기를 내느라 불 피우는 이들이 눈이 매워서 애를 먹었지. 당시 상황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뿌연 연기가 흘러나오는 열기구를 볼 수 있다네.”

열기구 실험 성공 후 레베용은 왕실에 벽지를 납품하는 공식 제조업자로 지정되었다. 수년 후 프랑스에서 혁명이 시작될 때 레베용의 벽지공장은 성난 군중이 가장 먼저 공격해 불태운 공장이 되었다.

어느덧 파리에서 프랭클린의 역할이 끝나고 있었다. 파리 조약 체결 후 프랭클린은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남아 있는 외교 사안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의 후임자로 제퍼슨이 파리로 건너왔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뒤로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항상 제퍼슨이 내 후임으로 적임자라 생각했다네. 그는 기품과 지성이 있고 게다가 겸손하지. 사교성이 있으니 프랑스인들과 잘 지낼 것이고 신념이 있으니 흔들리지 않을 것이네. 그보다 나은 인물은 없을 것이야.”

프랭클린은 제퍼슨에게 업무를 넘겨주며 프랑스와의 외교에서 유념해야 할 점과 주의해야 할 점을 상세히 전달했다. 프랭클린은 제퍼슨을 프랑스 외교가와 정치계에 소개하고 그의 후임자로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제퍼슨은 프랭클린을 존경했고 그의 후임으로 온 것을 명예롭게 여겼다.

프랭클린은 1785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렀다. 프랑스를 떠나기 전에 프랭클린은 프랑스에서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과 석별의 시간을 보냈다. 떠나는 프랭클린보다 그를 보내는 프랑스인들이 더 많이 슬퍼했다. 프랭클린은 아메리카로 출발하기 전에 브리튼에 있는 친구들을 만날 작정이었다. 팔십세가 된 자신이 다시 대서양을 건너는 항해를 하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떠나는 날 항구에서 프랭클린은 제퍼슨과 여러 프랑스인의 환송을 받으며 배에 올랐다.

“프랑스에서 여생을 보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네. 돌아보면 나는 사업을 은퇴한 뒤로 항상 공직에 있었지. 처음에는 펜실베이니아 의회에 있었고 런던에도 오래 있었어. 그곳에서 생활은 평온하지 않았다네. 필라델피아에는 정적들이 나를 노리고 있고 런던에서는 귀족들이 나를 멸시했지. 프랑스만큼 나를 환대하고 동등하게 대해주는 곳은 없었어. 그리고 여기만큼 사교계의 유쾌한 긴장을 즐길 수 있는 장소는 없지. 여기가 그리울 거야.”

범선은 열흘 간의 항해 후 브리튼 남부 항구 도시 사우스햄튼에 정박했다. 프랭클린은 그곳 숙소에 며칠을 머물렀다. 프랭클린의 귀향 소식을 듣고서 런던에 사는 친구들이 프랭클린이 머무는 숙소에 속속 찾아왔다. 프랭클린이 런던에 머물 때 오래 교류했던 친구들이 프랭클린을 찾아와 그의 성공적인 귀향을 축하하며 옛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프랭클린이 아메리카를 향해 떠나기 전 마지막날 런던에서 윌리엄이 찾아왔다.

“저는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와 저를 갈라놓은 전쟁이 있기 전에 다정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윌리엄. 너의 선택을 탓하고 싶지는 않구나. 누구나 어떤 선택을 하는 데에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 더 묻지 않으마. 다만 네 선택의 결과를 불평하지 말고 달게 받기를 바란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저는 같은 길을 선택할 겁니다. 저는 그때 최선을 다해 숙고했습니다.”

“네가 브리튼에 충성을 맹세한 그날 너는 네 아비의 토지를 약탈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네 결심을 스스로 성취하지 못했으니 네 몫의 토지는 없다. 너는 내 유산을 받지 못할 것이다.”

윌리엄이 떠난 뒤 프랭클린은 친구들과 밤 늦게 고별 파티를 즐겼다. 다음날 프랭클린을 태운 배는 사우스햄튼을 떠나 필라델피아를 향했다. 멀어지는 브리튼 땅을 바라보며 프랭클린은 런던에서 보낸 세월을 떠올린다.

“나는 성서에서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하는 잠언 22장 29절 구절을 일생의 교훈으로 삼았다네. 나는 사람이 노력으로 고귀해진다고 믿었지. 그리고 내 인생 안에서 그 믿음을 실현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네. 하지만 런던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좌절감이었어.”

프랭클린은 런던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담담히 말을 이어간다.

“귀족으로 태어난 그들은 내가 그들과 같은 높이에 올라서려는 시도를 좌절시키고 내 노력을 모욕했어. 한때 나는 브리튼에 충성을 바쳤지만, 브리튼 안에서 내 소망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다음에는 브리튼 밖에서 그들과 맞서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을 바꾸었지. 어쩌면 나를 밀어낸 그들이 나를 여기로 이끈 셈이야. 혹시 그들이 나를 동등하게 받아들였다면 지금 나는 하나된 아메리카와 브리튼의 번영을 위해 봉사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프랭클린은 범선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하얀 물결 위를 스치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그리운 프랑스로 생각을 옮긴다.

“누구나 그가 머물며 활동한 땅에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야. 내가 친애하는 유쾌한 프랑스 친구들에게 나는 무엇을 남기고 떠나왔을까?”

프랭클린은 그가 프랑스 땅에 남겨놓은 불씨를 스스로 과소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이 성공의 선례만큼 도전심을 고취할 수 있을까? 왕권을 격파한 아메리카의 사례를 본받아 프랑스에서도 자유와 평등을 향한 동지애가 불붙기 시작했다는 것을 프랭클린은 알았을까? 머지않아 거대한 불길이 프랑스 전역을 불태우리라는 전조를 프랭클린은 정말로 간과했을까?

“앞날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야. 누가 아메리카의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미리 알았겠나? 독립에 이르기까지 쉬운 날은 하루도 없었다네. 프랑스의 앞날도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들의 운명은 그들이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정해지겠지. 그들이 무엇을 믿을지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네. 윌리엄처럼 말이야.”

어떤 사람은 프랭클린이 프랑스에서 펼친 활동의 이면에 숨은 의도와 은밀한 계획이 있다고, 피뢰침 발명에도 프랭클린이 프리메이슨 회원으로서 숨겨 놓은 목적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 믿음은 놀랄 일도 아니고 새로운 일도 아닐세. 프리메이슨이 국제적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는 사람 중에는 그 음모에 ‘가담’하려 프리메이슨에 입회하는 사람도 있지. 거대한 음모가 진행중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음모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들을 실망시키는 것일 테지. 진정한 설득이란 개종과 같아. 타인이 어쩔 도리가 없다네. 기이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나 있고 프리메이슨 안이든 밖이든 예외는 아니야.”

프랭클린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프랭클린은 바닷바람을 들이쉬며 잠시 생각에 잠긴 다음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시간을 낭비한다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지? 기이한 믿음은 탐구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낭비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물증이지. 그것에 찬성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곡해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야.”

프랑스 혁명 백주년을 기념해 파리 만국 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그곳에 거대한 피뢰침을 세운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백여 년 전 프랭클린이 피뢰침에 숨겨놓은 의도를 자신들이 발견했거나 혹은 프랭클린이 숨겨두지 않은 비밀마저 자신들이 발견했다고 믿었는지 모르겠다.

건축가이자 사업가인 에펠은 말할 것도 없이 프랭클린처럼 프리메이슨이었다. 에펠탑은 전체가 철로 된 뾰족한 첨탑이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피뢰침이었다. 에펠의 전문 분야는 교량 건설이었으니 그에게도 철탑 건설은 모험적 사업이었다. 에펠이 파리 한복판에 삼백 미터 높이의 뾰족한 피뢰침을 세운 데에는 기필코 어떠한 믿음이 작용하였으리라.

“나도 그런 사람들을 잘 안다네. 그들은 거대한 피뢰침이 지배력을 획득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생각하지. 그들은 천구의 에너지를 지각에 끌어들이면 지상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야. 그들에게 피뢰침의 목적은 단순히 구름의 전기를 땅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라 설명하면 과연 믿겠나? 그들이 믿고 싶은 답이 나올 때까지 의심을 멈추지 않겠지.”

자유의 여신은 언제 어떻게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건너왔는가? 그 여신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세계를 계몽하는 자유’이다. 자유라고? 그렇다. 부유한 평민 사업가 볼테르가 일생 쟁취하고자 했던 그 자유다. 필라델피아의 인쇄업자 프랭클린이 공감했던 그 자유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단지 여신의 형상이 아니다. 여신이 물질을 입고 친히 걸어와 그곳에 발길을 멈추어 섰기 때문이다.

독립 백주년을 맞은 아메리카에 자유의 화신을 보내자며 모금을 하고 참여했던 프랑스인 가운데 프리메이슨 아닌 인물이 누구인가? 바르톨리가 여신을 디자인하고 에펠이 트러스 구조를 설계했다. 여신이 딛고 선 기단, 그곳에 설치된 기념 동판에는 여신을 맞이하는 아메리카의 프리메이슨 표시가 선명하다. 저 여신상은 프랑스와 아메리카의 프리메이슨이 합심하여 건립한 거대한 승리의 트로피인 셈이다.

“시간은 인간이 만든 모든 의미를 지워버린다네. 설령 과거에 어떤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해도 그것이 현재까지 위력을 발휘한다고 믿을 근거는 없어. 사람들은 물질 위에 정신을 각인하려 애쓰지만 정신은 물질보다 빨리 부패하기 마련이고 정신이 스러진 자리에는 텅 빈 물질만 남지.”

마천루는 지배자들의 사원이다. 세계를 지배하고자 야심을 품은 자들은 그들이 건설한 도시에 반드시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아니면 로마처럼 이집트에서 훔쳤다. 워싱턴 기념탑을 보면 지배욕이 뚜렷하다. 어디 그뿐인가? 맨하튼에 세워진 마천루 전체가 거대한 오벨리스크 군집이다. 이름조차 ‘제국’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오벨리스크가 아니면 무엇인가? 월드트레이드센터는 트윈 오벨리스크이다. 세계를 지배하려는 자들은 마천루에 집결한다.

“나는 인류가 거대한 사건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고스란히 실천했으리라 믿지 않는다네. 인류 사회는 그렇게 정교하지 않다는 것이 내가 이제까지 살면서 목격한 사실이야. 많은 일들이 사전 계획이 아니라 최선의 발견들을 편집하여 이루어지지. 어떤 일을 망치는 데에는 한 사람의 발설이나 실수로도 충분해. 몇몇 사람들이 단결해서 온세상을 조종한다고 상상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과대평가라네.”

보이지 않는 큰 손이 이 세상의 뒤편에서 쉬지 않고 톱니바퀴를 돌리고 있다는 상상은 어떤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는 듯하다. 이 혼란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을 간략한 사고의 사슬로 포획할 수 있다는 확신감이 그들을 당혹감에서 건져주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질서를 믿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반대편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질서 같은 것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이 부인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질서’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가 지배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만큼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으로 혼란하고 무질서할 것이다.

이제 프랭클린은 지팡이를 짚고 객실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걸음을 따라 지팡이가 갑판을 가볍게 두드린다. 작은 구름 그림자가 갑판 위에 순간 그늘을 드리우고 스쳐갔다. 프랭클린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미소를 지으며 먼 바다를 응시한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의 백발을 휘날렸다. 범선은 바람을 헤치며 필라델피아를 향해 한없이 항해를 계속한다.

[림보의 프랭클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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