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8장

2021.10.31 02:0910.31

은령이와 하람이의 숨소리를 숨죽여 들으며 동준이는 몰래 발을 이불 밖으로 빼었다. 늦은 밤이었다. 마을이 잠드는 시간으로 준이는 계단을 내려가 누나를 보러 갔다. 거실 소파에 자기로 한 누나의 자리는 먼저 온 손님으로 작은 전등을 밝히고 있었다.

 

 

오늘은 재워주지만 내일은 안돼요.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정체도 모르는 걸.

이해해주기를 바래요.

 

 

살짝 씩 들리는 옷깃소리. 전등을 따라 끄덕여지는 그림자 하나. 엄마의 목소리에 동준이는 벽으로 숨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엄마가 누나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신다. 동준이는 귀를 기울였다. 부엌에 있던 전화가 깜빡인다. 작은 진동 소리가 잔잔히 준이의 발끝으로 올라와 적신다. 화들짝 놀란 동준이는 까치발을 들고서 금방 엄마의 전화를 줍는다.

 

 

여보세요?

 

 

준이니?

 

 

동준이의 아빠였다.

 

 

아빠!

 

 

네 엄마는?

 

 

준이는 거실로 새어 나오는 작고 동그란 빛과 두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해 얼버무리는 동준이에게 아빠가 말한다.

 

 

엄마가 바쁘니?

 

 

응!

 

 

그럼, 말 좀 전해주렴.

곧 있으면 할아버지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구나.

 

 

동준이가 작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목소리로 투덜거려보았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준이의 아빠가 사과를 하며 웃는다. 아빠의 조막만한 웃음소리가 데굴데굴 준이의 발치로 구른다. 동준은 그런 아빠의 웃음이 좋았다.

 

 

알았어, 전해둘게.

 

 

그래, 그래 고맙다.

 

 

끊으려는 아빠의 소매를 동준이가 붙잡는다.

 

 

저, 아빠.

 

 

응?

 

 

준이의 손이 꼼지락거린다. 물어도 될까. 전에는 무턱대고 물어보았지만 이번엔 조심스럽게 묻기로 하였다.

 

 

저, 할아버지가 말이야.

 

 

응.

 

 

나 할아버지가 어떻게 죽은 건지 알았어.

 

 

뭐?

 

 

당황하는 아빠의 목소리로 동준이가 작게 소곤거렸다. 거실로 비추이는 두 개의 그림자가 서서히 멀어진다.

 

 

할머니가 말해주셨거든.

줄곧 궁금했는데,

엄마랑 아빠는 말해주지 않으니까.

 

 

우리 준이, 미안하구나.

그래,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응, 바다로 돌아간다고 했어.

 

 

엄마가 거실로 나와 위층으로 올라간다. 동준이는 엄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복도 벽 그림자 속으로 팔과 다리를 움츠렸다. 엄마가 지나가고 동준이는 거실로 몸을 들었다. 누나는 멀건 눈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바다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마을을, 또 어쩌면 어부를, 저기 멀리로 불어오는 어부들의 자장가를.

 

 

준아.

 

 

응?

 

 

네 할아버지는 인어를 보러 가셨단다.

 

 

나도 알아.

 

 

어떻게?

 

 

그냥 알아.

 

 

누나가 보이는 방향으로 동준이는 부엌 벽에 기대어 잠자코 기다렸다.

 

 

아무튼, 네 할아버지 말이다.

 

 

응.

 

 

결국 바다로 가지 못하고 돌아가셨단다.

 

 

왜?

 

 

바다를 보러 가다 그만.

 

 

누나의 눈이, 누나의 말간 몸이, 누나의 까만 머릿결이. 동준이가 있는 부엌으로 돌아간다. 동준이와 누나가 서로를 본다.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는 자신이 숨기고 있던 아주 작은 비밀을 말해주기로 하였다.

 

 

트럭에 부딪히고 말았단다.

결국 네 할아버지는 바다로 가지 못하셨어.

줄곧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하셨는데.

 

 

누나의 눈으로, 누나의 손으로, 그저 앳되고 순수한 기억으로. 아빠의 전화를 받던 동준이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울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키운 그 마음이 준이를 더욱 괴롭혔다.

 

 

준아?

 

 

으아아아앙. 숨을 죽이고서, 온통 눈물을 머금은 채로. 소리를 죽이고서, 온통 안타까움을 안은 채로. 동준이는 슬피 울었다. 별빛보다도 많이, 바다가 품은 산호조각들의 소원들 보다 더 많이. 울음을 우는 준이를 누나가 다가와 품어준다. 전화가 바닥 위를 구르고 동준이가 누나의 품에 안긴다. 동준이가 받지 못한 전화가 힘을 잃고 빛을 거둔다. 준이의 몸을 안아 올린 누나가 그를 자신의 소파에 뉘었다.

 

 

바다와 마을이 보이는, 높은 마을의 절벽과 바다에서 잃은 가족들이 보이는 그 풍경으로. 동준이는 숨을 진정시키고서 이부자리를 제 몸 쪽으로 끌었다. 누나가 이불을 덮어준다. 어린 동준이의 머리칼도 함께 쓸어준다. 준이는 수줍은 목소리로 누나에게 부탁하였다.

 

 

자장가 들려줘.

 

 

언제 이 사실을 누나에게 알려야 할까. 언제 이 사실들이 바다에 전해질까. 당신을 그리워한 이가 채 그곳에 닿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는 걸. 언제쯤 저 바다가 알아줄까. 눈을 꼭 감은 동준이의 머리맡으로 누나가 노래를 부른다.

 

 

아, 아.

 

 

아주 익숙한 음과 박자로 준이의 등을 토닥이며, 누나는 어부들을 불렀다. 채 닿지 못한 기억들도 불렀다. 마을의 미망인들이 잃은 기억들도 불러, 함께 슬픔을 나누기로 한다. 그것이 준이에게는 퍽 편안하기도 해. 스르르 잠에 들고 만다. 잠에 든 소년을 베고서 누나는 입술을 물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밤들을 손가락으로 세며, 그녀는 저 혼자서 다짐하고, 또 결심하였다.

 

 

인어였던 그녀, 한 소년을 사랑해 몇 십 년이고 기다리던 그녀가 오래된 텔레비전이 있는 방문 앞으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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