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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 술집

2021.12.15 20:1112.15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는 주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라는 목소리는 들었다. 어느 가게나 하는 인사고, 나는 아늑해 보이는 구석 자리에 앉느라 바빴다.

회사 일로 몹시 피곤했고 저녁도 거른 상태였다. 테이블 옆에 꽂혀있던 메뉴를 보고 고등어구이와 병맥주를 시키고 휴대폰을 꺼냈다. 단체대화방에서 직원들이 나눈 채팅과 주고받은 자료들을 훑어봤다. 내가 신경 써야 할 내용은 없어 보였다.

머릿속에 떠도는 회사 생각을 떨쳐내려고 스마트폰으로 뉴스와 웹툰을 봤다. 십여 분이 지났을 때쯤 음식이 나왔다. 사장이 직접 서빙해주었는데, 나는 그때도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맥주를 곁들여 밥을 반쯤 먹었을 때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이 대여섯 개 있는 크지 않은 가게로 간단한 식사와 술을 파는 곳이다.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평일 밤 11시였고, 주택가에 있는 가게니 그럴만하다.

사장은 내 또래의 남자로 요리사 앞치마를 두른 채 카운터 뒤에 앉아있었다. 다른 종업원은 보이지 않았다. 약간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럴까 싶었는데 가게에 아무런 소리가 없어서였다. 음악도 틀어놓지 않았고 TV도 없었다. 뭐 그래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나는 휴대폰을 벗 삼아 밥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알콜이 적당히 들어가니 긴장이 풀렸다. 마음도 한결 너그러워졌다. 동시에 외로웠다. 집에 가면 반겨줄 사람도 없고, 이 시간에 불러낼 친구도 없다. 불행하거나 끔찍한 인생까진 아니지만, 매력적이거나 재밌는 삶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삶을 살 방도도 딱히 없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 살지 고민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만족할 만한 답을 가져본 적이 없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와중에 나는 강한 시선을 느꼈다. 처음엔 착각인가 했다. 아니었다. 사장은 카운터 뒤에서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뭐지? 변탠가……? 나는 대놓고 사장을 쳐다봤다. 사장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다. 나는 평소답지 않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심심하시면 저랑 맥주 한잔하실래요?”

거절하겠지, 했다. 그런데 사장은 맥주 대신 사이다를 꺼내 맞은편에 앉았다.

“왜 절 슬쩍슬쩍 보셨어요?”

“죄송합니다. 좀 놀랐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나 싶어서…….”

사장이 진지하게 대답해서 난감해졌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곤란한데……. 아는 사람인가 해서요, 정도로 눙치고 넘어가면 서로 편할 텐데 말이다.

“왜 놀라셨는데요?”

“정말 알고 싶으세요? 그렇게 유쾌한 얘긴 아니라서…….”

사장의 대답에 생각이 많아졌다. 아무리 봐도 사장은 내가 아는 사람도, 알던 사람도 아니다. 나와 전혀 닮지도 않았으니 몰랐던 형제나 친척 같은 것도 아닐 것이다. 대체 생면부지의 사람을 보고 놀랄 일이 뭐란 말인가?

“짐작도 안 가네요. 전 안 유쾌한 일에 익숙하니까 편하게 얘기해주세요.”

사장은 컵에 따른 사이다를 맥주처럼 벌컥벌컥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곤 결심한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장-편의상 ‘김’이라고 하겠다-은 미술학도였다. 김은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미대에 들어갔지만, 재능이 없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다른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건 좋았다. 대학 생활 내내 실컷 놀았다. 일주일에 다섯 번은 술을 마셨고, 여행도 자주 가고, 연애도 많이 하고, 기행도 자주 벌였다. 행위예술이라고 큰소리치면서.

15년 전, 졸업이 가까워질 무렵 김은 연애 문제로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에 자취방을 얻었다. 바로 지금 이 술집 근처다. 졸업 전시회를 앞둔 상황이었지만 작품 대신 술을 마셨다. 그리곤 뭘 그릴지 고민하며 취한 채로 집까지 걸어갔다. 도보로 한 시간이 걸리지만, 택시는 타지 않았다. 택시를 타면 다음 날 술 마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날도 김은 술에 취해 집으로 가고 있었다. 날이 선선했고 과음을 하지 않은 덕에 집 근처에 오자 술이 다 깼다. 자정이 안 된 시간이었다. 김이 재래시장을 지나 오픈 공사 중인 편의점 옆 골목으로 진입했을 때였다. 약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골목 중간쯤에서 김은 잠시 멈췄다. 냄새……. 피 냄새가 밤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이어서 소리가 들렸다. 영화에서 칼로 사람을 찔러 후벼팔 때 나던 음향효과…. 그 소리였다. 머리칼이 쭈뼛 곤두서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소리는 십자로 교차 된 골목 안쪽에서 들린다. 김은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거리를 유지한 채 천천히 다가간다. 서서히 형체가 드러난다. 바닥에 사람이 누워있고 그 옆에 칼을 든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연극무대의 조명처럼 보안등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그들을 비추고 있다.

김이 칼을 든 남자를 본다. 너무 놀라서 몸이 굳는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칼을 든 남자는 바로 김이다. 아니, 김과 똑같이 생겼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다. 자신이 늘 자기 얼굴이라고 인식하는 바로 그 얼굴. 하지만 조금 다르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귀를 덮고 목까지 내려온다. 김은 머리를 저렇게 길러본 적도 파마한 적도 없다. 옷도 처음 보는 옷이다. 자신과 다른 점들이 확인되자 처음의 충격이 가시며 얼굴도 더 객관적으로 파악된다. 지금의 자신보다 나이가 약간 더 들어 보이고 수척하다. 내가 아닌 건가…? 나이 든 김은 한 손엔 칼, 다른 손엔 소주병을 들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뱉는 그의 호흡에선 틀림없이 소주 냄새가 나리라.

칼을 든 늙은 김은 불과 4~5m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김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 실제론 1분 남짓이겠지만, 영겁 같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대로 거친 숨만 내뱉고 있다. 김은 용기를 내어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람도 관찰한다. 모르는 얼굴이다. 칼은 든 김과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 그의 동공은 열려있고 크게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칼에 찔리면 저런 얼굴이 되는 걸까? 아니면 공포에 질린 채 칼에 찔려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섬뜩하다. 그의 공포와 고통이 그대로 전이되는 것 같다. 김은 쓰러진 남자의 얼굴을 계속해서 살피지만, 기억 어디에도 없다. 확실하다. 대신 이젠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죽어가는 그의 얼굴을 생생하게 뇌리에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김이 심호흡을 한다. 더는 여기 있어선 안 된다. 도망치자. 달아나야 한다. 김은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도망친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 저였단 얘긴가요?”

사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나는 팔짱을 끼고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사장에게서 떨어지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무서운가? 아니, 잘 모르겠다.

“사장님 말씀이 맞다고 치죠. 근데 15년 전에 본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실 수 있나요? 헷갈릴 거 같은데.”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하며 말했다.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나는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태도가 어딘가 엉거주춤했는지 사장이 안심시키려는 듯 말을 이었다.

“저는 그날 이후로 술을 완전히 끊었습니다. 일부러 머리도 짧게 깎고, 파마도 안 합니다. 옷도 그때 봤던 옷과 비슷한 건 사지 않고요, 살 찌우려고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가오자 사장이 카운터 뒷벽에 드리워있던 커튼을 젖혔다. 창문이 있을 줄 알았던 그 자리에는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었다. 검은 배경에 칼을 든 남자와 쓰러진 남자를 그린 그림이었다. 강렬한 그림이었다. 어둠 속 인물들의 얼굴이 세밀하게 표현되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그림 속, 쓰러져있는 남자의 고통에 찬 얼굴…. 그것은 나였다. 누가 보더라도 알아볼 만큼 명확했다. 나를 보고 그렸다는 게 합리적일 정도로.

“졸업작품으로 그렸던 그림입니다. 이걸로 상도 받고 괜찮은 갤러리에서 전속 제의도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여기에 술집을 열었습니다. 술장사를 제대로 하면 술을 마시기 힘들 것 같아서요.”

내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사장이 심호흡을 권했다. 그의 말대로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더니 조금 나아졌다. 문득 그림 하단에 적힌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그림을 완성한 날짠가요?”

“아뇨. 이 광경을 목격한 날입니다.”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오늘이다. 오늘의 날짜가 그림 하단에 적혀있다. 사장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술집을 나와 집까지 걸어가는데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방금 겪었던 일로 머리가 복잡했다. 우리는 모두 무사한 것일까? 인생을 예측하거나 계획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혹은 사장이 그랬다면 우리는 오늘 그림 속의 광경처럼 만나게 되었을까?

 

다음 날 술집을 다시 찾았다. ‘폐업’이라고 붙어있었다. 나는 그가 체중 유지를 위해 운동하고, 머리를 짧게 깎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돌아서는데 쓰레기를 쌓아 둔 곳에 신문지로 싸인 커다란 사각형 프레임이 눈에 띈다. 신문지 한쪽을 찢어 내용물을 보니 예상했던 대로 그 그림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림을 들고 집으로 간다. 이제 이 그림은 아주 오랫동안 내 방에 걸려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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