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환취뽀

2023.09.28 01:4509.28

어느 스터디카페였다. 둥그런 테이블에 다섯 사람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 중 네 사람은 좌절하고 낙담한 표정으로 혹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유일하게 좌절도 의기소침도 하지 않은 사람은 수염이 덥수룩한 삼십대 중반의 남자였는데, 그가 나머지 네 사람의 기분을 북돋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다음번 공채에서 기대를 걸어봐요. 다음번엔 우리 모두 붙을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래서 아무도 위로받지 못했다.

“우리 모두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엔 다 잘될 거예요. 우리 노력이 전부 다 보상받는 날이 올 거라고요!”

이 말에는 다들 짜증이 났다.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 노력이 보상받아?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데? 이것보다 얼마나 더…….

“그래도 축하할 일 아니에요? 정연 씨라도 붙은 게…….”

삼십대 중반의 털보 남자, 진수가 이번에는 같은 스터디 멤버였던 정연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래, 그건 축하할 일이긴 해요. 그건 그래. 근데 정연 씨도 참 너무한 거 아니에요? 자기 합격했다고 톡만 띡 하고 남기고 단톡방을 나가버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예의가…….”

화장을 두텁게 했지만 아줌마 티를 감추기에는 역부족인 사십대 후반의 여자, 연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실 정연 씨가 음, 성격이 좀 그렇지. 안 그래? 이기적이랄까. 솔직히 다들 그렇게 느끼고 있었잖아?”

연진보다 일고여덟 살은 많아 보이는 통통한 아줌마, 수정이 팔짱을 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많이 도와줬죠. 처음 들어왔을 때 기억해요? 그렇게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취준생은 처음 봤다니까. 우리가 어렵게 알아낸 정보만 쪽쪽 빨아먹고……. 그러지 않았으면 D그룹에 합격할 수가 있었겠냐고.”

흡사 두더지를 연상케 하는 생김새의 오십대 초반의 아저씨, 정환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그래도…….”

진수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정연 씨 얘기는 그만합시다. 갈 사람은 가는 거고, 여기 남은 사람은 여기 남아 계속 하는 거고. 이게 다 감정소모예요. 그럴수록 우리만 괴로워. 무엇보다 집중도 안 되고.”

곧 환갑을 바라보는 인호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네 사람이 인호를 바라보았다. 마흔을 넘기면서부터 진행된 원형탈모로 인해 인호의 가운데머리는 아주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인호의 머리 위로 형광등 불빛이 내리비쳐 눈부시게 번들거렸다.

그렇게 2주에 한 번씩 만나 2주 간 공부한 걸 서로 체크해주고 중요한 취업 정보를 공유하는 취업 스터디 모임 <환갑 전에 취업 뽀개기>, 줄여서 <환취뽀>의 제 471회 정기 모임이 끝났다. 뒤풀이를 제안한 건 진수였다. 아무도 빠지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오늘 같은 날은 한잔해야겠지 싶었던 것이다.

실은 <환취뽀>의 멤버들은 모임을 가질 때마다 뒤풀이를 즐겼다. 종종 한두 사람이 아르바이트 등의 이유로 빠지곤 했으나 한두 사람이 빠진다고 해서 하지 못할 것도 없었기에 뒤풀이는 거의 매번 있어왔다.

2063년, 역노화(逆老化)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인류의 수명이 무한히 연장된 작금의 시대에, 몇십 년 간 지속되는 취준생 생활에 지치고 외롭지 않을 취준생이 있을까? 매일 마시는 것도 아니고 2주마다 한 번씩 만나 신세 한탄하는 자리조차 누리지 못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튼 그들 다섯 사람은 늘 가는 노가리집에 가서 노가리 두 마리와 맥주 다섯 잔을 시켰다.

스터디장으로서, 그리고 이제는 이 <환취뽀>를 이어가는 이유가 사실상 이 뒤풀이 자리에서 신세 한탄이나 하는 게 되어버린 인호가 익숙한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끙끙거리며 자기 무릎을 주물렀다.

“너희들은 건강관리 잘해야 한다. 건강관리가 곧 취업성공이라는 말이 있잖아. 십 년 전부터 무릎이 조금씩 쑤셔오더니, 이제는 십 분 걷는 것도 힘들다.”

“저도 오십 넘기고 나서는 금방 지치고 그러더라고요. 예전 같지가 않아.”

수정이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자신은 인호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수정과 인호는 고작 다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인호의 지금 모습이 곧 오 년 뒤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 오빠는 자기 나이보다 훨씬 더 폭삭, 아주 폭삭 늙어버렸어. 환갑이면 아직 팔팔할 나이 아닌가. 그러나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진작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노년을 모른 척했고, 남들도 몰라주기를 바랐다. 그녀는 누구 앞에서도 최근에 어쩔 수 없이 장만한 돋보기안경을 꺼내들지 않았고 아무리 불편해도 핸드폰을 ‘큰 글씨 모드’로 바꾸지 않았다.

“돈 아끼겠다고 라면만 먹지 말아요. 오빠 나이에는 먹는 것부터가 아주 중요해요. 영양제도 꼬박꼬박 챙겨먹고.”

연진이 잔소리하는 투로 말했다. 그녀는 최근 영양제를 챙겨먹기 시작했다.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요새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자신의 몸에 차곡차곡 쌓이는 이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서는 취업밖에 답이 없었다.

노가리는 빠르게 사라졌고 술도 빠르게 사라졌다. 기본 안주로 나오는 뻥튀기를 거듭 리필했고 리필하는 횟수가 느는 만큼 그들의 취기도 더해졌다.

“형님들 누님들, 제가 진짜 존경하는 거 아시죠? 솔직히 저요, 취준생 생활 이제 칠 년차인데요, 진짜 너무 너어무 힘들어요. 이 생활을 대체 몇 년을 더 해야 하는 거지? 이 생각에 숨이 턱턱 막힌다니까요. 근데 형님들 누님들은…… 꿋꿋이 하시잖아요. 벌써 십칠 년차, 이십 년차, 심지어는 삼십 년차를 앞두고 계시고……. 그래서 형님들 누님들 보면 진짜 대단하고 또 막 가슴속에서 존경심이 샘솟는데……. 그래서 제가 많이 사랑합니다. 제 마음 아시죠?”

진수가 침까지 튀겨가며 요란하게 말을 했다. 진수의 수염에는 노가리 부스러기와 하얀 맥주 거품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야 인마, 너 우리 놀리냐?”

정환이 안 그래도 작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진수를 노려보았다.

“아니이, 그런 말 아닌 거 아시잖아요. 제 말은요…… 그 인내심과 그 노력이 대단하다고요. 그게 정말…….”

“이 새끼 우리 놀리는 거 맞네.”

정환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놀리는 거 아냐. 쟤 원래 저래.” 수정이 담담히 말했다. “그냥 눈치가 없는 거야. 애는 나쁘지 않은 거, 정환이 너도 알잖아. 취했으니까 이제 재우자.”

진수는 술이 약했다. 그리고 취하면 어디서든 잠드는 주사가 있었다. 정환이 진수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래 그래, 그냥 자라. 응? 진수가 몇 차례 더 존경이니 사랑이니 함께여서 행복하다느니 중얼거리다가 이내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잠들었다.

“아무리 봐도 우리 먹이는 건데요.”

연진이 얼굴을 구겼다. 팔자 주름이 더욱 도드라졌다.

“아이고, 참 할 일도 없다. 그리고 먹이는 거면 또 어때. 쟤도 금방 우리 나이 될 텐데. 아니, 우리보다 더 늙을지도 몰라. 앞으로는 취업 연령이 더 높아진다고 하던데.”

수정이 쯧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래요? 이제는 환갑을 넘겨도 괜찮대요?”

정환이 눈치 없이, 그러니까 인호의 눈치도 보지 않고 물어보았다.

“요즘 추세가 그렇다고 하더라고. 좀 폭 넓게 본다나. 최근에 S그룹에 입사한 신입이 예순셋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수정이 슬몃 인호의 눈치를 살폈다.

“환갑도 봐주면 뭐, 이제는 고희에서 커트하려나요?”

정환이 계속 눈치 없이 말했다.

2063년, 역노화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수명이 무한히 늘어난 만큼 회사의 신입사원 티오도 비약적으로 줄어들었다. 기업은 유능하고 경험 많은 인재를 늙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작금의 시대에 퇴직이란 없었다. 그래서 다음 공채까지 몇 년이 걸릴지 아무도 몰랐다. 누군가 일을 못해 잘리거나 무슨 문제를 일으켜 잘리거나 할 때까지 오륙 년이 걸릴지 십여 년이 걸릴지 몰랐다. 그에 따라 취준생의 취준 생활 또한 비약적으로-마치 모짜렐라 치즈가 주욱 늘어나듯 늘어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인호처럼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취준생도 심심치 않게 생겨난 게 바로 이 때문이었다.

환갑은 일종의 상한선이었다. 회사 차원에서 ‘아무리 그래도 신입인데 그 나이는 좀…….’이라고 할 만한 나이가 바로 환갑이라는 것이었다. 무한 수명 시대에 사초생 연령 상한선이 웬 말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었다. 인호가 <환치뽀>를 창시한 십팔 년 전에도 현실이 그랬고, 그래서 스터디 모임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 스터디명을 <환취뽀>에서 <고취뽀>로 바꾸는 게 어떨까요? 우리 인호 형님, 좀 있으면 환갑이잖아. 형님, 환갑이 내년이었던가요? 아니, 올해인가? 암튼 <환취뽀> 창시자를 탈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정환이 제안했다.

“이놈아, 딴 게 먹이는 게 아니라 이게 먹이는 거지. 안 그러냐.”

인호가 정환을 지그시 노려보며 말했다.

 

벌써 칠 년 전이었다. 최종 면접까지 갔던 때가. 때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세련된 정장을 입고 목에 사원증을 건 이들이 도로로 쏟아졌는데, 모두 이십대 혹은 삼십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오십대가 주를 이루는-정확히 말해 사오십대의 얼굴을 한 이들이 주를 이루는 학원과 스터디카페, 독서실 등을 전전하던 인호에게는 매우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오늘 커피는 내가 쏠게. 열여덟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가 한 무리의 젊은이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 주위로 이십대 혹은 삼십대로 보이는 멋지고 예쁘고 괜히 쿨해 보이기까지 하는 젊은 남녀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얗고 고운 피부, 숱 많은 머리칼……. 그간 쌓인 노화를 완벽히 제거한 세포로 이루어진 이들에게 길이 막힌 인호가 작디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지나갈게요.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인호는 그들 사이를 헤집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냄새조차 불결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인호처럼 홀아비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인호는 자신이 불결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옷에 밴, 아니 이 옷을 벗고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하더라도 풀풀 풍길 게 분명한, 살갗과 살갗 안쪽의 늙고 병들어 쇠약해진 세포들에 깊게 배인 이 홀아비 냄새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이 냄새가 모두를 불쾌하게 만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새파랗게 어려보이지만 실제론 동년배이거나 그보다 나이가 많을 면접관 앞에서 말을 더듬고, 어처구니없는 실수까지 저지른 게.

인호가 고개를 저으며 칠 년 동안 곱씹어보았던 그때에서 벗어났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적어도 그의 시간은 그랬다. 인호가 짧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술자리 대화에 참여했다.

몇 가지 화제가 술자리를 오갔다. 아이유의 27번째 정규 앨범에 수록된 곡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노래 좋더라고요. 역시 아이유야.” “감성이 진짜…….” “근데 아이유가 몇 살이었더라.” “아마 일흔은 됐을걸요.”) 인호의 추천으로 모두들 재밌게 본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막내아들의 막내아들>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전작 <재벌집 막내아들의 막내아들>보다는 스토리가 탄탄하더라고요.” “송중기는 여전하더라.” “연예인이니 당연히 늙을 일이 없잖아.” “그러고 보면 가수나 배우 지망생 들은 우리보다 더 심각할 거예요. 거긴 아예 바늘구멍조차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대화의 말미에 다시 정연이 등장했다.

“그나저나 D그룹이면…… 가족들까지 다 역노화 프로그램을 지원받을 수 있지 않아요?”

정환이 물었다. 물론 그는 답은 알고 있었다.

“맞아. 걔는 부모님께 최고의 효도를 한 거야.”

수정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답했다.

“부럽다 부러워, D그룹이라니. 나도 효도하고 싶은데 차암.”

정환이 푸념하듯 말했다.

“그나저나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정연 씨는 젊어져 있겠죠? 우리는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이고…….”

연진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인호가 또다시 자기 내면 깊은 곳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번번이 서류 전형에서 탈락하는 패배자였다. 이제는 불합격 통보에도 속이 쓰리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 D그룹 공채에서 떨어진 건 타격이 컸다.

노화가 사라진 시대에서 그는 늙어 죽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쪽팔리게 늙어 뒈지더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됐었다.

결국 그를 달래주는 건 값싼 술뿐이었다. 그래서 연거푸 마셨다. 사실 오늘은 그의 생일이었다. 이제 그는 환갑이었다. 지금 이 술자리가 그의 환갑잔치인 셈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일에 대해 모두에게 비밀에 부쳤다. 하긴, 부끄러운 일이다. <환취뽀>의 창시자가 취업을 뽀개지 못하고 환갑을 넘기고 말았다.

“인호 형님, 이제 그만 마셔야 하는 거 아녜요? 형님은 그러다 죽어.”

술에 취한 정환이 큭큭거렸다.

“맞아요. 절제 좀 하시죠. 내가 다 무서워. 우리 오빠, 회사 면접관 앞에 서는 것보다 저승사자랑 면접 보는 게 더 빠를까봐.”

얼굴이 시뻘게진 연진이 히죽 웃었다.

“저승 가는 스펙은 차곡차곡 쌓으셨지. 일단 나이부터 합격이시고. 건강관리도 열심히 엉망이시고. 지금도 절제 못하고 알코올 충전 중이시고.”

수정이 깐깐한 의사선생님처럼 말을 했다.

“그만 좀 먹여라.”

차라리 혼자 마실걸, 생각하며 인호가 세 사람을 쏘아보았다.

저녁 아홉 시, 그날의 뒤풀이는 그렇게 끝이 났다. 더 마실 수 있었으나 다음날 모두 아르바이트를 나가야 했다. 연진은 식당 서빙 알바를 했고 수정은 카페 알바를 했다. 정환은 배달 라이더로 생활비를 벌었다. 인호는 마트 주차장 안내원으로 일했다.

인호가 곤히 잠든 진수를 들쳐 업으려 했으나 정환이 빼앗아 업었다.

“무릎도 안 좋은 양반이 또 무리하려고 하시네. 아, 그리고 앞으로 얘는 끼지 말자고요. 술만 좀 들어가면 꼭 이렇게 자버리는데 이거 어디 길바닥에 내다버리고 갈 수도 없고…….”

모두와 헤어지고 인호는 휘청휘청 걸으며 다섯 평 남짓의 자기 자취방으로 향했다.

성치 않은 무릎으로 언덕길을 오르며 인호는 다시금 정연을, 그리고 정연의 가족을 떠올렸다. 정연과 정연의 가족은 D그룹과 제휴를 맺은 병원에 가서 그가 그토록 갈망하는 붉은색 용액이 담긴 주사를 맞을 것이다. 붉은색 용액이 정연과 정연의 가족의 질긴 근육과 흐물흐물한 지방, 메마른 뼈와 삐꺼덕거리는 관절마디에 척 들러붙는다. 아주 잠시, 몸살이 난 것처럼 아플 것이다. 하룻밤만 견디면 됐다. 그리하여 그간의 불쾌한 세월을 죄 빨아들여 역겨운 탁한 푸른색으로 변한 용액이 땀으로 혹은 소변으로 그들 체내에서 빠져나가게 되면, 그들은 탱글탱글한 얼굴과 새것 같이 활기 넘치는 육체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리라.

D그룹은 그가 갔어야 했다. 그의 것이 되었어야 했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그러지 못했다.

 

-

 

인호의 집 앞에 익숙한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인호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도 환갑이라고 축하라도 해주러 온 건가. 차 운전석 문이 열리고 긴 생머리의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날렵한 동작으로 차에서 내렸다.

세련된 정장 차림의, 긴 생머리의 미녀가 인호를 노려보았다.

“전화도 안 받고 톡도 씹고……. 술 마셨니?”

인호가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긴 생머리 미녀가 그를 따라 원룸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흡 하고 참는 게 들렸다. 지독한 홀아비 냄새 때문이겠지. 인호가 헛웃음을 삼켰다. 자기도 그랬으면서. 자기도 이런 냄새를 풀풀 풍겼으면서. 아니지,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홀아비 냄새는 풍기지 않는다고 하던가.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것처럼 어떻게 자기가 그랬던 적은 까맣게 잊어버린 거지?

인호와 긴 생머리 미녀가 싸구려 식탁에 마주앉았다.

“왜 왔어?” 인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눈을 내리 깔아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눈치껏 오지 말았어야지. 옛날처럼 환갑이 잔치하는 날은 아니잖아? 특히나 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자살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인 날이라고.”

“그렇다면 그래도 다행인 날이네.”

“누님이 쳐들어오지만 않았어도 모르는 일이지. 지금쯤 밧줄 동그랗게 말아놓고 그 앞에서 근사하게 생의 마지막을 즐기고 있을지?”

인호가 내리 깐 눈을 들어 네 살 터울의 누나를 노려보았다.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오늘은 나에게 좀…… 아이고, 기념비적인 날이잖아?”

인호가 말했다.

“취업 연령 커트라인이 높아진다고 하더라. 사회적으로 말이 많고 또…… 그, 자살자수가 워낙 늘기도 해서……. 아무튼 정부에서도 기업에서도 좀 신경 쓰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이 누나 말은, 인호 너한테 몇 년 정도는 시간이 더 있다는 거야.”

인호의 누나가 타이르는 어조로 말했다.

“추세가 그런 건 나도 알아. 근데 그렇다고 내 나이가 환갑이 아닌 건 아니잖아. 내가…… 아니다.”

인호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래서, 이 누나나 우리 엄마 아부지 평생 안 보고 살 작정이야?”

누나의 말에 인호가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술기운이 완전히 달아났다. 그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십 년 전 M사에 입사한 인호의 누나는 젊었을 적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 M사는 기업 규모와는 다르게 사내 복지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사원 본인에게만 역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사원의 가족에게까지 그 혜택을 제공했다. 다만 문제는, 이 혜택을 1인 한정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십 년 전에는 이 1인 한정 혜택이 여든이 넘어 매우 쇠약해진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아버지는 이십대 혹은 삼십대 시절의 모습을 회복하진 못했다. 그래도 온갖 지병이 생기기 전인 사십대 중반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다시 트럭을 몰기 시작했고, 누나와 약속한대로 어머니를 잘 돌보셨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십 년마다 돌아오는 역노화 프로그램이 제공되는 시기가 다시 다가왔고, 누나는 주저 없이 아흔 살이 된 어머니를…….

그건 당연한 결정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결정이었다. 여전히 정정한 어머니였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 혜택이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게 맞았다. 비록 이번에 정권이 바뀌면서 85세 이상의 비(非)역노화 노인에게 무상으로 제공되기 시작한 ‘어르신 나이 제로’ 정책으로 하여금 일 년에 한 살씩 젊어져 오래도록 정정한 아흔 살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혜택은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게 맞았다.

그런데 그는 대체 왜 어머니에게 그런 못된 말을 쏟아냈을까.

“솔직히 말해서, 하나밖에 없는 동생 생일이라고 해서 여기 온 건 아니야. 엄마만 아니었어도 여기 안 왔어. 엄마가…… 엄마가 이거 전해주라고 해서 온 거야.”

누나가 싸구려 식탁 위에 붉은색 티켓 한 장을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인호는 그 티켓이 무엇인지 알았다.

“엄마가 안 하신대. 한사코 안 하신단다. 괜찮으니까 네 동생 챙기라고…….” 누나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치켜떴다. 눈물을 참는 모양새였다. “그러곤 엄마가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인호 네가 금방 좋은 회사에 취업할 거라고, 그래서 이 어미 손 꼬옥 잡고 그 역노화인지 뭔지 그거 시켜드리려 모시고 갈 거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하시더라.”

싸구려 식탁과 그 위에 올려 있는 붉은색 티켓을 사이에 두고 빛나는 원형탈모에 무릎이 성치 않은 환갑의 동생과 싱그럽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젊은 누나가 한동안 서로 다른 이유로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거기 적힌 병원으로 가면 돼. 거기서 하라는 대로 하면 되고……. 누나가 주는 게 아니라 엄마가 주는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해. 그래, 이제 머리숱도 다시 풍성해지겠고……. 아무튼 환갑, 축하한다.”

누나가 딱딱한 말투로 말하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로 가져가. 나 이거 못 받아.”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알아서 해. 엄마한테 드리든 네가 쓰든 네 마음대로 해.”

누나가 그의 집을 떠났다.

떠나기 전 누나는 이 말을 남겼다.

“일단 엄마한테 전화나 드려. 기다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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