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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빛머리 - 걷이철(0)

2021.11.27 03:4911.27

해동국(海東國). 기천 년의 역사가 대륙에서 남으로 뻗은 땅에 내려앉았다. 험준한 등뼈가 길고 날카로운 땅은 근래 병화(兵禍)를 입었다. 처음 북방에서 내려온 화는 장중한 소맷바람에 물러갔으나, 다시 닥치어 멸악산맥(滅惡山脈)의 명운도 꺼뜨리기로 끝내 광주산맥(廣州山脈)에 이르렀다. 그러나 곧 불씨가 사그라지므로 돌아가던 차, 천마산맥(天麿山脈)에서 에는 살바람을 만나 얼어붙었던 것이다. 이후에 거듭 불씨를 불린 화는 거센 된바람을 만나 마침내 꺼지고야 말았다.

오늘 정촉(丁燭)은 산맥에 다녀온 늙은이 곁에 섰다.

“…쏘넌 살촉, 창날이 눈앞에 새까맣게 어리넌디.”

곁눈으로 때를 슬슬 살피던 재담꾼이 손바닥을 고개 앞에 대거니,

“김 장군 가로되… 양 공, 목은 그리 가서 축입시다, 먼지 가서 술은 마련헐 텡께, 허니...”

하고 손날을 살살 내리더니,

“양 장군 가로되, 별장(別將)은 술을 데워 놓아야 헐 것이다 허시니..!”

그러곤 팔을 척 뻗치고서 등허리를 난딱 세우렷다.

“발딱 서선! 마아악 짓치넌 살촉덜 개의치 않으렷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허…”

둘러싼 고개들이 숨 빠지는 소리를 하나둘 빼었다. 늙은이가 비틀비틀 고쳐 앉더니 턱을 까딱까딱 꺼뜨렸다.

“…그리허여 무장이 눈을 주릅뜨신 채, 화살박이루 가시구야 말았넌지라.”

“허참…”

“이참…”

서로를 재는 눈살들이 서로를 지나고, 혀를 더 떼잖으려는 기미와 귀를 더 대잖으려는 기미를 서로가 읽어 낼 맡이었다. 무리는 이야기가 맺게 되는 즘을 알아채기 무섭게 흩어졌다.
싸게 흩어지는 무리에 새침이나 던지던 늙은이의 눈살은, 토란 뿌리 몇 알과 주전부리 한 움큼을 두고 가는 이들을 마저 흘겼다. 과연 걷이가 시원치 않았는지 눈을 새초롬히 뜨다 말다 하고서 썩히는 낯판이었다.
다디단 이야기를 낸 낯이 구겨지기로 참 안되었다. 정촉은 품을 뒤졌으나 집히는 것이 없자 혀를 다셨다.
 
“귓볼이 뻘겋구 두덩이가 굵은 걸루 보아 기골이 웬만허렷다.”

마악 돌아서려는 정촉을 그친 틀거지였다.

“그류?”

“암, 그럼.”

정촉은 치레인지 뭔지가 끼쳐 온 얼굴을 벅벅 긁었다.

“…귓볼이야 항시 볕이나 쪼이니 뻘겋구, 두덩이야 잠두 못 자구 논밭 이나 가넌 통에 축 늘어진 거구. 그걸 기골이라 허넝 규?”

그러자 저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늙은이가 “허허.” 웃음이었다. 그러고서 곧 입매를 가지런히 놓았다.

“자네 농사 짓남?”

“시방에 괭이 안 드넌 사램이 으딨겄슈?”

“손 즘 줘 보게.”

정촉이 당찮은 소릴 한다는 조로 이르니 노인은 대뜸 손을 내놓으라 일렀다. 그럼에도 정촉이 눈을 껌뻑껌뻑 주저하자 냉큼 앗아드는 형국이었다. 그가 찬찬이 손바닥을 살폈다.

“…검은 쥐 본 적 읎구?“

“머… 얼매 쥐었쥬-“

“아하!“

멀거니 이르자 버럭 지름이었다. 정촉은 그 빛에 움찔 고개를 뺐다.  눈에는 불씨가 화륵화륵 튀었다.

“장심(掌心)에 고루 백인 왕못(손에 박인 큰 굳은살)을 봉께, 예사 검이 아니렷다..!”

“아부지 쓰던 검인듀.”

“옳거니, 가계 전승이 서슬이라. 시퍼런 명도, 시퍼런 춘장 함자가 검판에 진동했으렷다..!”

자신만만히 이르는 통에, 속으로 사실을 짚던 정촉은 속이 괜히 저렸다.

“군에 있다 나와선 막 나도시담… 멫 해 전에 집에 기양-“

“어허이, 으찌헐꺼나. 으쩔꺼나.”

말을 뎅겅 자르고서 혀를 끌끌 차던 이가 제 눈초리에 우수를 살살 어리웠다.

“지꺼분헌 세파에 위인이 웅심(雄心)으루 공명헐 뜻 꺾였으니 서럽도다…”

거듭 뭉근한 기운이 모여 들던 눈초리가 이내는 빛을 발하고야 말았다.

“허나 묘헌 천지요, 신이헌 원리로고. 아들이 고만 그 시퍼런 기백과 유전 마다 못허구, 부자 간 도타운 정 못 이겨 출사헐 참이렷다..!”

늙은이가 자세를 고쳐 앉더니만 고개를 뾰족히 뻗쳤다.

“어지러운 때 무운이 힘써 흥기허문, 영웅이 내릴지니!”

“잉? 어지러워?”

버럭 지르는 고함에 때아닌 딴전이 놓였다.

“시방 대왕께서 다스리시넝 기 영 못 쓰겄넝 규?”

“응? 무어?”

“글씨, 시방이 어지럽다넌디. 난세라구.”

정촉과의 대담을 주워 듣던 이들이 말꼬리를 채고서 개코쥐코 핀잔을 낼 참이었다. 그러자 늙은이의 눈초리가 사리살짝 흔들리더니 곧 매무새를 딱 잡고선,

“치세에두 잘만 허문 영웅이 내린다!”

하고 또 질렀다. 힘써 둘러대는 그 수작에 정촉 이하 무리들이 한데 인상을 썼다.

“다 가구, 장차의 고려일검(高麗一劍)만 예 섯거라!”

그러고도 늙은이는 손가락을 뻗칠 기운이 남은 모양이었다. 주위 이들이 혀를 내저었다.

“…순 허풍선이였구먼.”

“저 나이 먹두룩 허파 바람이 안 빠져서 글씨…”

“내참. 여즉두 일검, 이검 허넌 눔팽이덜이 있단 말여?”

끝에는 여즉 이야기 고물이나 떨어질까 싶어 남았던 이들마저 죄 흩어져 버렸다. 야박하게 군소리나 내며 가는 이들을 보며 정촉은 입을 다셨다.

“선천(宣川)이다.”

늙은이가 대뜸 일렀다.

“예?”

“고 시절, 거란 임금이 몸소 개경꺼지 약탈허구 돌아가던 차에 우리 장수덜에 내처 쫓겨 갔더니라.”

“예…”

“요동과 고려 장졸이 창칼 따라 한데 스러진 그곳인즉, 북계(北界)의 선천이라.”

저 수염을 가만 쓸어내리며 말을 쏟아 냈건만, “헌데...” 하며 운을 떼는 품을 보아 거듭할 품이었다.

“핏물은 진즉 진토에 스미구 백골은 일찍이 바람에 삭았응께 섧은 혼은 갈 데 읎구, 헤매이넌 혼이 가문 워디루 가겄나.”

“예에, 만강허시구유. 예… 지두 이만.”

정촉은 마악 짓쳐 오려는 밭 용무에 그만 발을 뗐다. 뗄 맡이었다.

“두 나라 황실 금붙이에나 붙겄지.”

가는 중 모로 쏘인 소리에 정촉은 발씨가 엉키더니 몸이 슬그미 돌았다.

“…허참, 거 애달프다.”

“애달프지? 달뜨지?”

“예, 가슴이 기양… 무너지넌듀.”

정촉이 가슴팍을 쥐어뜯듯 하니, 늙은이는 그저 손을 횡으로 그었다.

“됐구.”

샛노란 눈을 하고 늙은이가 가만가만 손을 들어 당겼다. 정촉의 고개가 저절로 그리 옮아 갔다. 고개가 얼마쯤 닿을 성싶으니 늙은이가 그 귓가에 입을 바짝 오므렸다.

“…선천의 문수산(文秀山), 게 크다란 아가리 벌린 동혈(洞穴)이니. 게루 가게.”

“…가넝 길에 누가 선수 치넝 거 아뉴?”

“…심마니헌테 듣자마자 싸게 온 것잉께, 그녁(거기) 사램덜은 아즉 몰르지.”

“…선학(先學)의 말씸을 아니 받잡을 수가 읎겄시유, 잉.”

바락 들이닥친 행선지에 머리가 쩡하고 울린 정촉은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끄덕 오르내렸다. 두 사나이의 힘찬 눈살이 허공에서 한동안 부딪혔다. 눈알이 슬슬 저려 오던 정촉은 마저 인사를 올리고 정말 갈 참이었다.

“미래 고려일검은 들으시게.”

이른 노인이 몸을 곧추세운 채 정좌하여 앉았다. 뻗치는 눈살에는 여즉 남은 기운이 팔팔 삐져 나왔다.

“기연을 뵈었응께, 장국 한 그릇은 대접을 해야 안 쓰겄넝가.”

“잉…”

과연, 그렇다는 조로 정촉은 고개를 또 끄덕끄덕했다. 그리고는 저기 위치한 숫막을 찌르고 섰다.

“쩌기, 담 건너에 숫막 한나 있응께, 글루 가선 요기나 허슈. 정촉이 보냈다 허구.”

“잉, 알겄네.”

“내 이럴 줄 알었지.”

노인이 명아주 지팡이를 땅에 박고서 몸을 마악 세우다 그쳤다. 정촉도 웬 딴전인가 싶어 쳐다보자 숫막 주가(朱家)네 자식이었다.

“인마, 너가 먼디 남의 집 국을 내라 마라 허넝 겨?”

어느샌가 나타난 주점(朱佔)이 힐난을 하듯 정촉에 대고 일렀다. 꿈에 떡 맛 보다 깬다고, 일이 잘 짚히다가 대뜸 산통이 깨진 턱에 정촉은 얼굴을 죄 찌푸렸다.

“후일의 고려일검이 긴허게 말씀허잡넌디, 어깃장이여?”

“아아니? 오백검이 국으루 말씀허잡응께 제우 장국밲에 안 될까 여쭈넝 것이제.”

주점이 무어 대답이랍시고 시부렁거렸다. 정촉은 가만 코를 먹었다.

“시방, 내가 오백검은 되넝 겨?”

“그랴, 오백검은 되겄제. 제우 휘두르기넌 헝께.”

“암, 초장에 괄시 받넌 무인이라, 영웅 수난이로고.”

노인이 지팡이를 탕 내려 치며 무어라 운을 끼워 넣었다. 그를 흘낏 살핀 정촉은 스스러움을 물릴 양 콧망울을 가만 훔쳤다.

“이분에 저기, 콩 낼 적에 한 두어 되 저기허문 될 거 아녀?”

“너 전에두 그 말 했지? 야기꾼 왔을 적에? 그때 너 저기했어 안 했어?”

“…”

대꾸 없이 또 코나 먹던 정촉은 이내 손사래를 휘휘 쳤다.

“아이, 이분엔 참잉께, 말 말어.”

“너 어무니 알문 또 아서아서라 역정허실 틴디.”

“그 영웅에 그 모친이라, 그 풍모에 체모라..!”

점이 놈이 또 뭐라뭐라 찌르는 중에, 노인은 또 운을 욱여 넣었다. 정촉은 볼썽이 구겨질까 와락 성이 돋았다.

“시방 너 어무니여? 정각쟁이(박수)여? 자꾸 냄의 엄마 개지구서 아서니 마니 점복(占卜)을 본대?”

그러자 주점이 느직이 팔짱이나 끼고선 턱을 치키었다.

“한두 분이어야 말이지이. 점복을 안 볼 재간이 읎어.”

눈살을 찌푸린 정촉은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놈이 고개를 살살 들이댔다.

“그러덜 말구, 이분에 보리남 나문 이짝에다 내기루 햐.”

“아이참.”

무어 대단한 혜안이랍시고 내놓는 것이 얄팍한 수였다. 정촉이 주저하고 있자, 주점이 허리춤을 툭툭 찔러 왔다.

“말씀을 잘 해봐아. 공으루 달래? 제값 칠르구 받넌다넌디.”

“…글씨, 말씀은 드려 볼 거인디… 참.”

“너 딱 잘햐. 또 물린다 만다 허문, 그땐 오백검이 멋이여? 허풍일검이여, 너. 알었지?”

주점이 정촉의 허리를 꼬집고선, 눈이나 끔뻑끔뻑 여닫는 노인을 일으켜 세웠다.

“갑시다, 어르신.”

“잉, 영웅이 내넌 장국 한 그릇 말아 잡숫겄다아..!”

노인이 영차, 삐걱대는 몸을 부여잡고는 녀석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여보, 잠자리두 한나 내주넝 겨?”

“글씨, 그건 또 값을 치뤄야겄는듀? 영웅허구?”

가만 섰던 정촉은 머리를 긁적이다 별 수가 없어 한숨이나 길게 빼고는 돌멩이를 힘껏 걷어찼다. 그리고 집으로 타박타박 향했다.

게운보름

바아악시이이혀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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