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사라진 시간

2023.07.29 09:4307.29

1

 

사소한 일이었다. 특별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흔히 겪는 일이리라. 무언가에 몰입하다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 있는 경험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일어나니까. 그걸 내가 겪었을 뿐이다. 그런데 조금 달랐다. 무엇이 그런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다르다는 느낌만은 확실했다. 의심이 솟아나 마음을 어지럽혔다. 대체 이 감정은 뭔가. 차근차근 생각해보아도 도저히 답을 알 수가 없다. 그냥, 시간이 평소보다 많이 지나 있었을 뿐이다. 평소에는 일을 끝내고 집에 와서 씻고 밥 먹으면 보통 8시쯤 되었던 것이, 오늘은 10시가 되었을 뿐이다. 사소한 일이다. 아무래도 밥 먹는 중간에 핸드폰을 조금 오래 쳐다봤을 것이다. 재미있는 동영상을 보거나, 친구들의 메세지를 읽거나.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 많은 가능성 중에서 어느 하나도 실제로 그랬다고 느껴지는 기억이 없었다. 이건 조금 이상했다. 이상하지만 뭐, 기억이란 게 좀 그럴 수도 있으니까. 괜찮을 것이다.

 

2

 

이상하다. 기분 탓이겠지만 그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잘 생각해보니 이전에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종종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말이 안 된다. 분명 무언가에 집중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겠지. 하지만 몰입한 무언가가 무엇인지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순식간에 지나간 두 시간 동안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게 아니라면 단순한 신경과민일까. 계속 한 가지 일에 신경을 쓰다 보면 무언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가벼운 건망증일 수 있다. 그래, 그렇다. 이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느끼는 것도 그냥 단순히 예전 일이라 중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 것뿐이다.

 

3

 

예전에 정신과에 다녔던 적이 있다. 그때 의사에게서 힘든 증상이 나타나면 글로 모조리 써 보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정신과에 다시 가 봐야 할 것 같다. 그다지 효과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최근 이상한 기분이 날 계속 쫓아다닌다. 신기하게도 기분은 보통 나의 것인데, 내 것이 아닌 기분이 날 외부에서 쫓아오는 것 같다. 내가 썼지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느낌은 정말 그렇다. 내 저녁 시간, 8시에서 10시 사이의 시간은 좀 더 빈번히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분명 그 시간에 있었다. 밥을 먹고 있었다. 우리 집 거실에 있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8시에서 10시 사이의 시간이 찍힌 내가 받은 메세지와 내가 보낸 메세지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는 감각은 늘 같았다. 집에 와서, 씻고, 핸드폰을 보며 밥을 먹는다. 그러면 8시다. 하지만 그와 정말 똑같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어떤 날의 시계는 10시였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시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4

 

정신과에 다녀왔다. 아무래도 내가 조금 과민했던 모양이다. 의사는 나와 비슷한 증상인 사람들이 꽤 있다고 했다. 사실 신경과민이나, 약한 강박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흔히 나타나는 사고라고 한다. 그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최근에 그런 생각에 빠지게 된 것은 반성해야 할 일이다. 나만이 느끼는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만 했는데도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좋아. 이제 그런 일은 신경 쓰지 않고 살 것이다.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5

 

영화를 봤다. 이럴 때일수록 기분 전환은 중요하다. 최근에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 업무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 길어져서는 안 된다. 다행히 평소에 일을 열심히 해 두었기에 최근 소홀한 점에 대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는 동료나 상사는 없었다. 그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최근에 피곤해 보인다는 말만 건넬 뿐이었다. 아직은 괜찮다. 더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이제 제대로 집중해야 한다.

기분 전환을 위해 본 영화는 정말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물론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제대로 된 의미로. 영화는 인류가 시간에 대한 개념이 다른 외계인과 만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었다. 다양한 외계인이 등장했으며, 흥미로운 설정이 한 장면을 지날 때마다 쏟아져 나왔다. 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뇌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는데, 이와 반대로 미래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과거를 향해 나아가는 외계인이 등장한 장면은 꽤나 인상 깊었다. 서로의 시간의 방향을 지키기 위해 주인공과 목숨 건 혈투를 벌이는 그 외계인은 결국 주인공에게 쓰러지지만, 그래도 멋지게 싸웠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장 인상 깊었던 외계인은 따로 있었다. 그건 영화 마지막쯤에 나오는 원형 외계인이다. 이 외계인은 놀랍게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시점에 동시에 존재하는 해괴한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설정이 나를 놀랍게 했다. 이런 점이 영화를 보는 재미라 할 수 있겠지. 오랜만에 뇌가 반짝이는 듯한 좋은 경험을 했다.

 

6

 

상황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아니, 좋아졌다. 최근 나를 괴롭혔었던 이상한 기분은 더 이상 나를 쫓아다니지 않는다. 뭐, 결국은 나 혼자 끙끙거렸던 것이고, 객관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정신과에는 그 이후로 몇 차례 더 얼굴을 내비쳤지만, 이제 안 가도 될 것 같다. 의사 선생님도 내 상황이 많이 좋아진 것을 느낀 듯하니 괜찮겠지.

일에 대한 집중력도 평소대로 돌아왔고, 집에서도 편안하다. 최근에는 얼마 전에 본 영화처럼 시간이나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SF에는 평소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재미있는 작품이 정말 많았다. 그 덕분에 집에 있는 시간이 심심하지 않다.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슬슬 그만둬도 될 것 같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때다.

 

8

 

시간이 조금 지났다. 아니, 많이 지났나.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쓴 날짜를 들여다봤지만 그 후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한 달? 두 달? 한 달이란 것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었나? 시간개념이 머릿속에서 점점 뒤죽박죽이 되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글로 쓰니까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다. 무엇이 이상하냐고 하면, 시간이다. 그것도 다른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내 시간이다. 내 시간만 이상했다. 그래서 이상하다. 말이 반복되는 것은 알고 있지만, 뭐라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내 시간이 이상하고, 그래서 이상하다.

시간이니 외계인이니 하는 내용이 나오는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아니, 소설을 읽었다. 만화도 보았던 것 같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건 어제인가? 왠지 어제였던 것도 같다. 그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게 결과적으로 이상한 거지만.

이렇게 쓰다가는 점점 더 이상해질 것 같다. 그만두어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그만두어야 하나. 분명 의사선생님에게서 무언가 들었던 것 같은데. 강박적인 사고에 대해 그만두어야 한다고 했었다. 강박적인 사고는 무엇에 대한 사고인가. 아무래도 시간에 대한 사고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그만두어야 하는 것은 시간인가. 이상한 시간을 그만두라는 말인가? 하지만 그래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9

 

정신과에 다녀왔다. 지난번에 쓴 글을 보니 매우 엉망이다. 내가 저런 상태까지 되었던 건가.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앞으로는 더 신중하게 몸 상태를 관리하자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무래도 시간이니 외계인이니 하는 것들을 너무 많이 봤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최근에는 정말 그런 생각만 하고 지냈다. 사실 일하는 중에도 그런 생각에 빠져 있곤 했다. 기분 전환이 조금 지나쳤던 모양이다.

최근에 몇 번인가 저녁 시간이 사라졌다. 이전과 동일하게, 8시에서 10시 사이였다. 하지만 실제로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상황을 내 정신이 점점 힘들어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의사 선생님도 그런 이유로 나타나는 증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이상한 일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내 마음 관리에 더 힘쓰기로 했다. 이게 올바른 접근법이리라. 이 글을 쓰는 일도 당분간 지속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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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괜찮다. 적어도 그렇게 상황이 악화되진 않았다. 시간은 계속 사라지고, 어떤 기분이 날 따라다니지만 괜찮다. 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저 무언가에 열심히 집중한 내 뇌가 조금 피곤해할 뿐이니까.

괜찮다. 이럴 때일수록 긍정적인 마음이 중요하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그래. 매일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을 사는 현대인은 시간에 민감하게 얽매일 수밖에 없다. 나도 매일 퇴근하고 나서 내 자유시간이 조금밖에 없다며 한탄하지 않았던가. 그런 피로감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증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조금 생각에 여유를 두자. 워라밸 시대라고 하지 않던가. 회사도, 일도, 시간도 조금은 어깨에서 힘을 내려놓아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좋아. 그렇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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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늘 마트에 간다. 그곳에서 다양하게 늘어선 물건을 구경하고, 잠깐 고민하기도 했다가 결국엔 어떤 물건을 집어 든다. 그리고 계산을 하고 집으로 가져온다. 바로 이런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 뭔가 맞는 것 같다. 조금 더 자세히 쓰면 이렇다. 어떤 외계인이 있고, 그 외계인이 외계인의 마트에 간다. 그 마트에는 다양한 생물의 시간이 진열대에 늘어서 있다. 그 외계인은 늘어선 시간들을 구경하고, 뭐 잠깐 고민하기도 했다가, 결국 하나를 집어 든다. 그리고 계산을 마치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간다.

왜 이런 내용이 떠올랐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전에 본 영화의 영향이리라. 그런데 그 생각이 지금 내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내 8시에서 10시 사이의 시간은 어디로 간단 말인가? 분명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외계인이 우리 인간들의 시간을 자기 멋대로 집어가는 것이 틀림없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은 하는 게 아니었다.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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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정신적 문제도 감기처럼 계절을 타는지도 몰랐다. 저번에 정신과를 찾아갔을 때는 의사가 이런 증상인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인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좋은 뜻이다. 나만 특별하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고 인간 보편적인, 말 그대로 감기 같은 증상이라는 뜻이니까.

의사 선생님은 이런 증상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았다. 처음에 내가 설명할 때는 조금 묘한 표정을 지으셨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이 증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계신 것 같았다. 의지가 되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다 보니 의사 선생님이 점점 바빠진 것이다. 그래서 원래 오늘 정신과를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취소하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시간이 없다고, 죄송하다고 하셨다. 아무래도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과로하지 않으셔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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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에 가지 않았다. 그래, 이건 맞다. 왜 가지 않았던가? 선생님이 바쁘시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아무래도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내 상황은 이전과 같다. 아직은 괜찮지만, 좋아지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똑같다. 매일이 똑같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랬다. 아마 오늘도 그럴 것이다.

슬슬 가봐야 할 텐데. 하지만 아직도 선생님은 바쁘다. 시간이 없다고 하셨다.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아니면 이번에 그랬고 그 다음에 저번에 그러셨었나. 뭐, 큰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 큰 문제는 아니다. 매일이 이렇게 똑같은데, 문제가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일도 열심히 하고 있고, 저녁도 먹고, 핸드폰도 들여다본다. 샤워도 하는 것 같다. 물에 젖어 있는 것을 보니까. 아니다. 기억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마음이 중요하다. 사람은 건전한 취미를 가져야한다. 영화를 보는 것은 매우 건전한 취미에 속할 것이다. 나는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재미있는 출근을 하고, 재미있는 잠을 잔다. 재미있는 하루이다.

 

24

 

젠장. 젠장. 이런 젠장. 이전에 쓴 글들을 읽다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졌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긍정적인 마음? 개소리다. 온통 개소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가만히 앉아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다. 정신과 같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딴 멍청이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는데. 뭐가 흔한 증상이냐고 그의 얼굴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래, 맞다. 흔하지 않다. 젠장할. 나는 매우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이 감각을 잊어서는 안 됐다. 아니, 늘 느끼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온갖 거짓말로 그걸 숨겼다. 숨길 수밖에 없었다.

차분히 정리하자. 화를 쏟아내는 것은 용기를 얻는 것에는 도움이 되지만 지금은 생각할 때다. 지금 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 괜찮다. 생각하면 풀 수 있는 문제이다. 당연하다. 우리 인간은 지금까지 이 뛰어난 지능의 힘으로 지구에서 생존해 왔지 않는가. 그것이 곧 나의 힘이다. 나는 이겨낼 수 있다.

소리가 들린다. 욕을 마구 내뱉고 싶다. 참자. 지금은 참으며 생각을 해야 한다. 더는 그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 나는 지지 않는다. 이 기분에도 소리에도 지지 않는다. 그들을 모두 꺼져버리게 만들 것이다.

방법은 생각해 두었다.

 

26

 

예로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비열한 도둑놈을 잡는 것에는 명백한 현장을 덮치는 것 만한 수가 없었다. 나는 바로 그 방법을 쓸 예정이다. 다행히도 우리 인류는 기술 발전을 통해 다양한 수단을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나는 별다른 준비 없이 바로 작전을 실행할 수 있었다.

간단하다.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것 까지는 똑같다. 나는 언제나 똑같이 그 후 샤워를 하고, 밥을 먹으며 핸드폰을 본다. 여기가 승부처다. 나는 집에 들어온 후, 샤워를 하기 전 핸드폰을 거실에 있는 식탁 위에 올려 둘 것이다. 물론 내가 앉아서 식사를 하는 위치가 잘 보이도록 받침대 위에 올려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녹화할 것이다.

사실 오늘 이미 이것을 실행해 보았다. 그 결과, 오늘은 도둑이 오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나는 8시에 도달해 있는 시간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오늘의 시간을 지킨 것이다.

내일도 같은 방법으로 실행할 것이다. 그 비열한 것의 정체를 잡을 때까지 나는 이것을 반복할 것이다. 강한 의지와 용기만이 이 상황을 이겨낼 나의 든든한 자원이다.

 

30

 

나는 어제 쓴 내용을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결과물을 얻어냈다.

젠장, 나는 이것이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래도 써야 한다. 인간의 지혜를 모조리 동원하면 이것의 정체를 파헤칠 수 있으리라. 나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계획대로 식탁에 핸드폰을 올려두고 녹화를 시작했다. 그 후 나는 샤워를 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와 같이 식사를 마치고 시계를 보자, 시각은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확신했다. 잡았다고. 너무나 명백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녹화된 영상을 보았다. 그 안에 담긴 내 모습을 확인해야 했다. 이 비열한 놈들을 확실히 잡아내야만 했으니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혼자였다. 나는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나였다. 거울 속에 있던 나. 사진을 찍으면 나오는 나. 동영상을 찍으면 나오는 나. 내가 맞았다.

녹화된 영상을 여러 번 돌려보며 확인했다. 나 이외의 무언가가 찍힌 흔적은 전혀 없었다. 평범했다. 아무런 이상도 없는, 그저 내가 밥을 먹는 영상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말이 안 된다. 시간이 이상했다. 나는 영상 속에서 사라진 시간을 찾았다. 8시 10분의 나도, 8시 40분의 나도, 9시의 나도, 9시 37분의 나도 모두 정상이었다. 모든 시간을 찾을 수 있었다.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처음부터 영상을 재생하면, 없다. 이상했다. 영상 속 시간이 10시가 된다. 아니, 아니다. 설명이 이상하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8시도 있고, 8시 반도 있고, 9시도 있다. 모두 분명히 있다. 하지만 10시가 된다. 결국은 10시가 된다.

이것이 왜 이상할까.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정확히 몇 시부터 녹화를 시작했던가. 젠장, 왜 이런 중요한 것을 기록해 놓지 않았을까. 보통 집에 오는 시간은 6시이고, 씻고 밥을 먹기 시작하는 시간은 7시쯤 될 것이다. 그렇다. 영상도 분명 그렇게 되어 있다. 6시의 나도 있고, 7시의 나도 있다. 그럼 나는 7시에서 10시까지 밥을 먹은 셈이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니, 말이 안 된다. 평소에 나는 한 시간 정도면 밥을 다 먹는다. 그래서 8시가 된다. 영상 속의 나도 한 시간 동안 밥을 먹는다. 한 시간 후에는 밥을 다 먹는다. 그런데 8시의 나는 밥을 먹는다. 8시 44분의 나도 밥을 먹는다. 9시 11분의 나도 밥을 먹는다. 계속 밥을 먹는다. 밥을 다 먹고 나면, 10시가 된다. 그런데 내가 밥을 먹는데 걸린 시간은 한 시간이다.

정리가 안된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나를 따라오던 이상한 기분이 떨어지지 않는다. 계속 있는다. 꺼지라고 해도 꺼지지 않는다. 소리쳐도 그 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내 뒤에 있다. 계속 있다. 영상에는 없다. 아니, 있다. 아니, 내가 있다. 아니, 저건 내가 맞는가? 모르겠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40

 

드디어 만났다. 선생님은 내 최후의 희망이었다. 이 모든 일들을 끝장낼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는 내 주변에 선생님 말고는 없었다. 게다가 선생님은 열성적으로 이 증상을 연구하고 계셨다. 그것도 몇 백 년씩이나! 대단하지 않은가! 믿을 것은 그 뿐이다. 정말 이제 그 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정신과만 더 다녔었더라면, 선생님만 더 만났더라면! 모든 것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정말이다.

나는 분명 정신과 때문에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하지만 방향성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협력했어야 했다. 이 끔찍한 증상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해 힘을 합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고, 선생님은 홀로 힘겨운 싸움을 하셨다. 하지만 이제 우린 만났다.

선생님이 보인다. 저 멀리, 하지만 부르면 닿을 곳에 있다. 나는 집에 있다. 언제나처럼 일이 끝나고, 샤워를 하고, 핸드폰을 부수고, 밥을 먹는다. 늘 똑같다. 이곳에 선생님이 왔다. 날 위해 와주셨다.

이제 다 잘 될 것이다.

 

41

 

악마 같은 놈들! 함정이었다. 모든 것은 함정이었다!

선생님은 당했다. 놈들에게 당했다. 그리고, 나도 곧 그리 되리라. 젠장, 젠장! 그런 끔찍한 꼴이 될 순 없다. 이 운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 어디서? 어디로?

선생님은 며칠 전 내 앞에 나타난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당연하다. 선생님은 움직일 수 없다. 아니, 아니다. 선생님에게 없는 것은 그게 아니다. 선생님은 말 그대로 시간이 없다. 그 끔찍한 놈들이 결국 선생님의 모든 시간을 앗아갔다.

나는 이해하는데 오래 걸렸다. 그리고 겨우 그 악랄한 운명을 이해했다. 시간이 없다. 앞도 없고 뒤도 없다.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다. 나는 보인다.

모든 것은 함정이었다. 인류의 지혜에 기대서는 안 됐다. 바로 그곳에 그들이 함정을 깔아 놓았다. 선생님은 이해가 빨랐다. 그래서 운명에 지고 말았다. 이 개념을, 이 모든 끔찍한 것들을 인식해서는 안 된다. 알아서는 안 된다. 보지 말아야 한다. 듣지 말아야 한다. 젠장, 좀 더 빨리 알았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이다. 식사를 하는 8시 58분의 나에게 선생님이 보이는 것의 의미를 나는 깨닫고 말았지만, 아직 대책은 있다. 이곳에 그 대책을 정리할 것이다. 아직, 아직 조금의 유예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인식함으로 인해 벌어지는 파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면 된다. 인식하지 않으면 된다. 이미 인식해 버린 것은? 잊어버리면 된다! 망각이야말로 인간의 축복이다!

완벽하게 잊어야 한다. 간단하다. 인위적으로 기억상실을 일으키면 된다. 아니면, 지능을 포기하면 된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을 포기하면 된다. 바로 그 선택이 나를 지킬 것이다.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절대로, 절대로 저런 끔찍한 운명에 처박히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 계획을 실행하자.

 

 

 

***

 

 

 

[단독보도] 서울 내 아파트에서 일어난 자살소동… 원인은 정신장애인가

 

경찰이 서울 시내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자살소동에 출동, 자해 행동을 하던 A씨를 제압해 구조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지난밤 10시경, 이웃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는 한 주민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하였다. 신고에 따르면 이상한 괴성과 함께 바닥에 무언가를 두드리는 듯한 소음이 이어졌다고 한다. 현장 상황을 확인한 경찰은 아파트 경비와 협조해 문을 열고 내부로 진입, A씨를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 A씨는 날카로운 송곳으로 자신의 후두부를 깊게 찌르고 있는 위험한 상태였다. 경찰관은 즉시 A씨로부터 송곳을 압수하였으나, A씨는 이에 격렬히 저항하였고 곧 베란다를 통해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다행히도 A씨의 투신 시도는 경찰관에 의해 제압되었고, 이후 응급차를 통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경찰은 A씨의 주변 신변과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며, 병원 측에 정신감정을 의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을 접한 정신의학과 전문의 W교수는 A씨가 심각한 정신상태에 처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발견 당시 A씨가 보인 극단적인 행동 및 현장 인원의 증언을 토대로 얻은 정보를 분석한 결과이다. A씨의 주변인들은 그가 최근 들어 이상한 소음을 내거나 괴성을 지르는 일이 많았다고 증언했고, 유독 시간에 대한 말을 많이 했다고 전했다. 경찰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A씨는 과거 몇 차례 정신과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으며, 그때마다 시간에 대한 언급이 반복적으로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W교수는 A씨가 시간에 대한 일종의 강박 증상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추론하고 있다. 그의 집에서 시계는 물론이고 컴퓨터와 같이 시간을 알 수 있는 사물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던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교수는 해석했다. 다음은 본지와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이다.

“네 맞습니다. A씨는 시간에 대한 사고가 매우 강박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군요. 사실 저희도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많이 지나 있는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 평범한 경험을 심각하게 여겼다는 말씀이시죠?”

“네. 인간의 사고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끼면 점점 그에 어울리는 상황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객관적으로 봐서는 아무리 평범한 일이라고 할지라도요.”

“일상적이고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인데도 이상하고 위협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말씀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한 가지 사고에 반복해서 집중하다 보면 확증편향과 같은 심리 기제에 의해서 해당 사고를 뒷받침해주는 사례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점점 본인만의 세계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W교수는 이와 같은 정신질환의 예방에는 규칙적인 운동과 스트레스 관리, 주변인의 사회적 지지가 중요하다고 전했으며, 힘든 경우에는 전문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전문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최근 A씨가 말했던 이야기들을 재미삼아 떠들거나, 비슷한 증상이 있다고 거짓 호소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해당 사건은 사회적인 이슈나 재미로 다루기보다 정신의학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신중한 자세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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