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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짧은 나들이

2023.09.25 13:4809.25

사티의 짐노페디. 느린 피아노 선율이 한 음 한 음 심장을 때린다. 깊은 어둠 속에서 지구가 푸르게 빛난다. 그 푸르름에 눈이 시리다.

"우리, 영원히 여기 있게 되겠죠?"

"아마도."

다른 사람과 함께였다면 짐노페디도 나의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지만, 같이 음악을 들으면서 조용히 이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함께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그녀는 얼마 전 돔에 도착했다. 나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모른다. 다만 그녀가 아기와 함께 왔다는 사실만이 관심을 끌었다. 돔 안에서 그녀는 언제나 아기를 안은 채로 오가고 있었다. 마주칠 때마다 아기는 잠들어 있을 때도 있고, 깨어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녀의 아기는 그녀의 품 안에서 그녀만큼이나 조용했다. 아기를 제외하면 그녀는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 명의 돔 거주민이자 한 명의 직원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엄마였다. 돔에서 볼 수 없는 엄마라는 위치는 언제나 그녀를 특별하게 보이게 했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의 지난날을 보았다. 엄마로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시간. 인간이 달에 거주지를 짓고 살 수 있게 된 시대에도 우는 아기의 곁에는 엄마가 필요했다. 아기가 한 사람이 되기까지는 그저 지난한 시간의 흐름이 있을 뿐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부모 됨에 필요로 하는 인내심도, 체력과 정신력도 나에게는 모두 부족했다. 그래도 시간은 아이를 성장시켰고, 한 명의 인간을 길러냈다. 그 흐름이 나의 날카로움을 모두 무디게 만들 즈음 아이는 자신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를 과거에 묶어두고 아이는 자신의 미래로 나아갔다.


이제는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말의 뜻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이해의 시간이 오기 전에 어린 아기의 엄마는 쉽게 지친다. 아기를 안고 있는 그녀는 행복하고 만족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시간을 관통해 순간적으로 몰려오는 피로와 무기력함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저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자랄 것이고, 분명히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돔 안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그런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여전히 그녀가 아기를 안고 돔의 구석에 앉아 있던 날, 나는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하리 씨, 나랑 밖에 몇 시간 나갔다 오는 거 어때요? 아기는 손 선생한테 잠깐 맡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그녀의 시간을 지날 때 가장 필요로 했던 것, 엄마가 아닌 나 자신이 되는 시간을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가 스스로 아기를 놓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것은 힘든 일이니까.

"저는 아직 한 번도 돔 밖에 나가 본 적이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녀의 입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기대로 반짝였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기쁨이 느껴지자 이런 말이나마 건넬 수 있다는 것에 뿌듯해졌다.

"괜찮아요. 대단한 일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규정 때문에 두 명씩 나가야 하니까요. 이렇게 배우는 거죠."

"고맙습니다. 일정 알려주시면 손 선생님께는 제가 직접 얘기할게요."

왜 그녀는 아기와 함께 여기까지 왔을까. 아기에게 지구의 푸르름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달 위에서 아기와의 추억을 쌓고 싶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아기를 봐 줄 사람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이렇게 먼 곳으로 저렇게 어려운 걸음을 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개인적인 사정을 소소히 물어볼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니 이런 호기심은 그저 놓아둘 뿐이다. 본인이 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알아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아기를 맡기고 돌아오는 그녀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아기는?"

빈손의 그녀를 본 세현 씨가 물었다.

"손 선생님께 맡겼어요. 오늘 박사님이랑 밖에 나가거든요."

"아휴, 애기 걱정되서 괜찮겠어? 그래도 낯은 안 가리나 보네."

"그런 것 같아요. 손 선생님께 안겨서 웃더라고요."

발걸음만큼이나 가벼워진 그녀의 목소리가 복도 이쪽으로 돌아서던 내게도 반짝이 가루처럼 내려앉았다.


"미안해요. 기대하고 나왔을 텐데."

"음악이 경치랑 잘 어울리네요."

잠긴 내 목소리와 반대로 그녀는 봄바람을 맞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번에 하나씩 생각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겉모습으로는 그녀도 그런 사람 같다. 나도 한 번에 하나만 생각하고 싶지만, 보통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래도 겉으로는 그런 척을 한다. 그래야만 내가 편하니까. 한 번에 하나씩. 얼마나 편리한가. 인생이 그렇게만 간다면 괴로울 일도 없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최근에 돔 근처에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어 낸 운석 잔해를 찾는다는 이유를 댔다. 크레이터의 중심 쪽으로 나가 운석으로 보이는 돌을 찾아 로버에 싣고 온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뿐이고, 운이 좋다면 산소가 허락되는 한 나머지 시간은 마음대로 보낼 수 있다. 편도로 한 시간 반, 그곳에서 한두 시간 정도. 적당한 나들이 시간이다.


"이 우주복을 입어요. 로버가 어느 정도 공기와 온도를 유지하지만 그래도 나가면 추우니까."

"항상 이렇게 나가시나 봐요."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당신이 아기와 함께하는 그 시간처럼 말이다. 그날은 그녀가 달에 온 이래 돔 밖으로 처음 나가는 날이었고, 아마도 그녀의 아기도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진 날이었을 것이다. 산소통의 게이지는 94 프로. 산소통만으로도 거뜬하겠지만, 로버에도 산소가 있으니 이번 나들이에는 더 준비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출발했다. 나 역시 일을 핑계로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다. 한동안은.

크레이터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기한 듯이 로버의 옆에 난 작은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다가 잠깐씩 내 쪽을 돌아보며 눈치를 봤다. 괜찮다고, 처음엔 다 그렇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무안해할까 봐 차마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조금은 어색하지만 두근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도착한 곳에서 우리는 커다란 운석을 쉽게 찾아냈다. 달에 엄청난 충격을 주면서 자신도 똑같은 충격을 받았을 텐데 이렇게 온전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니. 지구라면 별똥별이라는 이름으로 다 타버리고 손톱보다도 작은 부스러기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기가 없는 달에서 운석은 엄청난 크기의 크레이터를 생성하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길가의 돌멩이처럼 놓여 있었다. 우리 둘이 움직이기에 너무 커서 운석은 사진만 찍고 돌아가기로 했다. 이걸 가져가려면 나중에 작정하고 장비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을 미루고 남는 시간을 마음대로 보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엄마 몰래 게으름을 피우는 듯한 은밀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나는 시간이 남은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그녀에게 제안했다.

"시간도 남는데 저쪽에 가서 경치 구경해 볼래요? 저쪽에 올라가 이쪽을 보면 돔 위에 지구가 걸린 모습이 보일 것 같은데."

"그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멋지겠어요!"

달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을 보기 위해 로버를 타고 크레이터 옆의 언덕을 올라갔다. 거의 다 올랐을 때쯤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로버가 들썩였다. 벨트 덕에 밖으로 튕겨 나가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헬멧에 세게 부딪혔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머리를 문질렀지만, 손은 무의미하게 헬멧을 문지를 뿐이었다. 로버가 뒤집히지 않은 게 다행인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진인가? 놀란 그녀와 나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이게 뭐죠?”

그녀에게 대답할 겨를도 없이 나는 먼저 통신기를 켰다. 헬멧 속으로는 지직거리는 잡음만이 울려왔다. 충격으로 통신기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잠시 기다렸다가 더 이상의 충격이 없어 일단 로버 밖의 통신기와 안테나를 살폈다. 다행히 그쪽에는 별문제 없어 보였다. 나는 다시 로버로 들어와 통신기를 켜 봤지만 어떤 신호도 잡히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상 통신 설비를 찾았다. 부산하게 오가는 나를 보며 그녀는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고장이 났나요?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아, 괜찮아요. 충격으로 통신기에 문제가 생긴 거 같네요.”

그녀가 걱정스럽게 하는 말에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대답하며 비상 통신 설비를 작동시켰지만, 그쪽에서도 지직거리는 소리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전파가 안 잡히는 것 같네요. 일단 올라가서 다시 봐야겠어요.”

통신 장비가 전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약간 불안해졌지만, 한 시간 반도 안 걸려 돌아갈 수 있다는 계산을 하며 로버를 언덕 위로 끌고 올라갔다. 그 위에서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평선 끝에는 느린 속도로 가라앉고 있는 먼지와 함께 거대한 크레이터의 가장자리가 보였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쪽 너머 어디에선가 밝게 빛나고 있어야 할 돔은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였다. 절실한 마음으로 주파수를 바꾸며 통신을 시도했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히 돔이 있어야 하는 방향에는 처음 보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있었다. 너무 많은 현실이 쏟아져 들어왔다. 돔은 무사한가?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까? 모든 것이 사라졌으면 나는 어떻게 하지? 머리가 터지게 계산을 돌리면서 돌아본 순간 멍하니 지평선을 바라보는 그녀가 눈에 잡혔다. 순간 그녀의 아기가 떠올랐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에서 반짝이는 눈물이 넘쳤다. 나는 그 눈물을 끝까지 볼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조용히 그녀와 함께 하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로버에 앉은 채로 차갑고 푸르게 빛나는 지구와 그 밑으로 돔이 있었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돌아갈...... 수 있을까요?"

달의 저 너머로 빨려 들어가던 나의 영혼을 그녀의 잠긴 목소리가 잡았다.

"글쎄."

간신히 대답하고는 무의식적으로 산소 레벨부터 점검했다. 로버에 45 프로, 산소통에 52 프로. 우리가 밖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하다 문득 이 순간 나에게 남은 산소가, 남은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지금, 현재 외에는 과거도, 미래도,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이 순간에 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었다. 돔으로 돌아가거나, 여기에 머무르거나. 돌아가는 것은 실낱같은 희망이 무거운 실망으로 바뀌는 경험만을 선사할 것이었다. 누군가 살아남았더라도 파괴된 돔은 지구에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그 생명을 유지해주지 못할 것이었다. 우리 둘이 마지막을 맞이하느냐, 더 많은 사람이 함께 마지막을 맞이하느냐 하는 차이만이 있을 뿐. 이런 생각들로 우울하던 차에 갑자기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눈물 어린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짧은 나들이네요. 그래도 굉장히 기억에 남겠어요."

내가 그녀를 위로해 주어야 할 것 같은데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마음이 아팠다. 이 나들이도, 사라진 돔도, 저 어둠 속에 잠겨버린 당신의 아기도.

"사실 달에 혼자 오고 싶었어요. 가볍게 몸만 오고 싶었죠. 그렇지만 그렇게 하질 못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제한적이다. 왜 그랬는지 과거의 나는 알고 있을까? 현재의 나는 알지 못한다. 미래의 나는 알게 될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지금, 이 공간에 그녀와 내가 함께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밖에 나올 때면 들으려고 항상 가지고 나오는 음악이 있는데. 피아노곡 좋아해요?"

사티의 짐노페디 1번. 피아노 음들이 고요의 바다 위로 빗방울처럼 내려온다. 느리고 비통하게(Lent et douloureus). 심장을 때리는 음 사이로 지구가 생명의 푸른 색으로 빛난다. 짐노페디와 함께 이곳에 갇힐 우리의 영혼은 저 생명의 푸른 빛 속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순간, 혼자가 아니어서, 이렇게 함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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