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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부러진 칼날

2023.12.22 16:1912.22

저녁 10시 무렵 뿌연 이슬비가 가로등 불빛 속으로 흩날린다. 비는 건물 위로, 도로 위로, 자동차 위로 내리고 있다. 차도 위에 줄지어 있는 전조등은 뿌연 대기를 가로지르며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한다. 버스 창문에 매달린 와이퍼는 흐려진 창문 위를 오가며 빗물을 쓸어낸다. 버스가 부아앙 소리를 내며 떠난다. 버스가 떠난 자리 근처에 택시가 비를 맞으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택시 운전사는 거리를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모양이다. 택시 안에 앉은 운전사에게 빗물이 닿을 리 없건만 운전사는 갈 곳 없이 비에 젖은 사람처럼 표정이 없다. 그리고 무표정 뒤편에서 생각하기를,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들이 무슨 수로 알겠는가 하고 상상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택시!” 저 앞에서 취객 하나가 택시를 부르며 손을 뻗는다. 그리고 서둘러 걸어와 뒷자리에 들어 앉았다. 취객은 탕 소리를 내며 택시 문을 닫고는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외친다. 목적지를 뭐라 말했는지 택시 밖에서는 들리지 않지만, 운전사는 잘 알아들은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을 시작한다. 택시가 출발하자 택시 표면에 고여 있던 빗물들이 뒤로 밀려나며 땅에 후두둑 떨어진다. 취객은 술자리를 일찍 시작한 모양인지 이미 어지간히 취한 듯한 냄새를 풍긴다. 택시가 출발하고 얼마 못 가서 횡단보도 신호등에 멈추어 섰는데, 신호가 채 바뀌기도 전에 성급하게 뛰어 나온 몇 사람이 택시 앞을 거의 부딪히듯이 질러갔다. 그러고는 도리어 택시 운전사를 뒤돌아보며 투덜거리는 모양이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운전사는 무심히 뭐라고 중얼거린다.

“저의 딸이 죽었답니다. 이혼한 아내한테서 한달 전 쯤 전화가 왔지요. 딸 아이가 죽었다는 거에요. 이게 무슨 미친 소린가 하고 크게 소리를 쳤죠. 애 엄마가 엉엉 울기만 하고 말을 못하기에 병원 이름만 겨우 알아 듣고 찾아갔어요.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서 죄송합니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승객은 뒷좌석에서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운전사는 후방거울로 뒷좌석을 확인해 본다. 승객은 비스듬한 자세로 입을 벌리고 꼼짝 없이 잠들어 있다. 운전사는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리고 말 없이 운전을 계속한다. 신호등이 바뀌고 운전사는 택시를 출발했다. 지금 운전사는 괜한 말을 꺼냈다고 후회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잠든 승객을 보고 오히려 안심하며 후회를 털어내었다. 그리고 트렁크에 넣어둔 삼덕 칼을 떠올렸다.

‘내가 다 죽일 테다. 죽일 놈들. 내 딸을 죽게 만든 놈들. 내가 다 찾아서 죽일 거야. 눈이랑 혀를 뽑아서 똥물에 패대기칠 테다. 기다려라. 이 죽일 놈들.’

운전사는 마음 속으로 악을 쓰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러나 삼덕 칼을 고른 것은 명백히 그의 실수였다. 칼날이 너무 넓고 끝이 뭉툭해서 칼을 제대로 쓸 수 없을 것이라 깨달았을 때는 이미 결제를 끝내고 나와서 포장을 뜯어버린 다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성급한 행동을 반성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식칼 판매대에서는 사시미 칼을 본 기억이 없다.

‘사시미 칼을 샀어야 했는데.’

삼덕 칼을 고른 사유는 이러하다. 그가 분노에 휩싸여 부랴부랴 양판점에 달려가 주방용품 코너를 찾았을 때 식칼 판매대에 가장 많이 진열된 물건이 삼덕 칼이었던 탓이다.

‘사시미 칼을 먼저 봤다면 사지 않았을 리가 없어. 그래. 사시미 칼을 사자. 사시미 칼을 사서 전부 죽이는 거야. 그런데 사시미 칼을 어디서 사야 하지? 온라인 칼가게를 찾아봐야겠군.’

그는 가장 날카롭고 단단한 칼날을 가진 사시미 칼을 골라서 주문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는 손님을 깨웠다. 잠들었던 취객은 크게 웅얼거리며 깨어나서 신용카드를 꺼내 운전사에게 건냈다. 운전사가 결제를 끝내고 신용카드를 돌려주자 취객은 휘청이며 택시를 내렸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취객의 뒷모습을 운전사는 거울로 힐끗 보았다. 그리고 골목길을 빠져 나가며 상상을 이어나갔다. 어떻게 놈들을 죽여야 시원한 복수가 될지 생각면서, 사시미 칼을 손에 쥐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렸다.

‘천천히, 천천히 죽일 테다. 개새끼들. 배통에 구멍을 내고 창자를 꺼내 입에 쑤셔넣을 테다.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질러라. 깎아 죽여도 모자른 놈들.’

선혈이 낭자하는 바닥 위를 기어다니는 형상 없는 짐승들을 상상하면서, 그는 자신의 각오를 몇 차례나 되새긴다. 그리고 복수를 어떻게 완결할지 생각을 이어갔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이제 내게는 아무것도 없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다 죽이고 나도 죽자. 그래. 죽는 거야. 내가 죽으면 애 엄마가 장례식장에 오기는 할까? 오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냐. 이혼했는데. 어휴. 그렇게 잘 살겠다고 큰 소리 치고 가더니 이게 무슨 꼴이냐. 딸 하나 목숨을 간수 못하고.’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하는데 마침 골목길 끝에서 손짓하며 택시를 부르는 한 무리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얼른 눈물을 훔쳐내고 무리 앞에 택시를 세운다. 무리를 이룬 사람들은 서로 인사하는 손짓을 주고 받더니 두 사람을 남겨두고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털컥 하는 소리를 내며 차문을 열고 뒷좌석에 남녀 승객이 올라탔다. 운전사가 행선지를 물었고 남자는 남서울역으로 가자고 말했다. 택시가 출발하자 남녀는 머리를 맞대고 자신들만 들리는 작은 소리로 웃음 섞인 대화를 주고 받는다. 운전사는 무심히 먼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기사님! 조금 빨리 가주실 수 없나요? 앞에 차도 별로 없는데.”

남자가 목소리를 키워 말한다.

“예예. 서둘러 가겠습니다.”

운전사는 마치 들으라는 듯이 가속 페달을 꾹 밟는다. 남녀는 대화를 다시 시작한다.

“아휴. 죽겠다. 마지막 병은 마시지 말걸. 오랜만에 브랜디를 노미쓰기했나봐.”

남자가 짐짓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럴까봐 내가 적당히 마시라고 했잖아.”

여자가 웃음 섞인 말투로 남자에게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남자도 웃음을 흘리며 왼손으로 명치를 쓸어내린다. 둘의 대화가 잠시 멈춘 사이에 운전사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린다.

“제 딸이 한 달 전에 죽었습니다. 마지막 얼굴도 못 보고 말이지요.”

그 말을 듣고서 남녀는 할 말을 잃고 운전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 정말 슬픈 일이네요.”

여자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쩌다가…” 하고 이어서 말하려는데 남자가 말을 끊었다.

“잠깐 기다려 봐.”

남자는 여자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듯이 손짓을 하며 말했다.

“기사님. 무척 슬픈 일을 겪으신 것은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여기에서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답답해서요. 딸은 무덤에 있는데, 저는 먹고 살겠다고 운전하러 나왔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운전사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는데, 남자가 이제 다 왔으니 내려달라고 말했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더 남았지만, 운전사는 잠자코 택시를 세웠다. 택시비를 결제하고 택시를 다시 출발할 때까지 세 사람은 아무 말이 없다. 남녀는 택시를 내려서 왔던 방향으로 조금 거슬러 걷더니 금새 다른 택시를 잡아 타고 장소를 떠났다. 남녀를 내려놓은 운전사는 다른 승객을 태우려는 생각도 잊고 빈 채로 도로 위를 달렸다. 도로를 채운 수많은 자동차에 둘러싸여 있지만 지금 그는 모르는 군중 사이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울화가 치밀었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군. 이렇게 괴롭게 살아서 뭐하나? 빨리 죽어야지. 하지만 놈들을 다 죽이고 나서 죽을 테다. 그러면 신문 방송이 떠들썩 하겠지? 딸의 복수를 마친 아버지의 극단적 선택. 뭐 이렇게 지껄이려나. 맘대로 지껄이라지. 네 놈들이 내 심정을 아느냐. 승냥이 새끼들.’

택시는 젖은 도로 위를 목적지 없이 달리고 있지만 문득 그는 자신이 집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 이상 운전할 의욕마저 남아 있지 않음을 느끼며 집으로 가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조급해져서 속도를 높였다. 그러다가 뇌리 한쪽에서 이대로 집에 가면 오늘 하루 기름값도 벌지 못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날마다 이렇게 일찍 집에 가다가는 엥꼬 나겠군. 휴우. 도대체 택시가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택시를 먹여 살리는 것이냐. 우리는 서로 먹이고 먹는 공생관계인가 보다. 그렇다면 나는 악어일까 악어새일까.’

이어서 그는 자신이 죽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들어 대겠지. 살인의 동기가 어쩌고 저쩌고, 사회가 어떻고 양극화가 어떻고 하면서 말이야. 그래도 살인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둥, 분노 조절을 하려면 명상을 하라는 둥 하면서. 얼어 죽을. 너희가 나에 관해서 뭘 아느냐? 알기는 개뿔을 알아? 나한테 한마디 물어 본 적이 있느냐? 내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너희가 무엇인데 나에 관해 아는 척을 하느냐?’

운전사는 차가운 운전대를 꼭 쥐고 아악 하고 고함을 질렀다.

‘내가 죽고 나면 신문 방송은 제 맘대로 지껄이고, 속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욕하겠지. 마땅히 죽을 놈이 죽는데 욕은 내가 먹다니 안될 일이지. 진짜 욕 먹을 놈은 따로 있는 걸. 나는 마땅히 할 말이 있어. 그놈들이 어떻게 내 인생을 깨트렸는지, 놈들이 왜 죽어 마땅한지 한 글자도 빠짐 없이 말할 테다. 죽더라도 할 말은 끝내고 죽어야지.’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간이다. 어둠은 비 내리는 마을을 조용히 덮고 있다. 택시는 미로 같은 골목을 지나 낡은 다가구주택에 닿는다. 운전사는 건물 뒤편에 택시를 세워두고 1층에 이어진 녹슨 문을 밀고 들어간다. 전등을 켜자 흐릿한 불빛이 서늘한 방을 채운다. 방은 제대로 청소하지 않아서 바닥이 지저분하다. 그는 작은 싱크대에서 전기주전자에 물을 채우고 스위치를 올린다. 그리고 허름한 1인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전기주전자가 촤아 하고 물을 덥히는 소리를 듣는다.

‘경찰이 나를 잡아서 재판정에 세우겠지. 오히려 바라던 바다. 재판정에서 큰 소리로 말해야지. 딸 아이 장례식에서 애 엄마가 몇 번을 까무러쳤는지. 내가 딸 아이를 어떻게 먹이고 씻기고 재웠는지 전부 말하겠어. 이젠 딸 아이 시집도 못 보내고 웃는 얼굴도 못 보게 되었다고. 내 목소리로 말할 테다.’

그는 컵에 믹스커피를 하나 쏟아 넣고 뜨거운 물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붓고는 젓지도 않고 마신다. 커피를 마시던 그의 시선이 구석에 쌓인 통조림 깡통에 닿았다. 그는 시계를 보고 깡통 하나와 접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깡통을 열어 접시에 쏟았다. 고양이 식사였다. 그는 접시를 들고 집을 나와 건물 뒤편 가로등 아래로 간다. 기다렸다는 듯이 삼색 고양이 한마리가 가로등 불빛 아래를 서성이고 있다.

“얼룩아. 밥 먹어라.”

그는 나오지 않는 음성을 힘겹게 뱉어 고양이를 부르고 접시를 내려 놓았다. 고양이는 야옹 소리를 내며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익숙하게 다가와 접시를 핥았다. 고양이 등이 빗물에 촉촉이 젖어 가로등 불빛을 반사한다.

“그래. 너라도 먹어라. 나는 밥이 넘어가지 않는구나.”

고양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의 얼굴을 보더니 다시 접시에 고개를 숙인다.

“허리가 쑤시는구나. 운전을 수십년 했더니 어느새 나도 늙었어. 너는 나이가 몇이냐.”

고양이가 식사에 몰두하는 동안 그는 마치 고양이가 듣기라도 하듯이 중얼거린다.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쭈그려 앉아서 고양이 밥이나 주는 것이지. 나한테는 힘이 없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뒤엉킨 마음만 가득하지. 누가 이 답답한 마음을 들어 주겠니.”

소리 없이 이슬비가 내린다. 가로등 불빛 속으로 가늘게 부서진 물방울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는 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보려고 입술을 달싹거리지만 끝내 입술을 떼지 못한다.

고양이가 그의 손등을 핥았다. 그러나 그는 소리 없이 울먹이며 눈물을 흘릴 뿐이다.

[부러진 칼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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