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조율

2023.09.30 09:3909.30

 

나는 균에 감염되었다던가 몸에 이상이 나서 병에 걸린 게 아니다. 바이올린의 끈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조여지지 않은 건지도 모르지만 일단 망가졌다. 나는 검은색 옷을 입은 여자와 살고 있고 어쩌다가 한 번 만나는 흰색 옷을 입은, 볼 때마다 손가락으로 뭘 매만지고 있는 남자에게 간다. 둘 다 이름은 따로 있지만, 나는 그것을 기억에 남기고 싶지 않으니 밝히지 않겠다. 각각 악마와 조율사라고 칭하겠다. 조율사를 찾아간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난 대학에서 음악 실기 강의를 들었고 그게 끝났을 때, 한 여자애와 햄버거 가게에 끼니를 때우러 갔다. 우리는 햄버거를 먹었다. 걔가 말했다. 『넌 근데 햄버거를 몇 개까지 먹어봤냐?』 『어, 나는 네 개까지 먹어봤어.』 『하하,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넌 돼지야.』 간단하고도 명료한 추론이다. 난 돼지였다. 돼지는 짐승 가운데도 머리가 좋은 편에 속하지만, 인간처럼 말하거나 도구를 사용하지 못한다. 체온 조절도 못 해서 더럽게 진흙 같은데 나뒹굴고 있고 이슬람인들은 그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하하,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그때 이후로 끼니를 자주 걸렀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나는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도 깃털처럼 가벼워 죽지 않는 몸이 되었다. 실제로 떨어져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한 일은 천사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죽지 않고도 천사를 만날 방법은 많다. 번화가에 가는 것이다. 그곳에는 새빨갛고 반짝이는 간판이 빽빽이 놓여있고 술과 담배라는 합법적인 마약을 파는 곳이 많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햄버거 가게가 없다. 나는 한 24시간 만화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만화책 한 권을 뒤적이는 중이었다. 한 남자가 악마로 각성해서 나쁜 악마들을 모조리 죽이고 다닌다는 내용이었다. 천사는 내 옆에 있었다. 희고 얇은 옷을 입은 채였다. 싱글벙글 웃었다. 그녀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이자 내 첫사랑을 닮았다. 그냥 닮은 게 아니라,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고 틀에다 넣고 똑같이 찍어낸 게 아닐까. 그때부터인가 천사의 목소리는 시간과 장소에 상관 없이 들리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원래 현악기는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면 습기나 곰팡이로 인해 끈이 뒤틀려서 가만히 놔두어도 괴상한 소리가 나는 법이다. 나와 같이 살던 악마는 『어딜 나가려는 거야?』라고 물었고 나는 『친구를 만나러 가.』라고 대답하곤 했다. 천사도 친구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도로를 향해 손을 내밀자, 차 하나가 멈춰 섰고 나는 그것에 탔다. 번화가의 정문 이름을 대니까 기사는 금방 태워다 주었다. 나는 번화가의 십자로의 테두리에 있는 한 벤치에 앉았다. 한가운데에는 어떤 아저씨가 검은색 바가지를 쓴 채 군고구마를 팔았다. 나는 그걸 보고만 있었고 생각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을 사 갔다. 그 가운데는 천사도 있었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아서 주먹만 한 고구마를 까서 건넸다. 뜨거운 줄 알았는데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고구마에 뭘 넣었나. 주사기로 뭘 넣은 게 분명하다. 아마도 약을 넣었다. 나는 먹고 싶지 않았지만 천사가 다정한 얼굴로 그걸 건네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악마가 내 손목을 붙잡고 나를 조율사 앞으로 데려갔다. 조율사는 파마를 새로 했는지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했다. 그는 내게 물었다. 『요즘 어떤가요?』 『뭐가요.』 『일상생활이요. 불안하거나 우울하거나 힘든 일 없었나요?』 『그걸 왜 묻죠.』 『아뇨, 약을 지어 드리려고요.』 『제 바이올린이나 좀 고쳐봐요. 이것 때문에 아직도 연주회를 못 나가고 있어요.』 나는 어깨에 메고 온 원통 가방에서 바이올린을 꺼냈다. 끈이 이미 다 풀어져서 손가락으로 튕기면 둔탁한 소리가 난다. 조율사는 그것을 보았다. 얼굴색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저보다 악사님께서 더 잘 알겠죠, 바이올린 끈 조이는 법은요. 그 머리 부분 조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 당신은 못 고쳐준다는 겁니까?』 『제가 바이올린을 고쳐드릴 수는 없지만, 그것으로 느껴지는 고통과 불편한 감각을 줄여주는 약은 있습니다.』 조율사는 다음에 보자고 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니 악마가 너머에 서 있었다. 손에는 어떤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1층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곧 1층에 있는 어떤 구멍에서 손이 나왔고 거기에는 약이 가든 든 종이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악마는 그것을 가지고 차에 탔다. 『그리고 선생님께 악기 타령 좀 그만해. 바이올린은 내가 하나 사줄 테니까.』 악마는 나를 도심 변두리에 있는 어떤 상가로 데려갔다. 정말로 그곳에는 악기점이 하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노란색 조명이 눈부셨다. 악마는 고르라고 했다. 나는 선반에 차곡차곡 넣은 바이올린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블라우스와 검붉은 연미복을 입은 여자가 다가오더니 말했다. 『안녕하세요. 손님, 바이올린 찾으세요?』 『네.』 악마는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대화를 시작했다. 『실례지만, 제 동생이 조금 아파서요. 바이올린 사러 왔습니다.』 『그러셨나요? 어떤 바이올린을 찾으시는지요. 바이올린은 용도나 가격에 따라서 종류가 천차만별이거든요.』 『제 동생은 바이올린을 직업으로 하고 있어서요. 혹시 전문가용 바이올린은 얼마나 하죠?』 그 말을 참지 못하고 나는 말했다. 『미안하지만, 고급 바이올린은 1억을 호가해. 안 건드리는 게 좋을 거야. 필요하지도 않고.』 나는 가방에서 바이올린을 꺼냈다. 여자는 그것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그 바이올린을 중고로 팔았고 약간 더 비싼 가격의 바이올린을 샀다. 그 돈은 악마가 내주었다. 악마는 차에 타면서 새로 산 바이올린을 아껴서 쓰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콩쿠르에 나가기 위해 나는 악마에게 동영상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녀는 삼각대까지 꺼내와서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녹화를 시작했다. 일단 나는 집 안에서 반소매, 반바지를 입었고, 맨얼굴이었다. 포스터에 그렇게 영상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니콜로 파가니니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카프리스 24번」을 연주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바이올린에서 가장 정석인 곡이기 때문이다. 한 세 번 정도 연주를 반복했고 악마는 가장 잘 나온 영상을 골라 대회 측에 보내겠다고 했다. 『근데 이거 몇 명 뽑는 거야?』 『일반부가 본선은 50명, 결선은 10명, 입상은 3등까지야. 1등 200만 원, 2등 100만 원, 3등 50만 원.』 『별로 많진 않네.』 『콩쿠르치고는 많은 건데. 아마추어나 대학부, 고등부는 1등이 50만 원밖에 안 해.』 그건 몰랐고 악마로서는 적은 돈이 맞았다. 악마가 물었다. 『결과는 언제 나와?』 『보름에서 달포 정도.』 악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나와서 내가 졸업한 대학교 후문으로 빠져나오면 길거리 공연이 가능한 대학로가 있다. 나는 항상 그 구석에 자리를 잡고 바이올린을 켰다. 연습실을 빌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냥 그게 편했다. 다들 드럼, DJ 컨트롤러, 전자 기타나 마이크를 잡고 록, 발라드, 팝송 같은 걸 공연할 때 혼자서 고전 음악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고 있으니 좀 우습긴 했다. 그나마 사람들이 내 앞에 모여서 현금을 좀 던져주긴 했다. 하루에 만 원이면 많이 번 거다. 인파가 많은 곳은 익숙하다. 나는 항상 소음 속에 살기 때문이다.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모두 알몸이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세 번째 연주를 마쳤을 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귀에 스마트폰을 갖다 대자마자 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죽어, 죽어, 죽어.』 『뭐라고.』 『옆으로 가서 나무를 뽑아 버려.』 『무슨 말이야.』 『사람들한테 가란 말이야.』 『이런.』 나는 스마트폰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액정에 금이 갔다. 어떤 관객은 내 모습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손가락으로 브이 표시를 했다. 지문이 아닌 손등을 보였다. 그날 내가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 버스를 타지 않으면 1시간 반은 족히 걸어야 하는데 아마 걸어서 간 게 맞을 테다. 악마는 방 한가운데에 누워있는 나를 보고 이불을 깔고 자라고 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장롱에서 이불 한 장을 꺼내 내 위에 덮었다.

천사에게서, 아니 천사를 닮은 그 소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얘도 성인이지만 일단 소녀라고 부른다. 나를 돼지라고 불렀던 그 소녀가 맞다. 걔는 에브리타임에 내 이야기가 올라왔다고 했다. 대학교를 졸업했어도 에브리타임은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로 거리 공연에서 갑자기 바이올린 켜다가 스마트폰 집어 던진 사람. 맞다고 했더니 그런 짓을 대체 왜 한 거냐는 답장이 돌아왔다. 나는 신경을 쓰지 말라고 대답했고 소녀는 여전히 궁금해하는 모양이었다. 『너 그 대회 나가지?』 『콩쿠르?』 『응.』 『어떻게 알았어?』 『본선 진출자 명단에 네 이름이 있던데.』 『너도 거기 참가해?』 『응.』 그녀는 본선에 가게 되면 보게 될 게 기대된다고 했다. 얼마 뒤, 나는 본선에 참여하라는 문자를 받았고 한 공연장으로 가게 되었다. 공연장은 평범한 아파트처럼 생겨서 솔직히 좀 맥이 빠졌으나, 안으로 들어가니 오페라 극장이나 중세 유럽의 성을 연상시키는 으리으리한 곳이 나와서 당황했다. 무대 앞에는 머리에 회색이 있는 중년 남자와 안경을 쓴 여자가 심사위원으로 있었다. 무대 옆에 대기실이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바이올린을 들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곳에는 사람이 많았고 저마다 연기할 악기를 든 채 거울을 보거나 했다. 얼마 뒤, 내가 받은 번호표의 번호가 들렸다. 17번. 누군가가 대기실 옆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심사위원 둘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참가번호와 오늘 연주하실 곡 말씀하세요.』 『참가번호 17번입니다. 오늘 니콜로 파가니니의 「La Campanella」와 히사이시 조의 「인생의 회전목마」 연주하겠습니다.』 콩쿠르는 1곡만 연주하는 게 원칙이지만 참가자가 원한다면 2곡 연주도 가능했다. 다만 심사위원이 충분히 들었다고 판단하면 연주를 중단하고 퇴장시킬 수도 있다. 『24세, 일반부 지원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일반부로 지원하신 거면 음악을 전공하셨겠네요?』 『네, 관현악과 졸업했습니다.』 『네, 그럼 들어볼까요.』 나는 곡을 시작했다. 「La Campanella」는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편곡한 것이 가장 유명하며 귀를 에는 듯한 소름 돋는 화음, 빠른 박자와 속도로 많은 바이올리니스트 지망생을 절망시킨 곡이다. 니콜로 파가니니에게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을 만든 곡이기도 하다. 또한 「인생의 회전목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대중으로부터 큰 성공을 거둔 곡이며 많은 음악가가 본인의 실력을 뽐낼 때 쓴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 곡들을 연주했고 그것이 끝났을 때, 안경을 쓴 심사위원이 탁자 위에 있던 종이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네, 좋았고요. 딱히 누군가가 어떤 점이 문제다고 집을 만한 실력은 아닌 거 같아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곡의 음정 박자가 원래보다 너무 빠르고 튄다는 점이에요. 아무튼 잘하셨습니다. 귀가하셔도 좋습니다.』 본선이 끝나고 나는 1층 밖으로 나가 편의점 앞에서 커피 한 병을 마셨다. 그때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는데, 소녀였다. 소녀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너도 빨리 끝났네? 심사위원이 뭐래?』 『마음에 드는데 음정 박자가 너무 빠르고 튄대.』 『야, 그거 교수님도 지적했던 거잖아. 아직도 안 고쳤어?』 나는 바이올린이 망가져서 이때까지 연습하지 못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소녀가 말했다. 『같이 햄버거 먹으러 안 갈래.』 『응.』 『안 간다고?』 『응.』 『왜?』 『그걸 먹으면 돼지가 되거든.』 『아, 내가 너 보고 저번에 돼지라고 한 거 마음에 담아두는 거야?』 『그렇지.』 『내가 그건 사과할게.』 어디서 꺼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정말 사과 하나를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 재미없었나.』 『아무튼 햄버거는 안 먹어.』 『너 살 진짜 많이 빠졌다. 키도 좀 큰 거 같고. 군대 갔다 와서 그런가.』 『나 군대 면제됐잖아.』 『왜?』 『아파서.』 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논의 끝에 초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그곳은 신기했다. 바닥은 새하얀 타일이었고 의자와 탁자도 죄다 희었다. 옆 테두리에는 화면이 하나 있었는데 먹고 싶은 초밥을 고르고 그곳에 카드를 꽂으면 결제와 동시에 초밥을 내온다고 했다. 나는 그 가운데 문어 초밥을 열 홉 주문했다. 소녀도 열 홉짜리 모둠 초밥을 시켰다. 소녀는 왜 문어 초밥을 열이나 먹냐고 물었고 나는 『그냥.』이라고 답해두었다. 내가 문어 초밥을 먹는 이유가 있다. 내게는 구름이 문어로 보여서다. 어린 시절 거미의 능력을 사용하는 영웅과 문어처럼 생긴 촉수를 가진 악당의 싸움을 다룬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이후로 문어에 빠져버렸다. 문어는 서양에서는 사악한 모습, 동양에서는 영리하고 점잖은 모습으로 묘사된다는데,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동양인들은 사람을 볼 때 눈을 먼저 보고 서양인들은 입을 먼저 본다던데 그것 때문일지도. 초밥이 나오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들고 입에 씹었다. 소녀는 일부러 예쁜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듯이 오물거리는 모습을 강조했다. 소녀는 다시 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근처에 있는 메가커피에서 아메리카노까지 한 잔씩 마시고 헤어졌다. 그녀는 연락처가 바뀌지 않았다면 다음에 또 연락하겠다고 했다.

결선에는 10명이 진출했고 나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입상은 3등까지.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나머지는 그냥 장려상으로 처리한다. 내 번호는 10번이었다. 솔직히 마지막이라고 해서 부담감이 좀 들었다. 차라리 7번이나 9번이었으면 이 마음에 덜 들었을 텐데. 무대 가운데는 피아노가 놓여있었다. 원래는 각자 악기를 선택해서 가져오는 게 원칙이지만 피아노는 사람이 들고 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무대에 그대로 둔다고 했다. 관객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그냥 인파가 있구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각자 자신의 기교를 자랑하는 곡을 가져왔고 곧 음악이 시작되었다. 콩쿠르는 일부러 어려운 곡을 선택해 자기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었고 쉬운 곡을 선택해 무난한 연주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녀는 「전쟁 소나타 6번」을 선택했는데, 피아노를 망가트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어려운 곡이다. 아무튼 4악장까지 그럭저럭 곡을 끝낸 그녀는 퇴장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악마는 내 팔을 붙잡고 나를 무대로 끌고 나왔다. 그때 관객석 앞에 앉아있던 심사위원 가운데 한 명이 마이크를 붙잡고 말했다. 『여러분, 원래 콩쿠르는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남들과 같은 조건으로 공연하는 게 원칙입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장애인은 일부 도움을 받는 걸 허용하고 있는데요. 지금 무대에 오른 이효민 악사는 정신장애 3급으로, 빛, 소음, 시선, 스트레스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 때문에 친누나의 도움에 따라 무대에 오름과 동시에 관객석을 보지 않고 뒤돈 채 연주하는 점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미리 이야기해 놓았던 부분이지만 막상 심사위원이 관객석에 대고 정신장애를 운운하니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악마는 나에게 허리와 가슴을 펴라고 말했고 나는 바이올린을 들었다. 나는 게임 「테일즈위버」의 배경음악 「Reminiscence」를 연주했다. 얼마 안 가 연주가 끝났고 사람들은 박수했다. 나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누나는 여전히 내 팔뚝을 잡고 있었다. 누나가 말했다. 『잘했어.』 심사위원의 점수 계산이 끝나고 곧 시상식이 일어났다. 언제 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시상대까지 구해와서 시상식을 시작했다. 곧 1등, 2등. 3등 이름까지 불렀다. 3등은 소녀였다. 「안재희」 재희는 웃으면서 트로피를 받았다. 자세히 보니 그 트로피에 뽀뽀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관객들이 박수하면서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한 심사위원이 마이크를 잡더니 말했다. 원래 순위권은 우수상까지지만, 이번 대회에는 특별한 참가자가 하나 있어서 주최 측에서 특별상을 하나 준비했어요. 이효민 악사?』 참가자 무리 사이에 있던 나는 내 이름이 들리자마자 놀랐다. 『저요?』 『네, 악사님의 곡에는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남들과 달리 관객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 연주자와 전혀 차이가 없는 멋진 곡을 연주했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마음에 변화를 느꼈답니다.』 나는 시상대 앞으로 갔고 곧 심사위원이 특별상이라고 적힌 표창장을 주었다.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보고 있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콩쿠르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재희와 누나는 내 뒤로 다가와서 특별상을 받은 걸 축하한다고 했다. 나는 고맙다고 했다. 표창장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고맙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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