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여자아이

2023.10.21 15:3210.21

명절이다. 온갖 음식을 준비하는 예능 프로가 며칠 전부터 Youtube 상위에 올라와 있다. 그런 거 봐 봐야 괜한 욕심만 생길 게 뻔했다. 혜령은 클릭하지 않았다. 같이 먹어 줄 사람도 없는데 괜한 수고 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도 한번 충동적으로 음식을 잔뜩 해놨다가 냉장고를 비우느라 애먹었던 적이 있다. 나중에 결국 물러진 나물반찬을 버리고 말았다. 아까워 그날 내내 마음이 안 좋았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결심했는데 막상 요맘때만 되면 뭔가를 놓친 듯한 불안감에 공연이 허둥대곤 한다. 매일 하던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때때로 가슴이 뛰어 진정시켜야만 했다. 약은 꾸준히 먹고 있는데 이럴 땐 약발도 안 듣는다.

분주한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아침을 차렸다. 밥, 국, 김치, 마른반찬. 간소하지만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사별한 남편은 찬이 많은 걸 좋아했다. 보기 드문 대가족에서 자라나 식탁이 꽉 차야 만족했다. 그만큼 식사량도 많고 빨리 먹었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은 항상 배가 나왔다. 고혈압이 걱정되는 생활 습관이었다. 결혼 초기에는 그것 가지고 자주 다투다가 아들이 아빠를 닮자 혜령이 포기하고 말았다. 남편은 얼마 전 고혈압으로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남편이 죽고 아들이 떠나자 자연스레 혼자 살던 때의 식단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끼니를 거르지 않은 것은 남편과의 결혼 생활 동안 달라진 점이라 할 수 있었다. 결혼은 심리적 안정뿐만 아니라 대사의 안정도 가져다주었다. 결혼 전에는 식사를 자주 걸렀다. 바쁘기도 했지만 먹는 데 관심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소화제를 끼고 살아 공복이 지속 돼도 힘들지 않았다. 사람은 길들여지기 마련이다. 하루 한 끼만 먹고 사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속이 불편한 것보다 빈 것이 더 나았다. 젊었다. 먹지 않고도 버틸 수 있었다. 그 빈속을 달래준 것은 일이었다. 주위에서 건강을 걱정하는 말을 많이 했다.

“괜찮아요. 견딜만해요.”

대게 그런 말을 하면 더는 참견하지 않았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설거지한 후 소파에 앉아 전화를 기다렸다. 아들은 인도에 산다. 3시간 정도 시차가 난다. 전화가 오려면 더 기다려야 했다. 인도는 명절이 아니다. 인도에도 추석이 있다는데 더위 탓인지 우리보다 많이 늦다. 그래도 아들은 명절을 거르지 않는다. 며느리가 신경 쓴 탓이다. 아들은 제 아빠를 닮아 누구를 챙겨주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 무심함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며느리는 아들과 달리 다정다감한 편이다. 손녀도 제 엄마를 닮았으면 하지만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먹는 것만 보면 제 아빠를 닮아 거침이 없다. 아기 때부터 그랬다. 제 어미의 젖을 다 먹고도 먹을 것을 찾았다. 결국, 이가 나기도 전에 이유식을 먹였다. 하도 잘 먹어 젖 떼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아들보다 더 잘 먹는 것 같다는 혜령의 말에 며느리는 잘 먹으면 좋죠 라고 대수롭지 않은 대답을 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지요.”

요즘 엄마들이 하는 말이었다. 기후변화와 바다 오염으로 물가가 점점 오르고 있다. 머지않아 천정부지로 오를 거라는 전망도 있다. 예전에 비하면 맛도 없고 값도 비싸졌지만 혜령은 아직까진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살면 다 살아지는 법이다. 다른 사람에게 한 번도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혜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전화를 기다리다 깜빡 졸았나 보다. 꿈에서 손녀를 보았다. 손녀가 할머니하고 달려오더니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손녀가 너무 커져서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는 중에도 얘가 그렇게 먹어 대더니 결국 이토록 커져 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깼다. 눈을 떠 보니 손녀가 문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제 어미하고 있을 텐데!’

그래도 눈앞에 너무 생생한 손녀가 의심스러워 이름을 불러 보았다.

“현주야!”

손녀는 대답 없이 집 밖으로 나갔다. 손녀를 쫓아갔다. 손녀는 골목 끝 공터에 있는 놀이터에 놀러 가곤 했다. 놀이터에는 반드시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 지금 쫓아가지 않으면 제 어미가 욕을 먹는다. 어미 대신 자리라도 차지하고 앉아 있어야 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걸음부터 걸었다. 걸음이 잘 걸리지 않아 더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골목을 다 빠져나와도 놀이터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사람 많은 거리에 트램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공터나 놀이터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어디로 갔지?’

트램 정류장이 보였다. 거기 있는 사람에게 손녀의 행방을 물어보리라. 도착해 보니 사람이 없었다. 벤치에 앉았다. 벤치에 앉아 기다리면 손녀가 올 것 같았다. 높다란 통창으로 들어오는 가을 햇볕이 따스했다. 그 맑은 햇살에 머리를 감았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손끝으로 정수리부터 살살 문질렀다. 손끝에 얇은 머리 가죽과 앙상한 머리뼈가 느껴졌다. 동물의 가죽 같았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눈앞에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여자아이는 조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어, 뭐라고?”

“괜찮으시냐고요.”

“어, 어, 괜찮지. 괜찮아. 괜찮고말고.”

혜령은 손을 내려놓고 바르게 고쳐 앉았다. 여자아이는 혜령 옆에 자리가 나자 가방을 벗어 품에 안고 그 자리에 앉았다. 혜령은 그제야 자신의 몰골을 확인할 정신이 들었다. 잠옷 차림에 신발은 한쪽만 신고 있었다. 나머지 한쪽 신발은 처음부터 신고 나오지 않은 건지 아니면 도중에 잃어버린 건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손으로 머리를 마구 문질러 댔으니 머리카락도 부스스할 게 뻔했다. 손으로 머리를 빗겨 주고 나서 신발 신지 않은 발을 치마 속으로 감춰 넣었다.

여자 아이는 혜령이 자신을 추스르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여자아이와 앉아있자니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엄마와 버스 정거장에 있는 장면이다. 엄마는 청바지에 티셔츠, 녹색 잠바를 입고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다. 혜령은 엄마가 멀리 간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헤령은 다리를 흔들며 치마를 접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입에서는 당시 유행했던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엄마는 혜령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는 혜령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도 웃고 있지 않았다. 엄마에게서 향수 냄새와 음식 냄새가 났다.

혜령은 이 기억이 실제 기억인지 자신이 만들어낸 기억인지 알 수 없었다. 유행가를 부른 사람이 엄마였는지도 몰랐다. 오로지 하나 확실한 건 그날이 엄마가 떠나가던 날이었다. 엄마가 멀리 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혜령은 울지 않았다. 엄마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와 텅 빈 엄마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아빠와 할머니가 찾기까지 혜령은 엄마 방에 있었다.

“할머니, 누구 기다리세요?”

여자아이가 툭 던지듯 질문을 해왔다.

“손녀. 그런데 손녀는 여기 살지 않아.”

“그럼, 어디 사는데요?”

“인도에 살지. 인도 알지?”

“아, 그럼 오늘 소녀가 오기로 한 거예요?”

“아니야. 꿈에서 손녀를 봤어. 손녀가 놀이터에 간다길레 손녀를 쫓아 나왔어. 그런데 손녀가 없어졌어. 정거장에서 기다리면 올까 싶어 기다리고 있었지.”

“그럼, 손녀가 온 게 꿈이었던 거여요?”

“아니, 아니, 그... ”

여자아이의 시선을 의식하고 혜령은 삐져나온 왼발을 다시 치마 속으로 감추었다.

“할머니는 손녀를 좋아하나 봐요. 우리 할머니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할머니가 계시니?”

“네. 하지만 매일 새벽같이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와서 거의 보지 못해요.”

할머니가 무척 힘들겠구나.

“아빠도 그래요. 그래서 저는 집에 거의 혼자 있어요.”

“아빠도 계시는구나. 그럼, 엄마는 안 계시니?”

“엄마는 제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요.”

여자아이는 심드렁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없어요. 제가 아기일 때 사고로 돌아가셨데요.”

“어, 그러니?”

“가끔가다 사진으로 엄마 얼굴을 봐요. 엄마는 환하게 웃고 있는데 그런 엄마를 저는 기억하지 못해요.”

“...”

“아빠가 그러는데 제가 엄마를 닮았데요. 마치 거울 보는듯하데요. 저는 거울 속에서 한 번도 엄마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작고 못생긴 제 얼굴만 보여요.”

혜령은 스마트폰 속에 엄마의 사진과 동영상을 차곡차곡 모아 놨었다. 그러던 게 스마트폰이 안경, 장갑, 소매 속으로 스며들면서 사진과 동영상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뒤져 보면 어딘가 있겠지만 혜령은 그런 복잡한 방법을 잊은 지 오래였다. 어느새 혜령이 기억하는 엄마보다 혜령이 훨씬 늙어버렸다. 이제는 자신의 얼굴에서 엄마의 얼굴을 찾을 수 없다. 혜령은 자신에 얼굴만큼 기억도 늙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는 거니?”

“집은 반대편이에요. 친구 집에 가려고요.”

“친구가 먼 데 사나 보구나!”

“아니요. 친구 집은 걸어가면 돼요. 그냥... 잠시 앉아 있고 싶었어요.”

트램이 다가와 멈췄다.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물론 타는 사람도 없었다. 잠시 멈추었던 문이 다시 닫히고 트램은 이내 떠나버렸다.

“할머니 손녀는 좋겠어요. 인도에 살잖아요. 비행기 타고 가야 하죠? 전 비행기를 한 번도 못 타봤는데...”

여자 아이는 혜령을 쳐다보지도 않고 가방을 품은 자세 그대로 앞만 보고 말했다. 딱히 혜령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지 않아 혜령은 말없이 아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타워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어요. 아빠가 비행 울렁증이 있는데 저도 그럴 거래요. 비행기는 물론 드론도 한 번 타 본 적이 없어요.”

“...”

“하지만 언젠가 멀리 떠날 거에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그런 곳으로요. 거기서 혼자 살 거에요. 누구의 방해도 없이, 아무런 부담도 없이요.”

뜸금없는 고백에 혜령은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가방 끈을 배배 꼬며 말을 이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전 알아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과 할머니와 아빠가 저만 바라보고 살고 있다는 걸요. 어쩌다 모두 한 식탁에 둘러앉으면 느끼고 말아요. 할머니와 아빠가 제가 어서 크길 바라고 있다는 걸요. 빨리 커서, 그래서 돈 벌어 오길 바란다는 것을요.”

배배꼬이던 가방끈이 엉성한 매듭이 되었다.

“오늘 아침도 그랬어요. 명절이니깐요. 다 같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전 못 참고 뛰어나왔어요. 친구 집에 간다 하고요.”

아이는 매듭을 비틀었다.

“하지만 막상 갈 집이 없어요. 다들 가족과 있을 거잖아요. 전 친구에게 방해만 될 거에요. 오다가 트램이 지나가는 걸 봤어요. 트램을 타고 아무 곳이나 가고 싶었어요. 트램을 타면 아주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짧아질대로 짧아진 가방끈은 아이의 손 안에서 감겼다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엄마가 떠난 후에도 혜령은 종종 엄마 방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아빠는 어쩐 일인지 빈방을 없애려 하지 않았다. 엄마 방이 혜령의 아지트가 되어도 아빠와 할머니는 아무 말 안 했다. 그때만 해도 그게 엄마를 기다리던 아빠의 마음이란 걸 알 길이 없었다. 혜령은 단지 언제라도 아빠와 할머니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을 뿐이었다. 일 년을 기다리던 아빠는 엄마 방을 혜령의 방으로 바꿔주었다. 혜령은 자신의 방이 생겨 좋아해야 할지 몰래 숨을 수 있는 아지트가 사라져 싫어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혼과 함께 타워로 이사 오기 전까지 혜령은 그 방을 자기 방으로 썼다. 자기 방에 있을 때엔 아빠든 할머니든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혼자만의 시간은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외로운 시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결혼 이후 더욱 분명해졌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넓은 집에서 오직 혜령 혼자였다. 혜령은 그 공간에서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그 시간에 하는 일은 자신을 위한 것이 되지 못했다. 남편과 아들이 있는 세상.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타고 가지 않았구나.”

“용기가 없나 봐요. 아직 준비가 안 됐거나. 아빠와 할머니 걱정도 되고요. 사실 어떻게 해야 모르겠어요.”

통창으로 들어오던 아침 햇살이 많이 짧아졌다.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아들 전화를 기다렸던 생각이 났다. 전화 연결이 안 되면 아들은 불안해할지도 몰랐다. 치매 초기 판정을 받은 이후로 계속 그랬다. 시장에 가서 길을 잃었었다. 며느리가 시장 간 사실을 알았기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몰랐다. 경찰이 혜령를 발견한 건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였다. 장바구니에 담겨 있던 냉동 만두가 다 녹는지도 모르고 혜령은 길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할머니, 여기에 계시면 어떻게 해요.”

경찰은 호송 차량에 혜령을 태우며 투덜거렸다. 녹은 물이 바닥을 적셔 미안했다. 그날 이후 며느리는 매일 아침 전화해서 식단을 짜고 원격에서 장을 주문했다. 드론으로 배달이 와 장에 나갈 일이 없어졌다. 반가공 상태로 배달된 음식을 덥혀 먹기만 하면 되었다. 소소하던 음식에 쏟는 노력과 시간이 그마저 없어져 하루가 헛헛했다. 그 헛헛함은 아들과 며느리의 잦은 통화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채워지지 않는 자리가 쓸쓸하고 고독한 적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혜령은 집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발 한 짝이 없어 걸음이 이상했다. 마저 벗어들고 걸음을 내디뎠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발바닥을 날카로운 감각이 핥고 지나갔다. 차갑고 거칠었다. 이 도시의 느낌과 같았다. 누구나 맨발로 길을 걸어보기 전까지는 결코 도시의 내면을 알지 못할 것 같았다.

혜령은 다시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도 갑자기 일어서 걷는 혜령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도와줄래?”

 

혜령은 집에 오자마자 발의 상태를 보았다. 발이 붓거나 물집이 생기지 않아 굳이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명절이라 여는 병원도 없을 텐데 다행이었다. 일단 아들에게 전화해서 별일 없음을 알렸다. 아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막, 경찰에 연락하려고 했어요.”

아들에게 거듭거듭 안심을 시키느라 꽤 애를 먹었다. 저번 일 이후 한 시간 이상 부재 시 경찰에 알리기로 했다.

“그러기에 그냥 추적 장치를 달자고 했잖아요. 지금이라도 신청할 테니 요번에는 저번처럼 버리고 그러지 마세요. 그냥 팔찌라고 생각하시고 차고 있으면 되는데 왜 그렇게 싫어하세요.”

아들은 또 치매용 팔찌를 부착하라고 성화였다. 무슨 죄인도 아닌데 추적 장치를 달고 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한 번은 그냥 차고 다니다 영 마뜩잖아 길에다 그냥 버려버렸다. 추적기가 길 한복판에 너무 오래 머물자 경찰이 출동하였다. 혜령은 경찰에게 고개 숙여 사과 했다. 하지만 혜령의 고집으로 결국 추적 장치를 반납해버렸다.

혜령이 이런저런 뒷수습을 하는 사이 여자아이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냥 가려는 걸 혜령이 잡아 앉혔다. 뭐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살펴보니 줄 게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가라 할 수는 없었다. 한참을 뒤지다가 오래된 찻잎을 찾았다. 냄새를 맡아보니 다행히 아직 향이 좋았다.

“혹시, 차라도 마실래? 카모마일인데 꽃향기가 제법 고급스런 좋은 차야. 한 번 먹어봐. 내가 이거 권하고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다행히 여자아이는 좋다고 했다. 여자아이의 선선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여자아이는 거실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 집은 처음인 듯 잔뜩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거실에 아이가 관심을 가질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아이는 두리번두리번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그러다 손녀가 놓고 간 머리핀을 발견했다. 작년에 놓고 간 건데 놔둔 그대로 한 해를 보냈다. 먼지가 끼었지만, 겉보기엔 멀쩡했다. 디자인이 유치해 아마 손녀도 더는 사용하지 않을 듯했다. 여자아이는 그 유치한 디자인이 맘에 들었나 보다.

“손녀가 놓고 간 건데, 인도에서 산 거야. 예쁘니?”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안한 듯 시선을 외면했다.

“줄까?”

“아니에요.”

여자아이는 당황하며 정색했다. 혜령은 너무 과했나 싶어 미안했다. 물을 가져다주며 조심스레 눈치를 보았다. 불쾌한 기색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입에 맞니?”

“조금 떫지만 먹을 만해요.”

“다행이구나. 조금 오래된 거라서 신경 쓰였는데. 새것은 떫지 않은데. 줄 게 없어 미안하네

아니에요. 맛있어요. 꽃향기가 좋아요“

아이는 한 모금 홀짝 마시더니 예쁜 미소를 지었다.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아이와 좀 더 있고 싶었다. 뭘 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영화 좋아하니?”

OTT를 검색하며 물었다. 여자아이는 제목을 말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이가 직접 드라마를 골라 보여주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의 청춘 드라마였다. 드라마를 같이 보았다. 풋풋하고 어린 감정들이 교차하며 반짝였다. 저런 작은 세상이 전부인 때가 혜령에게도 있었다. 친구, 아빠, 할머니가 세상 전부인 때. 아니 어쩌면 친구가 세상 전부였을지도 몰랐다. 아빠와 할머니는 그 세상 너머 어딘가에 부유하는 필요조건 같았다. 없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제 세상 안쪽으로 들이기도 싫은 존재들이었다. 친구는 여럿 있었다. 딱히 사람을 가리거나 하는 편이 아니어서 친구를 만드는 게 어렵지 않았다. 친구들이 혜령의 세상에서 살다가 떠나갔다. 떠날 때는 슬펐지만, 곧 다른 친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혜령의 세상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혜령은 항상 외로웠다. 결혼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편과 새 식구들도 곧 부유하는 존재로 변했다. 남편을 사랑했고 남편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나아질 것은 없었다. 아들은 달랐다. 임신은 새로운 나를 가지는 경험이었다. 임신 이후로 혜령은 진정 외로움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혜령은 아들이 있어 살았다. 아들을 품고 있으면 온 세상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아들이 커가며 자신만의 세상을 가지려 하자 혜령은 화가 났다. 그 화를 남편에게 풀었다. 남편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용케 그 시기를 견뎌주었다. 다시 혼자만의 공간으로 돌아온 혜령은 더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희정이란 친구가 있어요. 키는 작지만 예쁘고 착한 친구에요. 초등학교부터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같은 반이 되어 본 적은 없었어요. 몰랐는데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했데요.”

중학교 올라와 희정이와 아이는 같은 반이 되었다 했다.

“잘 웃는 얼굴이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요. 잘 사는 집 아이가 왜 그런 일을 당했을까 의아했어요. 잘 사는 집 아이들은 대게 왕따를 당하지 않아요. 돈으로 친구를 사귀면 되니까요. 먹을 것을 잘 사주는 친구를 싫어할 애들은 없어요.”

희정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잘 웃고 싸우지 않으면 친구가 되는 줄 알았다. 아이들은 희정이를 괴롭혔다. 이상한 아이 취급하고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괴롭히는 건 참을만해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건 힘들었다.

“중학교에 와서는 희정이가 아이들을 피했어요. 저도 그 일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희정이란 아이가 있는 줄 몰랐을 거에요.”

체육대회 반 대항전을 준비하기 위해 피구 연습하던 날이었다. 상금이 걸려있던 대회라 다들 열심이었다. 아이는 체육부장이라 책임감을 느끼고 조를 짜고 연습시키는 것까지 다 참견했다. 아마 그것이 원인이었나 보다.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 번갈아 가며 공수를 연습했다. 아이와 희정이가 한 조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와 희정이는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사이였다. 몇 번 공수가 바뀌면서 게임이 과열되었다. 다른 조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노리고 공을 던졌다. 그냥 아웃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다칠 정도로 세게 던졌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아마 공에 아이의 손이 그대로 맞았으면 손을 삐었을지도 몰랐다. 그때 옆에 있던 희정이가 공과 손 사이에 뛰어들었다. 공은 희정이의 등을 맞고 튕겨 나갔고 희정이는 아이 쪽으로 쓰러졌다.

“나중에 보니 희정이의 등에 공 자국이 선명하게 났더라고요. 다행히 희정이는 타박상약만 바르면 낫는 정도였어요. 저에게 공을 던진 남자아이는 선생님께 혼나고 반성문을 썼어요. 희정이의 말에 따르면 그 남자아이 예전에도 다른 아이를 때리고 괴롭힌 적이 있는 아이였데요. 우린 희정이의 등에 난 공 자국이 너무 선명하고 우스워 한참을 웃었어요. 그리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됐어요.”

여자아이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상기되어서 친구 얘기를 늘어놓았다. 드라마를 보다 시작된 얘기는 드라마가 끝나도록,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처음 집을 나왔을 땐 희정이네 집에 가려고 했어요. 집에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집 앞까지는 가봤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희정이네 집에 희정이만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가족들에게 온 이유를 설명하려니 막막해졌어요. 그러다 포기하는 마음이 들고 트램 정류장을 보고는 이대로 훌쩍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여자아이는 몸을 움추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휘어진 등줄기와 처진 어깨가 표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찰랑대는 머리카락에 아픔이 걸려있었다. 그 아픔이 고스란히 혜령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혜령은 가슴에 손을 얹고 한숨을 쉬었다. 조금은 저릿한 감정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이는 가방에 윗몸은 얹힌 채 한참을 있더니 어느새 밝은 얼굴로 돌아와 혜령은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여자아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 지났다. 아침도 안 먹었으니 배가 단단히 고플 것이다.

“우리 그러지 말고 점심 먹을래? 제대로 한 번 차려 먹어보자. 내가 명절 상을 오래간만에 봐서 감이 아주 낯선데 같이 이것저것 하다 보면 예전 실력이 나올지도 몰라.”

아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먹을까? 아무래도 명절 음식 하면 전이겠지? 그럼 우선 전을 시키고. 음... 잡채. 그래, 잡채가 있어야겠지. 뭔가 메인 음식이 하나 있어야겠는데. 불고기. 고기 좋아하니? 그래, 그럼 불고기로 하자. 가만있어봐라. 오늘 명절인데 배달이 될까 모르겠네.”

냉장고로 가 앱을 열었다. 사용법은 며느리가 여러 번 알려줬지만, 막상 사용해본 건 처음이었다. 카테고리가 뜨고 화려한 음식 사진이 죽 흐르지만 필요한 걸 찾기 어려웠다.

“여기, 나 좀 도와줄래?”

역시 아이라 달랐다. 명절음식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전, 잡채, 불고기 요리를 금방 찾아냈다. 모두 2인분을 시켰다. 3인분을 시킬까 하다가 음식이 남으면 곤란했기에 혜령이 덜 먹으면 되겠지 싶어 그만두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엔 명절이면 시댁 식구들이 찬을 한 가지씩 해 와 모였다. 혜령의 담당은 항상 불고기였다. 혜령의 불고기 요리는 짜지 않고 고기가 부드러워 모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먹은 음식이었다. 비법은 소스에 있었다. 고기를 재울 소스에 배즙을 첨가하면 고기가 연해지고 맛이 부드러워 졌다. 혜령은 시댁 식구들이 비법을 물어보면 대충 농으로 응대하며 알려주지 않았다.

“그럼 다음 명절엔 전 해 올 음식이 없어지잖아요.”

시댁 식구를 대신해 남편이 슬쩍 떠봐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건 혜령의 할머니에게 배운 비법이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커서 누가 물어봐도 알려주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적어도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한 가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게 할머니의 생각이었다. 그래야 남들이 얕잡아 보지 않는다고 항상 말했었다. 이왕이면 오늘 그 실력을 발휘하고 싶었지만 고기를 재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반가공 음식에 만족해야 했다. 대신 집에서 한 번 더 조리할 때 같이 주문한 배즙을 넣어가며 조리하면 아쉬운 대로 먹을만할 것이다.주문한 지 얼마지 않아 반찬집에서 요리가 배달되었다.

명절인데도 반찬 가게는 연다. 시켜 먹는 사람이 있으니 가게를 여는 것이다. 옛날 같지 않게 이제 명절이라고 일가친척이 한 집에 모이는 가족은 거의 없다. 대부분 영상으로 만나고 인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민족의 대이동도 종갓집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부자들은 고급 식당을 빌려 큰 파티를 연다고 하던데 아는 사람 중에 그럴 만한 사람이 없으니 사실인지 알 길이 없다. 하여튼 명절이라고 전을 부치고 음식을 만들고 송편을 빚는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반찬가게는 명절에 더 장사가 잘된다고 한다. 모두 가게에서 배달해 먹고 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혜령도 오래전부터 그 대열에 들어서 있다는 사실이다.

불고기에 전, 잡채, 밥, 국, 마른반찬을 올려놓으니 식탁은 정말 푸짐한 한 상이 되었다. 아이는 달고 맛있게 많이 먹었다. 비싼 만큼 넉넉한 양이었기에 망정이지 잘못하면 부족할 뻔했다. 아이는 잘 먹었습니다 하고 시원하게 인사한 다음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혜령도 대충 정리만 한 후 거실로 갔다. 아이는 아까의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차를 마시고 싶어 그러나 해서 물을 데워 가져갔다. 혜령과 아이는 다시 차 시간을 가졌다. 말없이 한참을 차만 마시던 여자 아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저, 여기서 살면 안 돼요?”

 

혜령은 너무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아이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혜령의 마음은 아이와 조금 더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였다. 아이가 이런 말을 꺼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도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잘못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할머니와 같이 있으니까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느껴졌어요.”

커가면서 여자아이는 엄마가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이 엄마와 손잡고 걸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상실감은 커져만 갔다. 엄마가, 동생들이 있는 다른 아이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다른 아이들은 혼자 있는 자기를 부러워했다. 그건 희정이도 마찬가지였다. 외롭고 힘든 건데 뭐가 부러우냐고 하면 맘대로 다 할 수 있어서라고 대답했다. 그 아이들이 맘대로 다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도 여자아이가 원하는 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들은 엄마 잔소리와 동생 짜증을 받아주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랐다.

“할머니와 같이 점심 먹다가 생각했어요. 이게 가족이구나. 이렇게 맛있는 것을, 이렇게 얘기하면서 먹는 거구나. 가족은 좋은 거구나. 마음이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지는 거구나.”

아이는 원래 많이 못 먹었다. 혼자 먹는 음식이 맛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른 아이들이 가난해서 먹을 것을 밝힌다고 놀릴까 봐 맛있는 음식을 보고도 조금씩 먹는 게 몸에 뱄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먹었어요. 그저 ‘맛있다. 맛있다. 먹자. 먹자.’ 하는 생각밖에 안 했어요. 처음 그렇게 먹어본 거라 지금 몹시 부담스럽지만, 기분은 아주 좋아요. 충분히 소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할머니와 같이 살면 못 해본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없이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이는 부른 배를 가리며 상기된 채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혜령의 눈치를 보더니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견뎌온 고생 때문인지 몰라도 아이는 끝내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혜령은 자신 같았으면 그냥 울어버렸을 것 같았다. 그냥 울면서 매달렸을 것 같았다. 나, 집에 가기 싫다고. 나, 여기 있게 해 달라고. 제발, 제발, 거절하지 말라고. 혜령은 아이가 목 놓아 울지 못하는 것도 가슴 아팠다. 속에 있는 것을 다 토해내지 못하는 조심스러움이 안타까웠다. 무너지지 못하는, 무너질 수 없는 삶의 무게가 아이에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선 그 모든 것을 다 받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 이었다.

엄마가 없는 삶은 혜령에게도 고통이었다. 그래도 할머니와 아빠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혜령의 할머니는 혜령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할머니는 요리하는 법, 살아가는 요령보다 더 중요한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받는 마음을 배우게 해 주었다. 그건 학교에서도 책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가족만이 유일하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아들을 낳고 키우다 보니 그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은 정말 달랐다. 사랑은 주면 줄수록 더 커지지만 받는 건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줄 수는 없었다. 혜령은 아이에게 잠시나마 사랑을 주었다. 아이의 반응은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네가 그렇게 얘기해주니 참 고맙다. 도와준 데 대한 작은 보답이 없는데 그게 그만큼 기쁜 일이 없다니 나도 정말 기쁘구나. 나도 너와 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혜령은 자신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말투만큼 표정도 따라 차가워지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지 않구나.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너와 같이 살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해도 정말 같이 살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이 필요하단다. 무엇보다도 너의 아빠가 할머니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난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뺏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단다.”

혜령은 말을 마치고 자신의 말투가 너무 딱딱한 것 같아 어색해서 깜짝 놀랐다. 아이는 언젠가부터 서늘한 표정으로 혜령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네가 마음에 든다. 우리가 가끔 만나 오늘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건 가능할 거다. 하지만 네가 나와 같이 산다는 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순간 혜령은 아이가 자신에게 화라도 내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아까와 사뭇 다른 아이의 차가워진 얼굴은 아이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다친 강아지 같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화가 난 살쾡이가 되었다. 아이를 달래야 했다.

“네가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야. 나는 정말…”

“괜찮아요. 없는 말로 할게요. 잊어버리세요.”

너무 당돌한 말에 혜령은 몹시 당황했다. 정말 그래서 그런 게 아닌데 아이는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줄 수 없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고 점차 두근거림이 심해졌다. 선천적으로 심약한 탓이었다. 저혈압 약을 찾았다. 약은 안방에 있었다. 어지러움을 참고 물을 들고 안방으로 갔다. 약을 찾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최근 들어 이렇게까지 증상이 심하게 나타난 건 처음이었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약을 털어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손을 떨려 물이 새어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약을 목 안으로 넘기는 게 먼저였다. 턱을 바짝 들어 약을 삼켰다. 언젠가 급한 마음에 약을 먹으려다 물만 마시고 약은 안 넘어가 고생한 적이 있다. 그때 터득한 방법이다. 다행히 약은 한 번에 쑥 넘어갔다. 아직도 떨리는 손으로 물컵을 놓으려다 물컵이 넘어졌다. 물이 거의 남지 않아 공연히 빈 물컵이 쓰러지는 소리만 요란했다. 탁자에 튄 물방울이 점점이 얼룩으로 변해갔다. 혜령은 침대 가에 주저앉았다. 멍한 정신에도 아이의 말이 남에 맴돌았다.

‘잊어버리세요.’

‘잊어버리세요.’

‘잊어버리세요.’

호흡을 고르는 데 집중했다. 크게 한 번, 두 번, 세 번 숨을 쉬었다. 멍하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 가쁘던 호흡도 조금 가라앉았다.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어 보았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손을 멈춰도 괜찮을 정도가 되었다. 넘어진 물컵을 세우고 휴지로 튀긴 물을 닦았다. 나무 탁자를 물들였던 작은 물방울들은 벌써 탁자 안으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았다.

진정이 되자 아이를 거실에 놔두고 들어온 것이 생각났다. 서둘러 거실에 나가보았다.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도 없었다. 가방도 없고 현관에 신발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혜령이 안방에 있는 사이에 가버린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더 이곳저곳을 둘러봤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아서 거실로 돌아와 앉았다. 아이가 앉아 있던 그 자리였다. 혜령이 동영상을 보기 위해 늘 앉던 자리였다. 그런데 뭔가 달라졌다. 처음엔 뭐가 달라졌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곧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머리핀이 없었다. 유치한 색으로 늘 눈에 거슬리던 머리핀이 없어지니 뭔가 너무 잘 정돈된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되어 주변을 뒤졌다. 설마하니 싶어 들어가지도 않는 디스플레이 뒤편을 손가락으로 긁어 보았다. 휴지통은 죽 펼쳐놓고 다시 담기를 두 번이나 했다. 역시 없었다. 찾다 보니 아이가 훔쳐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믿기지 않았다. 줄 때 거절해 놓고 뭐라 가져간단 말인가! 그렇지만 지금 와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 아이가 훔쳤다는 사실이었다.

 

혜령은 아이를 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런데도 멍하니 있다 보면 어느새 아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항상 뭐라도 하고 있어야 했다. 뭐라도 하고 있으면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집 밖으론 한 시간도 나가 있을 수가 없으니 취미에도 맞지 않는 영상을 계속 클릭했다. 집중하지는 못해도 뭔가 꾹꾹 누르는 동작만으로 생각에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뉴스를 클릭하게 되었다. 썸네일에는 ‘독거노인이 위험하다’이라고 적혀있었다.

“명절을 맞이하여 독거노인들의 외로움이 더욱 증가하였다는 통계가 나왔는데요. 이 점을 노린 악성 범죄 행위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악질적인 사례는 어린아이를 이용하는 경우인데요. 혼자 사는 어르신을 상대로 펼쳐진 일련의 범죄 행위가 모두 어린아이를 이용한 것이라 놀라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32층 23구역에 사는 00 노인은…”

혜령은 더 들을 수가 없어 꺼버렸다. 마음속에서 큰 울림이 들렸다.

‘혹시, 내가?’

그럴 리가 없었다. 여자아이가 범죄를 위해 자신에게 접근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아이는 유치한 디자인의 머리핀 하나만 훔쳐가고 말았지 않았는가. 그 정도는 범죄가 아니지 않은가. 나중엔 좀 바뀌었지만 정말 착한 아이가 아니었는가. 할머니도 있고 아빠도 있고 친구도 있는 어렵게 살지만 평범한 그런 아이가 아니었는가. 엄마가 없어도 그 모든 것을 감당해낼 줄 아는 당찬 아이가 아니었는가. 그런 아이가 범죄에 이용된 거라니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일 아이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면 어쩌겠는가. 아빠도 할머니도 친구 희정이도 모두 지어낸 얘기라면 어쩌겠는가. 엄마가 죽은 것도 사실이 아니라면 어쩌겠는가. 그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질 않은가. 그냥 자신이 믿어버린 것이지 믿을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설혹 일부는 사실이라 해도 과장해서 자신을 이용한 것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불쌍하게 보이게 해서 집에 들어온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자신의 곤란한 처지를 한눈에 파악하고 범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지 어떻게 아는가. 혹시 공범이 있었는지 모르지 않는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자아이가 자신의 집으로 가고 있는지 살펴본 눈길이 있었는지 어떻게 아는가. 시간을 더 끌다가 문을 열어주거나 경비 시스템을 망가뜨려 다른 사람을 부르려 했는지 어떻게 아는가.

생각이 끝이 없었다. 한 번 꼬인 마음은 자꾸 나쁜 쪽으로만 생각을 이어가게 했다. 자신이 정말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였다가 일이 잘 풀린 걸 수도 있었다. 아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아이보고 집으로 가는데 도와 달라 했고 집에 들이지 않았나. 아이는 불쌍한 할머니의 부탁에 순순히 따라준 것뿐인데 그런 아이를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갑자기 잊어버리려 했던 모든 순간이 생각났다. 한순간, 한순간, 이 모습, 저 모습. 범죄를 위해 한 행동이나 말이 되는지 따져보았다. 아이의 말, 표정, 동장 하나하나를 새길 때마다 의심은 점점 커갔다. 자꾸 모든 말과 행동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딘지 아귀가 안 맞고 거짓말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머리핀을 바라보던 그 눈빛이 생각났다. 탐욕스러웠다.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내면의 욕망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잊어버리세요 라고 말하면서 확 변해버리던 모습도 생각났다. 어쩐지 그 모습이 아이의 진짜 모습인 것 같았다. 그전까지는 시간을 벌기 위한 연기였고 그것이 잘 안 되자 본연의 공격성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혜령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못내 괴로웠다. 혜령은 아이가 정말 맘에 들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버텨가는 아이의 모습이 혜령 자신보다 나아 보였다. 가끔 아이를 만나 응원해주고 싶었다. 잘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필요하면 얼마 되지 않는 물질적 도움도 각오했었다. 그런데 일이 그렇게 틀어졌다. 알고 있었다. 아이라면 응당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안방에서 나가면서 아이를 잘 달래 돌려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만나자고, 언제든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혜령은 이후로 많은 날을 괴로워하며 지냈다. 스트레스는 혜령을 약하게 했다. 숨 가쁨이 더 잦아졌고 치매도 심해졌다. 전기를 끄지 않는 건 다반사고, 뭘 먹었는지 얼마나 먹었는지 기억 못 하는 경우도 많았다. 종종 길을 잃었고 그때마다 경찰이 와 집으로 데려갔다. 아들은 요양센터에 들어가라고 조심스럽게 요구했다. 그런 요구도 혜령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왔기에 더 심하게 할 수 없었다. 더는 혼자 살기 불가능했다. 혜령은 그럼에도 어떻게든 혼자 살았다. 혜령에게 요양센터는 감옥과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패배의 인정이자 삶을 포기하는 행위로 느껴졌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센터는 싫었다. 센터의 생활이 옛날 같지 않고 자유스럽고 안락하다는 홍보영상을 보아도 쉽게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

그날도 혜령은 꿈에서 손녀를 보았다. 손녀는 혜령에게 놀이터에 가자며 따라 오라 했다. 놀이터에는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하니 할머니가 있어야 한다고 빨리 오라고 재촉했다. 혜령은 앞서 가는 아이를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손녀는 저만치 앞서 가며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혜령은 다급한 마음에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길을 나섰다. 언젠가 이렇게 맨발로 걸은 기억이 났다. 그때는 누군가와 같이 있었는데 누군가인지 당최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손이 따뜻했다는 것과 그 사람 때문에 차갑고 거친 발걸음도 아프지 않았다는 것이 기억났다. 혜령은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그 사람임을 절실하게 느꼈다. 손녀는 벌써 보이지 않았고 주위를 둘러봐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혜령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할머니! 어휴, 얼마나 찾았는지 아세요? 말도 없이 그렇게 나가시면 어떻게 해요?”

“누, 누구세요?”

“할머니 손녀 은주잖아요.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또 나가셨네. 신발 먼저 신으세요. 여기...”

“내 손녀는 현주인데...”

“아이고, 또 그러시네. 현주가 아니라 은주라고요. 은. 주. 도대체 현주가 누군데 매번 그러시나 몰라. 명절음식 가르쳐준다고 하시고선 이렇게 나가버리시면 어떻게 해요. 오후에 희정이가 올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할머니가 좋아하는 내 친구 희정이요.”

“희정이?”

“네, 희정이요. 제 친구요. 인도 유학 갔다가 오늘 올 거라고요. 희정이 보고 싶지 않으세요?”

“보고 싶지. 그런데 그 머리핀...”

“아, 이 머리핀 기억나세요? 희정이가 사준 머리핀이잖아요. 얼마 전 청소하다가 디스플레이 옆 빈 화병에서 찾았지 뭐에요. 그래서...”

humm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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