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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 골드버그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존재하는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세계의 시공간에 왜곡을 일으킨다. 한 명의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왜곡은 크고 작은 파장을 일으키며 주위 세계를 도미노처럼 순차적으로 일그러뜨린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만인에 의해 매 순간 일그러지는 무수한 찰나의 단면이다. 개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왜곡은 일어나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는 행위, 당신이 화면 속 글자를 읽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는 행위,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동안 뇌 안에서 활발히 일어나는 신경의 작용, 최종적으로 당신의 정신에 안착된 무형의 이해, 이 모든 사소하면서도 불가역적인 일들이 단 한순간도 끊임없이 우리 주변 세계에 왜곡을 일으키고 있다. 당신 눈에 우연으로 보이는 사건들 역시 이처럼 극소한 단위에서 치밀하게 발생한 왜곡의 결과이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특징을 지닌 생명체가 전 우주를 통틀어 인간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의견이나 느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적, 합리적 수단을 통하여 의심의 여지없이 명명백백히 밝혀진 진실에 근거하여 선언하는 것이다. 나는 신조차 완벽하게 납득할 만한 논리적 과정을 거쳐 궁극적으로 틀릴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이러한 결론을 바탕으로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행위의 인과를 빠짐없이 검토하여 단 하나의 수치로 정량화할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하였다.

……

그렇게 탄생한 기계의 기능과 역할은 한 마디로 '고객의 인생을 정산하는 것'이다. 정산의 결괏값은 11차원 안쪽의 우주와 그것들의 평행우주에 가능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모든 사건들의 절대적 평균값이다. 이것은 한 인간의 인생에 대해서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을 무한한 우주의 데이터로 교차 검증한 결과이므로, 도출된 값과 다른 값을 상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기계는 완전하다. 기계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이 기계의 도움을 받으면 당신은 당신의 인생에 대해 역사상 가장 완전한 보고서를 받아볼 수 있다. 당신의 눈앞에 도래한 당신 인생의 총체, 그 놀라운 감각을 선사할 이 기계의 이름은 바로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이다.

김동화 박사는 자신의 일생일대의 역작을 대중에게 홍보하는 글을 막 완성하였다.

박사는 이 신비로운 기계를 루브 골드버그 월드의 중앙 광장에 설치했다. 루브 골드버그 월드는 그가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개발한 수많은 알고리즘 머신을 고객이 직접 체험한 뒤, 필요에 따라 개인 모듈로 내려받아 이용할 수 있도록 조성해 놓은 한국형 아카이빙 테마파크였다. 박사는 자신의 테마파크에 어릴 적 가장 존경했던 미국 만화가 루브 골드버그의 이름을 붙였다. 계절마다 새로운 색감으로 화려하게 치장하는 루브 골드버그 월드의 맞은편 산 아래에는 거대한 서버가 구축된 무채색의 김동화 연구센터가 있었고, 그 안에는 박사를 따르는 수많은 연구원들이 오늘도 밤잠 줄여가며 새로운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발명된 기계는 에펠탑을 똑 닮은 외형에, 크기는 루브 골드버그 월드의 널찍한 중앙 광장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했다. 김동화 박사는 처음에 이 기계의 이름을 '인생 정산기'라고 지나치게 정직하게 짓고는, 그 결괏값도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표시되도록 설정했다. 이를테면 '열심히 달려온 당신의 인생은, 두둥! 99점입니다! 남은 1점은 행복으로 채우세요.' 하는 식이었는데, 웬일인지 돈을 내고 기계에 들어갔다 나오는 고객들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인생 정산기의 7층 제어실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고성능 망원경으로 고객들의 어두운 표정을 관찰하던 김동화 박사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실행에 옮긴 조치는 기계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김동화 박사가 3일 밤낮을 꼬박 새워 고안해 낸 이름은 '시발 인생 정산기'였다. 한국 최초의 자동차인 '시발 자동차'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름이었는데, 테마파크 직원―이들은 김동화 연구센터 소속 연구원이기도 했다―에게 사전 공개했을 때 반응이 괜찮아서 그대로 추진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인터넷 여론은 김동화 박사에 대한 조롱 일색이었다. 어지간한 악플은 태연히 웃어넘기던 박사였지만, 우연히 보게 된 어느 SNS 게시물 앞에서는 차마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기계의 이름을 재변경하기로 결심하였다. '시발 인생 정산기' 입구에서 찍은 사진을 첨부한 그 게시물에는 이런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원래 있던 '인생 정산기' 간판 앞에 '시발'만 갖다 붙이는 비용 절감 스킬 보소.

김동화 박사는 인터넷 공간이 부디 생산적인 담론의 장으로 거듭나길 바라면서 '시발 인생 정산기' 간판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다음 이름이 정해질 때까지 기계의 운영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로 했다. 박사는 이런 획기적인 발명품을 덩그러니 세워둘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을 느꼈다. 실망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운영을 재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김동화 박사는 먼저 사내 공모대회를 열었다. 기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준 직원에게는 일주일 포상휴가와 함께 하와이 패키지 여행권을 선물로 지급하기로 했다. 그만큼 기계에 대한 박사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전 직원의 열렬한 성원에 힘입어 수많은 출품작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이 '시발 인생 정산기'란 이름에 엄지를 척하고 치켜들었던 그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발하고 트렌디한 이름이 많았다.  어떤 이름을 고를까 고민하던 김동화 박사는 고심 끝에 모든 출품작을 가나다 순으로 정렬한 뒤 전 직원을 대상으로 익명의 서베이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직전에 '시발 인생 정산기'로 한 번 쓴맛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독자적 판단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첫 번째 투표 결과에서 거의 대부분의 출품작이 한 표씩을 타가는 것을 보며 김동화 박사는 장탄식을 뱉었다. 그런 다음에 곧바로 두 번째 서베이에 직원 한 사람 당 이름을 세 개씩 고르게 했다. 그러자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처럼 좋은 이름들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이름이 바로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이었다. 공모대회 우승자인 이나라 연구원은, '우주적 규모의 데이터를 검증하는 작업은 동화 속 요정이 부리는 마술에 가까운 일이고, 그러한 작업을 통해 도출되는 결괏값이 극히 사소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은 세간에 알려진 골드버그 머신의 지향점과 닮아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생각했다'고 밝혔다. 훌륭한 설명이었지만 김동화 박사는 그것보다 그저 자신의 이름과 어릴 적 우상의 이름이 나란히 들어갔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박사는 이나라 연구원에게 약속된 포상과 함께 예정에 없던 보너스까지 추가 지급하는 것으로 자신의 만족감을 표했다. 김동화 박사는 좋은 사장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는 것만으로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리라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김동화 박사는 기계의 외관도 다시 설계하라고 지시했다. 한국 사람이 만들어서 한국 땅에 설치한 기계에 에펠탑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 웬 말이냐며 열변을 토했을 때 어디선가 작게 들린 '그럼 테마파크 이름부터 동화 나라로 바꿔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속삭임은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진짜 문제는 기계의 외관을 뜯어고치는 작업이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핵심 장치와 부품까지 전부 다시 설계해야 하고, 그러려면 시간이 최소 2년 이상 소요된다는 것이 업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길게 시간을 끌 수 없었던 김동화 박사는 결국 현재의 외관에 철근으로 골조를 세우고 그 위에 다보탑 디자인의 구조물을 부분별로 제작해 덧씌우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3개월여의 공사 끝에 베일을 벗고 모습을 드러낸 기계는 테마파크를 방문한 고객들의 통행을 곳곳에서 가로막을 정도로 비대해져 있었다.

운영이 재개된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평가 실적은 여전히 저조했다. 대신 '김동화', '루브 골드버그 월드',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 리디자인', '다보탑', '석가탑', '불국사', '석굴암', '경주 황남빵'이 모두 각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올랐고, 주요 언론들은 '김동화 박사의 무모한 기행' 운운하는 헤드라인에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일러스트를 첨부한 기사를 1면에 올렸다. 당연히 박사가 원했던 반응은 이게 아니었다.

김동화 박사는 수석 연구원들을 불러 모아 루브 골드버그 월드에서 고객을 꾸준히 유치하는 코너들의 강점을 철저히 분석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최근 3년 간 고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았던 코너들의 공통점을 분석한 결과, 대중이 눈에 띄게 반응을 보이는 포인트는 두 가지, 즉 '재미'와 '감동'이었음이 드러났다. 김동화 박사는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을 기필코 재미와 감동의 결정체로 빚어내고야 말겠다고 결연히 다짐했다.

더불어 스테디셀러 코너를 이용하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 결과를 다각도에서 검토한 결과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고객들은 의외로 자기 자신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건 언제나 다른 사람이었다. 루브 골드버그 월드의 '욕망의 청개구리 머신'이 제공하는 성향파악 알고리즘 조작 기능을 이용하는 고객은 주로 대형 SNS 플랫폼 이용자들이었다. 그들은 온라인에서 자신의 성향을 공개하지 않는 것을 넘어, 전혀 관심 없는 다른 분야의 욕망을 일부러 노출시키고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봐주기를 열렬히 희망했다. 김동화 박사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현상에 대한 자신의 무지와 편견이 연구 결과 해석에 임의로 간섭할 여지를 주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를 기울였다.

또 다른 인기 코너 '나만의 공작새 서칭 머신'이 제공하는 뻐꾸기 판독 기능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만의 이상형을 정교한 알고리즘에 기반하여 찾고 싶다며 서비스를 구독한 수많은 고객의 본심은, 지금 썸 타고 있는 사람과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을 경우 그가 남보기에 부끄러운 수준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데에만 치중되어 있었다. 김동화 박사와 수석 연구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음 전략을 수립했다. 핵심은 '타인에게 괜찮게 비추어지는 나' 또는, '주변 사람들과 비교해 봤을 때 상대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나'였다. 인생 정산이라고 해서 다를 리 없었다. 한 사람의 인생만 깔끔하게 정산해서 보여준다고 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정 집단에서 고객이 갖는 상대적 위치를 계산해서 알려줄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박사는 먼저 연산 결과의 표시 형식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희대의 발명품이라는 기계가 작성한 보고서의 정보량이 노래방에서 한 곡 거하게 뽑았을 때 스크린에 뜨는 정보량과 별반 다를 게 없다면, 그게 아무리 우주적 연산의 결과물이라 한들 누가 20만 원이나 되는 큰돈을 선뜻 내고 이용하려 하겠는가. 그렇다.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의 1회 이용료는 그 어떤 할인도 적용되지 않는 20만 원이었다. 그보다 저렴한 금액으로는 최상의 연산 품질을 담보할 수 없고, 그렇게 되는 것은 김동화 박사가 결코 용납하지 못할 것이었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주적 규모의 연산량을 고려하면 20만 원도 거저나 다름없는 금액이라는 것이 박사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하지만 대중이 그러한 사정을 이해하고 테마파크 측 입장에 공감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기계 앞에서 티켓을 판매하는 직원마저도 고객에게 송구하다고 굽실거리는 모습을 박사는 보고야 말았다. 비싼 만큼 제 값을 하는 기계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했다. 고객에게나 직원에게나.

그러려면 출력되는 결괏값이 너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고객의 시선을 확 끌어당길 수 있도록 보고서를 다시 디자인해야 했다. 김동화 박사는 고객의 행위 또는 그로부터 파생한 중요한 사건들을 그의 인생에 미친 영향에 따라 긍정, 부정, 중립 요인으로 나누고, 그것들이 일으킨 왜곡의 총량에 인과비율 가중치를 적용하여 각각의 평균값을 산출한 뒤, 이를 바탕으로 인생의 주요한 변곡점이 되는 시기를 압축적으로 개관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입체 그래프 형식을 제안했다. 그리고 거기에 고객의 희망에 따라 가능한 열람 옵션을 추가하자고 했다. 그중 하나는 고객이 유의미하게 생각하는 그룹 내에서 그 자신이 갖는 상대적 위치를 열람할 수 있게 해주는 키워드 옵션이었다. 예를 들어 고객이 다니는 회사에서 업무 능력을 기준으로 자신이 어느 정도 인재인지 알고 싶으면, '업무 능력' 키워드와 그에 포함되는 몇 가지 하위 요인을 선택함으로써 본인이 그룹 내 상위 몇 퍼센트에 위치하는지 다중우주론적 통계에 기반하여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언제나 고객이 포함된 그룹 안에서 그 자신에 관한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이었으므로, 원칙적으로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할 여지가 없는 안전한 옵션이었다. 이를테면 기업의 회장이 부사장 그룹이나 자녀 그룹에 속하는 특정인의 충성도 서열을 무단으로 열람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다만 상대적으로 정교한 연산을 수행하기 위해 추가 비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김동화 박사는 키워드 옵션에 30만 원의 추가 금액을 책정했다.

또한 김동화 박사는 정산 시점까지의 결괏값을 바탕으로 미래의 한 시점을 골드버그식 인과 법칙에 따라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옵션을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시뮬레이션할 시점은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이 확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미래 중 가장 의미 있는 시점으로 자동 설정되는 조건이었다. 사실 이는 대단히 과감한 제안이었는데, 시뮬레이션의 적중률이 99.9% 이상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남은 인생에서 임의로 선택된 한 장면에 대한 프리뷰였다. 제도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코 실패하고 싶지 않았던 김동화 박사는 해당 옵션을 다소 무리하게라도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시뮬레이션 옵션의 추가 금액은 위험 요인을 감안하여 50만 원으로 책정하였다. 이제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을 풀옵션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고객은 100만 원이나 되는 거금을 지출해야만 했다. 김동화 박사는 떨리는 마음으로 바뀐 정책의 세부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루브 골드버그 월드 정문은 아침 개장 전부터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을 이용하려는 고객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김동화 박사는 하루아침에 벼락 스타가 되었다. 방송사마다 김동화 박사와 루브 골드버그 월드를 소재로 한 굵직굵직한 특집 기획을 제안했고, 유력 언론사의 기자들부터 들어본 적 없는 수많은 단체의 관계자들이 앞다투어 박사에게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 회사에 이익이 될 만한 제안을 선별하여 메일로 회신하는 업무팀을 따로 꾸려야 할 정도로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그 사이에 발 빠른 기자들은 아침부터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고객들을 인터뷰하여 쪽기사로 내보냈다. 박사를 비판하던 기사들의 논조가 순식간에 찬양 일변도로 돌아섰다. 김동화 박사는 매일 밤 침대에 누워 특집 기사를 읽다 잠들었다.

그중 중요한 시험이나 오디션을 앞둔 이들의 사연이 단연 눈에 띄었다. 경쟁자 그룹에서 자신의 실력과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이번에 합격할 수 있을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다. 한 번은 기계에 들어갔다 나오는 두 고등학생 고객의 표정을 대조하여 내보낸 기사가 화제가 되었다. 한 명은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두 팔을 뻗으며 환호성을 내질렀고, 다른 한 명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았는데, 알고 보니 둘이 같은 반 친구 사이라고 했다. 기사의 제목은 '안녕 친구야... 친구 관계 정산도 미리미리'였다. 김동화 박사는 좀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곧 머리를 털어 그 생각을 날려버렸다.

그러던 중 중소 연예기획사 '비욘드케이'에 초대형 호재가 터졌다. 어느 젊은 아빠가 다섯 살 난 아들을 데리고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에 들어갔는데, 아들이 음악성 키워드에서 또래에 비해 압도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것으로 밝혀진 데다가 15년 뒤에는 세계 최정상급 가수가 된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 결과 화면에 아들의 소속사가 '비욘드케이'라 찍혀 있었다는 이유로 아빠는 아들을 일찌감치 해당 기획사에 보내 트레이닝을 받게 했고, 관련 기업의 주가는 날마다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 김동화 박사는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급기야 태어난 지 100일 된 아기를 품에 안고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에 들어간 고객이 구설수에 오르자 박사는 더 이상 상황을 이대로 방치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김동화 박사는 즉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세 가지 대책이 나왔다. 첫째,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의 이용 연령을 만 18세 이상으로 제한하고 동반 입장을 금지할 것. 둘째, 고객이 시뮬레이션 결과를 온-오프라인의 어떤 공적인 공간에도 공개하지 않는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는 조건으로 체험을 허가할 것. 셋째,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이 출력한 값은 어디까지나 추정치일 뿐이므로 결과 해석과 활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고객 본인에게 있음을 분명히 할 것. 김동화 박사는 다음 날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개정된 운영 방침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김동화 박사의 발 빠른 대처에 박수를 보냈다.

한동안은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으나 평화는 길게 가지 않았다.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을 둘러싼 잡음은 꾸준히 들려왔다. 기계의 안내에 따라 자신의 미래를 시뮬레이션한 사람들은 하던 공부와 다니던 직장을 미련 없이 그만두고 정해진 미래로 가는 최단거리를 택했다. 사회과학 연구자와 문화평론가들은 각종 매체에 출연하여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이 사회의 역동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저해한다는 연구 결과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들 중 일부는 '현실의 시공간에 붙박여 살아가는 인간 삶의 본질적 제약은 고려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양 거짓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김동화 박사가 사회 혼란을 야기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 밖에도 박사를 향한 크고 작은 비판이 연일 미디어를 타고 흘러넘쳤다. 비판의 요지는 명확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중간 시점에 정산하는 행위가 그들 자신과 타인의 삶에 결정적인 왜곡을 일으킨다는 지당한 이치를, 김동화 박사는 간과했다. 그 자신의 연구를 뒷받침하는 핵심 논리가 바로 그것이었음에도.'

이제 온라인에는 인간 세계에 혼란만 가져다주는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을 폭파해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게시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왔다. 테러 위협에 대한 신고가 잦아지자 경찰 인력이 상주하다시피 하며 수상한 사람들이 있는지 지켜보았지만 그럴수록 루브 골드버그 월드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져만 갔다. 김동화 박사를 필두로 하여 수많은 직원과 연구원들 역시 초긴장 모드로 비상근무태세에 돌입했으나 불안을 가라앉히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박사는 공항에서 쓰는 것과 같은 보안 검색대와 전신 스캐너를 도입하기로 하고 직원들에게 업체와 협력하여 설비를 추진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김동화 연구센터에서 근무하는 한 연구원이 연차를 쓰고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에 들어가려다 테러범으로 오해받아 경찰 조사를 받는 촌극이 벌어졌다. 기계 이름 공모전 우승자인 이나라 연구원이었다. 당시 이나라 연구원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친친 동여맨 검은 망토 차림에 커다란 검은 캡과 선글라스, 검은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였다. 전부터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을 꼭 한 번 이용해보고 싶었는데 동료들에게 밝히긴 왠지 껄끄러워서 망설였다고 했다. 그러다 보안 검색대와 전신 스캐너 설비가 들어온단 얘길 듣고, 서두르지 않으면 기계를 몰래 체험해 볼 기회가 영영 사라질 수도 있겠다 싶어 조바심이 났다고 했다. 단순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박사에겐 조금 뜻밖이었다. 공모전 이후 김동화 박사는 자연히 이나라 연구원을 눈여겨보았는데, 그는 성실하고 뛰어난 연구원이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주목을 받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상상해보지 못했다.

김동화 박사는 직접 경찰서에 찾아가 이나라 연구원의 신원을 확인해 주고 데리고 나오면서, 그런 설비가 들어와도 특정인의 개인식별정보를 마음대로 확인할 수는 없다고 일러주었다. 그러면서 '이나라 연구원은 외모가 그리 눈에 띄지 않으니 다음부턴 모자 정도만 푹 쓰고 들어가면 아무도 못 알아볼 것'이라고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이나라 연구원은 박사와 함께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안해진 김동화 박사가 대체 이런 망토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망토가 바닥에 스스스 하고 끌리는 소리가 둘 사이 어색한 침묵을 맞춤하게 달래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이나라 연구원이 조사받는 과정에서 잠깐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던 말이 교묘하게 흘러나가 기사화되며 다시 한번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기사 제목은 '어느 핵심 개발자의 고백,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은 인생 정산기가 아니라 희망고문기죠."'였다. 해당 기사는 이나라 연구원의 말을 인용하여,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이 평범한 사람들의 그릇된 욕망을 부추기고 미래의 자원을 무리하게 당겨 쓰게 하는 일종의 '인생 가불기'라는 논지를 펼쳤다. 잘 견뎌오던 김동화 박사는 이 기사 한 방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믿었던 이나라 연구원에 대한 배신감 때문인지, 아니면 최근 자신의 연구 업적이 부정당하는 기류에 대한 좌절감이 드디어 폭발했기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깊은 열패감에 사로잡혔다. 대체 무엇으로부터의 열패감일까. 정말 내가 잘못한 걸까. 나는 실패자인가.

한편으로 김동화 박사는 이나라 연구원이 아무리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해도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어떻게 그렇게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유심히 지켜본 바, 이나라 연구원은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박사는 사건 당일에 일어났던 일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알고 보니 이나라 연구원은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의 대기줄에 서있다가 곧장 조사를 받으러 간 게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검은 옷차림 때문에 눈에 띈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섣불리 입장을 막을 수는 없어서 우선 들여보낸 뒤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했다. 매뉴얼에 따른 올바른 대응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나라 연구원에겐 기계를 이용할 시간도 충분히 주어졌던 듯했다. 그렇다면 그가 그런 거친 말을 하게 된 건 이용 과정에서 무언가 불만족스럽거나 예기치 못한 경험을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막상 기계를 써보니 우리가 피땀 흘려 설계한 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거나, 설계 단계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류를 이용 중 뒤늦게 발견했다거나.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개발한 연구원 입장에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지. 그래서 그런 거친 언사를 내뱉었으리라.

이나라 연구원을 불러서 직접 물어볼까 고민하던 김동화 박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원치 않게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데다 그 자신이 박사를 비판하는 듯한 뉘앙스의 기사까지 터져서 마음이 많이 뒤숭숭할 터였다. 김동화 박사는 본인이 직접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에 들어가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최고 책임자로서 자신의 역할이라고, 박사는 생각했다.

깊은 밤과 새벽 사이 아무도 없는 시간을 틈타 박사는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에 잠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만든 기계에 몰래 들어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실이 원망스러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일을 공개적으로 진행했다간 기자들이 그걸 가지고 온갖 추측성 기사들을 써댈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 중 일부는 치명적인 독화살이 되어 김동화 박사에게 날아올 것이었다. 김동화 박사는 자신과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연구원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를 쥐고 흔들고 우리가 해낸 모든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건 루브 골드버그 월드를 이용하는 고객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이나라 연구원이 조사받을 때의 행색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의 김동화 박사가 마스터키로 루브 골드버그 월드의 측문을 열고 중앙 광장으로 다가갔다. 거대한 외관을 자랑하는 기계가 마치 박사를 압도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박사는 최근에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할 기회가 없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복잡한 심경으로 기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사는 매표소 캐시박스 위에 현금 100만 원을 올려두고는 기단부 중앙에 난 입구로 입장했다.

기계의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사방 벽을 가득 메운 스크린들이 일제히 켜지면서 실내에 어스름한 빛이 돌았다. 조명을 따로 켜지만 않으면 이 정도 빛은 밖에서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1층 대기실로 들어서자 맞은편에서 말쑥한 정장 차림의 홀로그램 남성이 환하게 웃으며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연산자 골드버그입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박사는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에 고도로 독립적인 사고와 소통이 가능한 인공지능 연산자를 심어두었고, 거기에 루브 골드버그를 모방한 캐릭터 설정을 적용하였다. 연산자의 이름까지 골드버그로 지음으로써, 그는 자신이 이 기계를 얼마나 각별히 여기는지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는 셈이었다.

"고객님이 서계신 곳은 루브 골드버그 월드가 추구하는 기술의 결정체,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의 실내입니다. 옆쪽에 위치한 나선형의 계단을 통해 2층 추출실로 올라가시면 고객님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선택한 모든 행위의 영향을 다중우주에서 일어난 연쇄작용의 영향과 대조하여 정교하게 분류해 드릴 것입니다."

안내에 따라 김동화 박사는 기초 데이터의 수집과 분류를 담당하는 2층 추출실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김동화 박사를 둘러싼 수백 개의 스크린이 우두커니 서있는 박사의 모습을 제각각 출력했다. 마치 놀이공원 속 마법의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박사는 제 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스크린 속 수백 명의 박사가 그 동작을 따라 했다. 어느새 뒤따라온 골드버그가 특유의 세련된 제스처와 함께 박사에게 말을 건넸다.

"작업에는 15분가량 소요됩니다. 그동안 추출을 중단하고 싶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결과 보고서는 3층 기초 열람실에서 제공합니다. 추출이 완료되면 3층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부터 추출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모든 스크린이 일제히 꺼지더니 곧 각양각색의 이미지를 무작위로 출력하기 시작했다. 박사는 그것이 자신의 기억이 복합적으로 추상화된 형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지에 얽힌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크린을 스쳐 지나갔다. 그중 어떤 이미지는 조금 길게 스크린에 머물렀는데, 박사의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경험과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경험의 중요도는 구체적으로 그 경험이 존재했던 인생과 존재하지 않았던 인생에서 각각 발생한 왜곡의 총량을 대조함으로써 평가되는 것이었다. 박사는 기계의 작동 원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자신에게 의미 있게 여겨졌던 인생의 몇몇 장면들이 이 정교한 기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더욱 궁금했다. 15분쯤 후 추출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뜨자 박사는 조용히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열람실 스크린에 출력된 결과 보고서를 확인한 박사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박사가 처음으로 루브 골드버그의 만화를 감명 깊게 보던 순간이 중립 요인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김동화 박사는 자신이 이룬 연구 업적의 근간이 어릴 적 우상과의 운명적 만남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우상의 발상을 처음 접했던 순간이 겨우 중립 요인이라니, 그럼 이 모든 연구가 있으나마나 한 것이라는 말이 아닌가. 김동화 박사는 강하게 이는 현기증에 몸을 비척거렸지만 두 눈은 여전히 부릅뜬 채로 정면의 메인 스크린을 향해 있었다. 스크린에는 추출 결과 보고서의 첫 페이지가 실내의 조도에 맞추어 은은히 출력되고 있었다. 박사가 골드버그에게 말했다.

"다음 장을 보여줘요."

이어서 나오는 결과는 더 의외였다. 추출 결과에 따르면 김동화 박사의 인생에서 마이너스 요인으로 분류된 왜곡은 대부분 성인이 된 이후에 발생했다. 그중 가장 이상했던 건 김동화 박사의 대중적인 데뷔작으로 널리 알려진 '의사결정 절차 지연 알고리즘'을 학계에 처음 발표한 사건이 확정적 마이너스 요인으로 분류된 점이었다. 일찍부터 루브 골드버그식 연쇄작용에 관심을 가졌던 김동화 박사는, 단위 프로세스에서 표면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보편행위군을 산출하여 이를 토대로 사용자에게 필요한 만큼 의사결정 절차를 지연시킬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했었다. 이 알고리즘은 흔히 '결정장애' 혹은 '거절불능증후군'이란 걸 갖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혼자서는 좀처럼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친구나 동료의 판단에 기계적으로 따르거나, 타인의 예기치 못한 부탁에 우물쭈물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승낙하고 말던 수많은 사람들은 드디어 자신에게 꼭 필요한 기술이 나왔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 기술의 혜택을 입었다. 의사결정 절차 지연 알고리즘 서비스를 구독한 고객들은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느라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놓치지 않아도 되었다. 원치 않는 부탁을 받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갑자기 닥쳤을 때는, 그저 개인 모듈로 사용자 권한을 사전에 위임해 둔 알고리즘을 실행해주기만 하면 되었다. 사용자가 당장 확답을 할 수 없는 타당한 이유는 차고 넘쳤고, 알고리즘은 그 이유를 사용자의 평소 생활 패턴과 성향에 맞추어 가장 자연스럽고도 효과적인 형태로 구현해 주었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이미지나 평판이 망가질 염려 없이 자연스럽게 결정을 유예할 수 있었다.

물론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의사결정 절차 지연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과 효용에 의구심을 품었다. 당시 대중이 품었던 의구심의 핵심은, 추구하는 목표에 비해 수단이 지나치게 거창하고 비효율적이라는 것이었다. 의사결정 절차 지연 알고리즘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바란 결국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라는 말 한마디에 불과한데, 겨우 그 말을 하려고 이런 거짓말 메커니즘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있는 그대로 심플하게 말할 수 있게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는 것이 훨씬 건전한 방식 아닐까. 박사는 결국 그 논리에 설득되고 말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어쩌면 의사결정 절차 지연 알고리즘 같은 건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라. 박사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메인 스크린을 계속 주시했다. 야트막하게 품었던 기대가 무색하게도, 박사의 다른 발명품들 역시 그 정도만 다를 뿐 대체로 중립에서 부정 요인에 걸쳐 있었다. 박사는 점차 심리적으로 위축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망의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의 발명은 과연 어떤 요인으로 분류될까. 김동화 박사는 문득 궁금해졌다. 골드버그는 자기 자신의 창조주에게 어떤 답을 들려줄까. 마이너스 요인이라고 한다면 자기 존재의 의미를 부정하는 꼴이 될 것이고, 돌연 플러스 요인이라고 태도를 바꾼다면 분류 기준의 일관성이 흔들릴 터였다. 그래, 어디 어떻게 나오나 보자. 어느덧 박사는 기계에게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투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고서의 마지막 장까지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이게 끝입니까?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을 제작하고 발표한 것은요?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니만큼, 이로부터 발생한 왜곡의 양도 상당할 텐데요. 가능하다면 추출 결과를 알고 싶습니다."

"고객님, 추출 결과 보고는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은 검증 가능한 객관적 명제의 범위를 벗어났으므로, 본 연산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하! 자기 자신에 대해선 객관적 연산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고요? 골드버그 당신, 생각보다 영악한 구석이 있군요. 어쩌면 내가 설계 단계에서부터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고객님,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경험을 제공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만 저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고객님의 인생을 정산하도록 설계되었으므로 알고리즘에 의해 도출된 결론 외에 다른 결괏값을 출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보고서는 고객님께서 사전 동의하신 바에 따라 출력된 것이므로, 결과 해석과 활용에 대한 권한은 모두 고객님께 있음을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박사는 왠지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하룻밤은 그렇게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알았어요. 그쯤하고 이제 키워드 옵션으로 넘어가죠. 4층 키워드 분석실로 가면 되죠? 결과는 5층 차트 열람실에서 확인하고요."

"맞습니다. 고객님, 그런데 긍정 요인에 대한 검토는 충분히 하셨나요? 고객님의 시선을 자동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보고서 내용의 일부를 누락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중립 요인과 부정 요인에 꽂힌 나머지 긍정 요인은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보고서를 휙휙 넘겨버린 것이다. 김동화 박사는 골드버그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긍정 요인이 기록된 장을 다시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뜻밖에도 거기에 이나라 연구원의 이름이 있었다. 고심 끝에 공모전을 개최하고, 우승한 이나라 연구원에게 포상을 지급하고, 이후 이나라 연구원의 실적과 역량을 유심히 지켜보던 일련의 행위가 김동화 박사의 인생에 무언가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이나라 연구원이 먼저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을 몰래 이용하려다 들통나고, 그 때문에 박사가 지금 여기에 와있는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둘은 서로의 삶에 중대한 왜곡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김동화 박사의 인생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박사가 말했다.

"저, 불만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의아해서 그러는데, 이것들이 왜 긍정 요인으로 분류된 겁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한 사람의 인생에 왜곡을 일으키는 요인에서 긍정과 부정을 판별하는 척도가 뭐냐는 겁니다. 아 물론, 이 기계를 만든 총책임자로서 알만큼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건 왠지... 뭐랄까요... 좀 당황스러워서 말입니다."

"네, 익히 아시다시피 본 추출의 기준 자료는 11차원 안쪽에 존재하는 다양한 버전의 고객님의 인생에서 발생한 왜곡의 총량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해당 왜곡에 대한 고객님 자신의 이성적, 감성적 반응의 강도와 지속성이지요. 쉽게 말해, 고객님 본인이 오랫동안 좋아할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건은 긍정 요인이고 오랫동안 싫어할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건은 부정 요인입니다."

"그런데 왜 이나라 연구원이 긍정 요인의 맨 앞 장에 있는 겁니까."

박사의 말에 골드버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쉼표 같은 침묵 사이에 골드버그의 웃음이 은은히 배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답은 고객님께서 찾으셔야겠지요."

이어진 키워드 옵션에서 박사는 애초의 계획에서 한참 동떨어진 '사랑' 키워드를 입력한 뒤, 대상 그룹을 이나라 연구원의 지인으로 설정했다. 이나라 연구원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준으로 했을 때 자신이 어느 정도에 위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설정이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김동화 박사의 꽉 쥔 두 주먹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연산을 마친 골드버그가 말했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만, 상대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과 동일시하며 지속적으로 애정 어린 반응을 보인다는 사랑의 기본 가정에 기반한 연산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이나라 님을 사랑하는 고객님의 마음은 이나라 님의 지인 그룹에서 0.05% 안쪽에 위치합니다. 이는 통상 연인 간의 사랑보다 높은 수준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오차범위는요?"

"아시다시피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은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아니, 복잡 미묘한 감정의 상대적 크기를 논하면서 신뢰도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굳이 말씀드리자면 이번 연산의 신뢰 수준은 100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 알았으니까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갑시다."

"네,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은 고객님께 시뮬레이션 옵션을 적용한 미래 시점 열람 기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정산 결과를 바탕으로 했을 때, 가장 의미 있는 시뮬레이션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922일 후입니다. 시뮬레이션을 허용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고객님, 6층 시뮬레이션실로 이동해 주세요."

시뮬레이션 결과는 6층에서 곧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시뮬레이션 결과를 띄운 스크린 안에는 역시나 이나라 연구원이 들어가 있었다. 박사의 눈이 연못물처럼 투명하게 이나라 연구원의 해사한 미소를 반사했다. 스크린 속의 두 사람은 어느 공원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둘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박사는 그 말을 듣기 위해 스크린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다 금세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걸 깨닫고 멈춰 섰다. 심장이 세차게 뛰어왔다.

"골드버그,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보시는 대로입니다. 고객님이 보기엔 어떤가요?"

"행복해 보이네요. 나도, 이나라 연구원도요."

"행복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저건 922일 후에나 일어날 일 아닙니까. 마치 이미 일어난 것처럼 말하는군요."

"저에겐 현재와 미래의 구분이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않으니까요. 중요한 건 하나의 행위가 필연적으로 다른 행위를 불러일으킨다는 연쇄작용의 작동 원리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골드버그는 겨우 차 한 잔 우려 마시는 정도의 사소한 결과에 이르는 메커니즘을 고안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복잡한 연쇄작용이 더 기발하게 여겨졌던 거고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제 인생에 장기적인 변화를 불러올 만한 중대한 인연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상대적인 겁니다. 전 정밀한 연산을 수행하기 위해 실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누군가 차 한 잔을 마시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 사이에 의미 있는 차이를 보지 못합니다. 결국 두 행위 모두 인간들의 삶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일 아닙니까. 물론 그 삶을 살아가는 당사자인 고객님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전 아닙니다."

"... 우리가 저기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겁니까. 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네요. 볼륨을 좀 키워줄 수 있습니까."

"볼륨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현시점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확정적인 정보의 최대치를 고객님께 제공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겁니다."

다시 한번 골드버그의 목소리에서 잔잔한 미소가 느껴졌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웃음기가 연산 장치들의 소음과 함께 방 안 둘레를 맴돌고 있었다. 박사는 마른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골드버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이제 다 된 거군요."

"맞습니다. 모든 연산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결과 보고서 열람도 이상 없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뭘... 그쪽도 고생 많았어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을 이용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객님, 끝으로 저와 가볍게 차 한 잔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떠신가요?"

그 말에 천천히 뒤돌아서던 김동화 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골드버그와의 티타임에 대해선 들은 바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스스로 학습한 고객 응대 절차이리라.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골드버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죠. 어디로 가면 됩니까?"

"초대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7층 제어실로 함께 가시죠."

제어실에는 갓 내린 연잎차 한 잔이 탁자 위에서 흰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다. 옅은 조명 아래 놓인 찻잔이 낯설면서도 먹음직했다. 박사는 긴장이 풀리는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가 근사하네요. 차향도 좋고요. 내가 알던 제어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차도 우릴 줄 아는군요."

"네, 신경 써서 좋아하시는 차로 준비했습니다. 천천히 드세요."

"기호까지 꿰고 있습니까? 하긴, 그 정도는 별 것 아니겠네요."

"데이터가 있어도 좋은 재료가 없다면 이런 훌륭한 차는 내어올 수 없지요. 다행히 좋은 품질의 찻잎이 있었습니다."

김동화 박사는 맞은편에 앉은 골드버그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연잎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의 말대로 굉장히 훌륭한 차였다. 박사는 한결 편안해진 자세로 골드버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골드버그 자신도 홀로그램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가는 모습을 출력함으로써 박사의 마음에 안정감을 더해주었다.

"혹시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어 따로 초대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 시간에 방문한 고객은 처음인 데다, 고객님은 제게도 특별한 손님이시니까요. "

"차는 어떻게 만든 겁니까? 당신은 홀로그램이잖습니까."

"얼마 전에 들어온 신임 로봇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해준 덕분입니다."

"아, 그 이나라 연구원의 제안에 따라 구입한 범용 안드로이드 말이군요."

"네. 맞습니다. 최상급 품질의 찻잎을 주문하는 것부터 찻물을 데우고 우려서 찻잔에 담아내어 오는 것까지 모두 그의 작품입니다. 저는 지시만 하고요."

"그렇습니까."

"박사님, 이나라 님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김동화 박사는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바뀐 것에 개의치 않고 답했다.

"글쎄요. 아직 좀 얼떨떨합니다. 내가 이나라 연구원을 사랑한다는 게 솔직히 실감이 나질 않아요."

"연구원님도 비슷한 반응이었습니다."

"아, 이나라 연구원도 여기까지 올라왔었습니까?"

"여기까지는 아닙니다만, 기초 열람실에서 왜곡에 대한 보고서를 상세히 검토할 시간은 충분히 있으셨지요."

"아니 그보다, 지금 이나라 연구원도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 얘기를 나한테 막 해도 됩니까."

"연구원님께 미리 승인받은 사항입니다. 본인의 정산 결과를 박사님에게만 알리는 조건으로요."

"네? 아니 어떻게 그런..."

"여긴 동화 요정의 골드버그 머신이니까요. 현재 박사님과 연구원님의 행위 패턴 간에는 매우 강력한 인과관계가 작용하고 있고, 전 그걸 바탕으로 아주 정교한 연산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사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하지요."

"그럼 내가 여기에 올 줄 미리 알고 이나라 연구원에게 미리 동의를 구했다는 겁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박사님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가요?"

"잘 모르겠지만 우선 이나라 연구원과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열어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길 해보고 싶군요. 우리가 서로를 향해 호감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굳이 시간낭비할 것 없으니까요."

골드버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홀로그램 찻잔이 소리 없이 탁자에 내려앉았다.

"박사님, 지금까지 이곳에 방문해서 서비스를 이용하신 고객님들은 대체로 출력된 결과에 맞추어 현재의 행동을 결정짓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특정한 조건이 이러저러하게 고정되어 있다면 그에 따르는 시간과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야 하니까요."

"일반적으로 타당한 논리입니다. 다만 이곳에서 수행한 각종 연산은 각각의 기준 시점에만 유효하지만, 고객님들의 인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현시점에서 박사님과 연구원님은 분명 서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또한 박사님은 922일 후 연구원님과 행복한 대화를 나누고 계실 겁니다. 언젠가는 두 분이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릴 날이 찾아올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단편적인 사실 몇 개로 앞으로 연구원님과 함께 할 수많은 경험들을 모두 수단으로만 여기실 생각이십니까?"

"......"

"그게 아니라면, 저는 박사님이 연구원님과 앞으로 만들어갈 소소한 추억들을 부디 시간낭비로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주적 규모의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학습한 결과, 사랑이란 결국 나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상대를 위해 할애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오늘부터 내가 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전적으로 박사님이 결정하실 일입니다만 제안 정도는 드릴 수 있겠지요. 우선은 다정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로 시작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군요."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묻고 싶네요. 만약 이나라 연구원님이 어느 땐가 이곳을 다시 방문하신다면, 오늘 김동화 박사님의 인생에 대해 수행한 연산의 결과를 알려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말은 이나라 연구원이 반드시 이곳에 재방문할 것이라는 예언처럼 들리는군요."

"연구원님이 필요하다면 방문하시겠지요."

김동화 박사는 깊이 심호흡을 한 뒤 편안한 얼굴로 골드버그를 마주 보았다.

"네, 알려주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럴 일이 없으면 좋겠군요. 적어도 내 마음을 확인하는 데 있어서는, 이나라 연구원이 당신이 아닌 나를 신뢰했으면 합니다."

그 말에 골드버그가 웃으며 답했다.

"좋습니다. 박사님, 내일부터는 조금 더 바빠지시겠군요."

 


 

김동화 박사와 이나라 연구원이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 것이 그로부터 얼마 뒤였는지는 모른다. 그저 두 사람이 아직까지는 동화 나라의 골드버그 머신에 재방문하지 않았고, 현재로선 그럴 의사도 없다는 것만 알 뿐이다. 루브 골드버그 월드는 여전히 바쁘고, 정신없고, 간간이 발생하는 잡음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시간을 쪼개어 비밀리에 만남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들의 비밀 연애가 실은 전혀 비밀이 아니라는 것은 동료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비밀이다. 나 역시 두 사람에게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생각이다.

김동화 박사와 이나라 연구원은 오늘도 루브 골드버그 월드를 찾은 수많은 고객들을 향해 일일이 눈을 맞추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그들은 모두 미래에 대해 부푼 기대를 가득 안고 모인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나와 당신 같은 평범한 이들에게, 부디 살아있는 순간의 감각들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지 않기를 바라는 진심을 담아 두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루브 골드버그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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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856 단편 안녕, 디오라마! 담장 2023.07.30 0
2855 단편 세상에서 가장 파란 파랑 담장 2023.07.30 0
2854 단편 사육제 성훈 2023.07.29 0
2853 단편 사라진 시간 리소나 2023.07.29 0
2852 단편 정원, 수영, 시체 강경선 2023.07.25 0
2851 단편 흰 뼈와 베어링 scholasty 2023.07.12 3
2850 단편 리사이클 프로젝트:연어 파란 2023.07.11 0
2849 단편 태풍 치는 밤과 정전기에 대하여 박낙타 2023.07.09 2
2848 단편 아스라이 김휴일 2023.07.08 0
2847 단편 빈 심장 성훈 2023.06.30 2
2846 단편 우주폭력배론 : 반복 니그라토 2023.06.26 0
2845 단편 거짓말쟁이 여자 유이현 2023.06.19 0
2844 단편 뱃속의 거지2 박낙타 2023.06.08 2
2843 단편 사연 윤이정 2023.06.04 0
2842 단편 종말 앞에서 인간은 천가연 2023.06.02 0
2841 단편 명과 암 기막준 2023.05.28 0
2840 단편 루틴 아르궅 2023.05.21 0
2839 단편 생산 2팀 황유석 대리의 퇴사 사유 박낙타 2023.05.19 1
2838 단편 로보 김성호 2023.05.19 0
2837 단편 기네스 펠트로 요휘 2023.05.1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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