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사일은 어젯밤 야산에서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 원래 사냥에 능숙했지만, 멧돼지가 평소에 잡던 거보다 커서 어제는 종일 힘겨루기해야 했다. 사일은 오두막 옆에 있는 창고에 죽은 멧돼지를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오두막으로 들어가자 아내 트리사는 이미 부들로 만든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사일은 외투로 입고 있던 두꺼운 가죽 망토를 벗고 트리사의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다음 날, 멧돼지를 잘게 썰어서 아내가 요리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사일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트리사는 눈을 뜬 채 사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따라 트리사의 볼은 하얬고 만약 바늘로 찌른다면 피가 아니라 투명한 물이 새어 나올 거 같았다.

일어났어, 트리사?

사일은 시선을 트리사의 눈에 마주 댔다. 트리사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일은 상체를 일으켰다. 어제 고생한 탓에 온몸의 근육에 바늘이 박힌 듯 피곤했다. 트리사는 같이 일어나서 사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제 사냥하다 왔지? 고생 많았어.

트리사는 침대에서 나와 오두막에 붙어있는 벽난로 앞에 섰다. 땔감이 없어서 벽난로는 꺼졌지만, 아직 방이 따뜻했다. 트리사는 빗자루를 가져와 재를 죄다 모아 항아리에 넣었다. 재를 흙에다 뿌리면 식물이 잘 자랐으니 마을에 있는 농부에게 말해서 밭에다가 뿌릴 생각이었다. 트리사는 벽난로 옆에 쌓아두었던 장작 하나를 꺼내 벽난로에 넣었다. 사일은 트리사에게 다가갔다. 불을 붙이는 건 트리사가 하기에는 힘든 일이었다. 무거운 부싯돌을 여러 번 부딪혀야 겨우 불길이 났다. 트리사는 뒤에서 사일이 불을 붙이는 걸 지켜봤다. 대장장이도 힘들어하는 불붙이기를 단 몇 번의 내리치기로 해냈다. 부싯돌에서 불티가 나 장작에 옮겨붙었다. 금방 새빨간 불이 타올랐다. 사일은 창고에서 멧돼지를 가져와 바닥에 내려놓고 평소에 쓰던 도끼로 가죽을 벗겨 먹을만한 부위를 적당히 잘라냈다. 삼일은 든든히 먹을 만큼 고기를 도려낸 사일은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트리사는 놋쇠로 만든 냄비를 꺼내 사일에게 내밀었다. 고기를 냄비에 넣자 트리사는 물과 감자 조각과 향신료 몇몇을 넣어 벽난로 위에 걸어놓았다. 시간이 지나 냄비 안에서 수프가 펄펄 끓었다.

두 사람이 자기로 만든 그릇에 수프를 담아 맛있게 먹은 뒤였다. 오두막의 나무 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두막은 언덕 위에 있어 마을 사람들이 잘 닿지 않는 곳이라 노크 소리가 들리는 건 드문 일이었다. 사일은 조금 경계심을 가지고 천천히 일어났다. 문 앞에 선 그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철갑을 입은 병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여기 계셨네요. 사일 장군님.

루서니아 군단에서 온 건가?

네 맞습니다. 행방이 묘연하셔서 찾기 힘들었습니다.

일단 들어오게.

사일은 오른팔을 펼쳐 집 안을 가리켰다. 병사는 뭔가 낯간지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거절하지 못해 들어왔다. 집에 있던 트리사를 보자 입을 다물고 코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트리사는 병사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사일의 태도를 보고 사일이 장군이었던 시절 아는 사이였다고 직감했다. 오두막의 침대 옆 구석에는 손님을 맞기 위해 준비한 의자가 둘 있었다. 사일은 그 가운데 하나를 들어 식탁 앞에 두었고 새 접시 하나를 가져와 수프를 담았다. 갑자기 손님이 된 병사는 숟가락을 들기 민망했지만, 사일과 트리사가 빤히 바라보고 있자 어쩔 수 없이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말을 먼저 꺼낸 건 사일이었다.

루서니아 군단에서 갑자기 내가 필요해져서 온 거겠지?

네, 맞습니다.

병사는 대답하면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병사는 설명을 길게 하는 대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에서 신문 한 장을 꺼냈다. 종이는 선홍색이었다. 선홍색은 루서니아에서 호외를 만들 때 사용하는 색이었다. 사일은 호외를 읽었다. 세라핌 왕조에서 선전포고했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을 선포한 이유는 루서니아에서 세라핌의 신교회 설립을 방해해서라고 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적혀있지 않았다. 아마 선전포고했다는 게 중요했으니 글쟁이들이 급하게 뽑아내느라 정작 중요한 선전포고 이유를 적지 않았다. 트리사도 옆에서 눈을 흘기며 호외에 적힌 글을 읽으려 했으나 배움이 짧았던 그녀는 그리 자세히 읽지 못했다. 다만 선전포고라는 단어는 봐서 남편이 다시 전장으로 나갈 게 걱정되었다. 사일이 말했다.

상황은 알겠지만, 나도 지금은 전쟁에 나갈 수 없네. 결혼도 했고.

알고 있습니다. 세라핌과의 전쟁이 사그라들 때까지만 보조해주시면 됩니다. 보상도 후하게 해드리겠다고 전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병사의 말을 들은 사일은 고개를 돌려 트리사를 바라보았다. 트리사는 당장이라도 소매를 붙잡을 것처럼 애절한 눈빛이었다. 병사는 애절함을 눈치챘는지 덧붙였다.

장군님. 참전하시면 잠깐은 부인을 보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커진다면 평생 부인을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사일은 병사의 경고에 약간 겁을 먹었다. 트리사도 반쯤 포기했는지 안절부절 못하던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병사는 다시 가죽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는데, 땅문서와 은행 서류였다. 척 보기에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을 법한 재산 목록이 적혀있었다. 사일은 이게 뭔가 하고 보고 있었는데 병사가 대신 말해줬다.

참전 장교에게 주어지는 특전입니다. 부인과 평생 행복하게 살고 싶으시죠.

사일은 더 이상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수락의 의미로 트리사의 목을 팔로 감아 자신에게 안겼다. 트리사의 이마에 작은 키스를 했다. 트리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

사일은 그렇게 참전하기로 했다. 병사가 오두막 밖으로 나가더니 누군가에게 손짓했다. 어깨가 꽤 다부진 병사 둘이서 수레에 무언가를 끌고 왔는데, 장교에게만 주어지는 테온 갑옷이었다. 테온 갑옷은 흑백의 물결무늬가 빽빽하게 나 있었다. 극소수의 힘 좋은 대장장이만이 테온 갑옷을 만들 수 있었다. 테온 갑옷은 화살과 화승총을 쉽게 막을 수 있어 ‘저주’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마치 마주하게 된 병사에게 저주를 내린다고 하여.

사일은 그 자리에서 상의를 벗고 갑옷을 입었다. 다행히 갑옷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어깨에 견갑을 찬 사일은 뒤돌아 트리사에게 인사했다. 며칠이라도 말미를 주면 좋으련만 전쟁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그럴 수 없었다. 사일은 트리사에게 키스한 뒤, 병사들과 함께 언덕에서 내려왔다. 언덕 바로 앞에 있는 황토색 길에는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가 있었다. 병사는 뒷자리에 타라고 했다. 두 병사가 투구를 벗고 마부석에 앉았다. 사일은 언덕 위를 바라보면서 아내가 잘 있기를 기도했다.

말은 생각보다 빨리 달렸다. 사정없이 채찍질을 당하는 말이 불쌍해졌다. 양옆에 풀과 나무뿐이었던 길은 금세 건물 몇 개가 드러났다. 처음에는 흙을 빚거나 나무를 세워서 만든 집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벽돌이나 돌조각을 깎아서 만든 촘촘한 건물들이 나왔다. 몇몇 사람들은 나무를 하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과일이나 빵을 팔고 있었다. 마침내 사일이 도착한 곳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루서니아의 수도, 가브논이었다. 가브논은 직각으로 된 길모퉁이들이 많았다. 다들 2층, 3층으로 된 집에서 살았다. 사일이 가브논에 도착하자마자 평소에 잘 맡지 못했던 과일 냄새가 났다. 분명 사람이 우적우적 씹고 있는 사과라던가 반으로 쪼갠 무화과라던가. 가브논에서는 집에서 나와 몇 걸음만 걸어도 과일가게에 가는 게 쉬웠으리라. 사일은 자신이 외진 곳에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말로 몇 시간만 달려도 나오는 곳이 가브논이었다는 점에서 허탈감과 우스움을 느꼈다. 사일이 마차에서 내린 곳은 ‘장교들의 집합소’였다. 왕궁과 가브논을 지키기 위해 위기상황에 장교들을 집합했다. 사일은 이곳에 다시 오게 되었다는 것에 한숨이 났다. 사일은 병사들과 함께 집합소의 3층에 걸어 올라갔다. 집합소는 회색 벽돌을 원통처럼 쌓아서 만들었고 그것을 기다란 계단이 휘감고 있었다. 마치 곧은 나무를 뱀이 휘감고 있는 듯 보였다. 세 병사와 함께 계단을 걸을수록 가슴이 조여왔다. 다만 그것은 갑옷을 입고 오래 계단을 올라서 생기는 피로감이 아니었다. 다시 왕과 군단장들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겁을 먹은 것이었다. 잿빛 벽돌을 하나하나 지나칠 때마다 얼굴의 피부가 당겨졌다. 금세 나무판자를 금속 막대로 고정해 만든 문이 나왔다. 병사 가운데 하나가 고리형 문고리를 붙잡고 노크를 세 번 했다. 문이 열리고 익숙했던 얼굴들이 나왔다.

먼저 인사를 건넨 건 다카였다. 다카는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여자였는데, 왜 아직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긴 머리를 고수하는지 의문이었다. 다카는 사일에게 다가오더니 사일의 뒷허리를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드디어, 사일이 왔군. 못 보다가 갑자기 보게 되니 정말 반가워.

웃기는군. 너희들이 쫓아냈잖아.

쫓아내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우리는 너의 안전을 위해 떠나보낸 거잖아.

그럼 지금은 안전하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군.

다카는 민망해하며 웃었다. 사일은 마지막까지 그녀를 째려보았다. 이샨이 말리지 않았다면 시선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이샨은 나와 다카에게 다가가더니 다카의 손과 내 허리가 맞닿아 있는 부분을 손으로 쳐냈다. 장난스러운 성격인 다카와 엄한 성격인 이샨은 평소에 서먹서먹한 관계다. 이샨은 단발로 자른 붉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다시 사일 앞에 섰다. 이샨은 사일과 눈이 마주친 지 꽤 되었음에도 아직 인사를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버티고 있다. 사일은 내가 먼저 인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오즈가 입을 열었다.

사일이 돌아온다고 해서 다행이야. 우리도 기대 많이 하고 있었네.

그래. 상황이 안 좋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 반갑네.

사일은 오즈가 마음에 들었다. 장군답지 않은, 타인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씨와 특유의 카리스마가 마음에 들었다. 오즈는 싱긋 웃어보였다.

군단장들을 소집한 이유가 있었다. 세라핌에게 맞설 계획이 필요했다. 선전포고를 전해 들으면 3일 내로 왕조는 답장을 보내야 한다. 요구사항을 들어줄 것인가 아니면 전쟁을 할 것인가. 3일 내로 답장하지 않으면 전쟁을 수락한 것으로 간주하고 전쟁이 시작된다. 이 규칙을 먼저 제안한 건 세라핌 왕조였다. 다만 전쟁 관련 국제법을 제정한 뒤에는 딱히 이 법을 사용한 적이 없다. 군단이 출동하는 건, 도적단들과 싸울 때 또는 시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범죄가 일어날 때 개입하는 것뿐이었다. 다만 역사를 뒤져보면 세라핌과 주변국들이 싸운 적이 빈번히 있었으니 전쟁 채비를 해놓긴 했다.

네 장군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4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저녁 6시가 되면 루서니아 왕조의 왕자인 리바가 방문한다는 걸 전해들었다. 뒤에 있던 병사들은 회중시계를 건네며 6시까지 4층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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