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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일루미나티

2023.10.15 09:0810.15

 어떻게든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고 반쯤 성공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를 설득해 1년 만에 검정고시로 고졸이 되었고 2년 만에 독학사로 대졸 자격을 얻었으며 7년간의 개고생 끝에 일문학 박사가 되는 데 성공했다. 박사가 된 이유는 확고했다. 문학가나 번역가가 그나마 편하게 살 방법이라고 믿어서. 그것들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은 아니지만 좋은 직업, 편한 직업은 맞다. 나는 어느 날,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았다. 바로 일루미나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루미나티는 세계의 개혁을 이끌려는 사람들로 보통 철학자나 유명인이 모여 만든 집단이라고 한다.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일루미나티는 하나의 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불특정 다수이다. 한국에도 지사가 있다. 조심해야 한다. 일루미나티가 나를 해치려고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계속 일루미나티가 나를 해친다는 글을 올렸건만 사람들은 그저 정신병자의 글, 아무렇게나 쓴 소설이라고만 믿었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일본의 추리 소설 세 권을 번역했고 번역료로 9,000만 원쯤을 받은 박사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박사 학위증이 위조된 것이라며 믿지 않았다. 나는 집까지 포기하며 연구에 몰두해야 했다. 주거지가 정해져 있으면 일루미나티가 나를 살해할 가능성이 커진다. 나는 이때까지 모아두었던 번역료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받은 재산으로 생활했다. 보통 24시간 운영하는 만화방이나 찜질방에 자리를 잡았다. 하루씩 번갈아 가면서 잤는데, 이틀에 한 번은 씻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부하는 데는 만화방만 한 곳이 없다. 그곳의 정식명칭은 24시간 만화카페지만 나는 그냥 만화방이라고 부른다. 만화방의 냄새는 항상 퀴퀴하다. 그곳에는 다 낡아서 가죽이 헤져버린 긴 소파와 탁자 셋이 있다. 벽에는 사람이 잘만한 작은 방이 여섯 있고 왼쪽 벽에는 마치 일본식 찻집을 연상시키는 좌식 탁자가 있다. 물론 모든 건 오래되었다. 한 시간에 겨우 800원밖에 받지 않는 싸구려 만화방이 늘 그렇다. 그곳에는 노숙자와 가출 청소년이 우르르 몰려온다. 원래 10시 이후로는 미성년자의 출입이 금지되지만, 신분증을 위조하면 만화방 주인 입장에서도 막을 방법이 없다. 아무튼 나는 만화방 중앙에 있는 한 탁자에 자리를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별건 아니었고 노트북으로 국문학과 일문학을 비교하는 연구서를 썼다. 운이 좋으면 교수가 될지도. 물론 기대하는 건 아니다. 교수는 극소수의 천재만 할 수 있는 거니까. 아무튼 나는 계속 글이나 썼다. 그날도 복지사들이 찾아왔다. 흰색 가운을 입은 아가씨들이었다. 내가 만화방 밖으로 나가길 기다렸다가 복도에서 마주치자마자 다가왔다. 그녀들은 나랑 이야기하려고 했다. 1층에 있는 카페로 가자고 했다. 나는 그녀들을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복도 한복판에서 실랑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1층으로 가야 했다. 그녀들의 요구사항은 간단했다. 바로 내가 정신병원에 가는 것이었다. 그녀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요즘은 어린 사람들도 다 정신과에서 검사받고 치료받고 해요, 박사님 세대는 인식이 안 좋을지 몰라도. 나는 한숨을 깊이 쉬고 단발머리 복지사가 사준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빨아들이고 말했다. 그러니까, 저를 정신병원에 처넣겠다는 뜻이군요. 아뇨, 처넣는다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정신병도 없습니다,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온 건지 모르겠는데요. 박사님, 정말 일루미나티가 실존한다고 믿으세요. 당연하죠. 18세기 독일에 있었던 단체가 정말 한국에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킥킥 웃었다. 이봐요, 복지사 선생, 사회복지사면 학생 때 공부는 잘했을 텐데, 세상 공부는 잘 못했나 봐, 일루미나티는 하나의 단체가 아니에요, 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모두 일루미나티라고 하는 거지. 그러니까 계몽주의자가 왜 박사님을 노리겠어요. 그야, 내가 써 내렸던 저서들이 그들을 반대하고 있으니까. 복지사는 짜증이 날 법도 한데 끝까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박사님, 이틀 뒤에 다시 올게요, 여기서 주무실 거 맞죠. 이틀 뒤라면 여기 있을 거요. 그녀들은 정말로 사라졌다. 복지사들이 떠난 이후, 카페 여사장은 과자 하나를 서비스로 내오며 말했다. 저기요, 박사님, 왜 병원을 안 가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저런 사람들 속셈이 뻔하잖소, 어떻게든 정신병자 머릿수 늘려서 세금, 후원금 뽑아먹으려고 하는 인간들이지. 카페 여사장은 아버지가 사업가 시절 운영하던 보육원 출신이었기 때문에 나와도 친한 사이다. 그녀는 내가 정신병원에 가는 걸 찬성한다. 내 마음도 모르고.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왜 남을 정신병원에 가두고 싶어서 안달이지. 나는 노트 한 권을 꺼내서 글을 썼다. 저 인간들은 모른다. 자기들이 일루미나티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다음 날, 나는 공중목욕탕에 들러서 몸에 있는 때를 지워낸 뒤, 밖으로 나갔다. 그 여사장이 있던 카페로 돌아가서 통밀빵과 치킨 샐러드를 주문했다. 여사장은 여전히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그것들을 먹는 와중, 갑자기 빵을 썰 때 쓰는 나이프가 반짝이는 것을 느꼈고 나는 그것이 보통 나이프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혹시 여사장이 나에게 독이 묻은 나이프를 건넨 것일까. 나는 여사장을 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면서 마지못해 웃음을 보였다. 나는 그녀가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나이프를 이용해 빵을 맛있게 먹었다. 다시 2층으로 올라가서 카드를 받은 뒤, 캡슐 같은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잠들었다. 꿈을 꿨다. 내가 일루미나티의 존재를 확신하게 된 건, 그날의 충격 때문이다. 나의 박사 논문 통과가 이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대학원 건물에서 나와 자취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조용히 걷는 중이었다. 시간이 얼마 늦지 않았는데도 하늘이 어두웠고 마치 우주를 걷는 듯했다. 그때 한 파란색 축구공이 내 관자놀이와 강하게 부딪혔다. 나는 골목에 있던 벽과 머리를 찧고 그대로 기절했다. 나는 한 시간 뒤에 정신을 차렸는데, 축구공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누가 왜 공을 던졌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음 날 새벽, 아버지가 충수염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술만 받으면 살 수 있었는데 하필 운이 안 좋게 개복 전에 맹장이 터져버러서 패혈증으로 죽어버렸다고 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그래, 누군가가 내 인생에 개입하고 있어, 내 사상이 자기들의 사상과 맞지 않기 때문에, 내 인생을 어긋 내려고 하는 거야. 하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도서관으로 들어가, 정치학 서적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내 인생을 방해하는 거대한 적이 일루미나티라는 걸 깨달았고 그것이 독일이나 미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불특정 다수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나와 일루미나티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원래 살던 자취방을 빼고 24시간 찜질방과 만화방을 전전했다. 이것이 내 인생의 시작이다. 외롭다는 건 즐거웠다.

나의 저서, '적 일루미나티'는 편향적이고 자극적이며 근거가 부족한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열다섯 군데의 출판사에서 모두 출판을 거부했다. 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다시 막강한 권력 앞에 굴복한 기업들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모두가 악성 댓글을 달았지만, 상관없었다. 곧 스마트폰이 울렸고 복지사가 카페에서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나는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그녀들은 오랜만에 사복을 입고 왔다.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두어 잔 시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은 어떠셨어요. 어땠냐니요. 불안하거나 우울하신 점은 없었어요. 하루 종일 일루미나티로부터 감시당했는데 편안했을 거 같나요. 박사님, 혹시 과거에 안 좋았던 일이 있었나요. 나는 말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이봐요, 선생님들, 혹시 최악의 하루를 보내본 적이 있나요.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이 남자는 일문학을 좋아해서 매일 일본의 추리 소설, 라이트노벨, 만화 등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그가 사회성이 부족한 얼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그와 친구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다. 차라리 검정고시가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부터 학점은행제를 생각했으니 따로 내신을 챙길 일도 없었다. 복지사 가운데 단발머리에 눈동자가 반짝이는 여자가 말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아마 내가 반소매 차림이었던 게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박사님,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요새 날씨가 추워졌잖아요. 스마트폰으로 달력을 보니 10월 10일이다. 역시 달력을 보니까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른다. 나는 다시 만화카페로 돌아왔다. 그녀들은 이틀 뒤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사회복지사라는 인간들이 얼마나 한가한지 사람을 이렇게 붙잡아도 되는가, 생각했다. 그날 저녁,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실신했고 만화카페 직원은 119를 불렀다. 나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오래 굶은 채로 움직여서 빈혈이 온 거라고 했다. 나는 구급차에 누워있는 채로 구급대원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뭐가요. 겨우 빈혈 때문에, 구급차까지 오고. 아뇨, 어떤 환자라도 안전하게 이송하는 게 구급대의 일입니다. 나는 한 병실에 입원했다. 한 사흘쯤 지났을까, 복지사는 대체 어떻게 안 건지 내가 있는 병실로 왔다. 단발머리는 오지 않았고 장발이 왔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아니, 박사님, 식사 잘 챙겨 드시고 따뜻하게 입고 다니시라고 했잖아요. 아, 걱정시켰나요, 죄송합니다. 복지사는 한숨을 쉬었다. 원래 같이 다녔던 단발머리 복지사가 폐렴 진단을 받아서 열흘쯤 일을 못 나올 거라고 했다. 복지사도 사람이니까 병에 걸리는 게 당연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병실에서 퇴원하는 날, 나는 결국 정신병원 입원 동의서에 서명해야 했다. 내가 고집을 피울수록 누군가가 고생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노트북과 필기구를 써도 되는 병동이라고 했다. 연구가가 직업이니만큼 이를 고려해서 정한 병동이라고 했다.

나는 정신병동 1인실에 가만히 누워있다. 그곳에는 매트리스와 이불 한 장, 베개만 있다. 벽에는 비상시에 누르라고 있는 버튼이 있고 맞은편 벽에는 구멍도 하나 있는데, 아마 간호사나 간호조무사가 나를 감시하기 위해 있는 게 분명하다. 마침 간호사가 와있다. 남자 간호사는 별로 본 적이 없는데 이곳에는 남자 간호사와 여자 간호사가 반반이다. 내가 말했다. 간호사 선생님, 백지 노트 한 권과 펜을 구해다 주실 수 있나요, 돈 드릴게요. 남자는 웃으며 말한다. 무지 노트 말씀하시는 거죠, 줄이 없는 거. 나는 웃으면서 그렇다고 했다. 다음 날, 정말 남자는 노트와 펜을 구해왔다. 갱지를 접착제로 붙여서 만든 싸구려 노트다. 게다가 펜은 끝이 무른 플러스펜이었다. 아마 정신병원에는 이런 것밖에 못 들여오는 듯하다. 글이 잘 안 써지고 잉크가 뭉쳐지나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글을 썼다. 정신병동과 일루미나티의 공통점은 남을 감시하는 걸 좋아한다는 점이다. 매주 월요일 오후는 의사와 상담이 있었다. 의사치고는 다소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먼저 나에게 이때까지 살아왔던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이야기를 풀어갔다.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검정고시를 보고 독학사를 하고 대학원에서 일문학 박사를 하게 된 사연을 그녀는 그렇다면 앞으로는 박사님이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의사가 말했다. 박사님은 어쩌다가 일루미나티가 자신을 공격한다고 믿게 되었어요. 공에 맞았어요. 무슨 공이요. 축구공이요. 축구공에 맞아서 일루미나티가 자신을 감시한다고 믿었나요. 네, 일루미나티가 저를 공격한 게 틀림없어요, 아마 그때 잠시 기절했을 때 저에게 도청기를 씌워놨죠, 하하. 의사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의사가 내게 물었다. 혹시 올림픽이 어디서 처음 주최되었는지 아시나요. 그리스 아닌가요, 아테네인가. 오늘이 며칠인가요. 10월 10일이요, 그걸 왜 물어보세요. 지남력 확인이라고, 검사하는 게 따로 있어요, 박사님, 일루미나티의 존재를 믿지 마세요, 그건 18세기 독일에 있었던 종교단체입니다, 현대, 특히 한국에는 그런 거 없어요. 그건 18세기 독일에 있는 일루미나티 이야기죠. 나는 숨을 멈추고 잠깐 뜸을 들였다. 의사에게 말했다. 민주주의를 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민주주의 단체고 사민주의를 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사민주의 단체죠, 계몽주의를 따르면 그건 일루미나티 아닙니까. 박사님, 박사님 손으로 입원 동의서에 서명하셨죠, 왜 사인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복지사가 저 병원 입원시키려고 폐렴까지 걸렸어요,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알겠다고 했다.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남자 간호사가 나를 1인용 병실로 데려갔다. 말이 좋아서 데려간 건지 사실상 팔뚝을 붙잡고 끌고 간 거다. 그는 나에게 약 한 움큼과 플라스틱 물컵을 주었다. 약을 먹으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삼켰다. 알약이 목구멍에서 드문드문 느껴졌다. 간호사는 내가 약을 완전히 삼킨 걸 보고 사라졌다. 병실의 문이 닫혔다. 그날은 잠이 참 잘 왔다. 눈만 감았는데 누군가가 나를 꿈나라로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한 간호사가 나에게 나오라고 했다. 오늘은 미술 치료가 있는 날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토요일 오전에는 그랬지. 복도로 가는 길에 한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더벅머리였고 눈이 컸지만 눈밑에 검은색 그늘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소름이 돋았으며 확실한 정신질환자임을 간파했다. 간호사와 나란히 미술실로 가는 중이었는데, 그녀는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나는 소름이 돋았다. 미술실에서 이젤과 도화지를 올려놓고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그래봤자 먹어도 해롭지 않은 친환경 수채화 물감을 종이에 펴 바르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여자와 나는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새하얀 원피스다. 그것은 자살하지 못하도록 끈이 없고 단추만 두어 개 달려있다. 쉽게 찢어지는 소재라고 했다. 그녀는 자기의 옷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입이네. 아, 네. 나는 기분이 나빴다. 나보다 몇 살 어려 보이는 여자였는데, 대놓고 반말했다. 혹시 예상외로 나이가 많은 것인가. 내가 말했다. 몇 살인가요. 24인데. 나는 29이야, 반말하지 말지.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나이 맞추기는 잘 못해서요. 그녀는 주황색 물감을 갈색 붓에 듬뿍 묻히더니 무작정 도화지에 색칠했다. 거기에다가 가느다란 붓으로 다시 검은색 칠을 했는데, 마치 주황색 배경에 사람이 여럿 서 있는 모습이 되었다. 그녀가 말했다. 예쁘죠. 어. 우리 집. 집이 왜 그래. 예전에 불탔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녀의 오른쪽 턱과 목에 검붉은 화상자국이 있다. 그랬군. 저 여자는 화상으로 가족을 잃고 정신병원으로 들어간 거야. 나는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간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여기 왜 들어왔냐고. 나는 일루미나티가 나를 해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하하 웃었다. 나 알아요, 일루미나티, 그거 이상한 단체잖아요, 전 세계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려는, 아닌가요. 그녀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그만하라고 하자 갑자기 울상이 되었다. 그녀는 오늘 만나서 반가웠다고 했다. 오전 시간이 끝나서 이제 병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보았다.

나는 잠들었다. 오후에 음악을 몇몇 들었다. 뭔 노래인지는 모르겠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1인용 병실의 천장, 바닥, 벽에는 타원형 눈이 수백은 달려있다. 그것은 24시간 한시도 빠짐없이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 살갗만 보지 내 머릿속까지는 꿰뚫어 보지 못한다. 나는 머리맡에 두었던 노트와 펜을 꺼냈다. 글을 썼다. 오늘은 소연이라는 여자애를 만났다. 그녀는 24살이지만 일단 여자애라고 칭하겠다. 키가 작고 앳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미웠다. 그녀는 정신질환자이다. 일루미나티를 잘 안다. 일루미나티의 심복이 분명하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한 간호사가 내게 왔다. 간호사는 나를 한 원탁에 앉혀놓았다. 그곳에는 다른 정신병자가 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종이와 펜을 하나씩 가졌다. 간호사가 말했다. 오늘은 글쓰기를 해볼 거예요, 얼마 전에 들어오신 환우분 중에 박사님이 한 명 계세요. 그녀는 나를 소개했다. 일문학 성윤하 박사. 그녀는 나보고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나는 여기 들어오고 싶지 않았다. 사회복지사 하나가 계속 고집을 부려서 어쩔 수 없이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고개만 끄덕였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이에 글을 썼다. 그래봤자, 의미 없는 낙서일 뿐이지만. 안녕하세요. 병동 직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결코 시간에 늦지 않습니다. 이곳의 창문에는 철창살이 박혀 있습니다. 너무나 굵고 튼튼합니다. 바람이 새어 나올지 모르겠네요. 환기가 안 된다는 뜻이죠. 간호사 선생님들은 제가 약을 안 먹으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신기하네요. 감사합니다. 머리카락이 꽤 긴 잘생긴 총각의 종이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 남자는 그것을 그대로 읽었는데, 그냥 사람들은 듣고만 있었다. 언어치료사라는 인간은 그것을 그냥 받아적고만 있었다. 나는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글을 썼다. 옆에서 소연이 뭐라 뭐라 했다. 역시 박사님이라 글을 잘 쓰시네요. 내 글은 인간의 성악설을 다룬 글이다. 아기는 자기 장난감을 다른 아기에게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 악하다는 증거다. 인간은 사회에서 배워가면서 선을 배운다. 오후가 되었을 때, 우리는 도서관에 있었다. 소연은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었고 나는 ‘인간 실격’을 읽는 중이었다. 소연은 역시 일문학 박사님이라 읽는 책도 고급스럽다고 했다. 나는 흔하게 있는 책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그런 책을 읽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동의했다. 나는 똑똑한 사람이다. 일반인과 다른 사람이다. 그날 저녁, 밥이랍시고 식판 하나를 한 직원이 병실 문 아래 배식구로 넣었다. 그것은 밥과 미역국 그리고 돼지고기를 간장에 졸인 것이었다. 불고기는 소고기로 만든 것만 봤기 때문에 돼지고기 조림은 너무나도 신기했다. 혹시 나는 이것에 약을 타 놓은 게 아닌가 싶었다. 한 입 먹어보았는데 딱히 그런 거 같지는 않았다. 그것을 다 먹었다. 이번에는 간호사가 약과 물컵을 가져왔다. 드세요. 네. 나는 그것을 삼켰다. 이번에도 알약의 목구멍에 느껴졌다. 분명 동그랗고 매끄러웠는데 그날따라 까끌까끌했다. 다음 날, 소연은 도서관에서 의사 하나를 붙잡고 자기에게 폐결핵이 있다고 검사를 받게 해달라고 칭얼거렸다. 의사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신체화 장애의 일종으로서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거라고 했다. 소연은 의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의사는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최대한 착하게 말했다. 우리 몸은 병이 없어도 가끔 아픔을 느낍니다, 결핵약은 아니지만, 고통을 줄여주는 약을 드리겠습니다. 그날 도서관에 햄버거와 캔 콜라가 잔뜩 배달왔는데, 자선 사업가가 기부한 거라고 했다. 평소 자극적인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병원은 음식을 많이 주지 않았기에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소연은 그것을 먹지 않고 손가락으로 빵을 깨작거렸다. 내가 말했다. 왜 안 먹어. 미쳤어요, 의사가 여기에 약 묻혀놨잖아요. 아침, 저녁에 약 먹는데 뭐 하러 또 묻혀놔. 그건 항정신병제고 이건 임상실험이잖아요, 뭔지 몰라요. 그녀는 도서관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그것을 버렸다. 음식물은 종량제 쓰레기로 버리면 안 된다고 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결국 다른 의사가 와서 그 햄버거를 치워야 했다. 이럴 거면 왜 튼 거지.

저녁,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소연의 목소리였다. 스마트폰 너머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여전히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의사에게 말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이미 엑스레이 검사를 받아봤지만, 결과는 이상 없음. 몸에 문제가 있거나 병원체에 감염된 게 아닌 정신적인 문제라고 했다. 나는 왜 소연이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다. 그녀는 의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이 결핵 환자라고 믿었다. 나는 좀만 참으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약을 먹어서 졸렸으니 빨리 자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곧 잠들었다. 그 꿈은 마치 현실과도 같았다. 나는 지하철에 있었다. 지하철에는 머리가 구불구불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소연을 닮았다. 지하철의 공기는 퀴퀴했다. 나는 여자를 빤히 보았지만, 여자는 나를 의식하지 못했다. 곧 지하철에서 안내음이 나왔다. 다음 역은 신림, 신림역입니다. 근처에 다른 승객은 없었다. 잠에서 깼다. 곧 의사를 만났다. 의사를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다. 거의 매일 보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한 적은 얼마 없다. 의사가 말했다. 아직도 일루미나티의 존재를 믿으시나요. 그렇죠. 일루미나티가 박사님께 어떤 행동을 하죠. 그야, 감시하고. 감시하고 또 뭘 하죠. 그건 모르겠네요, 그 인간들이 워낙 신출귀몰해서. 알겠습니다. 나는 의사에게 말을 덧붙였다. 의사 양반, 나 이래 봬도 박사까지 한 사람이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연은 여전히 '1984'를 읽었다. 그날은 병원에서 단팥빵을 나누어주었는데, 한 사회적 기업에서 아이들 체험학습 시키고 남은 것들이라고 했다. 학생들이 만든 거라서 그런지 모양이 동그랗지 않고 빼뚤빼뚤했다. 나는 그 가운데 하나를 집어 먹었다. 소연은 여전히 먹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봉투째 빵을 내밀며 말했다. 좀 먹어. 여기에 약이 있어요. 있으면 뭐 어때, 나으려고 먹는 거 아니야, 약은. 그녀는 내 말에 동의했는지 그것을 먹었다. 오물오물 씹었다. 눈 밑에 검은색 그늘이 있던 그녀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그것은 신생 출판사에서 제작한 것이었고 검은 테두리가 둘러 있었다. '1984'의 핵심 주제인 검열을 의미한다나 뭐라나. 소연의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그러면 그림을 그려, 책 붙잡지 말고. 그녀는 평소에 소설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1984'만큼은 자주 읽는다고 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책도 도서관 책이 아니라 자기가 개인적으로 산 거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책은 낡아 보였고 조금만 손을 대도 부스러질 것처럼 보였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왜 그 책을 그렇게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출판사에서 디자인 공모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했다. 그 출판사는 저작권이 만료된 해외 문학을 번역해서 출판하는 일을 했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1984'였다. 그녀는 최대한 '1984'의 느낌에 맞춰서 검열을 상징하는 디자인을 해냈고 그렇게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그녀는 상금으로 1,000만 원쯤을 받았고 그렇게 그녀의 인생은 행복해지려고 했다. 그날 왜 폭발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안방 너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어떻게 소방관에게 이끌려 본인은 살았지만, 부모님은 결국 유독가스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그렇게 병원에 잠깐 있다가 정신병원으로 옮긴 거라고 했다.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면 가슴이 아픈 것도 그 화재 때문인가. 그렇겠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결핵 환자였기 때문에 자기에게도 결핵이 있으리라고 믿었는데, 의사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몸에 결핵이 없다는 이야기만 주야장천하고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의사는 신체화 장애를 진단했다. 내과적인 문제가 없는 데도 고통을 느끼는 정신병. 의사는 내게 자주 말하곤 했다. 정신과 치료가 내게 도움이 되었냐고.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치료받기 전보다 후가 더 나았으니까. 소연을 만난 것도 어쩌면 행운이라고 본다.

나는 병원 사무실에 있던 프린터를 잠깐 빌려서 나의 저서인 '적 일루미나티'를 인쇄했다. 소연에게 읽게 했더니, 이렇게 재미있는 글은 처음 본다며 깔깔 웃었다. 나는 이게 진실이라고 믿는다고 했더니 소연은 차라리 정치 서적보다는 소설가로 가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싫어, 소설은 허구잖아, 나는 진실을 쓰고 싶어. 하지만 사람들은 일루미나티를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지.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한 출판사에서 내 글을 출판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그 출판사는 1990년대 창간된 꽤 역사가 있는 회사였다. 출판사치고는 그렇게 오래된 회사는 아니었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외국인 작가 작품도 몇몇 냈었고 작가들 사이에서는 꽤 평판이 좋은 회사였다.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왜 내 책을 출간하고 싶냐고 물었다. 편집자가 답장한 이메일의 글은 명료했다. 이런 글도 필요하죠, 한국 출판업계에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 편집자는 보지 못했겠지만. 나는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의사가 딱히 허락해 줄 거 같지는 않았다.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고 했는데, 편집자는 그런 점이 오히려 출판의 마케팅 요소가 된다고 좋아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나보다는 출판사 편집자가 더 마케팅을 잘 알 테니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는 말했다. 일단 전자 계약서를 보낼 테니까 잘 읽어보라고. 대단한 건 줄 알았는데, 그냥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나눠주는 표준출판계약서였다. 딱히 이상한 내용은 없었다. 나는 그곳에 전자서명을 넣었고 그들은 좀 있다가 편집본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원래 출판사가 편집의 우선권을 두고 있지만, 박사님도 한 번 봐야 하니까.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의사에게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했지만,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회사에 다니는 정신병자가 있고 카페에서 일하는 정신병자가 있듯이, 나도 그냥 글 쓰는 박사 정신병자일 뿐이었다. 나는 속상하다고 했지만, 도서관에서 만난 소연은 원래 의사들은 환자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무뚝뚝하게 행동하는 거라고 했다. 나는 그것에 수긍했다.

얼마 뒤, 사회복지사들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내 어머니를 찾았다고 했다. 이혼한 지 꽤 되어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내가 정신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찾아오겠다고 했다. 어머니를 다시 마주하게 된 곳은 면회실로 자주 쓰이는 한 휴게실이었다. 나는 컵라면에 물을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중이었다. 어머니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를 보고 말했다. 지하야, 다시 못 볼 줄 알았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뭔가 감동적인 순간일 줄 알았는데 딱히 어떤 감정이 일지는 않았다. 내가 할 만한 건 그냥 어머니 앞으로 다가와서 간단한 포옹을 하는 것뿐이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아버지와의 이혼 후 내가 잘 먹고 잘살고 있을 줄 알았다고 했다. 박사가 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사람이 잠깐 아프기도 하죠.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곧 이따가 데릴러 오겠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가 나에게 이렇게 호의적일 줄 몰랐다. 어머니는 그날, 나에게 음식이랍시고 잡채를 만들어오셨다. 일회용 용기에 담아왔지만, 직접 만드신 거라고 했다. 나는 맛있게 먹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은 그 잡채를 맛나게 먹었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가 집을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었던 음식 같기도 했다. 모든 건 원래대로 돌아올 줄 알았건만 그런 건 아니었다. 갑자기 소연이 보이지 않았다. 의사에게 물어봤더니 말해주지 못한다고 했다. 도서관에서 알코올 의존증으로 들어온 어떤 할아버지가 소연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심정지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병원에 응급처치 팀이 있었지만, 소연을 살려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 할아버지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후유, 젊은 친구가 안 되었다, 그렇지. 나는 해줄 말이 없었다. 얼마 뒤, 어머니가 회색 소나타를 몰고 병원 앞으로 왔다고 했다. 나는 퇴원하기 전에 의사랑 잠깐 이야기를 가졌다. 의사는 나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별건 아니었고 그냥 오늘이 며칠인지 앞으로 무엇을 할 건지 그런 이야기였다. 의사는 3주에 한 번 이곳에 방문해서 약을 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의사가 말했다. 내 병명은 망상장애였다고 잘못된 상상을 현실이라고 믿는 병. 나는 의사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망상장애, 제 병명이 그것이었군요.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 팔뚝을 붙잡고 나를 병원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는 자동차 조수석에 탔다. 어머니가 말했다. 몸은 좀 어떠니. 괜찮아요. 그래, 약 잘 먹으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살던 동네에 내 재산과 어머니의 돈을 합쳐서 꽤 괜찮은 전셋집을 구했다. 공인중개사한테 가서 어머니와 살 집을 구한다고 하니까 그 돈이면 전세로 사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새로 가게 된 아파트를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만화카페와 찜질방에서 생활했다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었는데, 이왕이면 앞으로는 그런 곳은 가지 말라고 했다. 왜냐고 했더니 다시 과거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내 원고를 책으로 출판하고 싶어 했던 출판사 건물은 꽤 멋들어진 곳이었다. 살구색 직육면체였지만 마치 중세 시대의 저택을 연상시키는 느낌이 있었다. 길쭉한 창문이 차곡차곡 붙여져 있었고 눈앞에는 검은색 대문이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곧 경비원의 안내에 따라 3층에 있는 편집자실을 알게 되었다. 편집자라는 인간은 정장을 입은 꽤 멋들어진 올백 머리를 한 남자였다. 초판본이 나왔다면서 내게 책을 건넸다. 흰색 표지에 그냥 󰡔적 일루미나티󰡕라는 글자만 적혀 있었다. 나는 왜 디자인이 이러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원래 요새는 미니멀리즘이 대세라고 했다.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편집자님, 혹시 제가 번역한 글 읽어보셨나요. 네. 뭐요. 나카하라 츄야 시집이요. 아, 그거. 나는 킥 웃었다. 살다살다 시집을 번역하게 될 줄은 몰랐지요, 원래 한국 출판사가 시는 잘 번역하려고 안 하거든요, 다른 나라도 비슷하지만, 특히 한국은요. 편집자가 말했다. 그 나카하라 츄야 작품이 참 신기했죠. 네, 「춘일광상」이라는 시를 다뤘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자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죠. 아, 그런 말은 좀 극단적인데요, 보통은 자살하지 말라고 하지 않나요. 그때는 그게 당연했나 보죠, 아니면 문학적인 표현일 뿐이라던가. 편집자는 웃었다. 혹시 책 소개란에 저자가 정신병원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넣어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러라고 했다. 얼마 뒤, 정식으로 발매된 '적 일루미나티'는 나쁘지 않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렇게까지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인들 사이에서 ‘음모론 입문서’라는 별명을 얻으며 그럭저럭 사람들이 사준 모양이었다. 서점에서 그럭저럭 책이 있는 걸 확인한 뒤에 나는 매일 가던 만화카페의 아래층에 있던 카페로 갔다. 그곳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여사장은 나를 보면서 병원 생활을 잘 마쳐서 다행이라고 했다. 아픈 건 좀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나는 빨대로 커피를 홀짝이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뒤, 카페로 한 여자가 들어왔고 내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소연과 무척이나 닮은 여자였다. 소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빈 커피잔을 계산대에 돌려주고 카페 밖으로 나갔다. 그 여자의 목에는 화상자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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