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내 피는 하얀가요

2023.11.26 17:1611.26

나는 57번 버스에 올라탄다. 근무지인 서울의 한 고등학교 도서관에 가기 위해서다. 도서 배가 및 서가 점검 아르바이트를 하는 근무 학교까지 출근하기엔 아직 시간이 이르다. 상을 치운 뒤 나는 잠시 TV를 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 하릴없이 시간을 날리자 아버지가 어떻게든 연이 닿는 대로 마련한 아르바이트 자리였다. 그곳은 도서 납품 및 관리 용역업체인데, 마침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한 참이었다. 작가인 아버지에 의해 어렸을 때부터 책이라면 기생충처럼 달고 다녔으므로 내겐 더없이 적합한 일이기도 했다.

오전 열 시의 버스는 때 이른 저녁처럼 한적하고 고요하다. 버스 기사 바로 뒤에 앉은 한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다. 이윽고 그녀는 버스에서 내리겠다며 운전기사를 부른다. 기사는 정류장이 아니라며 세워줄 수 없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여자는 완강하다. 그녀한테서 무언가가 투두둑, 떨어진다. 코를 틀어막은 휴지를 적시며 떨어지는 그것은,

피다. 하얀 피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여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한순간 아름다워 보인다. 나는 이끌리듯 그녀에게 다가간다. 기사에게 여자의 상태를 전한다. 할 수 없이 기사는 버스를 인근 보도에 세운다. 우리는 재빨리 내린다. 여자는 어지럽다고 말하며 제대로 걷지 못한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나는 남들처럼 효과가 세진 않겠지만 도움이 될 거라며 약국에 데려가 두통약을 사서 건넨다. 그녀는 앞을 가리는 머리칼을 연신 쓸어넘기며 고맙다고 웅얼거린다.

“당신도 하얀 피를 가졌군요.”

“네?”

여자가 나를 올려다본다.

“저도 하얀 피를 가졌어요.”

나는 그렇게 말해놓고선 우스워 웃는다. 여자는 이상하다는 눈치로 나를 바라보다 이해했다는 듯 뒤늦게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평소엔 안 그러는데, 어제 과로해서 그런가 봐요.”

“어디서 일하시는데요?”

“게임회사요. 게임 세계관 짜고, 시나리오 짜고.”

그녀가 일하는 게임회사는 내가 즐겨 하는 RPG 게임을 서비스하는 곳이었다. 일순 나는 대답할 직장이 없어 머뭇거린다. 여자는 눈치챘는지 화제를 바꾼다. 정말 당신도 하얀 피를 가졌느냐고.

“그럼요. 이것 참, 보여드릴 수도 없고…….”

“괜찮아요. 그런 말이면 돼요. 다짜고짜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널렸는데요, 뭐.”

그녀는 체념한 듯이 눈썹을 늘어뜨린다. 우리는 서로 뭐라고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몰라 말하기를 주저하다 각자의 직장으로 다시 향한다. 그녀는 이것도 인연인데, 하며 명함을 줬는데 나는 내밀 명함이 없어 그저 악수를 청했다. 그마저도 여자가 돌아선 찰나였기 때문에 끝내 악수도 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의 명함에 적혀 있는 이름 석 자를 본다.

“병원 안 가냐?”

방문이 벌컥 열리며 아버지가 소리친다. 좀 전의 제 말은 잊어버린 양 재촉한다. 시간이 이른 이유가 있었다. 병원에 가야 한다.

나는 옷을 대충 걸치고 집을 나선다. 세상은 알록달록하다. 나도 그런 세상이 좋다. 단순히 보는 것만이 아니라 만지고, 맡고, 듣는 모든 감각이 활발히 움직이는 것 역시 좋다. 그러나 내 몸에 흐르는 하얀 피 만큼은 아니다. 그것이 몸 밖으로 흘러나오고,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에 나는 다른 이들과 구분된다. 특별해진다. 나는 끊임없이 순환하며 나를 증명한다. 하지만 하얀 피는 어떠한 초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상처(일반인들의 표현대로라면)가 나지 않는 이상 바깥에 드러날 일이 없기에 의도치 않은 비밀로 간직할 수밖에 없다.

나는 흰색이 좋은 게 아니다. 하얀색에 가까운, 그러나 투명하지는 않은 내 몸을 구성하는 그것을 사랑할 뿐이다. 따라서 나는 자해중독자도, 자살시도자도, 정신병자도 아니다. 난 그저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도 내가 좋아하는 책은 한강의 〈흰〉이란 소설이다. 그것이 소설로선 가장 나 자신에 가까우므로. 나는 그 책을 양장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해질 정도로 수십 번을 반복해 읽었다. 언젠가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네 피는 하얀색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하얀 피’는 그저 그것에 그나마 적합한 이름에 불과하다. 그 책은 아직도 내 가방 한 귀퉁이에 자리해 있다.

초여름의 정신건강의학과엔 언제나 사람이 많다.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뭔지도 모르는 약을 타기 위해 오는 곳이다. 약을 제때 챙겨 먹은 적은 손에 꼽지만. 대기번호를 뽑고, 곧이어 이름이 불린다. 나는 진료실을 두 번 노크한 뒤 들어간다. 젊은 의사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맞는다. 그는 내게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는다. 무엇보다 ‘증상’은 좀 나아졌는지. 나는 교회 얘기를 할까 말까 고민한다. 이내 하지 않기로 한다.

“아직도 하얀 피를 봐요?”

의사가 정감 어린 어조로 묻는다.

“제 피는 언제나 하얗습니다.”

“어떻게 하얀데요?”

나는 당황한다. 하나 당황하지 않고, 하얗다고 할 순 없으며, 하얀 것과 투명한 것 사이라고 답한다. 의사의 낯빛엔 금세 그늘이 어린다. 약과 운동, 여러 치료의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 걸까. 나는 그런 의사의 당혹감에 은근한 승리감을 느낀다.

“오늘도 실험해볼까요?”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의사가 혈당을 재는 바늘로 내 검지 끝을 살짝 찌른다. 따끔하다. 피가 밴다. 하얗다. 나는 거 보라는 듯 의기양양해지지만 그건 의사도 마찬가지다.

“붉죠. 피는 붉어요. 약은 제때 챙겨 드시나요?”

“하얀데요.”

“여러 검사를 다 해봤지만 백희 환자분의 피는 붉어요. 물론, 아직도 하얗게 보인다면 더 치료가 필요한 거겠죠.”

“전 문제가 없어요.”

나는 단호히 말한다.

“방금 말씀드렸던 것처럼, 당연히 문제가 없어요. 문제의 차원이 아니라 이해의 차원으로 접근해야죠, 이제. 자, 말씀해보세요. 하얀 피를 처음 보았던 순간을.”

“기억나지 않아요.”

거짓말이다. 나는 하얀 피를 처음 본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버지가 날 죽이려고 베란다에서 날 밀었을 때요, 그때요, 처음으로 하얀 피가 보였어요,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의사는 약의 부작용은 없는지 묻고, 다시 한 달 치 약을 처방해준다.

약국에선 약사가 그 환자구나,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약을 내어온다.

 

나는 맞붙잡은 두 손을 뗀다. 목사의 설교가 이어진다. 교회는 숨이 막힌다. 안 그래도 조그만 교회에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적막 위로 흘려보내는 숨으로 데워진 공기가 뜨겁다. 옆의 아버지를 흘끗 본다. 합장한 채 중얼거리는 아버지의 입술이 거슬린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신에게 무슨 말을 올려보내는 걸까. 이번에 낸 소설은 부디 잘 팔리면 좋겠다고, 베스트셀러가 되게 해달라는 내용일까. 아니면 ‘정신병자’ 아들이 인제 그만 철이 들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비는 걸까.

나는 다시 기도하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몸속 깊숙이서 구역질이 치민다. 손이 떨리고, 알 수 없는 배덕감과 혐오가 차오른다. 기분이 이상하다. 이대로 더 있으면 금방이라도 경련을 일으키거나 더러운 오물로 주변을 더럽힐까 봐 두렵다.

서두르지만 조용히, 예배당을 빠져나와 낡은 교회의 낡은 화장실로 향한다. 칸막이에 들어가 변기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앉는다. 나는 조그만 면도날을 주머니에서 꺼낸다.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 부위 쪽의 살갗 위를 긋는다. 하얀 피가 흐른다. 그것은 우윳빛 흰색과 물의 투명함 사이의 색을 띠고 있다. 그렇다. 내 몸엔 하얀 피가 흐른다. 다른 사람들에겐 붉은 피가 흐르지만, 내겐 하얀 피가 흐른다.

“예쁘다.”

나는 중얼거린다. 뒤이어 아릿한 통증 위로 샘솟는 환희와 쾌감에 휩싸인다. 언제부터인진 모르나, 내게는 하얀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고 난부터 이런 식의 자위행위를 계속 해왔다. 더군다나 교회에서 하는 이 행위란 참을 수 없을 만큼 중독적이다. 나는 흉터가 흉터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비릿한 정액 냄새처럼 잠시 머물다 사라질 뿐이다. 피는 계속해서 흘러내린다. 타일 바닥의 줄눈 사이를 타고 흐르다 어느 곳에서 고이기 시작한다. 나는 두루마리 휴지를 잘라 바닥을 대충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지럽다. 피를 많이 흘리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너무 많이 흘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역시 안다. 그래서 아버지 몰래 산 응급처치키트를 가지고 다니는데, 아뿔싸, 예배당 좌석에 놓고 오고 말았다……. 아버지 옆에.

나는 칸막이 문을 열다 휘청거린다.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가 흔들린다. 대충 자위 부위를 틀어막은 휴지 뭉치가 축축이 젖는 것을 느낀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 애쓴다. 사람들이 보면 안 된다는 의무감과 실컷 보라는 충동이 한데 뒤섞여 나를 뒤흔든다.

인기척이 난 것은 그 순간이다. 언뜻 사람의 형태로 보이는 실루엣이 점점 커진다, 앞으로 다가온다. 나는 천천히 그 실루엣을 향해 허공에 두 손을 내젓는다.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나는 그 형체의 주인공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지만 말이 되지 못한 음절들이 얕은 숨으로 흐트러진다. 나는 이내 몸의 중심을 잃는다. 힘이 죽 빠져나간다. 어둠이 눈앞을 흐린다.

 

흉터를 긁적인다. 여름 땀띠가 솟은 탓이다. 아버지는 맞은편에서 말없이 밥을 먹는다. 소설을 쓰느라 밤을 또 샌 탓인지 눈가에 그늘이 져 있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저번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아버지는 곱씹는 게 틀림없다. 그때 나를 처음으로 발견한 목사는 조용히 교회 구석의 자신의 사무실에서 나를 응급처치한 뒤 돌려보냈다. 그는 아버지에게만 그 사실을 알렸고, 아버지는 그것에 감사해했다. 그는 집에 오자마자 내 가방을 뒤져 응급처치키트를 내다 버렸다.

“그냥 그렇게 살아라. 죽든 말든 이제 내 알 바 아냐.”

아버지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한다.

“네.”

내 말에 아버지는 어이가 없는지 나를 멍청히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간다.

 

 

이홍희. 여자의 이름이다. 아주 새빨간 피가 흐를 것만 같은 사람의 이름이다. 그런데 하얀 피라니. 그게 못내 재밌어서 나는 일하는 내내 미친놈처럼 실실 웃음을 흘렸다. 반장이 일 처리가 늦다며 핀잔을 주기까지 나는 그 이름을 되풀이해 곱씹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도 홍희 생각을 이어갔는데, 그때는 웃음 대신 걱정만 가득했다. 세상에 하얀 피를 가진 사람이 나뿐이라는 생각은 물론 하지 않았다. 어딘가엔 있겠지, 지구상에, 아니면 우주, 우주 너머에라도. 근데 정말 이렇게, 갑작스레 내게 다가올 줄은 몰랐고 그것이 출근길 버스 안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나는 버스 안에 남았을 피에 생각이 미친다. 그것을 채취해 가지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하얀 피는 어떨지……. 그것을 정말 하얗다고 할 수 있을지, 함께 토론하여 다른 이름을 붙여주고도 싶다. 무엇보다 궁금한 건 그녀가 하얀 피를 처음 보았을 순간이다. 명함에 적힌 그녀의 전화번호로 몇 번이나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까 생각했지만, 그도 실례인 것 같아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저녁 안 차리냐?”

아버지가 방문 너머로 외친다. 나는 부엌으로 가 라면을 끓인다.

저녁 드시라는 말에 나온 아버지가 라면을 보고 얼굴을 찌푸린다. 고작 이거냐, 라는 시선이다. 나는 못 본 척하며 식탁에 앉는다. 아무 말 없이 라면을 건져 먹고 밥을 말아 먹는다. 그러다 나는 불쑥 묻는다.

“아버지. 유치원 때, 베란다에서, 왜 나 밀었어요?”

찬물 없냐고 투덜거리던 그가 미지근한 물을 마시다 말고 나를 곁눈질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는 말끝을 내린다.

“기억 안 나세요?”

“기억 안 난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런 일이 있었냐.”

나는 주먹 쥔 손으로 식탁 유리를 내리친다. 아버지는 여전히 물을 마신다.

“왜 그러셨어요?”

“......다 사고다. 사고였어.”

“그때부터, 제가 알았던 거예요. 하얀 피를 가졌다는 것을.”

“병원에선 뭐라디?”

“병원 얘기 그만하시구요.”

“입원해도 된다, 어제 선인세 들어왔어. 요번 작품은 잘 될 거라고 하더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 그릇과 아버지 그릇을 개수대에서 바로 씻는다. 그러곤 방에 가 틀어박힌다. 나는 유일하게 숨이 트이는 곳을 찾다, 홍희의 연락처를 떠올린다. 나는 무작정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서너 번 이어지다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반가움에 나는 만날 수 있느냐는 말이 앞서나가려는 것을 애써 참는다.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네요.”

나는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말한다. 데이트 신청도 아니고, 이게 뭐지, 싶었다.

“.......좋아요, 나도 그쪽에 대해 궁금하니까. 전할 말도 있고.”

“전할 말이요?”

“만나서 얘기해요. 지금은 일이 바빠서.”

그녀는 밤 열한 시쯤 인근 지하철역 포차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는다. 열한 시가 될 때까지 나는 TV로 생로병사의 비밀 다큐 프로그램을 본다. 인제 보니 ‘우리의 신비한 몸’이 주제인데, 아무리 기다려도 하얀 피에 관한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잠시 잠이 들었다가 퍼뜩 깬다.

오후 열한 시다. 헐레벌떡 신발을 꿰차고 집을 나선다. 오밤중에 어딜 가냐는 아버지의 말은 무시한다.

 

포차엔 사람이 득시글거린다. 홍희는 먼저 와있다. 나는 늦은 만큼 술은 내가 사겠노라 말하려다 멈칫한다. 카드 한도가 막힌 탓이다. 그녀가 왜 그러냐고 표정으로 묻자 나는 재빨리 주문을 먼저 한다. 닭발과 맥주 두 잔. 그녀는 술은 조금만 마시겠다며 설핏 웃는다.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어도 매력적인, 개성 있는 얼굴이다. 눈썹은 특유의 동선을 따라 쉼 없이 실룩거리고 입은 살짝 왼쪽으로 삐죽 올라가 한층 허무하고도 샐쭉한 표정이 된다.

“진짜 본인 피가 하얗다고 믿어요?”

나는 떠보는 식으로 묻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오히려 묻는 나를 이상하다는 눈치로 쳐다보기까지 한다.

“그럼, 그쪽은 아니에요?”

“아, 당연히 하얀 피를 가졌죠. 저는.”

나는 실실 웃으며 닭발의 매콤함으로 취기를 잠재우려 애쓴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자기가 하얀 피를 가졌다는 걸?”

“자살하려고 했을 때요. 손목을 그으니 갑자기 빨간 게 아니라, 웬 허여멀건 피가 나오더라고요.”

“왜 죽으려고 했는데요?”

“엄마가 미친년이었거든요. 술과 도박에 절어서. 지금은 죽고 없지만.”

나는 아, 입을 벌린 채 머리를 주억거린다.

“그쪽은요?”

홍희의 물음에 나는 머뭇거리다 아버지, 라고 입을 뗀다.

“아버지가 왜요?”

“아버지는 날 베란다에서 밀어서 죽이려고 했어요. 이혼하고 나서 한동안 아버지가 생활고로 힘들어했는데……. 그래서 떨어졌는데, 흘러나오는 피가 하얬던 거죠.”

“그 전엔 빨갰고?”

“그 전엔 붉었죠. 그쪽, 아니 홍희 씨도 그럼 그, 이렇게 하기 전엔 빨갰고요?”

나는 허공을 긋는 시늉을 하며 말을 잇는다.

“어쩌다 갑자기 하얀 피로 바뀌게 된 걸까요? 우리도 그전까진 남들처럼 평범했는데.”

말을 뱉고 보니 문득 나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민망해진다.

“바뀐 게 아니라, 원래 그랬던 거예요. 다만 그걸 우리가 조금 늦게 발견했을 뿐이지.”

조금만 마신다던 홍희는 벌써 맥주를 네 병째 주문한다.

“정말 피가 하얀 걸까요?”

“정 궁금하면 나 찔러봐요. 죽지 않을 정도로만.”

그녀의 말에 우리는 파안대소한다. 취한 그녀는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으며 긴히 전할 말이 있다고 화두를 돌린다.

“하얀 피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 말고 또 있을 것 같아요, 없을 것 같아요?”

갑작스러운 시험 분위기에 나는 자못 심각해졌다.

“있을 것 같은데요. 있겠죠.”

나는 오랜 고민 끝에 대답했다.

“그렇죠, 있을 거예요……. 우리만 있을 리가 없죠.”

홍희는 소주도 시켜 맥주에 말아 먹는다.

“그건 그렇고, 당신도 ‘컷’ 하죠?”

“컷이 뭔데요?”

“이거, 이렇게.”

그녀가 허공을 검지 끝으로 긋는다. 나는 그 의미를 알아채고 웃는다.

“몰래, 하죠. 사람들은 그걸 이해 못 하지만요.”

“우리도 그게 자해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이해하긴 하는데, 우리한텐 아니잖아요. 그 흉터들도 흉터가 아니라 타투에 가깝다고요. 둘 다 칼 대는 건 똑같은데 왜들 그런담.”

그녀가 킥킥거린다.

“어쨌거나 우린 좀 특별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나도 그녀를 따라 킬킬거리며 머리를 주억거린다.

“그렇죠. 근데 특별한 것도 지겨워요. 좀 평범해지고 싶어.”

“피가 하얘서 귀찮은 일이 많긴 하죠.”

나는 술을 따르려다 없는 것을 깨닫고 닭발만 오도독 씹어먹는다.

“참, 그런 일이 있었어요. 회사에서 게임 출시를 앞두고 있었는데, 연령 제한 낮추려고 벌건 피가 몬스터나 캐릭터 몸에서 튀는 걸 하얗게 바꾼 거예요. 하얀 피로. 그거 보고 혼자서 화장실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회사 건강검진 할 때 사실 하얀 피라서 하기 좀 그렇다고 말하니까 다들 미친년 보듯 했으면서. 게임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 바꿔도 돼요? 나 그 게임 출시되자마자 했는데, 바로 접었잖아요. 하얀 피도 못 견딜 만큼 더럽게 재미없어서.”

우리는 박장대소한다. 주인이 와서 조금만 목소리를 낮춰달라고 주의를 준다. 그 순간에도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모양이다. 우린 문득 그게 어색해 한동안 침묵을 유지한다. 홍희는 몸을 좌우로 흔들며 컷이나 하고 싶다고 한다. 나는 워워, 여기선 자제하라고 말린다.

“얼마 전에 애인이랑 헤어졌어요. 그래서 요새 컷을 좀 안 했더니, 당기네요.”

“저런, 헤어진 남자친구 욕이나 할까요?”

“여자예요. 여자친구.”

나는 가만히 홍희를 바라다본다. 그녀는 제 여자친구를 보여주겠다며 한참이나 핸드폰 갤러리를 뒤적였다.

“아, 나 얼마 전에 헤어졌지. 씨발.”

그녀가 핸드폰을 뒤집고는 닭발을 집어 오도독, 소리 나게 씹는다.

“코피 흘린 날이요. 아침에 헤어지잔 문자 받고 차이고 뒤늦게 출근하던 길이었어요.”

홍희가 말을 덧붙인다.

“죽으러 가려던 길이기도 했고.”

“왜 죽어요? 헤어져서?”

“네.”

“그건 좀 평범한데.”

나는 말하며 고개를 갸웃한다.

“아까까진 평범한 게 좋다면서요. 특별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 특별하진 않고 또 평범하지 않다고 해도, 그 정도로 평범하지 않은 건 아닌 게 우리잖아요. 애인과 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도 있는 게 우리라고요.”

“그런가.”

“그런가, 가 아니고 진짜라고요!”

홍희가 외친다. 앞 테이블의 남자가 힐끗 우리를 쳐다본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나는 진정하라는 손짓을 한다.

“그쪽도 얘기 좀 해봐요. 재미있는 얘기 없어요? 우리만 겪는,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

“아, 전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하는데요, 어느 날 새 책 종이에 살이 베인 거예요. 피가 조금 흘러나왔는데, 그때 그렇게 그걸 자랑하고 싶더라고요. 근데 주변엔 다 일반 사람들뿐이라서.”

“그래서요?”

“그게 끝인데요.”

“그게 뭐야. 재미없게.”

그녀가 얼굴을 장난스럽게 우그러뜨린다. 나는 그게 웃기다.

“어쨌든, 나는 이번 생은 그른 것 같아요. 다음 생에 올 배팅할 수밖에. 슬슬 일어날까요?”

나는 자리에서 엉덩이를 뗀다. 내가 산다고 하지만 그녀는 완강히 거부한다. 정확히 더치페이로 술과 안줏값을 치른다.

우리는 지하철역까지 함께 걸어간다. 술집에선 그렇게 시끄럽게 웃고 떠들었는데, 막상 길을 걷는 동안엔 적막만 흐른다. 잠시 재미난 게임 세계에 빠져있다가 전원 종료와 함께 현실 밖으로 끄집어 던져진 것처럼. 그녀의 버스가 먼저 오고, 나는 손을 흔들까, 하다가 안녕히 가세요, 깍듯이 인사한다. 그녀는 또다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하얀 피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세요. 꼭! 파이팅!”

그녀의 외침과 함께 문이 닫히며 버스는 떠난다. 나는 제자리에서 그녀의 파이팅, 을 조그맣게 따라 외친다. 파이팅. 파이팅…….

 

세상이 하얗다. 아니, 하얀 것도 투명한 것도 아닌 세상에서 나는 헤엄을 친다. 찌릿한 통증이 이따금 일지만 잠시뿐이다. 참을 만하다. 그러다가 덧씌워진 막이 벗겨지듯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다. 그대로 몸을 일으킨다. 방이다. 예전의 내 방과 다름없는 방. 나는 홍희가 생각나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가는 도중에 방문이 벌컥 열린다. 아버지다.

“너, 어제 술을 얼마나 처마신 거냐? 오죽하면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널 데리고 와?”

그 여자는 홍희가 틀림없다.

나는 재빨리 옷을 입고 집을 나간다. 뒤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은 언제나처럼 뒤로 한다.

인근 편의점에서 숙취 해소제와 이온 음료를 하나 산다. 홍희에게 전화를 건다. 얼마 안 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홍희 씨, 어제 잘 들어갔어요?”

“지금 바빠요.”

“아, 맞다, 근무 시간이죠. 미안해요. 그럼 이따 밤에…….”

“밤에도 시간 없어요. 아, 짜증 나.”

나는 내가 마지막 말을 잘못 들었나 고민하느라 대꾸하지 못했다.

“그쪽한테 짜증 난 게 아니고, 그냥, 좀 짜증 나네요.”

“뭐가 그렇게 짜증 나요?”

“그냥, 다요. 그나저나, 만약에, 내가 죽으면 그쪽은 좀 외로울까? 그럴까요?”

“아무래도요. 다시 그날 버스에서의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근데, 제가 좀 배려심이 없어서.”

홍희는 뭐가 우스운지 소리죽여 웃는다.

“어쨌든, 좀 있으면 점심시간이니까, 밥 먹고 회사로 와요. 사무실까지 올라오진 말고요. 밥도 미리 먹고 와요. 난 점심 회식이 있거든요. 그리고, 잘못하면 체할 수도 있으니까.”

통화는 끊어졌고, 나는 컷을 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롯데리아에 들러 데리버거 세트 하나를 해치운 뒤 근처 약국으로 가 응급처치키트를 새로 하나, 아니 두 개 산다. 그녀와 두 번째로 만나는 건데 빈손으로 가기가 뭣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 때문이다. 컷을 즐기는 그녀도 응급처치키트가 반가울 거다.

오후 한 시 오 분쯤 되었을 무렵, 나는 그녀의 회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지금 가도 괜찮겠냐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얼마 후 답장이 온다. 지금은 시간이 괜찮다는 내용이다.

―천천히 와요.

그렇지만 나는 두 발을 재촉한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회사가 있는 빌딩 앞에 도착한다. 빌딩에 걸린 전광판엔 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게임 광고가 한창이다. 캐릭터가 몬스터를 죽이자 하얀 피가 솟구친다, 터져 나온다. 나는 그녀가 술자리에서 말한 게임이 저건가, 싶어 유심히 올려다보다 횡단보도 신호등을 놓쳐 다음 신호를 기다린다. 광고 속 게임은 동시접속자 50만 명 달성을 자축하며 성대한 이벤트를 홍보한다. 지루해 보이지만 왠지 부럽기도 하다. 대체 뭐가 부러운 거지. 스스로에게 묻지만 대답을 찾을 수 없다.

다시 문자 알림음이 울린다. 아버지다.

―아르바이트 빠지고 어딜 간 거냐? 밥도 안 차려놓고. 넌 진짜 별난 놈이다.

답장하려는데 알림음이 재차 울린다. 홍희다.

―건물 쪽 잘 봐요. 나 거기 있어요.

나는 회사 건물 입구를 유심히 바라본다. 오가는 사람 중에 그녀로 보일 만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문득 휑하니 지나치는 바람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이다. 사람 몇이 소리를 지른 것은. 소리의 방향을 따라가니 회사 옥상 난간에 홍희가 서 있다. 핸드폰이 다시 울린다. 나는 재빨리 전화를 받는다. 홍희의 목소리가 낯설다. 식은땀이 셔츠에 배어 나온다.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잘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줘요. 나는 내 식대로 보여줄게요.”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홍희 씨?”

대답은 없다. 그녀는 그대로 난간에서 허공으로 발을 내디딘다. 몸이 기우뚱하더니 무언가가 휙, 좀 전의 바람처럼 소름을 남기며 지나쳤고, 쿵, 소리가 들린다. 세상이 내려앉는 느낌이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충격에 모골이 송연하다. 사람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진다. 나는 그 순간에도 횡단보도 신호등을 지킨다. 빨간불이야, 아직, 빨간불……. 건너면 안 돼, 아직은.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천천히 성큼성큼 홍희의 회사 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그녀가 떨어진 곳으로 점차 걸음을 재게 움직인다. 그렇지만 아무리 빨리 걸어도 홍희와의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기분이다. 그녀가 어딘가로 뛰어간다, 도망친다, 내게서. 되찾을 수 없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머릿속에 스민다.

어느 순간,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 채로 홍희를 건너다본다. 팔다리를 구부러뜨린 채 쓰러진 그녀의 머리에서 새빨간 피가 흐른다. 나는 핏줄기를 따라 눈길을 옮긴다. 피는 하수구로 흘러 떨어진다. 조심스레 그녀의 피에 손끝을 갖다 댄다. 피가 새빨갛다. 붉다. 곧이어 사이렌 소리가 허공을 휘돌며 나를 덮쳐온다. 머리가 팽팽 돌며 교회에서의 그때처럼 의식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몇몇 사람들이 내 두 손에 들린 응급처치키트를 빼앗아 홍희에게로 달려간다. 그들이 홍희를 살릴 수 있을까. 어쨌거나 둘 중 하나는 홍희 것으로 산 거니까. 쓸 일이 이렇게 빨리 생길 줄은 몰랐지만, 이런 순간일 줄 몰랐지만…….

순식간에 거리는 아수라장이 된다. 나는 사람들에 묻히는 홍희의 마지막을 건너다본다.

“괜찮아요? 피 나요.”

한 사람이 묻는다. 나는 손길을 거칠게 뿌리친다.

“내 피 아니에요. 내 피 아니라고요……. 내 피 아니에요.”

나는 홍희의 피를 바지에 문대며 닦아낸다. 그래도 계속 피가 배어 나온다. 쓰라리다. 손바닥에 상처가 난 때문이다. 거기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중얼거리다 이내 소리를 지르며 옷에 있는 힘껏 손바닥을 문지른다. 흘러나오는 그 피라는 것이, 빨갛다. 그것은 빠르게 바다를 이룬다. 빠져나가려 허우적거리지만 제자리다. 온 세상이 발갛게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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