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왕자는 기지개를 켰다. 어딘지 모르게 몸 한구석이 찝찝했다. 몸을 몇 시간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탓일까. 이유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천사는 왕자의 옆에 있었다. 언제나처럼. 왕자는 언제나처럼 다시 몸을 웅크렸다. 밖은 어두웠고 안은 추웠다. 흰쥐 한 마리가 나무틈새 사이에서 달려나와 왕자를 스쳐지나갔다. 사실 왕자는 흰쥐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무 작았기 때문이리라. 흰쥐의 조소는 그 몸이 그랬듯이 조용히 스러졌다.

-이야기 해줘. 그거.

왕자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명확했다. 먼 옛날의 이야기. 왕자의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모두 함께 살아있던 세상. 그 세상을 겪지 못한 왕자. 그러나 그 세상을 겪은 천사. 왕자가 듣고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나도 명확하지 않은가. 천사는 왕자를 바라보고 몸을 돌려 앉았다.

-아주 먼 옛날, 어쩌면 아주 멀지 않을 그날,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가 함께 숨쉬던 때.

-앞에는 조금 건너뛰어도 돼. 어머니 이야기부터 해줘.

-알았어. 하지만 앞 이야기를 건너뛴다면 너의 어머니는 어디서 나온건지 모르게 되잖니.

-모르긴, 어머니의 어머니에게서 나왔겠지, 뭐. 갈색머리에 두건을 쓰고다니던.

-하긴. 알았어. 너의 어머니는 하늘이 유난히 파랗던 날에 태어났어.

-저번에는 파랗다고 하지 않았는데. 푸르렀다고 했어.

-푸르렀다, 파랗다, 퍼렇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파란색이었다는 거지.

-알았어. 계속해.

천사는 왕자가 안타까웠다. 자고로 그리움이란 아름다웠던 대상이 빛이 바랠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왕자의 그리움은 그 대상이 없었다. 대상조차 없는 그리움은 그리움이라 할 수 있을까. 그저 환상통은 아닐까. 그러나 왕자의 그리움은 대상이 지독하게 명확했다. 천사는 볼 수 있었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던 것에 대해. 왕자는 천사가 안타까웠다. 모두가 태어나고 20년이 지나면 죽어버리는 세상에서 언제까지나 살아있어야 한다니. 천사의 몸은 그리움으로 채워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계속해서 사라져버리는 것들 사이에서.

천사의 이야기도 매번 다르지 않았다. 왕자의 어머니는 하늘이 파란색이던 날에 태어났다.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찬 곳에서 자라났다. 이따금 너무 초록빛으로 빛나다 붉어져버린 벽들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좋았다. 함께 살던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천사, 그리고 몇몇 어머니와 나이가 같은 사람들. 왕자의 어머니는 적색 하늘을 좋아했다. 매일 해가 보일 때쯤이면 하늘과 가까운 해변으로 달려갔다. 적색 물에 비친 적색 하늘과 함께 왕자의 어머니는 자라났다. 그렇게 살다가 왕자의 어머니는 왕자를 만들었다. 왕자가 세상에 나왔던 그때 왕자의 어머니는 20년을 채웠다. 왕자의 어머니와 나이가 같은 사람들도 머지않아 20년을 채웠다. 왕자는 그 즈음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너무 어린 탓이겠지. 기억할 수 있는 기간은 왕자가 살 수 있는 기간에 비해 턱없이 짧았기에 왕자는 천사가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너의 어머니는 바다 앞에서 20년이 끝났어. 너가 생겨나고 너의 어머니는 바다로 갔거든. 그대로 바다 안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그 다음에 자고 있던 나를 어머니와 나이가 같은 사람들이 가져갔고.

-3개월 정도가 지나서 다 사라지고 나서는 내가 가져갔지.

-그런데 그 초록색 벽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거야? 가보고 싶어.

-이곳과 다르지 않아.

-이곳의 벽들은 다 붉은색이라고.

-원래 초록색이었으니까 붉어진거겠지. 아직까지도 초록색인 곳들은 많지 않을걸.

-저번에도 이 이야기 한 것 알지?

-아직 안돼.

-20년까지 세 달도 안 남았다고.

-일주일정도 남기고 가면 되잖아. 왜 지금 가려고 하는거야. 멀지도 않고 위험하다고.

왕자는 초록색 벽들이 보고싶었다. 왕자를 둘러싼 벽들은 모두 붉었기에. 하늘조차 파란색이었던 날이 가늠도 되지 않았기에. 밖은 어둡고 안은 더욱 어두웠다. 아마 늦은 밤이 되었겠지. 자신을 말리기만 하는 천사에게 왕자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 화보다는 원망, 그보다는 속상함에 가까운 감정. 아직 왕자는 그것들을 소리로 바꿀 수 있는 단어를 찾지 못했다. 어쨌든 그래서 왕자는 그대로 돌아누웠다.

-잘게. 졸리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같이 가자. 알았지? 가는데 하루도 안 걸려.

-잔다고.

-알았어, 알았어.

-너도 자.

-알았어.

천사가 그렇게 오래 살아왔다고 믿기지 않은 게 하나 있다면 잠이 아주 빨리 든다는 것일까. 왕자는 왜 이 생각을 지금까지 못했는지 의아했다. 곧 가볍게 코를 고는 소리가 왕자의 귀를 긁었다. 왕자는 다시 기지개를 켜고 이번에는 다리를 펴 일어났다. 아주 약간 몸이 삐걱거렸지만 곧 제자리를 찾았다. 발을 내딛자 이번에는 나무바닥이 삐걱거렸다. 흰쥐가 다시 쪼르르 나오더니 달려나갔다. 흰쥐의 쏘아보는 눈빛은 이번에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채 없어져버렸다. 하찮게도.

왕자는 천사를 흘깃 보고는 그대로 바깥으로 발을 옮겼다. 아마 내가 초록색 벽에 다다라서야 눈을 뜨겠지. 왕자는 초록색 벽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또한 이곳을 떠나본 적도 없었다. 천사가 말하고 말했던 위험한 바깥으로 왕자는 처음 길을 나서려는 것이다. 왕자는 걷는 것에도 익숙지 않았다. 천사는 왕자가 걷도록 놓아두지 않았기에. 왕자가 지금까지 매일 해온 것이라곤 어머니의 이야기를 천사에게서 듣고, 듣고, 그리워하는 것뿐이었다.

나무로 된 문을 나와 왕자는 금세 첫 번째 벽까지 다다랐다. 스무 발자국 남짓 걸었을까. 붉다 못해 퍼렇게까지 보이는 벽이었다. 이토록 가까운 벽이 왕자가 지금까지 닿은 유일한 벽이었다. 왕자는 벽을 쳐다보다 입술을 움직였다.

-아! 어! 오! 오오오!

왕자의 말들은 받아줄 이가 없어 튕겨져 나가 흩어졌다. 말을 받아내어 다시 튕겨내던 네 개의 나무벽과 천사가 없으니 왕자는 기분이 이상했다. 흰쥐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무 바닥과 천장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왕자가 벽을 지나쳐 걷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심지어 혼자서.

이곳은 모두가 조용하다. 모두에 포함되는 생명도 적다. 그래서 왕자는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것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천사를 제외하면. 하지만 천사는 날개가 있으니 절대 왕자와 같다고 할 수 없다. 본질부터 다르니. 본질이 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지금으로서는 중요하지 않다. 왕자는 앞으로만, 앞으로만 걸음을 옮겼다. 오래전, 녹색으로 가득 차있었을 곳으로 들어갔다. 왕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늘보다 조금 덜 어두운 땅 뿐이었다. 왕자는 서로 엉켜 뭉쳐있는 균사체들의 더미를 힘껏 넘었다. 축축하게 땅을 적신 흙탕물을 둘러 건넜다. 쓰러진 나무들의 잔재를 넘어 위로 뛰었다. 한때 늪이었을 마른 땅 위에 발을 디뎠다. 왕자의 발이 닿은 곳의 흙들은 때로는 바스라졌고 때로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조금 지쳐 발을 끌며 걸었던 곳에는 바람이 일어 먼지가 생겼고 왕자의 발가락 사이에는 균사체가 걸렸다. 이 땅은 길고 길었다. 왕자는 목이 말랐다. 허나 이런 곳에 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왕자는 앞으로 계속 걸었다. 잘린 나무들의 밑동만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왕자는 회적색의 너울들을 발견했다.

너울들은 거대했다. 나무 밑동들을 모두 지나 걸어가자 너울 한 개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중간까지. 그 위, 그 뒤의 너울들은 고개를 치켜들어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나 앞에는 너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왕자는 그냥 너울로 가까이 다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왕자는 초록색 벽을 보러 가야 하기에. 걷고 또 걸었다. 배가 고팠지만 참을 만했고 목이 마른 것도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맨발에다 걸어본 적도 몇 번 없었지만 왕자의 발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상처가 났다 해도 왕자는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확실할 수 있다. 그러나 상처조차 나지 않았기에 왕자는 더욱 빨리 걸을 수 있었다. 왕자는 달리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빠르게 걷는 데에 집중했다. 그렇게 왕자는 너울을 올랐고 두 번째 너울을 향해 다시 내려갔다. 너울의 가장 높은 곳은 생각보다 높았지만 어두운 하늘에 가까워진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왕자는 넘어야 할 너울의 수를 가늠하고는 다시 세 번째 너울을 올랐다.

여섯 번째 너울의 가장 높은 곳에 닿은 왕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에는 더 이상 다른 너울이 보이지 않았다. 왕자는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이내 마지막 너울을 내려왔다. 왕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초록색 벽은 더욱 멀었다. 지금쯤이면 아마 천사가 일어났겠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놀랐을까, 쫓아오고 있을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아할까. 만약 쫓아오고 있다면 너무 빠르게 오고 있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왕자에게 항상 유순한 천사는 유일하게 초록색 벽에 대해서만 엄격했다. 일주일을 남긴 시점에 출발했으면 도착도 못하고 20년이 되었겠지. 생각해보니 아찔했다. 왕자는 다시 앞으로 앞으로 걸었다. 천사가 명확한 방향을 알려준 적은 없었지만 왕자는 왜인지 앞으로 걸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왕자는 걸으면 걸을수록 천사에 대한 의심이 피어올랐다. 천사는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 함께 걸어갔다면 너울 위는 올라가지도 못했으리라. 일주일은 터무니없이 적은 시간이다. 그리고 왜 꼭 같이 가기를 고집했을까. 그러나 왕자는 곧 머리를 흔들어 의심을 털어버렸다. 초록색 벽을 숨겼다고 천사를 의심하기에 19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순간 왕자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처음 맡는 냄새가 났다. 동시에 처음 들어보는 소리도 들렸다. 아주 가볍고 얇은 것이 쓸리는 소리. 약간 짭짤하고 차가운 냄새. 왕자는 홀린 듯이 방향을 약간 틀어 그것들의 근원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물이 있었다. 아주 많은 물. 짭짤한 냄새의 근원지는 물이었다. 쓸리는 소리의 근원지도 물이었다. 짙은 파란색과 검정색이 섞인, 처음 보는 색이었다. 그 앞에는 연갈색의 작고 낮은 조그마한 너울들이 가득했다. 왕자는 마르지 않은, 더럽지 않은, 오직 물만이 가득한 광경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왕자는 철조망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 물에 가까이 다가가 손을 넣었다.

-읏!

왕자의 손이 닿자마자 왕자의 손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깨끗한 물이 처음이라 반응이 있는 걸까. 왕자는 자신의 손에서 불꽃이 튄 것이 신기해 손가락을 물에 넣었다 뺐다 하며 가만히 물을 바라봤다. 계속 이대로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이 만드는 파장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저기요! 학생! 거기 들어가시면 안 돼요!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와 왕자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남색 셔츠와 바지를 입은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천사인가? 왕자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긴장한 채로 서있었다.

-아니 학생. 전기 철조망은 어떻게 뚫고 들어가신 거예요?

-어..? 어?

-에? 왜..왜요?

남자의 수염은 하얗게 색이 바래 있었다. 천사가 말해주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전에, 20년보다 더 길게 살았던 남자들처럼.

-뭐야? 뭐지?

-어디 아파요 학생? 괜찮아?

왕자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혼란에 남자의 수염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런 왕자를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왕자를 이리저리 살폈다. 세 발자국쯤 떨어져서 왕자를 지켜보던 남자는 왕자가 주저앉자 왕자에게 다가왔다. 왕자의 등을 두세 번 쓸던

-학생,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가요. 일어서는 것 도와줄게요. 손 주세요.

왕자는 정신이 멍해 남자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손이라는 단어쯤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왕자는 물에 담궜다 뺐다 반복했던 손을 남자의 손에 얹었다. 왕자의 손이 남자에게 닿자마자 멍하고 탁한 시선 너머로 남자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 뭐야. 사람인 줄 알았잖아.

-뭐? 무슨 뜻이야?

-얼굴 보니까 맞네. 어유, 얼굴부터 안 봐서 이게 무슨 고생이야. 야, 빨리 일어나라고!

남자는 왕자의 손을 내팽겨치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팽겨쳐진 왕자의 손은 힘없이 물 바로 앞에 나동그라졌다. 왕자는 남자의 태도도, 남자의 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마주한 자신과 비슷한 것, 그럼에도 20년보다 더 오래 살고 있는 것을 마주한 왕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의 태도와 표정은 화가 난 것이 분명해보였기에 왕자는 잠자코 남자를 따라 걸었다. 물 주변의 작은 길을 따라, 왕자가 앞장서서 남자에게 등을 쿡쿡 찔리면서.

몇 분이나 걸었을까. 등을 찔러대던 남자의 손이 문득 멈춰 왕자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곧 남자의 애써 위엄있어 보이려는 걸걸한 목소리가 왕자를 찌르듯 들려왔다.

-저기 보이지, 쭉 걸어가서 쟤네 따라가라.

뒤를 돌아보니 투실투실하게 살찐 남자의 손가락이 왕자의 앞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조그마한 것들이 모여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왕자는 남자에게 물었다.

-저기 뭐가 있는데?

-뭐가 있냐니? 너가 가야하는 곳이지.

-내가 가야한다고? 왜?

-너 불량이야? 아, 아니지. 미안. 말하면 안됐댔는데 자꾸 까먹는단 말이지. 이 나이가 되니까 그럴만도 하다만.

왕자는 중얼거리다 허공에 주먹질을 해대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이라 반응해야할지도 무엇을 말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그것뿐이 왕자의 최선이었으리라. 하지만 남자는 그런 왕자의 최선을 단번에 짓밟았다. 스러졌던 흰쥐의 조소처럼. 남자에게 왕자의 시선은 그저 하찮은 것이었을테니.

-뭘 멀뚱멀뚱 보고있어? 보아하니 거의 다된 것 같은데. 야. 3개월 미만으로 남은 애들은 망가뜨려도 합법이야, 알아? 하긴, 알 리가 없지. 빨리 가라고! 너 때문에 손 젖었으니까.

왕자의 시선은 흔들렸지만 감정은 명확히 느껴졌다. 왕자는 남자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으나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천사의 부드럽고 높은 목소리만 들어왔던 왕자에게 남자의 걸걸하고 가래 낀 목소리는 귀가 아플 정도로 듣기 힘든 것이었다. 남자의 문장에는 또한 주어가, 아니 목적어가, 어쨌든 왕자가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단어들이 숭덩숭덩 잘려 있었다. 남자의 의도였겠지만, 어쩌면 아닐 수도 있고, 왕자는 찝찝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그 문장들에서 계속 허우적대고만 있었다. 남자의 악쓰는 소리를 더는 듣기 싫어 왕자는 휘적휘적, 그러나 안간힘을 쓰며 남자의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쯤이면 천사는 애타게 왕자를 찾고 있으리라.

 

-이게 대체 뭐지?

 

-뭐야, 이건?

 

-이게 뭐냐고!

 

점점 초록빛에서 다시 회색빛이 되어가는 바닥을 보며 걷던 왕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왕자는 자의를 구별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왕자의 다리는 계속 움직였다. 앞으로, 앞으로. 왕자가 가고 싶어했던 방향으로. 그래서 자의일까. 하지만 분명히 왕자의 다리는 왕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고개를 든 왕자의 앞에는 수많은 왕자들이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수만의 자신이 자신의 옆에서 걷는 기괴한 모습은 왕자를 기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왕자의 고함은 다른 왕자들의 몸을 튕기며 점점 작아졌고 작아지며 모든 왕자들에게 닿아 부딪혔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입을 열고 있는 왕자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왕자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두 다리를 교차하며 앞으로만 걷고 있었다. 끼긱거리는 다리의 소리는 점점 커졌고 바닥에 닿는 발에서 나는 턱턱 소리는 왕자들을 집어삼킬 듯이 점점 빨라졌다. 왕자는 이내 뛰고 있었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리를 멈출 생각은 이미 버렸다. 왕자들의 걸음에 하늘에는 곧 초록색 천장이 생겨 어둠이 찾아왔다. 네 개의 벽을 가진 왕자의 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곳에는 천사가 아닌 수많은 왕자가 있다는 것. 아직도 앞으로 뛰고 있다는 것. 밖은 어둡고 안은 추웠지만 이곳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덥다는 것. 앞으로 가던 왕자들이 하나 둘씩 사라질정도로 덥고 뜨겁다는 것. 왕자의 망가진 손은 이미 녹고 있다는 것. 왕자의 앞에서 달리던 왕자가 녹아 흘러버렸다는 것. 왕자의 두 발은 눌러붙어 이미 녹은 왕자들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왕자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 이상하게 왕자는 아프지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으니 왕자는 오직 생각만을 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기억하고 또 기억했다. 천사가 해주었던 이야기. 천사와 나누었던 이야기. 마주쳤던 남자. 남자의 이야기. 걷기 시작하던 자신. 그리고 녹고 있는 자신. 그리고, 그리고...천사가 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것. 왕자의 기억도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왕자는 녹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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