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적그리스도

2023.09.18 11:3509.18

1

 

미영은 가까워지는 웃음소리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성탄 전야가 되자 모텔은 평소와 다르게 투숙객으로 붐볐다. 원래 그들이 묵고 있는 5층은 일명 달방으로 오갈 데 없는 처지들이 한 달 간격으로 그들의 거처를 연장하는 곳이었다. 싸구려 방향제와 퀴퀴한 먼지 냄새, 벽 속에 스민 지 아주 오래된 체취가 주머니 속의 구겨진 지폐처럼 그곳을 볼품없게 했다. 미영은 복도에서 손님을 안내하는 사장의 웃음소리에서 돈독이 잔뜩 오른 기색을 느꼈다. 오늘이라면 이런 곳이라도 값을 두 세배 부른다 한들 정욕에 눈먼 연인들이 값을 치르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아기가 종일 칭얼대다 그녀의 품에서 막 잠든 참이었다. 그녀는 아기를 침대에 누이고 아토피로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에 바르기 위해 침대맡에 놓인 연고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말라비틀어진 잎사귀 같은 알루미늄 연고 용기는 세게 쥐어짜도 주둥이에서 아무것도 뱉어내지 못했다. 그녀는 용기를 가위로 잘라 검지로 속을 후빈 후 묻은 약간의 연고를 아기의 등에 곱게 펴 발랐다. 그러고는 갈라진 뱃속을 내보이는 연고를 바라보다가 벽 전체에 스멀스멀 퍼져있는 검은 곰팡이를 눈으로 천천히 훑었다. 곰팡이가 끝나는 벽의 가장자리에서 고개를 멈춘 그녀에게 희미하게 캐럴이 들렸다. 빠끔히 창문을 열자, 경쾌한 리듬이 한층 선명하게 들려왔다. 두어 소절 작게 따라 부르던 그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주기도문의 한 토막을 반복해서 외웠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

성탄절 탓인지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별이 트리의 장식처럼 촘촘히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녀는 영롱한 반짝임에 매료되어 잠시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다 찬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그 순간 옆방에서 여자의 교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낡은 침대가 쉴 새 없이 삐걱대는 소리와 여자의 교성이 뿜어내는 분수처럼 솟아오르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벽이 작게 흔들렸다. 원래 창고였던 곳을 불법 개조하면서 세운 얇은 합판 벽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아기가 발작하듯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녀가 급히 공갈 젖꼭지를 입에 물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자지러지는 울음이 계속되자 벽 너머의 움직임이 멈추며 짜증을 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거 아기 울음소리 아니야? 시팔 분위기 깨지게.”

사장을 호출하는 격한 남자 목소리가 들린 후 복도에서 그가 호되게 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도 아기는 울음을 그칠 기색이 없었다. 미영이 아기가 가장 좋아하는 유니콘 모빌을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자 그제야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가 진정했다.

아줌마!”

사장이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손으로 두드려도 답이 없자 부실 듯 발로 문을 차는 굉음이 함께 들렸다. 미영은 아기를 침대에서 들어 바닥에 누이고 두 귀를 자신의 손으로 막았다. 망치 같은 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때렸지만, 그녀는 아기의 귀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자장가를 부르듯 아기에게 말했다.

엄마 눈만 바라보렴. 아가, 엄마 눈만.”

여러 번의 고함에도 미동이 없자 사장은 오기가 발동한 듯 열쇠 꾸러미에서 비상키를 찾아 문고리를 돌렸다. 그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으나 반 뼘 정도 열었을 때 걸쇠에 걸려있는 도어체인 때문에 문이 걸려 열리지 않았다. 틈 사이로 사장의 손가락이 도어체인을 풀기 위해 꼼지락거렸다.

아줌마!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 문 빨리 안 열어? 진짜 죽여 버린다.”

미영은 금방이라도 체인이 끊어지고 모텔 사장의 우악스러운 손에 자신의 머리채가 휘어잡힐 것만 같았지만 숨죽이고 버티는 것 말고 달리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장은 약이 오르는 듯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지른 후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난데 야스리하고 뻰찌 좀 가지고 5층으로 올라와라. 체인 잘라버리게.”

미영은 아기의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겨울의 거리를 배회한 적이 있어 그곳의 혹독함을 알고 있었다. 아기가 버틸만한 곳이 아니었다. 위협하는 사장의 목소리가 점점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주기도문의 한 토막을 반복해서 외웠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

그 순간 반 뼘쯤 열려있던 문이 빨려들 듯 닫혔다. 그녀는 겁에 질린 채 현관 상황을 주시했다. 잠시 희미하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금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뼈가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는. 모텔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중한 움직임이었다.

안에 계시면 문 좀 열어보시겠습니까?”

공명이 있는 음색이 닫힌 문을 넘어 미영에게 다가왔다. 부드러우면서 친절한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무력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 저기 아줌마, 문 좀 열어봐요.”

사장이 잔뜩 움츠러든 목소리를 냈다. 그는 마치 높은 사람의 수행원이 다급하게 외치듯 그녀에게 문을 열 것을 간청했다. 미영은 주뼛대며 조심스럽게 도어체인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한사람이 서 있었는데, 목소리에 걸맞은 용모였다. 흰 피부 위에 검은 안경이 가지런히 자리 잡은 얼굴에 말쑥한 감색 정장을 입고 머리는 단정하게 가르마를 타서 뒤로 넘겼다. 십자가 모양의 도금 넥타이핀이 검정 넥타이를 배경으로 도드라지게 번뜩이며 시선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녀가 말쑥한 외모와는 별개로 안경 너머에서 맹금류와 같은 안광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혼란스러웠는데 그것은 이곳을 둘러싼 비참한 냄새와는 다른 형태의 위협 때문이었다. 불가해한 위압감이 그녀를 위축시켰다. 그의 양옆으로 중년남성 두 명이 동행하고 있었고 보디가드인 양 체격이 상당했다. 그중 한 명이 상의 안 주머니에서 동그랗게 말려진 지폐 덩이를 모텔주인에게 건넸다. 그는 잽싸게 그것을 받고는 객쩍은 말 몇 마디와 함께 서둘러 복도를 빠져나갔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의 말은 나긋하면서도 완강했다. 설령 부탁을 말하더라도 명령으로 둔갑할 만한 기운이 그 안에 있었다. 더군다나 조금 전 돈뭉치를 건넨 건장한 사내들이 그녀가 거절한다손 치더라도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어색한 동작으로 그들을 안으로 초대했다. 방 안에 들어온 그들은 먼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아무 말도 없이 꽤 오랫동안 석상처럼 기도한 후에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불안한 기색으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있던 미영에게 말쑥한 정장이 말했다.

남자아기지요?”

미영은 난데없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평범한 질문 뒤의 낯선 이질감이 그녀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무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쁜 소식을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성함이?”

김미영이요.”

저는 유다 선교회의 최요셉입니다. 미영 씨는 신을 믿고 있나요?”

미영은 악착같이 외웠던 주기도문이 입술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손끝으로 침대맡에 펼쳐진 성경을 가리키자, 요셉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스도께서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다시 이 땅에 오시는 날이지요. 유다 선교회는 재림 하실 그리스도를 섬기는 단체입니다. 복잡한 교리 내용은 차차 설명하는 것으로 하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오늘 이 자리에 그리스도가 계실지도 모릅니다.”

잠깐만요,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요셉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평범이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굴리듯 반복적으로 발음했다. 그러면서 창가로 다가가 밤하늘 사이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에 유독 화려한 밤하늘의 별들이 걸려있었다.

이 자리에 우리가 모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제가 수백, 혹은 수천 개가 될지도 모르는 도시의 모텔에서 미영 씨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정녕 우연처럼 느껴지십니까? 이것은 신의 역사란 말입니다.”

그는 마음이 동요되는 듯 격양된 목소리로 말하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다시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미영 씨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아주 중요하고 오직 진실만을 요구하는 답변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질문의 끝에서 그녀는 섬뜩한 기시감과 맞닥뜨렸다. 한겨울이었고 몸에서 하얀 김이 펄펄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옆에서 남자의 주먹에 맞은 엄마가 얼굴을 감싸 쥐며 쓰러졌다. 그 뒤로도 발길질과 매질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목이 졸린 짐승 같은 소리가 났다. 남자는 술에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행위는 오락이나 운동에 가까웠다. 미영이 임신기미를 느끼고 공포에 질린 나머지 병원을 찾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촌구석 읍내의 진료소장은 그녀의 비행을 마을 유지였던 그에게 보고했다. 부끄러움이 새어 나가기 전에 덮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그는 마당 한가운데 그녀를 세워두고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끼얹었다. 물기가 그녀의 머리를 타고 바닥에 떨어질 동안 자식의 죄를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은 그녀의 엄마였다. 미영은 무력하게 서서 물기와 땀과 눈물이 구분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허수아비처럼 맞기만 하던 엄마가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놈의 집구석은 아비 모르는 자식 낳는 게 내력인가?”

머리채를 잡힌 채 주먹에 입술이 터지면서도 엄마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이제는 더 이상 안 돼. 저 애도 이제 홑몸이 아니란 말이야!”

미영은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이 볼품없이 구겨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문 옆에 세워둔 나무 빗자루를 집어 들고 엄마에게 달려들었다. 빗자루를 휘두를 때마다 공중을 가르는 바람 소리와 마른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어느 순간 미영은 가슴속에서 팽팽한 것이 닳아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평상에 놓인 남자의 지갑을 낚아챈 후 집 밖으로 혼신을 다해 뛰었다. 하지만 집이 있던 골목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녀가 볼썽사납게 땅바닥을 구르며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지갑의 묻은 흙을 털고서 지폐 몇 장을 땅바닥에 흩뿌렸다.

너는 끝까지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구나.”

골목을 들어서던 이웃 아낙 몇 명이 미영과 남자를 발견하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남자는 그들에게 다가가 지갑을 가리키며 뭔가를 설명했고 그들은 별것 아닌 일이라는 듯 안심하는 표정과 함께 작게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미영을 보는 그들의 눈빛에 그녀는 멍하니 자리를 일어나 조금씩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뛰었을까. 그녀는 거친 숨소리 사이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를 환청처럼 들었다.

꽤 시간이 지났지만, 미영은 요셉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집에 들어가기 죽기보다 싫었던 그녀였다. 남자가 잠든 후에 집에 들어가 옷가지만 챙겨 나오길 여러 번이었다. 그날도 집에 불이 꺼지길 기다렸다가 친구 집으로 향했다. 그날은 풀밭에서 들리던 이름 모를 벌레의 울음소리도, 바람에 나무와 꽃잎이 스치며 내는 소리도 없었다. 어둠 안에서 모든 것이 숨죽인 밤이었다. 이질적인 발걸음 소리가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고 그녀는 앞에 보이는 가로등을 향해 힘주어 걷다가 이내 뛰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라 발소리가 거칠게 들리기 시작했지만 두려움에 돌아볼 수 없었다. 그저 환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 있다면 안전할 거라는 막연한 희망만을 생각했다. 그녀가 가로등을 목전에 두기 직전 세상이 기우뚱하게 기울어졌다. 생경한 경험에 그녀는 잠시 멍한 상태로 있다가 이내 곧 머리에서 흐르는 뜨끈한 것에 정신을 차렸다. 익숙한 냄새였다. 엄마의 핏자국에서 맡았던 신경을 마비시키는 냄새. 그 냄새만 맡으면 마당에서처럼 사지가 무기력하고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몸이 우거진 덤불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혼절했다. 다시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이후 경찰조사에서 그녀는 그날의 기억을 복기하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녀가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날은 유독 조용했다는 것과 노르스름했던 가로등 불빛과 덤불을 스치는 소리, 그리고 자기 몸에 올라탄 비릿한 짐승의 땀 냄새였다. 기억은 칼로 도려낸 듯 예리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남아있는 확실한 것은 조금씩 배가 불러오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제 대답해 주시죠. 아기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요셉의 입에서 소리가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왔다. 미영은 피리 부는 사나이를 앞에 둔 것처럼 몽롱함을 느끼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침대에서 꼼지락대는 아이의 등과 배에 화상같이 퍼진 아토피, 말라 죽은 식물처럼 뒤틀려 있는 연고 용기, 그리고 새까맣게 피어오른 곰팡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깨달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배가 불러왔습니다.”

요셉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숲속을 산책하다 황금을 찾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를 따라 뒤에 있던 남성들도 그녀와 아기 앞에 무릎을 꿇고 곧이어 감격스러운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재림하신 그리스도께 경배드립니다.”

 

2

 

자욱한 안개로 세상은 온통 회색 천지였다. 미영은 뒷좌석 차창을 통해 지금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위치를 알 수 있는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안개 속에 반쯤 묻힌 나무와 축축한 습기가 희붐하게 공중을 떠다니는 것이 풍경의 전부였다. 그녀가 밖을 바라보는 것을 포기한 후에도 자동차는 안개에 둘러싸인 한적한 도로를 한참 달렸다. 기이하게도 녹음이 짙어지는 곳으로 들어설수록 표지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은 없었고 대신 사람들이 모두 흰옷을 입고 풀밭에 모여 환하게 웃고 있는 이미지와 구름 위에서 무리 지어 있는 군중 가운데 빛나고 있는 인영 밑으로 유다 선교회라는 글자가 도드라지는 것들이었다. 미영은 지난밤 요셉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알고 있던 기독교 교리와 너무나 동떨어진 내용에 강한 거부감이 들었지만, 아이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자동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멈춰 섰다. 자욱한 안개를 머금고 중세 성문을 연상시키는 쇠 창살문이 입을 벌렸다. 자동차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미영은 바깥을 두리번거리며 그녀와 아기가 맞이할 곳을 확인하느라 여념 없었다. 때마침 자갈이 깔린 진입로에 서 있는 요셉이 보이자, 그녀는 익숙한 얼굴에 긴장한 마음이 다소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는데 양옆으로 간호복처럼 생긴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들이 두 손을 모으고 도열해 있었다. 차가 완전히 정차하자 여인 중 한 명이 뒷좌석 문을 열고 공손하게 옆으로 비켜섰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미영은 난생처음 받는 환대가 어색해 발바닥이 반 뼘 정도 공중으로 뜬 기분이었다. TV에서만 보던 것들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 기분은 안개를 헤치고 요셉과 걸어가다 그 모습을 드러낸 건물에서 절정을 이뤘다. 이층으로 지어진 대리석 건물은 가운데 돔을 중심으로 매끈한 기둥들이 가지런히 서 있었고 그 사이로 정원수들이 보기 좋게 손질되어 있었다. 가운데 유리문을 중심으로 창문과 조각상을 비롯해 모든 것들이 좌우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보는 이를 압도하는, 흡사 그녀가 어렸을 적 견학 갔던 국회의사당에서 느꼈던 웅장함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건물에 다가서며 이곳이 자기 집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이곳이 이제부터 그녀와 아이가 살 집이었다. 뱃속부터 웃음이 끓어올랐지만, 그녀는 소리 내어 웃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미영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요셉을 따라 긴 복도를 지나 들어간 방에는 자신과 꼭 닮은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출산 후 부기가 빠지지 않은 모습으로 품에는 꼬물거리는 아기를 안고 있었다. 요셉은 비어있는 방석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방석은 잠시만 앉아도 엉덩이에 금칠이 묻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가 앉자, 요셉과 그를 따라온 다섯 명의 여성은 그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여러분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유다 선교회는 아주 오랫동안 루시페르의 빛이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인도할 것을 믿으며 기다려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밤 신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독생자를 맞이하라 명하셨습니다.”

요셉은 양손으로 우아하게 청중들을 가리키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하지만, 곧 우리는 신께서 마지막 시련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이곳에 앉아있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는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다만 우둔한 인간은 아직 앞에 계신 다섯 분 중에 누가 진정한 구원자인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영적인 시험을 통해 앞으로 벌어질 환난 전쟁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사탄마귀의 권세를 깨트릴 구원자를 찾길 원합니다.”

요셉의 말이 끝나자, 옆에 서 있던 여인들의 입에서 아멘이라는 소리가 추임새처럼 나왔다. 여자들은 어리둥절하거나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주위의 얼굴들을 조심스레 훔쳐보기 바빴고 미영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시험은 총 세 가지이며 이 과정을 통해 진실한 믿음의 무게를 잴 것입니다. 만약 시험을 원치 않는다면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셔도 좋습니다.”

요셉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들은 몸을 주뼛댔지만 실제로 걸어서 문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 더 지나자 다들 서로의 눈을 피하며 누군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주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미영 역시 남모르게 아기를 안은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 포기하기에는 너무 화려한 자리였다. 요셉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시험은 이 주 후에 시작될 예정입니다. 그동안 뒤에 있는 수행원들이 여러분이 생활하시는 데 필요한 편의와 지켜야 할 규율에 관해서 설명할 겁니다.”

 

3

 

맛있게 드십시오.”

그녀에게 배정된 수행원이 공깃밥 뚜껑을 열며 말했다. 윤기가 흐르는 쌀밥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거기에 더해 참기름 냄새를 품은 미역국과 나물, 갈비의 단내가 식욕을 자극했다. 그녀가 첫술을 입에 가져가는 사이 수행원이 아기를 침대에 정성스럽게 누이고 오일을 병에서 손에 덜어 전신에 펴 발랐다. 미끈거리는 감촉에 아기가 까르르 웃자, 수행원이 미간을 찡긋하며 맞장구쳤다. 미영은 그 모습을 보면서 바쁘게 수저를 움직였다. 이곳에 들어온 후로 식욕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 저녁상을 들인 뒤 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부탁한 식사였다. 식사하는 그녀의 눈에 오일을 바르는 아기의 등과 배에서 아토피가 눈에 띄게 가라앉은 것이 보였다. 그녀는 아기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넓적한 갈비뼈에서 고깃점을 집요하게 물어뜯었다. 식사가 끝나고 오일로 번들거리는 아기를 강보에 싸서 미영에게 돌려준 뒤 수행원은 식기가 담긴 쟁반을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가 곧 다시 들어왔다.

기도 시간입니다.”

미영이 침대에서 내려와 서자 수행원이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풍성한 드레스는 정교하게 새겨진 꽃무늬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순백이었다. 나신이 된 미영 앞에 수행원이 가져온 것은 완벽하게 똑같은 드레스였다. 하루에 세 번, 기도 시간이 되면 항상 그녀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기를 안고 복도를 걸어가는 그녀 앞에 수행원이 길잡이 하듯 앞장섰다. 긴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를 냈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몇 시간 후면 새 옷이 그녀 앞에 나타날 것이다. 앞서가던 수행원이 걸음을 멈추고 문을 연 채로 그녀를 기다렸다. 미영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와 동일한 복장의 여자들이 요셉을 마주 보며 둥근 원형의 형태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마치 다섯 명의 신부가 한 명의 신랑을 맞는 것처럼 긴장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이미 방 안에 있던 수행원 중 한 명이 그녀에게서 아기를 건네받아 금으로 치장된 화려한 요람에 누이는 사이 그녀는 비어있는 방석에 앉았다.

기도하겠습니다.”

요셉의 말에 그녀는 잠수하듯 깊은숨을 삼켰다. 이제 다시 그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 눈을 떠서는 안 된다. 미영을 포함한 여자들이 가장 먼저 들었던 규율이었다. 첫 번째 기도 시간, 미영은 규율을 위반했다.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지러지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여러 명의 울음이 포개진 소리에서 단박에 자신의 아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필시 아토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칠 기색 없이 점점 격렬하게 변해가고 어둠 사이로 온갖 것들이 떠올랐다. 기이한 일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그녀가 눈을 뜨려고 해도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만 할 뿐 요지부동이었다. 기도 중에 절대 눈을 뜨면 안 된다는 명령이 그악스럽게 그녀의 눈꺼풀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뜨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눈꺼풀은 빗장이 걸린 창문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계속되는 와중에 난생처음 겪는 현상에 영원히 눈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밀려오자, 목구멍에서 토하듯 울음이 올라왔다. 미지근한 눈물이 눈꺼풀 새로 스며들어서야 간신히 틈이 느껴졌다. 그녀가 눈을 뜨자 수행원이 말없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문으로 향했다. 미영은 문을 향해 걸어가며 남아있는 여자들의 표정을 살펴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불덩이를 삼킨 듯 몸을 부르르 떨거나 도리질하며 허공에 손을 내젓고 숨죽여 울었다. 그녀는 다음날이 돼서야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무게를 깨달았다. 그녀의 주위에 수행원이 보이지 않았다. 식사와 하루에 세 번씩 갈아입을 것이라 말했던 옷을 받지 못했고 기도 시간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아이를 안은 채 정적이 감도는 거대한 저택을 배회하던 미영은 마치 자신이 달리기 경기에서 늦게 출발한 선수인 양 느껴졌다. 조급함이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 같이 그녀를 괴롭히는 동안 덩그러니 비어있을 화려한 요람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미영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기도를 시작한다는 요셉의 말은 그녀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떨게 했다. 기도가 되풀이될수록 공포에 저항할 것이 필요했다. 그녀는 경쟁자들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속수무책으로 두려움이 밀려올 때면 그녀는 여자들을 찬찬히 떠올렸다. 눈가에 커다란 점이 있는 중년의 점박이, 커다란 눈에 옆에서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왕눈이, 무뚝뚝하고 매정하게 생긴 코주부, 그리고 여우처럼 간사하게 생긴 소희.

그녀가 처음으로 온몸이 비틀리면서도 요셉의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눈을 뜨지 않는 날이었다. 소희가 그녀에게 알은체했다.

언니, 신림동 진석오빠네 집에 잠깐 있었었죠? 저 소희예요. 거기 같이 있었는데 기억 안 나세요?”

글쎄요, 저는 기억이 없네요.”

미영은 속으로 뜨끔하면서도 완강히 부정했다. 그날 무작정 집에서 나온 뒤 미영의 손에 있는 지폐로는 이틀도 견딜 수 없었다. 한겨울의 거리를 배회하던 그녀에게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다가와 몸만 오면 재워준다는 곳으로 찾아갔다. 담배 냄새와 욕설로 가득한 그곳에서 그녀는 대장 노릇 하던 진석의 품에 인형처럼 달라붙어 있던 소희를 기억했다.

저기 있는 애도 틀림없이 그놈의 애새끼겠지. 무슨 거짓말을 해서 여기까지 온 줄 모르겠지만 이런 하찮은 애한테 미래를 빼앗길 수는 없어.’

그녀는 머릿속에서 여자들을 마음대로 끌고 다니며 그녀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죄인들에게 수많은 형벌을 집행했다. 목을 조르고 머리를 박살 내고 숨 쉴 수 없도록 고개를 물속에 처박고 발버둥 치는 사람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었다. 마지막에는 힘없이 나뒹구는 시체들을 모아 구덩이에 넣고 불을 질렀다.

시발년들아, 불맛 좀 어떠냐. 너희 주제에 감히 어딜 넘봐. 다 생각 없이 싸지른 애새끼들 데리고 팔자 한번 고쳐보려는 것 같은데 어림없지. 어쩔 수 없었던 나와 너희는 엄연히 처지가 달라. 이 자리는 내 아들 거라고 이 개 같은 년들아!”

그만 눈을 뜨십시오.”

시체들이 타오르는 불길을 뒤로하고 미영은 눈을 떴다. 뒤미처 들개처럼 헐떡이며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그녀는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몰래 품은 적의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온몸이 땀에 푹 젖어있었다.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점박이는 통곡했는지 기도가 끝났음에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왕눈이는 얼이 나간 듯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었다. 코주부는 땀 범벅된 얼굴로 눈만 껌뻑거렸다. 소희만은 용케도 제정신으로 보였는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미영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격한 운동을 같이 끝낸 사람이 건네는 인사 같은 양이었다. 미소를 보는 순간 미영은 알 수 없는 모욕감에 휩싸이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별안간 요셉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소리가 순식간에 여자들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마치 주인 앞에 놓인 사냥개처럼 여자들은 헐떡이며 일제히 요셉을 쳐다봤다.

시험을 치를 준비가 끝난 것 같군요.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그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보이지 않는 목줄을 조이는 것처럼 팽팽했다.

 

4

 

미영은 창을 통해 날이 밝아오는 것을 지켜봤다.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커튼을 매만지며 먼 훗날 행복한 나머지 권태로워져 긴장했었던 이 순간을 그리워할 날이 있을지 상상했다. 동시에 시험에서 탈락해 하루하루 아이와 함께 어디로 가야 할지 걱정하는 자신의 모습도 머릿속을 헤집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 더 풍경을 바라보다 찬물로 샤워하고 수행원을 불러 아침 식사를 넉넉히 먹었다. 넘어가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삼키며 그녀는 어떤 희생을 하던 아기에게 자신처럼 불안정한 미래가 아닌 보장된 미래를 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설령 그것의 대가가 그녀의 목숨이라 할지라도.

정오가 되자 수행원이 그녀에게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그녀가 아기를 안고 방을 출발했다. 평소와 다르게 수행원은 건물을 벗어나 사방이 트인 공터로 그녀를 인도했다. 그곳에는 나무 기둥을 땅에 박고 사이에 흰 천을 연결하여 벽을 만든 직사각형 모양의 장막이 보였다. 장막의 높이는 이 미터를 훌쩍 넘어서 밖에서는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입구에 다다르자, 수행원이 그녀에게서 아기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들어가셔야 합니다.”

미영이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어른 가슴 높이의 널찍한 탁자가 보였고 그 뒤로 놋으로 만든 화로와 큰 대야처럼 생긴 물두멍과 온통 검은 천으로 덮인 목조건물이 일렬로 서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그녀 뒤로 여자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전원이 모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왕눈이가 별안간 비명을 지르며 땅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녀들이 들어온 곳에서 무언가가 불쑥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돼지였다. 뽀얀 살색의 랜드레이스 품종으로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장막 안에 들어오더니 땅에 코를 박고 사방을 어슬렁거렸다. 모두의 눈에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할 때 요셉이 가죽 두루마리 같은 것을 가슴에 품고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와 계셨군요.”

그의 복장은 평상시의 정장 차림이 아닌 그녀들과 같이 발끝까지 내려오는 흰색 의복에 갈색 가죽 허리띠를 매고 천으로 만든 뾰족한 모자를 쓴 모습이었다. 그는 여자들을 부른 뒤 잠시 기도한 후 말했다.

첫 번째 시험으로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해 오심을 감사하는 의미로 번제燔祭를 드리고자 합니다. 전통적으로 양이나 소, 비둘기 같은 가축을 사용하지만, 유다 선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잡아 돼지에 집어넣으셨듯이 부정함을 쫓는 의미로 돼지를 사용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하실 일은 직접 번제물을 잡아 죄로 얼룩진 자신을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탁자 위에 가죽 두루마리를 풀자, 날카로운 날을 품은 단검 다섯 개가 햇빛에 번뜩거렸다. 미영을 포함한 여자들은 요셉으로부터 한 자루씩 단검을 받아 들고 나서도 한동안 갈팡질팡했다. 미영의 눈에 점박이의 떠는 손이 보였다. 마음의 동요가 심한 모양이었다. 곁눈질로 본 요셉은 기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한 발짝 물러서 지켜볼 뿐이었다. 미영이 손가락에 힘을 주며 돼지 앞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 많은 눈이 그녀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누구 믿음이 진실한지, 누구 배에서 나온 아기가 너희들이 섬겨야 할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주겠어.’

미영의 그림자가 머리에 드리우자, 돼지가 땅에 처박았던 얼굴을 빤히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팔이 순식간에 움직이며 돼지의 왼쪽 목덜미에 단검을 꽂았다. 미영의 손에 칼날이 살을 밀고 들어가는 섬뜩함과 함께 돼지의 비명이 장막 안을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돼지는 목덜미에 단검을 매단 채 이리저리 날뛰다가 동물의 본능에 따라 도망갈 틈을 찾아 흰색 천으로 된 벽을 파고들었다. 그 덕에 돼지가 지나간 자리마다 그것이 문 덴 핏자국이 흰 천에 선명하게 흔적을 남겼다. 가장 참을 수 없던 것은 돼지가 질러대는 비명이었다. 죽음을 직감한 짐승이 내는 소리는 상상 이상의 잔혹함을 가지고 있었다. 곁에 있던 여자 세 명이 귀를 막고 있는 사이 소희가 결심한 듯 다가가 돼지의 등에 단검을 찔렀다. 하지만 두꺼운 지방 탓인지 칼날은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조그만 생채기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자극이 계속되자 돼지는 흥분한 상태로 사람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뭐해요! 다들!”

소희가 얼빠진 여자들에게 소리치자, 그네들은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드는 듯 칼을 꼬나 쥐고 돼지에게 달려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눈을 질끈 감고 찌르는 어수룩한 공격은 돼지의 고통과 흥분만 가중할 뿐이었다. 모두 죽임당하는 짐승이 내지르는 처절한 소리에 귀를 막고 있는 상황에서 미영이 왕눈이의 단검을 빼앗아 들고 돼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단검을 거꾸로 잡고 돼지의 정수리를 내려찍기 시작했다. 단검이 돼지의 몸을 빠져나올 때마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소희와 여자들은 앞에서 펼쳐지는 지옥도를 멍하니 바라봤다. 사정없이 내리치던 그녀의 단검이 돼지의 눈을 찌르고 돼지가 중심을 잃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하지만 쓰러지고 나서도 주둥이에서는 폐부를 찌르는 울음소리가 계속 터져 나왔다. 소희가 미영을 거들며 난자질에 동참했다. 둘의 모습을 본 여자들도 자극받은 듯 뒤늦게 가세했다. 다섯 개의 단검이 돼지의 주둥이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이제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요셉의 말에 여자들이 홀린 듯 동작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들이 입었던 옷은 이제 본연의 색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뒤미처 깨달은 여자들이 단검을 하나둘 손에서 떨어뜨렸다. 먼저 울음을 터트린 것은 점박이였다. 울음은 금세 주위로 퍼져 나갔다. 소희 역시 목구멍에서부터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토해내듯 우는 그녀의 뒤로 규칙적인 단검의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었다.

, 언니.”

소희가 불렀음에도 미영은 들리지 않는 듯 곤죽이 된 돼지머리에 계속 단검을 꽂아 넣었다.

그만해도 돼요. 이제 그만요. 언니!”

부끄럽지 않아. 부끄럽지 않아. 부끄럽지…….”

소희가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소리칠 때까지 미영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읊조리다가 소희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어린아이처럼 떨며 울기 시작했다.

요셉이 장막 밖으로 나갔다가 남자 세 명과 함께 돌아왔다. 남자들이 피범벅이 된 돼지를 탁자로 옮기는 사이 요셉은 화로에 불을 지폈다.

제물을 올릴 시간입니다. 제사장께서 지시하신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남자 중 한 명이 여전히 울음바다인 여자들을 향해 말했다. 그는 점박이, 왕눈이, 코주부를 가리키며 앞으로 나올 것을 요청했다. 다른 남자가 든 놋 쟁반에 잘린 돼지 다리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세 명은 쟁반을 들고 화로 근처에 있는 요셉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가깝게 다가오자, 요셉이 말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은 죄.”

말과 함께 쟁반 채로 제물이 불 속으로 사라졌다. 불꽃은 제물을 음미하는 듯 더욱더 거세게 타올랐다. 다음으로 소희가 돼지머리를 들고 앞에 섰다. 요셉이 말했다.

생각으로 범한 죄.”

요셉의 말에 소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만이 알 수 있는 내밀한 장면이 잠시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사라졌다. 다음으로 미영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쟁반 위로 아직 살아있는 듯 꿈틀대는 심장이 보였다. 요셉이 말했다.

마음으로 범한 죄.”

꿈틀대는 심장이 불꽃 속으로 던져졌다. 그 순간 화로가 거세게 타오르며 돼지의 비명처럼 거친 소리를 냈다. 동시에 미영의 눈동자 속에서도 불길이 일렁이며 피 칠갑을 한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5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이 금세 핏빛으로 변하며 하수구로 사라졌다. 타일 바닥을 때리는 물줄기 소리를 제외하고 대중탕같이 넓은 욕실은 무거운 적막으로 짓눌려 있었다. 다섯 명은 말없이 자기 몸에 묻은 돼지 피를 지우려 온 힘을 다했다. 살갗이 벌겋게 변하여 피가 비칠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여자들은 욕탕으로 하나둘 말없이 모여들었다. 침묵을 깬 것은 왕눈이였다.

그 사람 좋은 사람이었어요. 순했고 나밖에 몰랐죠. 같이 살기로 한 후로 더 악착같이 일했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어느 날 일어나질 못했죠. 병원에서는 뇌출혈이라 하더라고요. 눈만 껌뻑이는 사람이 나보고 걱정하지 말래요. 나는 알겠다고 하면서도 걱정에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어요. 한 달 벌어 한 달을 살았는데, 당장 월세가 다음 달인데, 병원비는 어떻게 마련할까. 그즈음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의사가 나를 불러서는 다시 일어날 가망이 크지 않다고 말했을 때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그녀가 흐르는 눈물을 손날로 닦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까 죄 사함 받았잖아요. 이제 죄 없는 거잖아요. 그죠?”

왕눈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하자 점박이와 코주부가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감싸 안고 다독였다.

아까는 고마웠어.”

미영이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그때 맞죠?”

소희의 말에 미영은 그저 말없이 웃었다. 뭐가 뭔지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환상 속에서 잔혹하게 살해했던 소희가 갑자기 친밀하게 느껴졌다. 그저 거지 같은 곳에서 스치듯 한번 만났을 뿐인데. 마음의 경계선 안으로 불쑥 들어와 내민 손에 미영은 고민했다.

아니면 어때요, 다 같은 처지인 거 같은데 각자 최선을 다하면 됐죠.”

소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6

 

두 번째 시험을 앞둔 분위기는 무거웠다. 첫 번째 시험에서 겪은 경험이 여자들을 극도로 경계하게 했다. 종전의 시험과 달리 그들이 모인 장소는 휑한 실내였다. 아기를 누이기 위한 바퀴 달린 빈 요람과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가슴 높이의 탁자와 의자 한 쌍이 방에 있는 전부였다. 점박이, 왕눈이, 코주부는 욕탕에서의 일 이후 꽤 친밀해진 관계로 발전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긴장을 풀기 위해 끊임없이 한담을 주고받았다. 미영은 그들을 바라보며 한결 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첫 번째 시험 이후 몇 번의 기도 시간에 그녀는 더 이상 곁에 있는 여자들을 살해하지 않았다. 대신 마당에 서 있던 자신을 떠올렸다. 더 이상 눈앞에 남자가 마음대로 날뛰게 두지 않았다. 돼지머리로 변한 남자를 향해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다.

진즉에 해야 했을 일이었는데.’

요셉이 방으로 들어오고 뒤이어 다른 남자가 경호원들이 들고 다닐법한 검은색 직육면체 가방 한 개를 들고 들어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남자가 철커덕 소리를 내며 가방을 열고 뭔가를 준비하는가 싶더니 완료되었다는 표시를 요셉에게 보냈다. 그가 여자들에게 말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우리는 언약의 대리인으로 속죄의 의식을 거치며 정결한 몸이 되었습니다. 오늘 치를 두 번째 시험은 진정한 믿음과 순종을 신께 증명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가 말을 끝맺음과 함께 철커덕 소리를 내며 옆의 남자에게서 건네받은 것은 회전식 연발 권총이었다. 남자가 요셉에게 황동 빛의 총알을 하나 건네자, 그는 총알을 탄창에 삽입한 후 손바닥으로 밀어 빠르게 회전시켰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돌고 있던 탄창을 다시 결합한 뒤 권총의 공이치기를 엄지로 당겨 장전 후 총구를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겨눴다.

신께서 지켜주실 겁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철커덕 소리를 내며 공이치기가 빈 약실을 치는 소리가 났다. 여자들은 그 모습에 아연실색하며 비명을 질렀다.

, 그거 진짜 총 아니죠? 우리나라에서 그거 불법이잖아요.”

왕눈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신의 뜻을 행하는데 인간이 만든 법은 필요 없습니다.”

요셉이 자신이 들어온 나무 문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순식간에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폭발음과 함께 문에 주먹만 한 구멍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총에서 나온 매캐한 연기와 화약 냄새가 모두에게 총기의 실재를 실감하게 했다.

나는 도저히 못 해요.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그냥 시험만 보면 된다고 했잖아요.”

점박이가 억울함을 항변하듯 요셉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얼굴에는 감정의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포기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자유이니까요. 다만 이것만은 명심하십시오. 만약 시험을 중도에 포기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면 나는 그리스도를 오랫동안 기다린 수많은 신도를 대표해서 우리를 기만한 죄를 당신에게 물을 것입니다. 그동안 당신과 당신 아기가 여기서 입고, 먹고, 자고, 쌌던 것 모조리 이자 쳐서 청구하겠다, 이 말입니다.”

점박이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여자들의 얼굴이 새까만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어두워졌다. 총을 겨눈 듯 위압적으로 말하던 요셉은 여자들의 얼굴을 보고는 순식간에 예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특히 여러분이라면 말이죠. 그럼 두 번째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자가 총알 하나를 요셉에게 건넸다. 그는 좀 전과 같이 장전하고는 코주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온몸을 떨며 요셉의 곁으로 다가갔다. 덜덜 떠는 그녀의 손에 요셉이 장전된 총을 친절하게 쥐여줬다. 코주부가 총을 쥔 상태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자 요셉이 한숨을 쉬며 그녀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관자놀이 부근으로 총구가 움직이는 것을 거들었다. 그 순간 요셉이 뭔가를 잊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여자들을 향해 말했다.

설명 도중에 끼어들어 깜빡하고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이번 시험은 우리들의 믿음을 신께 증명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소중한 것을 신께 바칠 수 있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믿음의 증명이겠지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신께 드리려고 했듯이 말이죠. 만약 여러분 중 시험의 대상을 본인이 아닌 자신의 아기로 할 수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을 가장 유력한 그리스도의 후보로 추대할 것입니다.”

말을 끝낸 요셉이 떨고 있는 코주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겁먹을 것 없습니다. 순식간에 끝납니다. 검지에 힘주세요. .”

안간힘을 쓰는 코주부의 입에서 고통으로 앓는 사람의 기괴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가 조금씩 움직이다가 탄창이 돌아가며 철커덕하는 소리가 났다. 요셉이 다시 총을 받아 들고 그녀는 끈이 풀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대로 바닥에 무너졌다. 요셉이 그녀를 일으켜 세우자, 왕눈이가 다가와 부축하며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요셉은 탄창을 확인하고 다시 장전한 뒤 점박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앞에 서자 요셉은 자연스럽게 권총을 그녀의 손에 건넸다.

우리 행복이. 행복아. 행복아.”

총구가 달달 떨리며 관자놀이로 서서히 올라가는 동안 그녀는 아기의 이름을 끊임없이 불렀다. 총구가 관자놀이에 닿자, 그녀는 결심한 듯 깊은숨을 들이마신 후 방아쇠를 당겼다. 철커덕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녀는 들이마신 숨을 급하게 토해냈다. 통과 후 요셉을 보는 그녀의 눈에 설명할 수 없는 격정이 눈물에 담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요셉이 점박이의 어깨를 두드린 후 손가락으로 왕눈이를 가리켰다. 그녀는 요셉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미 두 번이나 별일이 없었다. 그녀는 가슴속에서 잠깐의 공포만 견디자고 자신을 다독였다. 다시 장전된 총이 요셉에게서 왕눈이에게로 전달되었다. 차가운 총구가 관자놀이에 닿는 순간 그녀는 병실에서 도망쳐 나올 때 잠자고 있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만약 무사히 시험을 통과한다면 그녀는 가장 먼저 남자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만 홀로 두고 도망친 것을 사과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이가 있음을, 그 아이가 어떤 대접을 받으며 살아갈지에 대해 자랑하듯 말할 것이다.

총구가 불을 뿜으며 피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몸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쓰러졌다. 여자들의 입에서 괴성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왕눈이가 쓰러진 곳으로 다가오려는 그들을 요셉이 손을 뻗어 제지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끅끅거리는 신음 같은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여자들이 자신의 지시에 고분고분 잘 따르자, 그는 옆의 남자를 시켜 왕눈이의 시체를 구석으로 옮기게 하고는 얼굴에 튄 피를 손으로 쓱 한번 닦고 다시 총을 장전하는데 몰두했다. 장전이 끝나자 피 칠갑을 한 얼굴로 소희를 향해 고갯짓했다. 그녀는 뚜벅뚜벅 요셉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아기를 데려와 주세요.”

요셉이 의외라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뒤의 남자에게 손짓했다. 잠시 후 남자가 소희의 아기와 함께 들어왔다. 아기를 눕힌 요람이 소희 앞으로 다가오자, 그녀가 손을 뻗어 장전된 총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총을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아기의 작은 손을 잡았다.

너는 이런 걸 겪으면 안 돼. 너는 나처럼 되지 말아야 하는데. 기껏 자라서 나처럼 될 바엔.”

그녀는 혼잣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떨림도 없이 그저 명령받은 대로 작동하는 인형처럼 총구를 아이에게 겨눴다. 방아쇠를 당기는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7

 

미영이 이곳에 도착한 그날처럼 안개가 사방을 에워싼 날이었다. 그녀는 아기를 안은 채 진입로가 보이는 창문을 응시했다.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던 수행원도 일부러 물렸다. 진입로에 세워진 자동차로 아기 잃은 어미가 어미 잃은 아기를 안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저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먼 거리 때문에 소희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미영은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소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고 싶지 않았다.

방아쇠가 당겨지고 순간의 번쩍임이 미영의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그 후로 송곳 같은 이명과 비명이 그녀를 괴롭혔다. 점박이와 코주부가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주저앉은 사이 미영이 천천히 소희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눈에 피가 요람의 철제다리를 타고 붉은 실처럼 소희에게로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소희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소희야.”

미영이 어깨를 붙잡으며 소희를 불렀다. 돌아선 그녀의 얼굴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잠에 사로잡힌 듯 피로하고 초췌해 보였다.

언니,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미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멀어져가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미영은 자신처럼 소희가 순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악령에 사로잡혔으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그것을 겪은 미영은 갈 곳이 없는데도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한편으로 이 모든 것이 요셉의 계략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녀의 아기는 정말 선택받은 것일까? 하지만 그녀의 아기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천년왕국이 세워진들 당장 그들은 길거리를 떠돌고 아기는 또다시 곰팡이가 핀 방에서 아토피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미영은 신께 기도하며 물었다.

당신이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은 언제나 침묵했다. 인내하며 그의 계시를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아들을 구원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8

 

세 번째 시험 날 여자들은 흰색 고급 리무진이 타고 외부로 이동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차창만을 응시했다. 다가올 시험의 두려움과 드디어 오늘이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해방감이 모두의 마음에 뒤엉켜 있었다. 차가 도심 외곽에서 중심부를 향해 달렸다. 빽빽한 고층 건물들을 지나 랜드 마크처럼 서 있는 흰색 돔 경기장의 입구로 진입한 차량은 전조등을 켜야 할 만큼 어둡고 깊숙한 지하 주차장에서 정차했다. 요셉과 수행원을 제외하고도 셀 수 없는 인파가 그들을 보기 위해 운집해 있었다. 여자들이 차에서 내리며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환호와 함성이 터졌다. 미영은 안내 된 방안에서 대기하며 어서 이 모든 것이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그녀가 방안에 들어온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수행원이 문을 두드렸다. 이제 무엇이 되었든 그녀가 극복해야 할 시험의 시간이었다.

미영이 수행원을 따라간 곳은 무대의 아래층이었다.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점박이와 코주부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메이크업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평소의 드레스보다도 더욱 풍성하고 화려한 드레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백의 옷이 움직일 때마다 빛을 머금은 듯 반짝거렸다. 서둘러 옷을 입는 여자들에게 붐 마이크가 달린 헤드폰을 낀 스태프가 준비 상태를 확인하러 다가왔다. 의상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완료되었다는 표시를 하자 그는 여자들에게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여기 세분이 서 있으시면 무대로 올라갈 겁니다. 오늘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 뵐 수 있어 너무나도 영광입니다.”

위를 올려다본 미영의 눈동자에 설치된 무대 조명 장치에서 화려한 빛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동시에 요셉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경기장에 울릴 때마다 인파의 함성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이윽고 장치가 작동하며 바닥이 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대가 가까워질수록 조명과 소음이 사납게 여자들을 덮쳤다. 강한 조명으로 인해 그들 앞의 관중석은 어둠 속에 잠겨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로 판단하건대 수백 명의 사람들을 짐작게 했다. 여자들이 무대 위로 모습을 나타내자, 함성이 절정을 이루며 폭발했다. 요셉은 마이크로 관중을 진정시키며 동시에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약속의 날, 다섯 개 루시페르의 별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습니다. 신께서 우리의 나약함을 지적하시고 고치시기 위해 예비하신 최후의 시험이었습니다. 하여 우리는 몸을 정결케 하고 신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시험을 통해 증명하였습니다. 다섯 중에 거짓된 둘은 탈락하였고 셋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진정한 부르심을 받고 우리를 이끄실 신의 독생자가 누구인지 밝혀낼 것입니다.”

요셉이 말을 하는 동안 무대 위에서는 영상으로 돼지에 덤벼드는 미영과 피 칠갑을 한 여자들의 모습, 힘없이 쓰러지는 왕눈이의 옆모습과 요람 앞에서 번쩍이는 총구의 장면이 여과 없이 나오고 있었다. 관중석에서 몇몇은 여자들의 울부짖는 장면에서 혼절하여 쓰러지기도 했다. 분위기가 달아오른 것을 느낀 요셉이 스태프에게 손짓하자 한 명이 무대 위로 올라와 무언가를 주고 빠르게 사라졌다. 요셉의 목소리가 다시금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시험은 사람의 인위적인 개입이 없이 진행됩니다. 마지막 시험을 진행하기에 앞서 먼저 제비뽑기를 통해 순서를 정하겠습니다. 막대의 끝에 순서가 적혀 있습니다.”

세 여자는 동시에 막대를 집어 들었다. 코주부가 ‘1’, 그리고 점박이가 ‘2’를 뽑았다. 미영의 막대 끝에 숫자 ‘3’이 보였다. 요셉이 숫자를 확인한 후 스태프에게 손짓하자 무대 뒤편에서 거대한 장막이 걷히며 세 개의 빛기둥이 보였다. 환한 핀 조명 세 개가 각각의 요람을 빛으로 감싸고 있는 가운데 요람 위로 자동차도 박살 낼만 한 크기의 원통형 은빛 무게추가 육중한 모습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곧이어 경기장의 모든 조명이 꺼지고 숫자가 쓰인 버튼 세 개가 붉게 점멸하며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시험의 과정은 아주 단순합니다. 여러분은 제비뽑기의 순서대로 버튼을 누를 수 있고 버튼이 눌리면 해당 번호의 무게추가 떨어지게 됩니다. 간단하지요?”

여자들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번호를 다시 바라보았다. 점박이가 미영과 코주부의 팔을 붙잡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우리 이거 하지 말아요. 다 같이 포기해요. 우리 이거 하면 어떻게 될지 알잖아요. 나는 그만할래요. 그만할래.”

진한 화장을 한 점박이의 얼굴에 마스카라가 번지며 검은 줄을 만들었다. 카메라가 오열하는 그녀의 얼굴을 집요하게 화면에 띄웠다. 그 옆으로 우물쭈물하는 코주부와 미영의 모습이 보였다.

자 이제 일 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앞으로 나와 주세요.”

요셉의 말이 쩌렁쩌렁하게 실내에 울린 뒤 코주부가 한껏 움츠러든 기색으로 버튼 앞에 섰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점박이가 애원하듯 손을 빌었다. 미영 역시 입에서 제발, 이라는 단어를 그녀에게 연신 외쳤다. 뒤돌아본 코주부의 얼굴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버튼으로 떨리는 손을 뻗던 그녀는 연신 도리질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내 아들은 그리스도가 아니에요. 그리스도 안 할래요.”

포기하시겠습니까?”

요셉이 말하자, 코주부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눈물이 턱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수행원 두 명이 그녀의 양팔을 붙잡은 채로 무대 바깥으로 사라졌다. 카메라가 점박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그녀는 사냥당하는 동물의 표정으로 미영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요셉이 그녀에게 여러 번 버튼 앞에 설 것을 말했지만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결국 코주부와 마찬가지로 수행원이 그녀를 무대 밖으로 끌어내렸다.

누르지 마! 절대 누르면 안 돼! 행복아! 행복아!”

미영은 귀를 가득 메운 소음 속에서도 무대 저편 어둠에서 내지르는 그녀의 절규가 생생하게 들렸다. 카메라가 미영의 얼굴을 잡기 시작했다. 단검을 가지고 돼지에게 달려드는 모습과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진 소희를 바라보며 방아쇠를 당기는 그녀의 모습이 화면에 나오며 실내에 다시금 함성이 커지기 시작했다. 무대 한가운데 서 있던 요셉이 그녀에게 다가오며 마이크 스위치를 껐다.

포기하시겠습니까?”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포기할 수 있나요?”

물론이죠. 포기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후에 벌어질 일은 말 안 해도 잘 알 겁니다. 나는 미영 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이 이 자리에 서 있을지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보기보다 강인하고 특별한 존재입니다. 스스로 구원자임을 입증하세요. 몇 발짝만 나아가면 그토록 바라던 것이 바로 저 앞에 있습니다.”

미영은 홀린 듯 버튼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소희를 휘감았던 악령이 찾아왔음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의 유혹을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란 것을 냄새 맡은 그놈은 순식간에 그녀의 머릿속을 휘감았다. 조금 전까지 아이를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자기 모습이 안개에 휩싸이며 뿌옇게 사라졌다. 점박이의 절규와 코주부의 눈물, 왕눈이가 쓰러지는 모습과 소희의 초췌한 표정까지 낡은 기억처럼 희미해져 갔다. 대신 오늘이 지나고 다가올 날들에 대한 두려움이 거세게 그녀를 공격했다. 아이를 안고 방황할 거리의 냉기와 위협적인 목소리와 진물이 흐르는 아이의 붉은 피부가 그녀의 손을 서서히 버튼으로 이끌었다. 세 개의 붉은 버튼은 뛰는 심장처럼 점멸하고 있었다. 그녀가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었을 때 맥의 율동이 선명하게 손바닥에 잡히는 듯했다. 그녀가 손을 빼려 저항하자 악령은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옥죄었다.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며 두 개의 버튼을 눌렀다. 쇳덩이가 대지에 떨어지며 둔중한 굉음을 냈다. 발바닥 밑으로 울음 같은 진동이 그녀를 스치고 사방으로 퍼졌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셨습니다!”

요셉의 외침에 무대 양옆에서 폭죽 소리와 함께 꽃종이가 흩날렸다. 알록달록한 꽃가루 속에서 미영은 부들부들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아기가 있는 요람을 제외하고 요람이 있던 곳에 무거운 쇳덩이가 자리 잡은 것이 보였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거센 눈발처럼 내리는 꽃종이 안에서 요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이전과 다르게 결연했다.

유다선교회의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가 탄생함과 동시에 적그리스도가 탄생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아비 없이 태어난 사람!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처결! 처결! 처결!”

놀란 미영이 요셉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무슨 미친 소리야! 너희들이 찾던 그리스도는 내 아들이잖아!”

요셉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리스도는 바로 당신이잖아요.”

, 뭐라고?”

미영은 맥이 탁 풀리며 자신도 모르게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다시 관중석을 보았을 때 검은 괴물이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괴물 안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이빨이 조명에 번뜩거렸다. 미영은 곧 그것이 사람들이 쥐고 있는 단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만요, 잠시만요. 제가 잘못했어요. 잠시만요.”

꿈틀거리는 괴물 앞에 그녀는 손을 싹싹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괴물이 그녀를 지나쳐 빛기둥을 삼켰다. 괴물의 끄트머리를 잡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그녀로서는 도저히 막을 재간이 없었다. 망연자실한 그녀에게 요셉이 다가와 말했다.

길고 안락한 삶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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