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아스라이

2023.07.08 17:1907.08

 

 

헤어지기 싫어.

 

 

언젠가 유라에게 했던 말이었다. 뒤따라 온 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유라는 우리가 헤어질 일 따위는 없다며 나를 안심시켰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기억이 아주 조금씩 소멸하고 있다. 가끔 거리를 걷다가도 목적지를 잃었고, 종종 하려던 말을 까먹어 금붕어처럼 입을 버끔거리다 끝내 입을 다물었다. 무언갈 써서 남기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던 것 또한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곳곳에 두서없이 써 내려간 형형색색의 메모지들이 붙어 있었다. 누군가와 약속한 것들은 빨간색, 기억해야 하는 것들은 노란색, 챙겨야 하는 것들은 초록색, 어설프게 정해진 규율은 잦은 이탈을 일삼았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수많은 메모지 속에서 주어는 ‘유라’를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부분 유라와 약속했거나, 유라와 같이 하기로 했던 것들, 유라에게 줘야 하는 것들.

 

 

「 유라. 6월 11일. B48 구역에서 만나. 」

빨간색 메모지.

 

「 B 48구역. 유라한테 받은 거, 돌려줘야 해. 」

그 옆에 초록색이었다.

 

우습게도 머리는 잊어도 몸이 기억하는 것들이 있다. 무슨 약속과 어떤 물건을 받고 돌려주기까지 해야 하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이 글씨를 쓴 사람이 나라는 것. 손가락 끝으로 글자 위를 천천히 쓸었다. 매끈한 종이 위로 울퉁한 볼펜의 촉감이 느껴졌다. 기억해내야 하는데. 하필 오늘이 유라와 약속한 날의 하루 전날이다. 아마 이쯤에서 이 이야기를 읽는 당신은 답답함을 느끼거나, 나를 갑갑하게 느낄 것이 분명하다. 유라에게 무엇을 돌려줘야 하는지 물으면 그만인 문제가 아닌가? 싶겠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장 하지 않을 것이다. 끝이 궁금하지 않으면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인간임을 알기에 나는 치사하게도 그 점을 자극할 예정이다. 그러니 나와 유라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줬으면 좋겠다. 아마 세 페이지를 겨우 넘길 분량이겠지. 기세 좋게 말한 것과는 달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내 기억이 그만큼 버텨주지 않으므로.

 

 

내가 처음 소설을 쓰겠다고 했을 때 유라는 웃었다. 웃음이 점점 커지더니 몸도 가누지 못해 벽에 기대어 숨을 헐떡이기까지 했다. 복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볼 정도였다. 한참을 웃고 나서는 무슨 이야기를 쓸 건지 묻는다. 타이밍 한 번 좋다. 그 웃음에 비웃음이 서려 있는 줄 알고 소설을 쓰지 않겠노라 다짐하던 찰나였는데 말이다.

 

“가장 먼저 너와 내 이야기를 쓸 거야.”

“싫은데.”

“왜?”

“내 이름은 안 빌려줄 건데.”

“그럼 너랑 내 이야기를, 다른 이름으로 쓸게.”

“그래.”

 

그날 기록된 메모지는 「 유라의 이름을 쓰지 말 것 」 빨간색이었다. 물론 소설을 쓰겠다는 포부는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왜 유라는 자신의 이름을 내 소설에 등장시키지 않으려고 했을까. 빨간색 메모지 아래에 노란색 메모지도 붙어 있었다. 「 왜? 」 그저 한날 대뜸 의문이 생겼나 보다 싶다.

 

쿵, 쿵, 쿵.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건 안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어떤 물체에 의해 나는 소리. 부딪히고 있는 건가, 충돌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부서지고 있는 건가. 조금 전 소리가 난 곳으로 향해 걸어갔다. 귀를 대고 눈을 감는다. 만약 어딘가에 부딪힌 거라면 엔진에 무리가 갈 것 같은데.

 

 

엔진.

엔… 진?

 

 

엔진이 아무래도 고장 난 것 같아. 넌 여기 있어. 나가서 고장 나면 고쳐줄 시간도 없고, 답도 없어. 그냥 내가 나가서 손 좀 보고 올게. 잘 지키고 있어라. 너 소설 쓸 거라며, 그거나 쓰고 있던지. 엔진 불 들어오면 B01로 곧장 가는 거야.

 

 

눈을 떴음에도 온 세상이 까맣게 물들어 있다.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댄다. 차가운 피부결이 느껴졌다. 유리창 너머에 메모지가 동그랗게 붙어 있다. 꼭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은 방 안처럼. 푸른색, 초록색, 흰색이 물감처럼 퍼져있다. 황홀하다. 황홀이 뭔지 모르겠으나 유라가 옆에 있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만 같다. 저 황홀한 무언가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때 몸이 위로, 아래로 쏠리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부딪혔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이젠 내게서 났다. 어떻게든 유리창과 멀어지지 않으려 팔을 크게 휘둘러 본다. 노란색 메모지와 노란빛이 났다.

 

 

노랗고, 반짝거리고, 딱딱한 거.

 

 

B48 구역 알지? 거기에 도선장이라고 우주선 몰면서 쓰레기 줍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줬어. 딱딱한 게 빛나더라고. 지구에서는 금이라고 엄청 값 비싸게 받는대. 여기선 고작 쓰레기인데. 꼭 똥처럼 생겼다 그치. 아, 넌 똥 싸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그런 표정 하지 마. 너 놀린 거 아니야. 대신 이거 너한테 줄게. 됐지? 그렇다고 쓰레기를 준다는 말이 아니야. 우리는 곧 지구로 갈 거잖아.

 

 

아, 기억났다. 나는 유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어디였더라…… 아, 지구다. 오랜 나의 친구이자, 나를 만든 유라. 유라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만나면 진짜 이름을 불러줘야 하는데 그래야 “소설 쓰고 앉았네.” 라며 비아냥거리는 잔소리를 안 들을 텐데. 유라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래도 부단히 써야겠다. 유라가 숨겨둔 유라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이쯤에서 이 낙서 같은 문장을 끝낸다.

 

 

 

그런데, 유라는 어디 갔지.

 

 

.

.

.

 

 

 

유……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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